방우회·독립운동

일본인 기술간부가 쓴 항일 단파방송 사건

이장춘 2011. 1. 16. 02:38

 

 

일본인 기술간부가 쓴 항일 단파방송 사건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은
방송국내외의 조선인들이 벌린 운동이어서
조선인들이 곤욕을 겪었습니다.  간혹 일본인도 불려
가기는 했지만 무슨 방송을 어떻게 들었는지 확인하는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많은 방송인들이 연행되고
옥고를 치루메간부로 있던 일본인들은 방송실무가
어려워지고 또 인간적인 면모가 있어서
마음이 아플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글은 1972년에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서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방송기술인들이 끌려 가던때 JODK 경성방송국의 기술과장으로
있던 와카미야 요시마님  (若宮義磨)이 쓴 글을 옮겼습니다.
(참고로 글 끝 부문에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
 관한 내용을 올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군에서 돌아온 후 나는 원래의 직장에 복귀했는데
전황은 심각해져 항간에는 일본 패전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는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 소지가 금지 되었지만
 국경 없는 해외로부터의 전파는 거침없이 들려와 여러 곳에서 비밀리에
 듣고 있었다. 경성방송국에서는 몇 대의 단파수신기를 듣고 있었는데
 야간 방송이 끝난 뒤에는 자물쇠를 채워두고 누가 손대면 큰 소리로
 울리는 밸을 설치 해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는 짓이었다.
지하실에는 출력 50W의 소형 송신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중      략-
 
다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단파사건도
 그 당시에 일어났다. 누가 유포했는지 모르지만
패전이 가까워질 무렵 항간의 소문에 대해 관헌들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드디어 소문의 출처가 우리 방송국의
직원이라며 늦가을 쌀쌀한 어느 날 고등계 형사가
나를 찾아와 당직일지의 열람을 요구했다.
 
그들은 일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미리 가져온 메모와 비교 해보고는 사람을

지정해서불러 달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근무

중인 부하, 동료들을연이어 검거 연행,

유치장에 감금했다.

 
나는 비통해 하는 직원 가족들과
수사당국 사이를 왕래 하면서 유치장 면회를
주선하기도 하고 방청 금지된 법정에 겨우 허가를 얻어
 가족을 대동 하고 몇 번이고 방청한 일이 있다.
 
 재판은 거의 서대문 법원의 법정에서 열렸다.
용의자는 치안유지법, 국방보안법, 육, 해군 형법,
전파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는데 변호사의 변호도
소용없는 판결인 것 같았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각지로 파급되어
 삼백 수십 명이 채포 되었고 그 중에는 투옥된
사람도 있었다. 유치장안에서의 범인 취급은 극에 달해서
더 이상 기록 하기에 붓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단파사건과는 별도로 내가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건이 있었다. 전파계의 선각자로 온화한 성격을
 가진 한덕봉기사가 어느 날 아침 헌병대에 끌려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 바로 용산에 있는
 본부에 가서 대장인 시노키 소위를
만나 석방을 탄원했다.
 
유치기간은 길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아마 한기사가 국제 기선회사에 근무 할 당시
수집한 무전기 부품을 소장하고 있던 것이 이유였던 같다.
당국에서는 언제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도
 한 밤중에 자택 검사를 받은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얄궂게도 나는 정동방송국 옥상에서 한밤중에 당국의
전파탐지 작업에 협력한 적도 있다. 방송국 주면에
 몇 개의 외국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방회(조선방송협회)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일본인 방송인들이
 돌아가 1972년 조방회라는 친목단체를 구성했습니다.
조방회는 해마다 전국을 돌면서 모임을 가졌고  1993년에
오오사카에서 있었던 21번째 모임에서는  다카노 야마  ( 高野山 ) 에
있는  大圓院 이라는 절에서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세상을 뜨신 분들과
 전쟁말기 폭파되어 산화한 청진방송국의 사망자의 영령을 위로하는
천도제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찍은 사진으로 한국방송인
 동우회 문시형 회장님과 이인관 (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왕종현, 김봉철 ( 뒷줄 왼쪽 첫번째,
두 번째)님이 함께 하신 모습입니다.
 
조방회에서는 1982년 J0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라는 책을 세상에  내  노았는데   이 책에서
 와카미야 요시마님 (若宮義磨)이 남긴글이 있습니다.  
와카미야 요시마 (若宮義磨)님은 경성방송국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있을 때 경성방송국 기술과장으로 있다가
 1944년 4월부터 4개월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해방 될 때까지 기술과장을 지내셨습니다. 회상기는
 경북대학교 김재홍 교수님의 번역으로
 국내에서도 시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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