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
그날부터 방송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동포들이 포승줄에 묶이고 용포에 씌워 채포
되었으니 그 수가 무려 350명에 이르며 75명이
형을 언도받았는가 하면 6명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제말기 어학회 사건과 함께
마지막 독립운동의 불꽃이었고 일제의 발악,
탄압이었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서 그때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성기석님의 말씀을 글로 옮깁니다. 성기석님은
1942년 항일 단파방송연락운동의 주역으로 1년 가까운 세월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으며 조사를 받고 2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복역 중 형기만료 2개월여를 앞두고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 나셨습니다.
오늘 글은 1988년 6월 3일 방우회가
실시한 단파방송 해외연락운동 방송토론회에서
성기석님이 직접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외국방송을 들었다고 해서
뭐 대단한일이며 뭐 죄가 됩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게 어렵군요.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개성 얘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단파방송사건은
우리민족의 단순한 일이며 활로를 찾으려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이 터지기전
이야기를 하려면 깁니다만 시간관계도 있고해서
개성에서 있었던 일만 말씀드리지요.
1942년 무더운 여름철이었는데
그때 단파 수신기로 이이덕씨와 몇 사람이
미국에서 나오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방송을 들어
보았습니다. 방송내용은 그야말로 뻑쩍찌근한
내용이었는데 뉴스도 있고 뉴스해설도 있었으며이승만 박사의 방송도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첫째뉴스에 이어 뉴스해설 그리고
이승만박사의 동포에게 고한다는 방송이었습니다.
태평양함대가 본토를 떠났음으로 늦어도 9 , 10월경에는
남태평양 해전이 있겠으며 일본 주변국가의 독립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이 절대 보장하며 침략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일본은 패망 할 것임으로
고국에 있는 동포는 서로 서로 조직을 해서 왜놈 전쟁에
협조하지 말고 협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송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귓속말로
전했습니다. 개성까지 멀다하지 않고 내려온 양제현씨등에게
알려줌은 물론 그러한 방송을 단파로 수신하여 중파로
내고자 하는 충격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동경방송을 중계하면서 다이얼을
약간 돌리기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데 하면서 괴롭기가 한량없었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이
애국심은 있어도 나약해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옥중에서 안 일입니다만
말을 전해준 양제헌씨가 송남헌씨에게 전해주고
민족운동지사인 4자 회의에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나라
앞날을 걱정하고 구체적으로 일을 꾸며 나가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비록 비겁해서 단파방송은 중계방송으로
내지 못한 자신이 지금 와서는 참으로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참으로 가슴벅찬 일이었으며 어깨가 무거워짐을
당시 느꼈습니다. 교육계와 체육계의 원로이시고
교회의 장로이시기도 한 박도화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송도고보 학감이신 박도화씨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나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성방송소 앞 큰길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나갔더니
김교돈씨라는 분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대학을 나온 개성에서 크게 과수원도
하시는 분인데 그때 그분을 알게 되었는데 큰길에서
만난 세 사람은 그곳에서 가까운 중국 요릿집에 들어
갔습니다. 중국집에 들어가니깐 맥주를 한타나시켜놓고 이것을다 마시지 않으면 못 간다는 것입니다. 어찌 주량이 그분들을 따라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때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이박사가 말한 동지의 규합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이덕씨의 사위로 고한경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제가 단파수신기를
그분에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시 이 박사는 방송을 통해 젊은 청년은
일본군의 열차를 탈선시키고 군수 열차를 폭파하라는
격렬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들은 24, 5세의
젊은이가 서너 사람이 있었는데 안색이 변하고 당장
철도를 폭파하러 나갈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조마조마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이덕씨도 미국의 제너럴 서비스 방송을 자유롭게
이해 할 수 있었기에 물어 보았더니 태평양전쟁은 뉴기니를
기점으로 해서 비율빈 쪽으로 즉 서쪽으로 전선이
옮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솔로몬전쟁에서 승전했다고 했는데
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중추부대는 패전한 것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은 없을 것 같고 일본에 대한 것도
미지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객지인 개성에서 정확한 정세를
알 수 없어 서울에 올라와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은 달라졌습니다. 골목마다
일본인이 붙인 경고문이 나 붙어 있었습니다.
첫째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 둘째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는
엄벌에 처하며 그런 자를 발견하는 경찰에 신고하라.
셋째 세 사람 이상이 모이면 안 되며 필요한
사람은 경찰에 허가를 받아야한다.
달라진 서울에서 전에 단파수신기를
만들어준 박형완이라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종로에 사는 그 사람 집엘 갔는데 요즘 집에 자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못 만나면 낭패인데 하면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으니깐 그 집 식구들이 저를
알고 있어서 다행히 그날 밤 늦게 잠깐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래 간만에 만난 박형완씨는
귓속말로 정말 놀라운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일본은
머지않아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독립한다는 소문이 장안에파다하게 퍼졌다 ” 이 얼마나 쇼킹한 뉴스입니까? 오늘날 우리들 소원은 통일이고 당시의 소원은 오직 독립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해어져 종로거리를 지나가는데 내왕하는
사람도 드물었고 뭔가 수군 수군대는 것 같았습니다.
활기찬 거리가 아니고 아주 가라앉은
거리인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 총독부도
말 못할 탄압을 자행 했습니다.
징용기피, 유언비어 유포죄, 통제품 암매죄,
도박죄 등으로 사람들을 마구 잡아넣었는데 통제품 암매죄
이외에는 전부 단파방송사건과 관련된 듯 덮어놓고 잡아가두기
시작하여 탄압의 정도를 높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시법으로
재정돼서 대부분이 형을 받고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이 망한다는 것을 아신 분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비협조적으로 나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징용이나 노력동원을
나가는 것보다 직결재판을 받아 형무소를 들어가기를
원한 사람이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1942년 11월경 미국방송은 솔로몬 삼차전에서
동남아 각지에 있는 일본군은 보급품이 끊겨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승전 ! 승전의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서 다시 개성으로 가서 그해 12월 중순경 어느 날인데
경기도 경찰부에서 방송소를 온통 수색하고 이이덕씨를
포승으로 묶어 잡아갔다는 것입니다.
섬뜻한 느낌 속에서 저도 다음날 아침에
사이가라는 악질작인 일본경찰에 잡혀 갔습니다.
사이가는 고문은 말 할 수 없이 극에 달했으며
단파수신기를 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이가는 해외 우리 독립투사 다시 말해
중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와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와
단파로 송. 수신을 했으니 송수신기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신기도
감추었다가 그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그들이
송신기는 아니라는 게 확인되어 10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이덕씨는
이이덕씨대로 모진 고문 끝에 사경을 헤매게 되고 홍익범씨도 마찬가지여서
명분은 병보석이라는 미명하에 석방되었습니다만 그로 인해서 다행히
해방조국을 보기는 하였으나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애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성에선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울로 압송되어
경기도 경찰부로 넘어왔습니다. 넘어와 보니 박용신 아나운서도
이미 들어와 있고 방송국 사람들이 여러분 들어와 있어 유치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장 안은 오전 중에 참으로 조용했으며
오후 4시가 지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가 하면 그때부터 불려나가
고문을 당하게되서 몹시 분주 했습니다. 말하자면 오후 4시까지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마구잡이 드리기에 바빴고 오후 4시부터는 이사람
저사람 닥치는 대로 불러내 고문을 했던 것입니다.
낮에는 잡아넣기가 바빴고 밤에는
사람을 패기가 바빴던 것입니다. 조서라는 것을
써 본 일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두툼하게 누가 썼는지
알지도 못하는 조서라는 것을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는
것입니다. 찍으라는 것이 아니라 손을 강제로
잡아당겨 지장을 찍개 했던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만
오늘날까지 산 면목이 없습니다. 그 당시 일제의 악독한
발톱에 짓눌려 옥사 하신 분들과 석방은 되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그들이 남긴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면 오늘 이렇게 나와 말씀을 드리는 게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분 기를 높이 드신 분이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시다가
1945년 8월 16일 풀려난 성기석님입니다. 사진은 소요산에 있는 자유수호 박물관에 들어서면입구에 커다랗게 걸려 있고 초등학교 사회교과서나독립기념관에도 모셔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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