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전후한 격동기 10년 세월에,
아나운서 생활을 통해 겪은 그때 그 시절의 얘기를
서명석님이 직접 쓰신 글입니다. 이 글은 1983년 8월호
월간방송에 실려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흥미 있고
또 그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두 번에 걸쳐 전문을 올립니다. 사진은
제가 올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1944년 2차 대전이 종말에 가까워질 무렵 …….
운현궁의 뒤 운니동에서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한옥 마루 기둥위에 일제 구식 라디오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아침방송이 시작되고 낮방송이 끝날 때가지 또 저녁방송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그 조그마한 상자에서는 JODK(겅성
중앙방송국) 의 방송이 계속하여 들려왔다.
집의 주부가 유일한 낙으로 방송듣기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조부가 특히 즐겨듣는 방송은 야담,
창과 각 지방의 민요와 일기예보, 뉴스 등이었다. 중학교 5학년인
나는 신문을 보면서 뉴스를 들었다, 같은 통신사에서 보도된 내용은
귀로 듣는 뉴스나 눈으로 보는 뉴스나 똑같은 경우가 많았다.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신문을 보곤 했던
나는 아나운서 뉴스방송에 맞추어 혼자 따라 하길 즐겼다.
제법 틀리지 않고 따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라디오에
대해서 이상야릇한 매력과 호기심과 멋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결정적이 동기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47년 6월
나는 당시 고려대학교 예과 2학년 학생이었다.
어느 날인가 KBS 아나운서 공개 모집공고가 발표되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가족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공개시험을 치렀다. 총 410명이 응시했는데 1.2차에 걸친
음성 테스트와 필기시험 및 면접을 거쳐
4명이 최종 합격되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위진록, 6.25때
행방불명된 박광필, 그리고 장균등이 그때 합격한
나의 동료들이다. 그 당시 미 군정하의 서울 중앙방송국은
아나운서계와 편집계가 방송과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 VOA에 가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작고한
이계원씨가 과장으로 스포츠 중계에 뛰어났고 역시 지금
미국에 가있는 민재호씨가 아나운서 계장이었다. 그밖에
작고한 윤길구, 행방불명된 전인국 두분이 주임으로 있었고
윤용로, 홍준, 강문수, 조준옥, 홍양보, 이진섭, 이성수,
박인자등이 나의 선배로 군림하고 있었다.
취직이 결정되어 2개월간의 연수교육을 마치자
꿈에도 그리던 프로그램이 내개도 배정되었다. 신인에게
배정되어오는 프로그램이라야 고작 음악방송의 소개 (그것도
생방송이 아닌 디스크로 방송하는 것), 역사 강좌나
국어강좌의 소개, 잘 해야 어린이 연속방송국의
소개나 일기예보 등이었다.
이런 식의 말단 졸병과정을 겪고 있던
다음해 어느 날 오후 과장이 신입사원을 모아놓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신인 여러분께 당부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말 내용이 있는 멋을 가지고 방송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파조에서 탈피해야 하죠. 리얼리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슬픈 음악을 소개 하면서 경망한 어조로 신나는 듯이
얘기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쾌한 음악을 소개 하면서 조사를 읇듯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기예보는 농촌에서, 항구에서,
또는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는 방송인데 자기류의 멋만 생각하고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빨리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사람을 위해서 멋과 리얼리즘을 찾으세요…….
그날 밤 나는 숙직 담당이었다.
그 당시 정동 중앙방송국 청사에는 숙직하는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위하여 따로 숙직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층 다다미방으로 된 국악 연주실이 바로
숙직실도 겸하고 있었는데 밤늦게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하지 못한 아나운서들의 임시숙소로도
곧 잘 애용되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면 아침 6시부터
아침장송이 시작된다. 6시 10분전에는 아래층
제일 작은 제 5 스튜디오에 들어가야 했다. 맨델스죤 작곡
봄의 노래를 소개하려고 하는 순간 밖을 보니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질 않은가?
얼핏 어제오후의 과장말씀이 생각났다.
멋과 리얼리즘 한마디 형용사를 붙이면서 소개하기로 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는 희망의 아침
오늘아침 첫 번째 곡목은 봄의 노래 맨덜슨 작곡입니다.
나의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 나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수십 초 만에 봄비는 멈춰버렸다.
그리고 5분후 수위실에서 야단이 났다.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는
것이다. 지금 비가 오느냐고 말이다. 방송이 끝나고 과장 댁에서
전화가 왔다. 6시에 방송국주변에 비 왔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나는 비가 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
인하고 방송을 했다고 대답했다.
8시 좀 지나서 과장이 출근을 했고 급기야는
어젯밤 숙직실에서 잔 사람들을 점검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봄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아침” 이란 소동은
비가 아니라 이층에서 자던 R모씨의 소피 때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요절 복통할 노릇이었다.
나는 어제 과장 말씀을 너무 충실히
이행했던 탓으로 사면되었지만 R씨는 해괴
망측한 내용의 시말서를 썼다. 이것이 바로 방송국내에서
폭소의 선풍을 일으킨 나의 첫 작품이었다.
1952년 6월 25일 동란으로 중앙방송국이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였다. 당시 부산시 대청동에 있는
부산방송국이 곧 중앙 방송국 ( HLKA)이었다.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직책으로 병역면제를 받고 후방요원이라는 신분으로 현역군인
못지않은 방송요원으로서의 직무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을 때였다.
또 아나운서 중 몇몇 사람은 UN군 사령부
심리전 담당 요원으로서 소위 UNC G-2의 신분을
가지고 일하고 있던 때이다. 피난살이에 신변은 고독하고
방송국 식사는 된장 소금국에다가 보리밥 란 그릇이요,
잠자리는 하나밖에 없는 스튜디오 한 구석이다.
26세의 청년은 방송이 끝나면 동료들과 어울려
매일 밤 부산 특유의 동동주에다가 생선 따위를 안주로
과음과 폭음을 일삼기 일쑤였다. 어느 날밤 몹시 과음을 하고
작가 조남사, 기술과 중견 왕종현, 작가 한운사등과 함께 부산역전
40계단 위에서 방황할 때 일이다. 난데없이 불량배에 의해서
금품을 빼앗기고 구타를 당하기 일보직전 나는
위기를 모면하는 만용을 부렸다.
아무리 만취가 됐지만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고
미제 장군 코트에다가 내 왼쪽 견장에는 UNC G-2 HLKA
어엿한 영문 마크가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나는 이 영문 이니셜을
위기를 당하여 잘 활용한 샘이기도 했다. 나는 작가 조남사에게 소리쳤다.
“조대령 부산의 치안이 이 정도인가? 영도 본부에 연락하여 1개 소대를
빨리 이곳으로 출동 시키도록” 조대령이라고 부른 조남사는
역시 감이 빨랐다. “네” 하고 자리를 떴다.
대령에게 명령하는 나는 그러면 계급이 무엇인가?
옆에서 보고 있던 불량배는 수근 수근 하더니 하나 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한다. 한 대령-한운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고 왕종현- 왕종현은 배꼽을 빼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
불량배가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 우리 셋은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 밤 결국 너무나 고주망태가 되어 방송국에 들어와서 많은
실수를 했고 결국은 몇 달 동안 금주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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