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남원방송국 회상기 / 벽산 우제탁님

이장춘 2011. 7. 17. 10:40

 

1. 윤헌영(시설과 목주 안테나설립), 2. 윤치호국장, 3. 전주호 기술과장

6. 우제탁, 7. 이택현, 8. 김경배, 9. 김봉완 방송과장. 10. 이영복 아나운서

 

 

 남원방송국 회상기 / 벽산 우제탁님 

 

 

 벽산 우제탁님은 1953년 남원남방송국

개국때부터 일생동안 KBS에 계셨습니다. 이 글은

 남원방송국의 회고록과 함께 방송국 생활중 겪은 얘기

두편을 함께 올려드립니다. 남원방송국에  관한 글은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655

 6,25 전쟁중에 태어난 KBS 남원방송국

 

 

 

 

남원방송국 개국 회고록 

 

 

낙동강까지 물밀듯 침공해온 인민군은

 UN군의 참여로 대패 ,,,특히 주간은 비행기의

공습으로 전투를 할수 없도록 되여 있어 주로 야간전,,

그레서 낙동강 전투부터 대패,,그 비참한 부상병 패잔병은

도보로 퇴로에,,, 그런데 un군이  인천상육으로 퇴로가

차단되니 태백산맥을 통해서 북으로  넘어갈려고

 지리산에 잠입하게 됨,

 

본 인민군 빨치산들의 군량미 공급원이

된다고 지리산주변의 산촌마을은 11사단이

전부 소각,,, 그후 5사단 (박병권 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이용문 사령관) 그외 도단위 경찰국에

해당하는 남부지구 전투경찰대 창설,,, (신상묵경무관)

 이런 전투장에서 선무공작을 위한 남원 방송국

설치령이 피난 임시정부에서 의결,,,, 결국

남원방송국탄생 된것,,,,

 

 

공보처소관으로 국가 공무원이나

 un군사령부에 겨우 5명만 월급을 주었고

운영비는 당지 번영회를 조직 운영할수 밖에 없게 됨 ,

 당시 지역적, 업무적 사정으로 로칼방송의 제한도 없어서,,,

군민위안잔치, 공개방송, 스무고개, 성우모집, 드라마 노래자랑 등,,

온갖 방송을 하게 된것,,    이때 발령을 받은 윤치호국장은

국장 후보로,, 김봉완도 방송과장 후보로,,,유병은의

 노력으로 모두 국장 과장이 됨,,

 

윤치호는 그후 국립국악원 서무과장으로

있다가 다시 이곳국장으로 재직중 정년퇴임했고

김봉완은 여수를 거쳐 1974년 3월부터 남원방송국

국장하다가  지병으로 사망,,,,

 

 

유병은은 기술인 이면서

공개방송 사회를 주도,,, 좌담회사회등,,,

원고도쓰고,,,,다재다능한 분이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한국방송야사와 잊혀진 독립운동 단파수신사건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기도 한 훌륭한 방송인.... 지역적인 사정으로

많은 손님이 찾아 왔고, 화제도 많았던 방송국,,,,

 

이제 개국 50년이 되던 2003년

10월25월은 방송국이 없어진다는 말에 따라

어떻한 잔치도 못했고,, 1993년 40주년 개국잔치가

최후의 잔치 였던것 같음 ( 아래 사진은 1993,

10,25 개국잔치떄 역대 근무자들의

모여 찍은것임,,,, )

 

 

 

 

지금 생각하면 개국당시

일본적산가옥을 임시 사무실로 개조 ,,,

유리창에 유리도 못끼우다가 얼마후 경찰대사령관의

 지원으로 유리를 끼고 ,,, 음향시설이 전연 안된 스튜디오

 국장이하 전직원이 망치로 구멍을 뚫고 흡음시설,,,, 국장 관사까지

 곁들인 건물,,, 숙직실은 임시가건물에 직원들이 자취하며 살았고,

거기다가 군 경 들까지 합숙,,,군경 사령관이 방송하고

돌아가면서 주고 간 건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니 ,,,,

 

남원 시골에서 처음 보는 방송국?

신기하기만 한 녹음기? 구경을 하고 가면서

막걸리 한주전자 사주면 배가 고프니 멋도 모르고 마시고

정신을 잃었던 일,, 도저히 지금 사람들은 이해 할수 없는 사연들,,,

방송은 해야 되니 인원이 필요,,,그간 수없는 사람이 처음은 호기심을

 갖이고 근무하다가 배가고프니 좀 있다가 나아가고 ,,,,

할수 없는? 끈끼 있는 사람만 직히고 있다가

 

1961년? 인가 군사혁명으로

 자리가 잡혀 갔던 것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순시 나왔는데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들고, 엔지니어는

녹음기를 들고 밧데리를 든 사람까지 세사람이 걸음도 빠른

박정희 뒤를 따라가다가 결국 녹음 한캇트도 못하고 말았던 일,,

나는 박정희 얼굴도 못보고,,,맨앞에갔던 아나운서 ,,,, " 야 박정희

얼굴을 꼭 찝어까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것 드라,,," " 정말 서슬이,,,,,"

지방순시를 하는데 그많는 기자들 박정희 얼굴도 못보고

이후락 간단한 기자회견등,, 일장 춘몽 ,,,,,

이만 쓰렵니다....

 

벽산 우 제 탁

 

 

 

 

6.25 남원방송국  회상기

  

 

 6,25와 방송 6,25는 우리역사상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태평양전쟁이

 거의 끝나게 될 무렵, 소련이 전쟁에 가담하여, 비극적인

국토양분 점령,,,그래서 생긴 것이 한스런 38선이다,

 

소련. 공산당 지원을 받고 있었던 김일성은

38이북을 있을 수 없는 체제의 국가로,,,그러나

남쪽은 좌우익 이념다툼으로 혼란한 틈을 노려, 아무런 정보도

국방력도 없었던 일요일 미명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 남침 했던 것,,,

이것이 6,25동란이다, 당시 유일한 방송 KBS는 정동 연주소가 인민군에 접수된 후,

송신소 근무자들은 송신출력관을 부수고 남하 피신,,, 부산인접 낙동강까지

침공해온 인민군,,, 그러나 un군의 참전으로 평양이북까지 반격,,,

 

국토통일 기회가 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요,

중국인민군이 본 김일성정권을 지원,,, 소위 인해전술로

대대적인 전쟁으로 발전,,, 결국 밀고 밀리고 장기간의 전쟁이 계속,,,,,

당초의 38선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는 휴전선이 그어지고,,, 오늘까지

국토 분단의 비극이 지속 된 것,,,그런데 당시 낙동강까지 침공해

 왔던 인민군은 un군의 인천상륙으로 퇴로를 차단하니

할 수 없이 산악지대로 은거,,,

 

 

 

결국 지리산은 인민군 패잔병의

은신처가 되여 버린 것, 그래서 장기간의

인민군 빨치산소탕전이 벌어진 것, 지리산은 물이 많아

 명산이라던 곳, 본 토벌작전으로 11사단, 5사단 남부지구경비사령부등이

 현지 남원에 주둔,,, 장기간의 소탕전을 전개하며 지리산 주변의 산촌마을은

 인민군 빨치산의 식량공급원이 된다며 전면 소각 처리 하게 되고,,,

본 인민군 소탕을 위한 선무공작을 위하여 전북 남원에

 1952년 10월 25일에 방송국이 창립 된 것이다,

 

패전국  일본의 배상조로 미국이 인수한

허술한 장비에 따른 방송시설,,그리고 운영요원,,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모습 이였다, 운영예산을

지역번영회를 조직 자금을 자체 마련해야 했으며,,,,

방송국에 근무하는 인원을 총 5명만 인정,,,이들은 un군

 총사령부에서 월급을 받게 되었고,,,소위 관련부서 공보처는

 인원 운영자금을 지원 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 소탕전으로

폐허가 되어, 먹고 잠 잘 곳도 없게 된 곳에서

운영자금 마련해야 했으니,,,,?

 

 

임시 가건물의 숙직실에서 잠을 자며

24시간 근무처를 떠날 수도 없었던 시절,,, 군, 경

사령관이 방송을 하고 돌아가면서 주고 간 건빵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살아온 이야기 한도 없다, 거기에 허술하고

보안장치가 전연 안 되였던 송신기, 매일 고장,,,급한 수리작업 하다가

고압에 감전,,,기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았던 일이 몇 번이였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가,,,, 당시 녹음기가 있을 리 없는 처지에서 30분마다

넣어야 하는 콜사인,,,한사람밖에 없는 아나운서 취재한다고 외출,,

기술 현업자 혼자 앉아 있는데,,,서울 콜사인이 나아가면 문책을

 당해야 했으니,,,할 수없이 살그머니 마이크를 잡고 기술인이

 콜사인 을 ,,,기상천외의 방송을 했던 일,,,

 

얼마 후 전주 미공보관에서

생전 처음 구경 한 자기녹음기를 빌려다가

사용 하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자기녹음기, 신기해서

구경꾼들이 매일 찾아오고,,,,지역주민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이를 다 받아 주게 되었으니,,,, 중앙에서 로칼 방송 통제도 없었으니,

 그 형편에 임의로 자체방송,,,실황중계, 군민위안잔치공개방송, 성우모집,,

드라마,수무고개 등 다양한 방송을 하게되었던 것, 전 직원 출연,,,

년말특집 방송을 했던바,,,지방유지가 전 직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 식사대접을 받은 일 까지 있었으니,,,,

 

녹음기 축전지를 지개에 짊어지고,

산간 오지 마을에 나아가 녹음구성,, 그런 경우엔

 시골사람들의 방송의 신기함에 질문공세,,,, 아는 체 잘하던

그? 아나운서 “ 뉴-스, 노래 등을 안테나로 쏘아 올리면 바람에 따라

 멀리 멀리 날아갑니다. 라며 으스대던 그는 유명을

달리한지 수십 년이 되었구나,,,,

 

 

 

잊어지지 않는 사연들,,,,

 

당시 당지 남원에 주둔하고 있었던

 5사단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그리고 경찰국규모의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창설되고,,,지리산 공비로 인하여 좁은

 고을은 온통 군경 병력의 집결지가 되였었다, 우리는 군복을 입고

군경과 생활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었고,, 당시 백범 김구선생의

둘째 아들인 스포스 맨 스타일의 김신 참모장 (후에

내무부장관)이 준장진급 별을 달아 주는

5사단 행사에 녹음출장,,,,,

 

영관급 장교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역시 고급장교들은 지식인? 신사였다, 그리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초대사령관 신상묵 경무관은

농담도 잘하는 호탕한 기질의 호남 형,,, 후임 박병배는

 매서운 관료형,,,그리고 백두산호랑이라던 김종원,,, 그리고

무뚝뚝한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이용문 장군은 토요일 오후

방송국에 와서 녹음을 하고, 간이 비행장에서

대구 육군본부로 출장 가다가 추락,,,

순직 했던 일,,

 

 

일본 적산가옥을 개조,,,

 

유리창유리도 못 끼운 허술한

방송국에 이들은 수시로 드나들었고,

가건물인 숙직실은 이들 군경과 같이 잠을 자고,

자취하며 살아야 했던 시절,,,,5사단 공보실 김일성대학을

 졸업했다는 화가 최하사 하고는 특별한 친교를 맺어, 매일 상면,,,

그런데 음악(교향악)을 그리는 특이한 화가 였다, 얼마 후

그 재주가 알려져 육군본부 참모총장실로

발령이 났으나,

 

당 부대에서 보내주지 않는다고,

도피 부임,, ,나는 그를 육본 참모총장실로

 찾아갔던 일,,,그 외 우리직원과 매일 생활을 같이했던

 심리장교 박중위(서림),,이는 그 후 1960년대 초 “장마루촌의

이발사” 란 KBS 연속극 작가로 발전,,,1950년대 당지의 모습,,,

지금 생각하면 잊어지지 않는 일들이 많다,

 

백두산호랑이라던 김종원 경무관은

 (그 후 치안국장으로 승진) 점심식사 자리에서

 처음 보고, 그 우람 육중한 체구,,,사람을 압도하는

그 모습? 에 놀랐던 일,,,그에 비하면 개미 같이 왜소한

내 체구,,,사람이란 원래부터 우열이 ?,,,,

 

당시 700원하던 하숙도 할 수 없어

숙직실신세를 지다가 5,16 군사혁명으로 일약

 3,000원의 월급인상,,,5,16군사혁명은 분명 우리들의

 구세주 였다, 조명기구는 백열전구만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처음 보는 형광등,,,,  미 RCA 방송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방송장비 하나 둘 교체되고

방송국모습이 가추 어 져 간 것,,,

 

 

유감스런 사연들,,,,

 

시대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일런지

모르지만?,,, 부당한일들,,,그래서 “ 7분의 이치,,,” 라고

했던가? 즉 이사회는 30%정도는 합리적으로 진행 되나, 70%는

 부당? 비합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제 세상이 크게 변화, 민주화

평준화 균형발전이란 말 등,,,변하고 있지만 공공기관에서 노골적인 부당? 한

 행정,,,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누구 인고,,,?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매일같이 손님이 찾아 왔을까?

 

월 급여가 최저생활비가 될 수 없었던 시절,,,

그리고 자체적으로 집행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예산이

얼마인데,,,, 그런데 매일같이 서울에서 잘 모셔야한다는 귀빈? 이

 찾아오니 주어진 업무보다 이들 상부관청의 손님 모시고 접대하는 일이

 지상과제였다, 당시는 무조건 요정,,,이는 전 지방 공통된 일 이였다지만,,,

그러니 그 채무로 인해서 인사이동이 되면 문제? 가 있었던 것,,,

 중앙에 인사권자는 지방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자를 선별,

중앙 등 영전? 승진을 시키는데,,, 어느?

지방에서 있었던 일,,,,“

 

 

 과장님 방송국은 영전 승진하려면

그 능력 실력보다도 중앙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인정을 받아야 영전 승진이 되는 것이데요,,,”

서울 본사만 쳐다보고 근무해야 했던 지방근무자들,,,

지방에서도 본사에 인맥이 있다고 자부?,,,

 

몰지각한 사람은 주어진 일은 안하고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문책도 못하고,,,,당시 능력

 경력을 고려한 인사 이였던가? 생각해 본다, 주어진 업무는

 뒷전으로 하고, 본사에서 출장이란 이름으로 내방한 손님접대,,,

충성을 다한 사람을 능력으로 인정,,,영전 승진이 되는 모습,,,

지금 퇴직한 사람들도 본사 중앙에만 근무 한 사람들은

 지방에 근무 한 사람들보다 실력 등,,,

 

우수 했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사실 지방오지에 근무한사람들은 새로운 지식,,,

장비가 날로 변화 발전해 가는 시대,,,보지도 듣지도 못한 지식

 장비를 알 수 가 없는 것, 그간 인사권을 주도 한 사람들은 자성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분명 환경이 사람을 만든 것, 대망을

품고 공개시험에 합격 입사한사람,,,,

 

오지의 송신소 중계소에 발령이 나면

사찰의 주지? 로 전락,,, 젊은 직원,,,낙담을 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간 사람이 얼마 였 던 가 ?,,, 인생,,,이는 왕도가

없다지만,,,,운명적인기회? 고비 고비가 그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것,,,,

“학벌 실력이 없어 지방에만 전전하다이번에 정년퇴직 합니다”

 “ 그레도 당신은 태만하지 않고 성실했기에,,,,”

 

그렇게도 순진 성실하기만 했던

어느 후배의 말,,, “ 과장님 어린애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인사이동이 잘 안 된다는 민간 기업체로

가야겠네요,,,” 지금도 그 모습 잊어 지지 안 는다,

오직 이곳 kbs 아니면 살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30여년을 목을 매고

 천직으로 생각,

 

 

본의 아닌 이곳저곳 전전하며

 지방에만 근무자한 사람들,,, 이제 이것도 좋은경험

이였다고 자위 해야지,,,, 라) 씨앗은 뿌린 대로 거둔다고,,,,?

중앙 본부에 인적 배경이 있다고 한 사람은 그 배경의 힘을 믿고

지방으로 이동해오면 유아독존 하는가 하면,,, 배정예산항목과 관련 없이

 변태서류 작성,,, 소위 기관장의 접대비,,, 기타임의 사용,,,무법천지다,  비상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힘들게 본부에서 얻어낸 특수수선비를 “ 발전기

수리하지 말고 300m거리의 이웃 공장에 발전기가 있으니 정전이 되면

 그곳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자,,,” 는 그? 기관장,,,, 그렇다고 정면대응

 할 수도 없어, 연극? 을 해서 기어히 발전기수리를 했더니,

결국 본부에까지 말썽 부린다고 신고,,,,

 

그 외 수표가 나오면 그대로 개인 주머니에 넣고

 서울 자기 집으로,,,그토록 좋은 자리에서 군림? 하고 있었던

 그들은 모두 말년은 보기 딱한 모습이이였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

그토록 돈을 좋아 했으니 부자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유별나게 돈을

챙기던 귀하신? 어른,,, 모두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초라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그리고 일직 병에 걸려 죽고만 것 이였다,

 

본부에 자기를 돌보아 준 사람이 있다며,

업무지시도 거역하며 유아독존 했던 그는 오만을

부리다 부상,,,, 40대 후반에 식물인간이 되고,,, 예산항목은

전면 무시,,, 가짜서류를 만들어 기관장 임의로 집행,,,

그뿐 아니 다, 본부 인사권자에 몇 년 인가? 매달려

 결국 지방 기관장 발령이 나니 가관? 이였다,

 

결재서류 밑에 돈을 숨겨서 상납 하지 않으면

 결재도 안 해줄 뿐만 아니라, 일 잘못한다고 본사에

보고까지 했던 그는 일직이 병마로 사망,,, 그런데 문제는

본사인사권자도 이를 신뢰 인사에 반영 하고 있었으니

모두가 같은 사람들,,,, 그런데 세상은 크게 변한 것,,,

 

 

 지방화 평준화 민주화,,,

그 어려운 일제 말에 태어나, 초등학교졸업직후

 8,15를,,, 고등학교 졸업년도 6,25,,,죽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 기적? 이라고 생각한일이 몇 번 이였으며,,, 그 후 직장에

들어와 이곳 안 이면 살길이 없다고 생각,,,그렇게도 충성? 을 다한 생활,,,

그렇다보니 이제 나는 인간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는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처량하기만 하구나,,

 

이를 또한 “개피” 라고 했던가?

 

2007년 6월 1일 벽 산 우제탁 (養閑亭에서)  

 

 

공비들의 소굴 지리산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믾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홍도야_울지마라____김영춘.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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