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수필문학의 금자탑, 방송인 청천 김진섭

이장춘 2010. 12. 13. 00:26

 

 

 

수필가로 당대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청천 김진섭은 1940년부터 경성방송국에 

근무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최초로 중앙

방송국 편성과장을 지냈다. 수필가로 워낙 명성을

 날린 분이라 문헌에는 방송국에서 일하신 기록이 별로

 없지만 선생님의 7년간에 걸친 방송국 생활은 

생애에 중요한 부문이었다.

 

 

수필문학의 금자탑, 방송인 청천 김진섭

 

 

도쿄 유학시절 이하윤, 김억,

김진섭은   동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 전담방송 제2방송실시를 앞두고

이하윤이 1932년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이혜구

 선생님과 함께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제작하다가

 1935년 방송국을 떠나면서 후임으로  들어 온분이

안서 김억이고 김억이 근무하는 곳에 김진섭

 1940년에 들어1946년 방송국을 그만둘

까지 방송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말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젊은
아나운서들을 비롯한 방송원들에게 우리말을
 제대로 알도록 하고  방송을 통해 우리말이 지켜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방송에 임하셨던 젊은 방송인들이
써 놓으신 글을 보면 새로 들어온 아나운서들이 우리말에 서투른
경우가 있어 선배들의 지도 감독을 받던 중 김진섭선생님의 철저함을

얘기한 부문들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직원들과의 융화도 잘 이루워졌다고

  한다.     중앙방송국 편성과에서 선생님을 모셨던 노정팔의 말을 인용허면  

“청천은 이래라 저래라잔소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아랫사람이 열심히 일하도록

유도 했고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분석평가로 일의 가닥을 잡아간 명 지휘관

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이 항상 즐겁게 일 할 수 있도록 과의

 분위기를밝고 건강하게 이끄는 덕장이었다. 그러므로 해방직후의

편성과 분위기는화기 넘치고 각자 스스로가 자기 일에

전념하여 방송원년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써 놓았다.

 

 

노정팔 선생님

 

 

선생님이 방송국에 들어온 시기가
중. 일 전쟁과 곧이어 대동아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암흑기를 맞던 시절이었지만 선생님은 흔들림이 없었다.

 1945년 10월 2일 편성과장이 된 선생님은 해방정국에서 방송국장

이혜구,  방송과장 이계원 아나운서, 업무과장 김억과 함께 혼란기의

 방송국을 지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긴  공은 길이 길이방송사에 남아

 있다. 방송국에 재직중에도 문학 활동은 계속 되었다.  그 시절에

 방송국이 생활하면서도 방송 자체가 그런 일과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방송국 재직기간에도 문학활동의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192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이래

1950년 6.25로 납북 될 때 까지 서울대학교

도서관생활의 10 여년과 방송국 생활 7년 그리고

 방송국을 떠난 후 생애의 마지막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서울 신문사 출판국장, 성균관

대학교 교수 등의 자리도 선생님의 문학 활동과

 직접 연관성을  지니는 직책이었다.

  

 

 

 

 

청천 김진섭 선생님의 생애를
돌아보도록 한다 1903년 8월 24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 났다.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이라고도

하지만 태어난 곳은목포였다.  선친께서 전국을 수시로

 돌아다니는 직책의 관리였기에 선생님이 산 곳도 목포, 제주, 나주,

서울 등 여러 곳이었다.     7세 때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근무했기에

제주도 정의로 옮아가  정의보통학교를 다녔고 졸업은 나주에서 했다.

1916년에 서울로 와 양정 고보를 다녔고 1920년에 졸업, 일 년 후인 1921년

  9월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호오세이(法政)대학 전문부  법과 예과를  마친 후

 독문학과(獨文學科)를 선택,  24세가 되던 1927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선생님의 수필에 독일 철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떠오를 뿐만

아니라 1950년 납북되던 해에는독일어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목포시 향토문화관 앞에 있는  문학비에 얘기가  있다.

 

 

 

 

 

일본유학시절 김진섭, 이하윤, 김억선생님 등
7인이 “해외문학연구회” 조직하고, 1927년 잡지 《해외문학》
창간에 참여 했다. 창간호에  평론 《표현주의 문학론》 외에  H. 만의

소설 《문전(門前)의 일보(一步)》 등 독일의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 카프의

 프롤레타리아트 문학과 대결해서 해외문학 소개에 진력했다. 국내에 돌아와

경성제국대학도서관 일을 보면서,  1931년 윤백남 ( 제2방송 초대 방송과장 )

홍해성, 유치진님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해서 외국의 근대극을 번역

 상연하는 등신극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47년에 첫 수필집

 《인생예찬》, 1948년에는 수필가로서의  위치를 굳힌 

 본격적 수필집《생활인의 철학》을 간행했다.

 
1950년에 논문집 교양의 문학을 출판사에
남겨 놓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지만 그 뒤에도 1955년

교양의 문학이, 1958년 유작 40편이 수록된수필평론집이 출간되었다. 

깊이있는 생활관찰과 인생사색을 꾸밈없는소박한 문체로 엮어낸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의한 모델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수필을  

문학의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생활 중에 술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노정팔의 글을 보면 “약주를 좋아해

  저녁때는 두부집이나대머리 집을 찾아 문학을

 의논하기도 하고인생을 얘기하기도 하면서 허허하고

껄껄 웃는 모습은세상을 달관한 도인의 모습이라고 할까.

술 마시는 것도적절하게 조절해서 과음하거나 실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 고 했다.

 
동방문화진흥회 간행 월간<동인>
2006년 2월호에 실린 글을 보면   “그는 본래

담배와 술을  무척 즐기는 사람이었다. 흡연의 습관은

일찍이 7세 무렵 목포에 거주할 때 김진섭 형제를 극진히

사랑 해주던 이웃집의 젊은 아낙네로부터 배운 이래 지속되었고,

동경  유학생활 이래음주벽은 하나의 생활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1939년

 9 월부터1940년 1월까지의 5개월 동안 월간 <조광 -월간 조선의 전신으로

 1935년 1월에 창간됨>에 투고한 수필 <주중교우록(酒中交友錄)>의 기록에

 있다.  그 내용에의하면 "동경 유학 시절에 일승회(一升會)라는 기이한

음주단체 까지 만들어 유학생들과 어울렸으며, 해외 문학파의

구성원들과의 우정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것으로보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천 김진섭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지  못하고 북한땅에납치되어 소식을

모르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발자국은 문학가로, 

방송인으로, 그리고 진솔한 인간으로서

후세에 길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1939년 조광 지를
 통해서 선생님이 남기신 현대수필
백설부 한 토막을 옮긴다.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까지를
 너희의 혼란 속에 휩쓸어 넣을 작정인 줄은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뻐이, 혹은 할 수 없이휩쓸려 들어가는 자도 많이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러한 혼탁한 와중에서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백설의 이 같은 난무는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설의 상태가 정지되면,눈은 지상에 쌓여

실로 놀랄만한 통일체를 현출시키는 것이니,이와 같은 완전한 질서,

 이와 같은 화려한 장식을 우리는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주위에는 또한 하나의 신성한

정밀이 진좌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엿듣도록명령하는 것이니, 이 때 모든 사람은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백설의 계시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를 달고있음은 물론이요, 괴벗은전야(田野)는

 성자의 영지가 되고,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되어 새롭고 정결하고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한다. 이 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줌으로
 의해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눈에 덮인 공원, 눈에 안긴 성사, 눈 밑에

 누운무너진 고적, 눈 속에 높이 선 동상 등을 보는 것은 일단으로

더 흥취의 깊은 곳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한 옛시를 읽은 것과도 같이,

그 눈이 내리는 배후에는 알 수 없는신비가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원에는

 아마도 늙을 줄 모르는흰 사슴들에 떼를 지어 뛰어다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 성사

 심원에는 이상한 향기를 가진 알라바스터의 꽃이 한 송이 눈 속에 외로이 피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며,저 동상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을 저 혼자

알게 되는 것을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된 눈을 도회에 속할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산중 깊이 천인만장(千 萬丈)의
계곡에서 맹수를 잡는 자의 체험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 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있는 눈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니,
 가령 열대의 뜨거운 태양의 쪼임을 받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멀고 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안타르크리스에 잔존해 있다는 눈,
우랄과   알래스카의  고원에 보이는 적설,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상부 이탈리아의 눈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위 사진은제1회 현상각본 심사위원으로 나오셨을 때의 사진입니다.
윤백남,이백수, 김희창, 백빈, 이계원, 송영호, 유호, 노정팔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