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 심리전에 힘을 쏟았던 방송인 전옥배 (全玉培)님
정확한 판단력과 탁월하고 치밀한 기획력, 번득이는 아이디어, 勤勉함,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업무추진능력과 관리능력, 폭넓은 친화력 등 님의 인간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1964년대전 방송국 방송과장 부임에서 부터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국장, 편성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1980년 8월 방송사를 떠날 때 까지 방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71년 8월 중앙방송국 대공과장에 부임한 님은 東西냉전과 南北이 극명하게 대치하던 시절에 국, 내외대상 대공방송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서 공산권 동포들에게는 자유를 향한 통일의식을 심어주고 국내 동포들에게는 반공사상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셨습니다.
1971년까지 100Kw로 발사되던 대공방송 전용 수원 송신소의 기능으로는 대공방송의 실효성이 의문시되던 때에 때마침 소래송신소가 500Kw출력으로 국내방송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음에 착안한 전옥배는 그때까지 국내방송 위주로 편성 방송되던 500Kw출력 남양송신소를 대공방송 위주 채널로 전환하고 또 전파가 발사되지 않던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새로이 대공방송을 편성, 전파를 발사하도록 함으로서 大 出力 深夜 종일 대공방송으로 북한은 물론 중국 동북 3성, 소련의 사하린 등지에서 음질이 양호한 자유대한의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국내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대공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밤 12시에 방송이 종료되던 지역방송국 채널의 심야에 새로이 전파를 발사 할 수 있도록 하고 이 시간에 대공방송을 편성함으로서 이때부터 12시 이후의 국내 심야방송은 모두 대공방송으로 편성하는 등 실질적인 대공방송 체계를 구축, 확립했습다.
그 시절의 대공방송 요원들
KBS 한국방송공사 제도의 틀을 확립했습니다. 님은 KBS가 공사로 발족하던 1973년 8월 새로 마련된 한국방송공사 기획관리실 관리부장이 되었습니다. 관리부는 공사의 법규와, 정원, 지역방송국과 계열사 관리 등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였습니다.
이때 한국방송공사법과 정관은 시행되었지만 KBS가 국영에서 공영으로 전환하기위한 세부적인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거나 임시로 마련된 제도에 따라 공사가 운영 되고 있을때 였습니다. 법률에 따라 운영되던 조직과 인사 등을 방송공사의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규정 등의 제도를 확립해야 했던 때였습니다.
문화공보부와 지역방송국간의 이원화되었던 방송링크와 행정체계를 일원화 시키는 문제, 1960년대부터 난시청 해소만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방송링크 체계의 재확립, 도 단위 방송체계의 확립, 임시방편으로 운영되어 오던 방송 중계소의 위상정립, 방송제작비 지출을 위한 제도 마련, 인사, 직제, 정원의 제도화, 공사 특수성에 입각한 취업규칙마련, 회계제도 확립, 시청료 징수에 관한 제도 확립 등, 오랫동안 법률에 따라 관리들에 의해서 운영되던 제도를 공사 독자적으로 운영하기위한 제도로 전환하는 일은 실로 방대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방송이란 특수성에 비추어 다른 공사의 제도를 참고 하는 것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방송공사의 특수 사정에 입각한 제도마련은 복잡하고 어려움을 더할때였습니다. 이 방대한 일은 낮에는 물론, 밤도 낮과 같이 삼으면서 조사, 연구되어 보고서를 쓰고, 하루가 멀다하게 관련회의를 열어 내용을 조정하고 이사회에 상정되어 심의를 거치고 의결되었습니다. 이사회 업무를 함께 맞고 있던 관리부는 이런 안건들을 수시로 상정했고 이사회역시 관리부에서 상정한 안건으로 분주하기만 했습니다.
님이 관리부장직에서 떠나던 1974년 2월까지 그 방대하던 일이 마무리 되어 공사 발족 후 1년이 지나면서 최초의 한국방송공사 사규집이 나오고 그때 마련된 제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의 변화는 있었어도 오늘날까지 한국방송공사의 기본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목포방송국장 시절 중앙방송국에 비해서 지방방송국 방송의 질이 낮음을 절감한 님은 지방과 중앙간의 방송 질적 차이를 매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방 방송의 질 향상을 위한 자체 노력과, 자체노력으로 불가능한 사항에 대해서는 수시 본사와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지방방송국 방송 불량 음질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중앙의 기술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방방송의 질은 향상 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1972년 사내 체육대회에서 대공과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1 이내수, 2 채선경, 3 김기찬, 4 장영오, 5 지용수, 6 송현식, 7 장민구, 8 김기흥 9 박휘서, 10 임대길, 11 우길명, 12 윤진영, 13 전옥배, 14 이창훈, 15 손종만, 16 강정수 17 광영자, 18 이공진, 19 최광일, 20 방필주, 21 이장춘, 21 김용석님 입니다,
아래는 KBS 본사 전 사원이 대전 동학사에서 계룡산 정상을 넘어 갑사에 이르는 1979년 가을의 산행길에서 최세경 KBS사장님과 전옥배, 이상설님 그리고 앞줄 왼쪽끝 신윤생,오른쪽 끝 김인태뒷 줄 왼쪽부터 정도영(아나운서), 최영신, 저 이장춘, 정석균, 김승한, 이규항, 정상현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이 산행길에서 본사 기획관리실장 전옥배님은 산행 인솔 책임을 맡았습니다.
주요경력
공사가 되던날 대공과장 전옥배님과 대공방송 요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이내수, 이순자, 김용석, 전옥배, 곽영자, 손종만, 송현식, 뒷줄 왼쪽부터 이병웅, 장영오, 이공진, 강정수, 최영춘, 채선경, 이장춘입니다.
문공회 사무국장시절 애석인들의 모임 7석회를 이끌며 1989년 문공회 수석전을 열었습니다. 사진은 전옥배님을 배롯해서 신병운, 신정휴, 손석주, 조돈준, 윤기범, 이무근, 김영우, 조오재 김창희 박한준, 이의달, 홍삼룡, 정하룡, 강신철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님이 생전에 자주 부르시던 목포의 눈물을 함께 듣고 계십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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