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KBS 목포방송국의 어제와 오늘

이장춘 2011. 7. 17. 11:03

 

 

 

 KBS 목포방송국의 어제와 오늘 
 

 

호남 제 1 의 항구도시 목포에서 
 목포 방송소라는 이름으로 출력 50W,
호출부호 JBNK,주파수 1080Khz로 첫 방송을
내보낸것은 1942년 11월 1일로 남한에 있는
방송국으로서는 7번째가 되었습니다. 

 

 

  

방송을 내 보내기 이전에도
1941년부터 광주 출장소 목포 라디오
상담소가  있어서 라디오 보급과 써비스를 담당
했고  1942년 3월부터는 광주 방송국  목포출장소가
되었다가 목포시 양동에 있는 미국선교사 사택을 빌려
 방송시설을 하고 방송을 내 보내면서 목포방송소가
되었습니다.  천주교 미국 선교사 사택은 일제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선교사들을
추방한 후 비어있던 건물이었습니다.  
  

 

 

목포방송소가  방송국으로
 승격된것은 1945년 1월 23일의 일이고
해방될때 이곳에 근무한 우리방송인으로는
이태구님과 한영희님이 계셨습니다.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마산에 근무하던 진말봉님이 초대 목포
방송국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뒤에 대전방송국장등을
하셨음) 해방직후 1945년 10월 현재 목포방속국 
라디오 등록대수는 4천 74대에 불과했지만 
방송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천주교 사택의 주인 커밍 선교사가 돌아와
사택 반환을 요구해 그 대책으로 1947년 목포방송국
신축기성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 기성회의 임원진 
 회장 김용진, 이사 최섭, 이태구, 이대신, 한영희,
송용호 등이 지방 모금과  중앙절충을
 동시에 벌였습니다.
 
  지방모금 650만환, 국고보조금 5백만환
모두 1천 150만환으로 목포시 호남동 1번지 철도부지
878평을 매입해서 10월 1일 청사신축에 착수하고 1950년
5월 5일석조 단층 122평 건물을 완공 이전함으로써 새 청사에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12월 22일 용당동 현
청사로 옮길때까지 오랜세월  여기서 방송을 했습니다.
 

 

 

이때 새청사 준공과 함께 50W출력을
500W로 강화 해서 방송했지만 곧이어 터진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불과 한달 여 만에
기계는 배로 옮겨지고 방송국은 폐허화
되고  말았습니다. 
 

 

목포방송국 하면 빼 놓을 수
없는것이   6.25때 해상 이동방송입니다.
6.25가   일어나고 적이 눈앞에    왔을 때 방송국 기기를
보호 하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해군 함정에 송신기를  싫고

 서남해안 주민들을대상으로 방송 했고 인천상륙 작전에까지   

참여해서 공을 세웠습니다. 해상 이동방송은  세계방송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로 방송사에 길이 기록 될 것입니다.
이 얘기는 다른곳에 글이 있어  줄입니다.
 

 

6.25직후의 목포방송국 모습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에는
파괴된 호남동 1번지 청사를 북구해서  다시
정규방송을 시작했으나 방송국 청사도 비가 새는등
말이 아니었습니다. 또 전란 후 재정난으로 방송국의 운영이
극히 어려워지자  1954년에는 목포방송협의회 (회장 차남하)를
구성, 꼬마합창단 초청공연 등,  문화사업과 배구대회 등 체육
대회를 열어 시민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 상당액의 자금이
모여져 청사와 연주실을 보수하기도 했습니다
 
1958년 2월에는 공보관용 곤셋트
1동을 완성하고 7월에는 높이 58M의 철탑
안테나를설치함으로써 12월 25일부터는 출력을
 500W에서 1KW로 늘렸습니다.
 
1967년 2월 25일에  영암군 삼호면
동호리에 송신소를 설치함과 함께  출력을
 10KW로 증강하고주파수도 860KHz로
변경했습니다.
 
1977년 3월 18일 영암군 삼호면
난저리 1천 116평에  131평의 송신소를 세웠고,
그와 함께 출력도 50KW로 증강하는 한편 주파수를
 1,470KHz로 변경했다가 1978년 11월 23일 
 1,467KHz로 변경했습니다.
 

 

 

 

 

 1982년에는 방송시설 현대화사업으로
3억1천151만원을 들여 목포시 용당동 1188의
 3번지에대지 1,670평을 확보하고 거기에 15억 3천
340만원을 들여  1983년 11월 19일 청사 신축공사를
 착공, 1984년 12월 22일지하1층 지상3층의
신청사를 준공했습니다.
 
새로운 청사가 마련되면서 연습소장비,
공개스튜디오, 조명용모토, 승강장치 17개소, 조명기구
29대 등  기자재도 최신형을 현대화했을 뿐 아니라 객석
260석의 다목적공개홀도  이용할 수 있게 됐고 각종
전시회도 개최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85년 11월 15일에는 1,022평의 대지에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1,599평의 철근콘크리트
다목적홀을 착공해서 1987년 4월 3일부터  각종 공개
행사와 체육행사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다목적홀을
신축하면서 대지구입비 2억 3천만원은 이고장 보해양조의
 임광해회장 등  8명이 각출한 자금으로 충당했습니다.
 
 1987년 11월 24일 목포방송국  제1TV,
제2TV, 교육 TV 매체별로 목포시, 영암군, 무안군,
완도군, 진도군,해남군, 강진군, 신안군을 시,청취권으로
하고 있으며 일일자체방송 시간은  제 1라디오가 3시간 23분,
FM이 2시간, 제 1TV  20분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전속단체로는 60명으로 구성된 어린이 합창단이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1958년의 목포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모습이고 이 무렵 목포방송국

 

직원으로는 방송국장 임수병님을 비롯해서 방송과장
유일봉, 기술과장 한영희, 그리고 고문석, 송윤섭, 임인국,
이창석, 윤삼기, 김정선, 백기홍, 임준택, 안동근,
김용훈, 백영일님 등이 근무 하셨습니다. 
 

 

목포방송국에서는 국악의 저변확대와 국악인을 발굴하기 위해

해마다 국악 경연대회를 열고 2009년으로 21회가 되었습니다.

 

 

 


공사 될 무렵 목포방송국에  근무 하셨던 분들

 

  

 
국  장    문 현 식
 
 
방송과장   임준택
 
기술과장   고문석
 
송신소장   노완배
 
 
명선태, 김기천, 윤정희,  윤오주,  
하로만,  신수용,  박승일, 신순남,  김인석,  
조미경,  이창진,  김성수,  김남수,심영옥,  김정진,  
박봉호,  김영무,  백보현, 고산술님
 
 
1974년 2월 28일 이종만 목포방송국장의 정년퇴임식 기념촬영으로
KBS가 공사로 되어 처음 갖는 정년퇴임식이었습니다. KBS본사 김동석

기획관리실장님과 윤기범 광주방송국장님을 비롯한 간부, 조남두 여수방송국장님,

그리고 목포방송국 전 직원이 참여한 사진으로 한영희, 윤기범, 김동석, 이종만, 조남두,

임준택, 김기천, 손일석, 백보현, 이창진, 정석균, 윤정희, 김경빈, 서구호, 김일수 우제탁,

이광수 하로만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이 무렵 목포방송국기술과장으로

부임한 우제탁님이 사진을 제공 해 주셨습니다.

 

  

1959년 우제탁님이 남원방송국 근무시 남원방송국

직원들과 함께 목포방송국에 들려 유달산에서 김광형 목포방송국장,

유일봉 방송과장님김봉완 남원방송과장, 양율희 아나운서, 박영기,

윤영자님등과 함께한 함께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목포의 눈물 이난영.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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