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홍두표님! 영원한 방송인! 영원한 PD!

이장춘 2010. 10. 31. 17:31
 
 

홍두표 선생님 방송 50년을 축하합니다.


KBS TV 50년과 
홍두표선생님 방송 50년은
  일치하는 것이고 KBS TV 50년을 맞는
2011년 12월 28일 (KBS TV 개국일 12월 31일)
홍두표선생님 방송 50년을 맞아 JTBC에서 특집방송을  
내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작사에서 자료
제공을 요청 해  왔기에 기쁜 마음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홍두표님! 영원한 방송인! 영원한 PD!


홍두표님의 사회 첫 인생은 방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1년 KBS-TV방송이 문을 열기위해
처음으로 선발한 PD에 홍두표라는 이름이 오른 이래 50년간,
 님의 이력은 남달리 화려하다. 1980년 46살의 나이로 TBC동양방송
사장이 된 이래   한국 방송광고 공사 창설 사장, 전매청장,  한국 담배
인상공사 창설 사장,  중앙일보 사장,   KBS 한국방송공사 사장,  제주
국제 자유도시방송 (JIBS)회장 등  수많은 책임있는 자리를 거쳤다. 
그러면서도  방송인임과 동시에  전 KBS사장이라는 이력이
특별히 돗 보인다.  님이 영원한 방송인이기를 원하고
 또 KBS 사장을 지냈다는 것을 자랑스러움
으로  꼽기 때문일 것이다.
 


 
KBS사장과 전산 정보실장으로  
맺어진필자와의 인연은   그 기간중 
 정보화 시대의 문턱에서 KBS의 전 조직을
연결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등 현대적인 전산
정보 씨스템을 구축했고,  KBS사상 최대의 현금
 부채  1,000억에  달 했을때 관재국장으로 있었으며
  KBS사상 최대의 흑자 1,100억원이 달성되었을때
 KBS수입을    총괄하는 업무국장으로 있었기에 
 님과 필자와는 인연이 깊고 할 얘기도  많지만
긴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방송 프로그램 편성 제작의 귀재, 
경영의 귀재,  사장학 박사, 독일병정등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필자는 님에 대해서
수식어에 나타난 표현보다도
많은것을 보고 느꼈다.
 



한, 두가지 실례만 들어본다.
100정, 200장으로 된 보고서도 4분에서
5분 안에 다 읽어 넘긴다.  그리고 몇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님의 머리 속에서는 그에 관한 판단과 결정이
끝난다.   어떻게 그리도 빠른 시간에........ 실무자들의
힘으로 처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항은 본인이
 직접 스스로 나선다.  심지어 광고주를
모실 골프장 예약 까지도.....
 
일이 지연될리도 없고 처리 않될
사항이 없다 "항상 길은 있다" 가    님의
좌우명이다. 길을 찾으면 처리 안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하직원을 편애 한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도
있고  또 무섭다는 얘기를 한는   부하 직원들도 있었다. 
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님은 어떤  형태로던지 사람을
 시험한다,       필자는 시험을 당할때는 몰랐지만  
다음에 생각 해 보니 여러번 시험을 당했다. 
 하나의 에를 들어본다. 
.

필자가 어느날 사장실에서 이유없이
 야단을 맞았다.  그리고 그 야단을 맞으면서
원래 목소리가 큰 필자는 무의식 중에 큰 소리로
필자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사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비서실에서 필자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찔했다. 그래서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다시 사장실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필자가 지나쳤음을
밀씀 드렀다.    의외의 반응이 왔다.  자네 이마에는 ****이
쓰여있어. 그런데 회사에는 그런 사람도 있어야 되.  그 뒤로  필자가
 들고 간 문서는  대부분 호의적으로 받아 드려졌다. 그래도  필자가 사장님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엾을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사장님은 필자를
 불러  회사의 모든 재산관리, 지출과 물품 구매, 계약, 조달,  회계등을 담당하는 관재
국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고사 했지만 임명권자에게는 고사가  통하지 않았다. 님과
필자만이 아는 관재국장 구두 발령을 받고 그로부터 15일 후 공식적인 발령을 받았다.  
이장춘이 관재국장이 되었을때 모두의 반응은 뜻 밖이라는 것이었다. 이장춘은 홍두표
사징님과 가까이 지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홍두표시징님의 독특한 경영기법이고 용인술이었다. 필자를  얘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징님의 경영기법과 용인술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그로부터 님의 밑에서 업무국장,  제주방송 총국장을
 지내며 온 정력을 바쳐 일했다.
 
 
 




님은 4회의 큰 상훈을 받았다.
1966년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 제 9회
 방송 문화상이 그것이고.  그 뒤 국민훈장 동백장
또 한국방송 70주년을 맞아 받은 1997의 금관문화훈장
2010년 9월 3일 제 47회 방송의 날에 수상한 한국방송대상
공로상이 그것이다.  모두 방송과 관련된 상훈이다. 전매청장이라는
 관리도 하고 관광공사 사장도 하고,  신문사 사장도 해서 그런 자리가
애정이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도 방송인 이라는 말이 가장
 듣기 좋고 KBS사장을 지냈다는것이      자랑 스러우며 국제도시
제주에 손수 방송국을 설계하고 세워,   운영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보람이러고 하신다. 2008년 필자가 제주에 들렸을때
님을 만나 여쭈었다. 큰 방송사를 거느리다가 이토록
작은 방송사에 게시는 것이 답답 하시지
않으시겠느냐고....
 
답은, 위의 얘기와 함께 마지막
까지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고
 만족한 삶을 누리고 계신다고 하셨다.   요즈음도
 각 신문사에서 방송국을 설치하면서   님의 힘을
빌리려고 해서 서울의 새로운 방송사 설립에
알게 모르게 힘을 기울이고 계시나 보다.
 
 




 PD로 부터 시작해서 PD로
끝나기를  원하는 영원한 PD! 영원한 
방송인! 명예 정치학 박사 보유자이기도  한 
 님은 방송인으로서는 금관을 쓰셨다.  경영인으로
서도 귀재이지만 그래도 영원한 방송인이라는 더
 애정이 가는 홍두표 선생님의 앞날에 행운이
 같이 하심을 기원합니다. ! 
 
 
 

 

사우회보 2021년 7월 1일자
「만나고 싶었습니다.」 100회,
KBS-TV 개국 60주년의 해에 특별
게재한 홍두표 회장님에 관한
글을 옮겼습니다.





 
KBS공채 PD 1기로 들어오셨다는데 당시 이야기 들려주시죠.
1961년 12월 31일이 KBS가 TV 전파를 처음 발사한 날이죠. 그때 공보
부 서울중앙 TV방송국 즉 KBS TV가 탄생했는데, 그 1기생으로 15명(‘여
로’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남섭, ‘쇼쇼쇼’의 황정태) 등과 함께 들어왔
죠. 당시 취직이 힘들 때였는데 대학에서 두 곳을 추천해줬죠. 첫 추천이
올해 60주년이 되는 농업은행(현 농협) 1기사원이고 동시에 8월에 공보
부에서 KBS-TV 첫 개국 1기생 모집에도 응시해서 두 곳 다 합격했는데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죠. 고심 끝에 안정된 농협보다 뉴미디어인 TV
로 결정하게 됐습니다.
TBC 창립위원으로도 계셨죠?
1964년 12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TV가 삼성과 LG가 합작투자해
서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서 출발했는데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게 됐죠. 초
창기에는 시행착오 속에 공부하고, 개발하고, 실패를 거듭했는데 중견이
되어 다큐멘터리 제작PD로서 1968년 우리나라 최초로 100일에 걸쳐 해
외 다큐멘터리 ‘미국 일만 마일 - 거대한 미국’을 제작했고, 도쿄 특파원
PD기자 1호로 취재와 함께 Color TV를 연구해서 TBC 컬러화에 주도적
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장이 직업이라는 세간의 평이 있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인데다 또 새로운 직종에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니 TV시대에 기회와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1980년 45세에 중앙일보
동양방송 방송담당 사장이 된 후 10개 기관의 사장 등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 창설사장이 방송만 5곳이 돼요. 내 직업이 사장이라고 하지만 내
평생직업은 일하는 것이고 현장 전문가라고 할까요.
KBS사장으로 부임하게 된 배경은요?
1992년 중앙일보가 어려워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외도를 접고 중앙
매스컴으로 돌아와 달라는 말씀을 듣고 중앙일보 사장으로 개혁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1993년 YS문민정부가 들어서서 KBS사장으로 방송과 경
영전문가로 내가 낙점됐지만 당시 나는 중앙일보 사장으로 1년이 채 안
된 때라 완곡하게 사양했죠. 결국은 당시 청와대 박관용 비서실장이 대
통령의 명을 받아 도쿄에 있는 이건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승낙을 받
고 28년만에 다시 KBS로 돌아오게 됐지요.
당시 KBS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KBS는 2개의 TV채널과 특수채널 포함 6개의 라디오 채널에 8,000명
에 가까운 사원들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과 매체력을 가진 국가공영방송
인데, 사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콘텐츠 경쟁력 저하, 특히 공영방송의
축을 이뤄야할 9시뉴스 시청률이 MBC뉴스데스크에 밀리고, 프로그램
탑10 중 MBC가 6개, SBS가 2~3개, KBS는 두 채널 합쳐 1~2개로 두
채널 합쳐도 MBC에 미치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진단했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돈이다. 재정불안정으로 제작비
투입이 불안정 했다. 더구나 수신료 징수율이 50%, KBS 2TV광고 매출
이 60%. KBS가 방대한 조직에 최우수 사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투
입해야할 제작비나 경비를 쓸 곳에 쓰지 못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형식만 갖춘 소극적 합리주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 않나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KBS수신료 징수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었군요?
이런 KBS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힘들게 YS대통령 독대를 신청했죠.
이원종 수석의 도움으로 성사됐는데 KBS가 이 시대 사회적 역할을 다
하려면 재정 정상화가 우선 해결돼야 한다고 역설했지요. 대통령은 처음
에 수신료 인상인가하고 난색을 표명하다가 인상이 아니고 전기료에 수
신료 병과 징수하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하면서, 그래야 척박한 시청자들
에 대한 수신료 감면 혜택도 돌아가고 공영채널인 KBS1의 광고를 중단
해서 완전한 공영채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지요. 그래도 대통령은 신
문방송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냐는 우려를 표명해 조선, 동아, 중앙,
MBC, SBS 등 신문 방송 사장들을 만나 KBS수신료를 전기료에 병과징
수하면 KBS1채널의 광고 중단으로 3,000억원의 광고혜택이 신문방송
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고 설득해서 동의를 얻었다고 설명해 대통령을 안
심시켰던 거지요. 그 후 내무부의 반대 등 문제가 좀 있었지만 이를 돌파
해 94%의 수신료 징수로 재정을 안정화시켰는데 1995년 700억 원의 당
기 순이익을 내는 등 KBS중흥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드라마 왕국 MBC를 제치고 KBS드라마 왕국을 건설하고 KBS 9시
뉴스 시청률도 고공행진을 했죠.
수신료 징수제도 개선으로 사원들의 사기도 진작되고 그래서 새 출발
한다는 의미로 연봉을 조정했는데, SBS 100%를 기준으로 MBC 93%였
는데, KBS의 82%를 MBC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뉴스와 콘텐츠 제작비
도 인상했습니다. 9시뉴스 앞에 방송사상 처음으로 드라마 일일 연속
극으로 편성한 문영남의 ‘바람은 불어도’ 56%를 비롯해 ‘젊은이의 양지’
만나고 싶었습니다-100
공영방송 KBS 중흥의 터를 닦다 - 홍두표 고문
문인수 KBS사우회장(왼쪽)이 홍두표 고문(오른쪽,
현 TV조선 회장)을 인터뷰하고 있다.

위성시험방송 개시 기념식(1996년 7월 1일)에서
첫 전파발사 단추를 누르고 있다(오른쪽

첫째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그 다음이 홍두표 회장,
다음이 오인환 전 문화공보부장관)62%, ‘
첫사랑’ 65.8%로 드라마 돌풍을 일으켜

MBC를 압도했고 9시뉴스도 전체 3위로 뛰어
올라 MBC뉴스데스크 시청률을 전체 프로그램
에서 8위로 밀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
고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 ‘열린
음악회’, ‘일요 스페셜’ 등을 신규 편성했고 이
중에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장수 프로그램도 있
지요.
KBS 퇴임 후에도 왕성한 방송활동을 하고 계
신데요.
제주방송(JIBS)는 방송가능 주파수로는 우리
나라 마지막 지상파 채널인데 KBS를 시작으로
JIBS참여는 처음과 끝을 잇는 방송과업이라는
점에서 참여했습니다. JTBC는 내가 1980년 11
월 30일 마지막 사장으로 깃발을 내린 방송인
으로 제2의 TBC 즉 JTBC의 깃발을 올려 종편
시대의 개막을 연다는 의미로 참여했고 TV조선
은 나이가 먹었어도 방송전문가로서 필요한 곳
이 있고 역할과 기여가 가능하다면 나에게는 최
고의 선물이자 과업이라고 판단해 참여했습니
다. 한 평생 방송인으로서 TV조선 이 마지막 방
송현장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화제인 미스터 트롯과 미스트롯의 기획배
경도 들려주세요.
방송이 본격화 되고 전문화 될수록 사람이 부
족한데 특출한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책임자로서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서혜진이라
는 창의력이 치열한 PD와 노윤이라는 신 개념의
특출한 작가가 답이다라고 보는데, 물론 회사도
적극적 파격주의로 뒷받침 한 것도 있지만… 어
쨌든 코로나 사태로 힘든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
망을 준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성공 비결이라면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한마디로 감동이죠. 오디션은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경쟁인데 미스, 미스터 트롯맨들 서
로 잘하면 기뻐하고 박수 쳐주고 못하면 위로
하고 안타까워하는 오디션 분위기에 시청자들
이 감동과 애정을 느끼고, 또한 멜로디만으로
듣던 노래에 노랫말의 의미, 느낌, 이런 것들이
코로나의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 위로와 격려
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리고 최후의 30인
은 호텔에서 합숙시키면서 교육과 훈련 즉 몸과
마음가짐, 편곡, 안무 등 정성스럽게 갈고 닦아
서 각자의 특성을 빛내게 한 후 그 중에서 준결
승 결승을 치렀기 때문에 소위 트롯사관학교라
고 할까요. 타사의 일반적인 오디션과는 확연히
다르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성공은 시청자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KBS가 요즘 힘든 상황인 데 타개방안이 있다
면요?
‘KBS가 두 개의 TV채널, 6개의 라디오, 전국
의 총국과 지국이 있는데 방대한 조직과 역할이
있을망정 방만은 아니다. 60년의 오랜 조직, 그
것도 Old media에서 디지털 New media로 전
환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한 면이 있다. 오래 축
적된 사안, 이해충돌의 문제 등 단기적인 해소
는 힘들다는 생각이고 적어도 5년 정도의 중기
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KBS가
잘 버티어왔다고 봅니다. 우선 수신료 2500원
책정 당시 제작비와 지금의 제작비 차이는 10배
의 격차가 있는데 수신료는 그대로며 국가기간
방송으로서 제작비나 운영비가 절대부족인데도
지상파 프로그램 탑10 중 6~7개가 KBS이고,
KBS뉴스가 11%로 SBS나 MBC의 두 배로 전
체적으로 시청률 3위 잖아요. 그리고 KBS기자
나 PD등 모두 우수한 인력들이고 제대로 실력
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일 할 뜻과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야 KBS
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KBS는 BBC나 NHK와
같이 공영방송으로 시청자 국민들에게 일관성
이 있는 공적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120여 개
의 무수한 채널이 쏟아내는 방송현실에서 One
of them이 아닌 보편타당성, 불편부당의 희망,
용기, 행복을 주는 공적기능을 흔들림 없이 수
행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KBS사우회 회우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리겠습
니다.
복잡다단한 일상생활 속에서 퇴직 사우들의
연결고리 역할, KBS에서 근무했다는 자부심을
고취하는 역할 등에 대해서 사우회에 감사하고
사우회보의 「만나고 싶었습니다」의 100회 특집,
KBSTV 60년, 나의 방송 입문 60년, 이렇게 가
치와 의미 있는 수치가 있는 때에 인터뷰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KBS 초창기 3년 그리고
사장으로 5~6년 그렇게 10년 가까이 KBS에서
일했는데 KBS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한 사
우회우 여러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
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년 7월 1일(목요일) 사우회보 제231호





홍두표 ((洪斗杓, HONG TOO PYO) 선생님 약력


1935년 12월 25일 출생  (양력) 


본적 서울 종로구 신영동 105-17
(출생지 경기 화성),
본관 남양
직업 방송인
좌우명 항상 길은 있다
가훈 매사에 정성을 다하자 


   학                력

1948 ~ 1954 : 인천고 졸업
1954 ~ 1960 :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1964 ~ 1966 :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96. 5 ~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연세대 명예정치학 박사


   경        력

1961 ~ 문공부 방송요원 및 한국방송공사 TV개국 준비요원
1964 ~ 동양방송 창설요원
1965 ~ 동양방송 제작과장, 편성부장, 편성부국장
1972 ~ 동양방송 동경주재 특파원
1974 ~ 동양방송 편성국장
1975 ~ 중앙일보 이사
1975 ~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상무이사, 전무이사
1980 ~ 중앙일보. 동양방송 방송담당 사장
1980 ~ 방송협회 부회장
1981 ~ 1986 방송광고공사 창설준비위원장 사장
1984 ~ 한국언론회관 이사
1984 ~ 문예진흥원 이사
1984 ~ 국제문협 이사
1986 ~ 전매청 청장
1987 ~ 전매공사 창설준비위원장 사장
1989 ~ 한국담배인삼공사 민영화작업 사장
1992 ~ 중앙일보 사장
1993 ~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
1993 ~ 1998.4   KBS 사장
1993 ~ 1998.4   한국방송협회 회장
1993.4 ~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이사
1993.5 ~ 서울예술단 후원회 회원
한국방송회관 건설추진위원장
1995.9 ~ 국제방송통신기구 이사
1996 ~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이사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과정 총동창회장
장애인먼저실천중앙협의회 공동대표
1996.3 ~ 서울대 총동창회 부회장
1996.4 ~ 미국방송박물관( Museum of TV & Radio) 이사
1996.9 ~ 국제텔레비젼과학예술기구(NATAS) 국제이사
1996.10 ~ 97세계 환경의 날 행사 추진위원회 상임위원
1996.11 ~ 이웃돕기운동추진협의회 공동회장
1996.12 ~ 2002년 월드컵축구조직위원회 위원
1997.3 ~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1997.3 ~ 연합통신 비상임 이사
1998.4 ~ 1999.5  한국관광공사 사장
1998.4 ~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한국지부 회장
1998.8 ~ 관광정책 심의위원회 위원
1998.8 ~ 관광정책심의위원회 위원
2000.8 ~ 중앙일보 고문
2003.9 ~ 현 로또공익재단 이사장
2002.1 ~ 현 제주국제자유도시방송(JIBS) 회장
2011. 2. 6 중앙일보 종편담당 회장 


     상   훈 

1966년 제9회 방송문화상
국민훈장동백장
1997년 9월 3일 금관문화훈장
2010년 9월 3일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2010년 11월 30일 TBC복원을
염원하는 이들의 모임에서 본 홍두표님
입니다. 그 뒤 홍두표님은 종합편성 채널
JTBC회장님으로 취임하셨고 2017년
TV조선으로 옮기셨습니다.









위는 KBS 사장실에서 업무국장
시절의 필자와 정종철 광고부장이 함께한

사진이고 아래는 제주도 산방산부근의 해안에서
제주방송총국장 시절의 필자와
문인수 보도국장
김청길 기술국장, 이준상 업무국장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65년의 두 홍두표님 모습으로 두분은 성도 이름도 한자도 같아서 자주
화제(話題)에 올랐습니다. 한분은 오랜세월 드라마 연출을 하던 분이고 또 한분은
1961년 KBS에 입사했다가 1964년 라디오서울로 옮기신 분입니다. 그때는 드라마 연출자는
 늘 네임 싸인이 들어가고 또 오랫동안 연출을 해서 이분은 널리 알려졌지만 TBC 홍두표님은
 잘 안 알려졌을 때였습니다. 그러던중 TBC 홍두표님이 국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드라마 연출가가 갑자기 TBC국장이 되었다니 알고보니 TBC에 또 한분의
 홍두표님이 계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두 홍두표님이 남산에서 만나는
모습이고 아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모습입니다.
 
 



 
 
50회 방송의 날 2013년 9월 2일
홍두표 회장님과 함께 한 특별화보
 
 
홍두표 회장님! 1961년 KBS TV창립 사원으로
방송에 입문 한 이래 TBC 동양방송 사장, 한국방송광고
 공사 창립사장,  중앙일보 사장, KBS사장, 제주 JIBC창립회장,
그리고 현재 JTBC 동양TV회장으로 역임하면서 방송인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하고 있는 홍두표 회장님이 방송인들과
만나 얘기 하는 모습들이 카메라에 들어와 특별
화보로 올렸습니다. 

위 사진은 홍두표 회장님과

KBS 사우회 서병주 전 회장님이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왼쪽부터 
 
구양술, 김탁, 이상수, 홍두표 회장님,
홍금표,  전홍구
(현 KBS 부사장),  서강원   KBS 메디어 (미래창조)
센터장, 이일로 사우회 전 감사님 입니다. 

 
 
 
 
홍두표 회장님과 전국회의원 박찬숙
아나운서가 반가운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이장춘(좌),
성대석님이 함께 했습니다.   아래는 왼뽁부터 이태수,
서강원, 이장춘, 박찬숙, 홍두표, 서병주, 김선초,
 김정빈, 홍금표님이 함께 했습니다.  
 
 
 
 
위 사진 왼쪽부터 홍두표 회장님,
홍금표, 남선현 JTBC사장님이 함게 한
사진이고 아래는    왼쪽 고수웅님이고
다른 분은 앞에서 설명 올렸습니다. 

 
 
 
 


 


제 53회 방송의 날에 2016년 9월 1일






한국방송협회(회장 고대영)가
주관한 축하연은 9월 1일 저녁 6시 30분
 63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에서 전, 현직 방송인들과
황교안 국무총리 등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 및    방송
유관기관 인사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장에는 불참했지만 축하 영상메시지를 통해
“우리 방송은 명품 콘텐츠의 생산기지이자 한류의 전초기지”라고
 치하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주역으로 계속 역할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정부도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불합리한 규제를 혁파하고 건강한 콘텐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홍두표, 윤세영, 서규석, 김인규, 임기영님과 함께 한 사진 




엄기영, 박찬숙, 윤세영, 홍두표, 정용석, 홍승택






윤대작, 김기호, 이철호 김인규, 이보길




















이장춘의 사진 한장은 올려야 된다면서
 사진의 대가 관주 김광일님이 촬영해 주셨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홍두표, 김인규 사장님, 서규석, 윤세영,  
이보길 회장님, 김상준 교수님, 참으로 반가운 마음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관주님 좋은 사진 고맙습니다.



권순이(수니/정진원) 선생님 글



저는 65세의 초로의 여인입니다
홍두표사장님이 인삼공사 사장으로 계실때
남편이제직중에 민방위소집령을 받고 출근하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분명 상대차가 신호 위반
 했다고   주변인 2분이 증언을 했는데 거대 버스회사의
횡포로 잘 못봤다고 위증하는 바람에 저희는 피해자에서
피의자가 되었답니다 저희 남편의 아버지가 육이오 때 전사
하신 관계로 유복자인 남편은 식물인간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어서    저는 남편 곁에 있어야하고 연로하신 시어머니와
아이들은 초등 5학년,3학년,1학년이고 저희 뒷일을 봐 줄
사람이 없다는   딱한 사정을 사장님이 들으시고 저희
사고해결 전담반을 두고 저희가 국가 유공자가
되어 보훈병원으로 이송되는 3년 동안 급여도
 계속주시고 퇴직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고마움을 디딤돌삼아 삼남매가 4년 재
대학을 졸업해 두 아들은 공무원이 되었고 딸은
시각디자인을 전공해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또한
 삼남매 모두 결혼해 각 남매를 둔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있답니다.   남편은 2013년에 23년의 식물인간상태를 뒤로
하고 하늘로갔습니다 장남이 결혼할때 이 고마움을 전하려고
 여러 밥법을 강구해 봤으나      여의치  않았는데 혹시 하고
 검색해보다 님의 공간에 들르게 되어 몇자 적어 봅니다.
꼭 전해 주십시오. 저희의 고마움을..저는 권순이
고요.     남편의 이름은 정진원이었습니다.
 사고는 1999년 9월이었습니다.


오야봉. 손경출 선생님 글
   
 
2017.12.02 00:39
저는 어릴 적부터 저의 아버님께서
홍 두표 회장님 의 3형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고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TBC 방송 대표 가 되신 걸 기뻤습니다. 감회가...
그 당시 봉두완 님 / 그 당시 박초아 아나운서...
오늘 우연치 않게     T V 조선 과학 포럼 방송에서
홍두표 회장님 을 보니 정말 반갑고....그 감회는 요
.. 홍 회장님 건강하시고요.     정말 로요 또한 저희
아버님과 친하셨던 회장님의 동생이셨던 " 홍진기연"
홍 영표대표님께서는 건강 하신지요..... 홍 대표님
께서는 크레인(부천소사) 사업의 열정이      대단
하신 분.. 참고로 저의 아버님께서는 2007년
타게하셨습니다.. 회장님건강 하시고 ..
대한민국 방송이 제대로 굴려가게
해 주셔요... 감사합니다 ....
 
홍 두표 회장님은 대한민국
방송의 산 증인이시며 ...그 작은
체구에 엄청난 힘을 내시며 제대로
굴러가는 대한민국 방송이
될 거라 믿습니다.


조수미 아배마리아 슈배르트-1.wma




사우회보 2021년 7월 1일자

「만나고 싶었습니다.」 100회,

KBS-TV 개국 60주년의 해에 특별

게재한 홍두표 회장님에 관한

글을 옮겼습니다.

 

KBS공채 PD 1기로 들어오셨다는데 당시 이야기 들려주시죠.

1961년 12월 31일이 KBS가 TV 전파를 처음 발사한 날이죠. 그때 공보

부 서울중앙 TV방송국 즉 KBS TV가 탄생했는데, 그 1기생으로 15명(‘여

로’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남섭, ‘쇼쇼쇼’의 황정태) 등과 함께 들어왔

죠. 당시 취직이 힘들 때였는데 대학에서 두 곳을 추천해줬죠. 첫 추천이

올해 60주년이 되는 농업은행(현 농협) 1기사원이고 동시에 8월에 공보

부에서 KBS-TV 첫 개국 1기생 모집에도 응시해서 두 곳 다 합격했는데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죠. 고심 끝에 안정된 농협보다 뉴미디어인 TV

로 결정하게 됐습니다.

TBC 창립위원으로도 계셨죠?

1964년 12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TV가 삼성과 LG가 합작투자해

서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서 출발했는데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게 됐죠. 초

창기에는 시행착오 속에 공부하고, 개발하고, 실패를 거듭했는데 중견이

되어 다큐멘터리 제작PD로서 1968년 우리나라 최초로 100일에 걸쳐 해

외 다큐멘터리 ‘미국 일만 마일 - 거대한 미국’을 제작했고, 도쿄 특파원

PD기자 1호로 취재와 함께 Color TV를 연구해서 TBC 컬러화에 주도적

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장이 직업이라는 세간의 평이 있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인데다 또 새로운 직종에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니 TV시대에 기회와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1980년 45세에 중앙일보

동양방송 방송담당 사장이 된 후 10개 기관의 사장 등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 창설사장이 방송만 5곳이 돼요. 내 직업이 사장이라고 하지만 내

평생직업은 일하는 것이고 현장 전문가라고 할까요.

KBS사장으로 부임하게 된 배경은요?

1992년 중앙일보가 어려워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외도를 접고 중앙

매스컴으로 돌아와 달라는 말씀을 듣고 중앙일보 사장으로 개혁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1993년 YS문민정부가 들어서서 KBS사장으로 방송과 경

영전문가로 내가 낙점됐지만 당시 나는 중앙일보 사장으로 1년이 채 안

된 때라 완곡하게 사양했죠. 결국은 당시 청와대 박관용 비서실장이 대

통령의 명을 받아 도쿄에 있는 이건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승낙을 받

고 28년만에 다시 KBS로 돌아오게 됐지요.

당시 KBS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KBS는 2개의 TV채널과 특수채널 포함 6개의 라디오 채널에 8,000명

에 가까운 사원들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과 매체력을 가진 국가공영방송

인데, 사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콘텐츠 경쟁력 저하, 특히 공영방송의

축을 이뤄야할 9시뉴스 시청률이 MBC뉴스데스크에 밀리고, 프로그램

탑10 중 MBC가 6개, SBS가 2~3개, KBS는 두 채널 합쳐 1~2개로 두

채널 합쳐도 MBC에 미치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진단했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돈이다. 재정불안정으로 제작비

투입이 불안정 했다. 더구나 수신료 징수율이 50%, KBS 2TV광고 매출

이 60%. KBS가 방대한 조직에 최우수 사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투

입해야할 제작비나 경비를 쓸 곳에 쓰지 못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형식만 갖춘 소극적 합리주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 않나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KBS수신료 징수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었군요?

이런 KBS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힘들게 YS대통령 독대를 신청했죠.

이원종 수석의 도움으로 성사됐는데 KBS가 이 시대 사회적 역할을 다

하려면 재정 정상화가 우선 해결돼야 한다고 역설했지요. 대통령은 처음

에 수신료 인상인가하고 난색을 표명하다가 인상이 아니고 전기료에 수

신료 병과 징수하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하면서, 그래야 척박한 시청자들

에 대한 수신료 감면 혜택도 돌아가고 공영채널인 KBS1의 광고를 중단

해서 완전한 공영채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지요. 그래도 대통령은 신

문방송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냐는 우려를 표명해 조선, 동아, 중앙,

MBC, SBS 등 신문 방송 사장들을 만나 KBS수신료를 전기료에 병과징

수하면 KBS1채널의 광고 중단으로 3,000억원의 광고혜택이 신문방송

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고 설득해서 동의를 얻었다고 설명해 대통령을 안

심시켰던 거지요. 그 후 내무부의 반대 등 문제가 좀 있었지만 이를 돌파

해 94%의 수신료 징수로 재정을 안정화시켰는데 1995년 700억 원의 당

기 순이익을 내는 등 KBS중흥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드라마 왕국 MBC를 제치고 KBS드라마 왕국을 건설하고 KBS 9시

뉴스 시청률도 고공행진을 했죠.

수신료 징수제도 개선으로 사원들의 사기도 진작되고 그래서 새 출발

한다는 의미로 연봉을 조정했는데, SBS 100%를 기준으로 MBC 93%였

는데, KBS의 82%를 MBC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뉴스와 콘텐츠 제작비

도 인상했습니다. 9시뉴스 앞에 방송사상 처음으로 드라마 일일 연속

극으로 편성한 문영남의 ‘바람은 불어도’ 56%를 비롯해 ‘젊은이의 양지’

만나고 싶었습니다-100

공영방송 KBS 중흥의 터를 닦다 - 홍두표 고문

문인수 KBS사우회장(왼쪽)이 홍두표 고문(오른쪽, 현 TV조선 회장)을 인터뷰하고 있다.

위성시험방송 개시 기념식(1996년 7월 1일)에서 첫 전파발사 단추를 누르고 있다(오른쪽

첫째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그 다음이 홍두표 회장, 다음이 오인환 전 문화공보부장관)62%, ‘첫사랑’ 65.8%로 드라마 돌풍을 일으켜

MBC를 압도했고 9시뉴스도 전체 3위로 뛰어

올라 MBC뉴스데스크 시청률을 전체 프로그램

에서 8위로 밀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

고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 ‘열린

음악회’, ‘일요 스페셜’ 등을 신규 편성했고 이

중에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장수 프로그램도 있

지요.

KBS 퇴임 후에도 왕성한 방송활동을 하고 계

신데요.

제주방송(JIBS)는 방송가능 주파수로는 우리

나라 마지막 지상파 채널인데 KBS를 시작으로

JIBS참여는 처음과 끝을 잇는 방송과업이라는

점에서 참여했습니다. JTBC는 내가 1980년 11

월 30일 마지막 사장으로 깃발을 내린 방송인

으로 제2의 TBC 즉 JTBC의 깃발을 올려 종편

시대의 개막을 연다는 의미로 참여했고 TV조선

은 나이가 먹었어도 방송전문가로서 필요한 곳

이 있고 역할과 기여가 가능하다면 나에게는 최

고의 선물이자 과업이라고 판단해 참여했습니

다. 한 평생 방송인으로서 TV조선 이 마지막 방

송현장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화제인 미스터 트롯과 미스트롯의 기획배

경도 들려주세요.

방송이 본격화 되고 전문화 될수록 사람이 부

족한데 특출한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책임자로서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서혜진이라

는 창의력이 치열한 PD와 노윤이라는 신 개념의

특출한 작가가 답이다라고 보는데, 물론 회사도

적극적 파격주의로 뒷받침 한 것도 있지만… 어

쨌든 코로나 사태로 힘든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

망을 준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성공 비결이라면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한마디로 감동이죠. 오디션은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경쟁인데 미스, 미스터 트롯맨들 서

로 잘하면 기뻐하고 박수 쳐주고 못하면 위로

하고 안타까워하는 오디션 분위기에 시청자들

이 감동과 애정을 느끼고, 또한 멜로디만으로

듣던 노래에 노랫말의 의미, 느낌, 이런 것들이

코로나의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 위로와 격려

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리고 최후의 30인

은 호텔에서 합숙시키면서 교육과 훈련 즉 몸과

마음가짐, 편곡, 안무 등 정성스럽게 갈고 닦아

서 각자의 특성을 빛내게 한 후 그 중에서 준결

승 결승을 치렀기 때문에 소위 트롯사관학교라

고 할까요. 타사의 일반적인 오디션과는 확연히

다르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성공은 시청자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KBS가 요즘 힘든 상황인 데 타개방안이 있다

면요?

‘KBS가 두 개의 TV채널, 6개의 라디오, 전국

의 총국과 지국이 있는데 방대한 조직과 역할이

있을망정 방만은 아니다. 60년의 오랜 조직, 그

것도 Old media에서 디지털 New media로 전

환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한 면이 있다. 오래 축

적된 사안, 이해충돌의 문제 등 단기적인 해소

는 힘들다는 생각이고 적어도 5년 정도의 중기

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KBS가

잘 버티어왔다고 봅니다. 우선 수신료 2500원

책정 당시 제작비와 지금의 제작비 차이는 10배

의 격차가 있는데 수신료는 그대로며 국가기간

방송으로서 제작비나 운영비가 절대부족인데도

지상파 프로그램 탑10 중 6~7개가 KBS이고,

KBS뉴스가 11%로 SBS나 MBC의 두 배로 전

체적으로 시청률 3위 잖아요. 그리고 KBS기자

나 PD등 모두 우수한 인력들이고 제대로 실력

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일 할 뜻과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야 KBS

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KBS는 BBC나 NHK와

같이 공영방송으로 시청자 국민들에게 일관성

이 있는 공적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120여 개

의 무수한 채널이 쏟아내는 방송현실에서 One

of them이 아닌 보편타당성, 불편부당의 희망,

용기, 행복을 주는 공적기능을 흔들림 없이 수

행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KBS사우회 회우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리겠습

니다.

복잡다단한 일상생활 속에서 퇴직 사우들의

연결고리 역할, KBS에서 근무했다는 자부심을

고취하는 역할 등에 대해서 사우회에 감사하고

사우회보의 「만나고 싶었습니다」의 100회 특집,

KBSTV 60년, 나의 방송 입문 60년, 이렇게 가

치와 의미 있는 수치가 있는 때에 인터뷰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KBS 초창기 3년 그리고

사장으로 5~6년 그렇게 10년 가까이 KBS에서

일했는데 KBS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한 사

우회우 여러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

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년 7월 1일(목요일) 사우회보 제231호

조수미 아배마리아 슈배르트-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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