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최초의 실황 중계방송 /1958년 3월 KNA사건
1958년 2월16일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민간 여객기 창랑호(DC3)가 북한으로 납북되어 평양을 거쳐 순안 배행장에 내렸습니다. 이 일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북한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끌었지만 북한은 승객이나 승무원, 비행기를 쉽사리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인도적으로 해결 해야 된다면서 남. 북의 적십자사 대표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담의 결과 승객과 승무원 34명중에 26명을 송환한다는 합의가 이루워져 송환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중계방송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세심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생 중계방송은 이루워지지 않았지만 삼각 연락망을 통해서 신속한 보도가 이루워져 방송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 줌로서 방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끝부문에 있습니다.
아래사진은 3월 4일로 기재 되어있어 그날 현장답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된 문시형 PD와 임택근 아나운서가 현장답사를 위해 판문점으로 갔을때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그 때 신문사 기자로 현장을 취재 하셨던 깁집 선생님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해 오던 그 빛 바랜 사진을 저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김집 선생님은 그때 같이 취재 활동을 하시던 노형곽 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서 그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 해 주셨습니다. 방송국이 판문점에서 실황 중계방송을 한것은 이때가 처음이어서 의미있는 사진이기에 사진첩의 많은 사진 중에서 이 사진을 찾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진을 제공 해 주신 깁집선생님입니다.
사진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KNA기가 납북되어 송환되던때 판문점 출입 한영섭기자는 대한언론인회에서 발행한 회고담에서 1958년 2월 16일 발생한 KNA여객기 (34명이 탑승한 "창랑호") 납북사건은 3월 6일에 26명의 승객이 귀환될 때까지 방송기자들의 보도활동이 돋보여 보도방송에 대한 청취자의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고 하셨습니다. 한영섭기자는 현재 원로방송인 모임인 사단법인 방우회 회장, 6.25 종군기자회 회장으로 계십니다.
납북인사 송환 현지중계방송에 관한 글이 1977년에 발행된 한국방송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에 옮깁니다.
1958년 3월 6일의 판문점, KNA 납북인사 송환광경의 현지중계 보도방송은 라디오방송의 신속성이 최대 한으로 활용된 가장 극적인 기술과 보도의 개가였다.
송환 하루 전날인 5일부터 현지로 가서 남산과의 FM전파를 시험하던 기술진에서는 6일 정오경부터 상호 연락상태가 양호하여 납북인사 송환 광경은 아무 차질없이 중계 할 수가 있었다.
이날 KBS에서는 기술진을 총동원하여 대형 중계차는 문산에 라디오 카는 판문점 회담장소에 각각 배치하고 남산의 주조정실과 단파를 통한 3각 연락을 취하면서 신속한 취재활동을 하고 있었다.
판문점애 나가있는 라디오 카가 11.3Mhz로 현장보도를 발사하면 그곳에서 50리 떨어져있는 문산의 중계차가 이를 포착하여 다시 9.0Mhz로 남산에 중계 했는데 남산에서는 11.3Mhz와 9,0Mhz를 온 촉각을 세워 지키고있다가 뉴스가 들어오면 즉시 기록하여 이것을 임시뉴스로 흘리는한편 7.2Mhz로 현장에게 새로운 뉴우스를 재촉하곤 했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FM으로 현장 중계 할 계획이었으나 판문점, 문산일대의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았고 회담내용도 생으로 중계 할 성질이 못 되어서 중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 방송사사상 처음 보는 장거리 무전 취재였다.
위 사진은 그때 납북 송환된 김진섭 기자와 취재활동을 하셨던 KBS내신부장 한영섭 기자, 6.25이래 우리 군을 이끈 군 수뇌부 인사가 함께 만나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때 납북되셨던 김진섭 기자는 90객으로 지금도 그때의 얘기를 생생히 기억하시고 녹취 한국 언론사에도 그 대강의 얘기를 써 놓으셨 습니다. 그때 공군 대령 정훈감으로 납북되었던 김기완은 5.16후 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임택근 아나운서의 매형이기도합니다. 그 때 취재 활동을 하시던 한영섭 기자는 6.25 종군기자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사단법인 방우회장직을 맏고 계십니다.
참고로 그때의 얘기를 요약 하겠습니다
그때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958년 2월16일 오전 11시38분 창랑호(DC3)는 어린아이 한명을 포함한 승객 29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비행기가 고도 7천m로 경기도 평택 상공을 통과할 무렵 괴한들이 총기를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고 저항세력으로 보이는 군인들을 쇠몽둥이로 때려눕힌 다음 조종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을 거쳐 순안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창랑호 기장인 홉스등 미국인 2명과 독일인인 요한 리트히스 부부 등 외국인 4명이 포함돼 있어서 주한 미국대사관과 독일대사관이 이들의 송환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지만 일이 쉽사리 풀리지 않고 3월 6일에 이르러 남북 작십자 대표가 합의를 보았지만 26명의 승객, 승무원만 돌아왔을뿐 기체와 나머지 인원은 영원히 돌아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납북 송환 인사중에는 언론인 깁진섭 기자를 비롯해서 국화의원 유봉순의원, 공군정훈감 김기완 대령등이 계셨습니다. 다음 사진은 19일만에 귀환길에 오르는 승객들의 모습입니다.
납북 귀환 인사들의 공개 기자회견 모습입니다.
범인은 간첩 기덕영(奇德永)의 사주를 받은 황해도 사리원출신의 김택선(金澤善)·길선(吉善)형제와 김순기(金順基)·최관호(崔寬浩)·김형(金亨)등 5명과 이들의 월북에 동행한 김애희(金愛姬)·김미숙(金美淑· 본명 신자·信子)등 모두 7명이었습니다.
창랑호 납북사건의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 1958년 4월 북한은 공군기를 납치 하려고 했지만 미수에 그쳤습니다. 1969년에는 1.21사태후 얼어붙은 남북관계에서 또다시 여러 만행이 저질렀고 그 가운데서도 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해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한공 소속YS-11A 여객기가 공중에서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사건이 벌어지는등. 북한의 도발행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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