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우리말 여자 아나운서와 최아지(兒只), 김문경
일제 강점기 18년 6개월간의
우리말 여자 아나운서는 모두 5명이었습니다.
1926년 7월 시험방송때부터 방송을 한 이옥경 아나운서와
개국을 앞두고 그해 1월 5일에 채용한 마현경, 우리말 방송 실시를
앞두고 1932년 7월에 시험을 실시해서 10월 경부터 방송을 한 최아지(최정석),
김문경 아나운서 일제 강점기 말에 채용되어 해방 된후까지 방송을 했던 호기수아나운서가 그 분들입니다. (그밖에 여자 아나운서 채용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인 사항이 없어서 확인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이옥경, 마현경아나운서는 1928년에
방송국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이후 김문경, 최아지
아나운서가 들어 올 때까지 우리말 여자 아나운서는 없었습니다,
최정석 아나운서는 3년정도 근무했고 김문경 아나운서는 6년정도
근무해서 이중방송 초창기에는 두사람의 여자 아나운서가 방송을 했습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약 4년간은 김문경 아나운서 한 사람밖에 없었고
김문경 아나운서 뒤 호기수 아나운서가 들어 올때까지 약 5년간은
우리말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확인중에 있습니다. 이옥경, 마현경, 호기수 아나운서
얘기는 다른글에서 썼으므로 오늘은 김문경,
최아지(최정석) 아나운서 얘기를 더 쓰고 또 이
두 아나운서가 쓴 방송국 근무 할 당시의 얘기를
불로그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최아지님과 김문경님이 방송국에
들어오신것은 경성방송국이 우리말 전담방송을
준비하면서 연희에 10Kw 방송국 송신소를 새우고
조선방송협회를 설립하던 때였습니다.
아직 제2방송은 하기 전이었지만
모든 준비를 갖추고 인원구성을 하던때로 1932년
10월에 인원구성이 끝나 정식 발령은 아니었어도 윤백남님을
책임자로 좀 먼저 들어온 박충근 아나운서, 이혜구, 남정준, 이하윤,
윤태림님등으로 진용을 짜고 제1방송에 참여 하면서 제2방송을
준비해서 1933년 4월 26일부터 제 2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지방국 설립계획이 수립 되었습니다.
이때 선발된 최아지님과 김문경아나운서는
우리말 전담방송을 위한 최초의 공개모집으로 들어온
여자 아나운서였습니다. 두 아나운서는 방송을 잘 해서 칭송을
받았고 라디오가 요술상자라고 하던 시절이라 장안의 화제가 되어
이분들을 보러 방송국을 찾는 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시절에는
남자는 그 전해에 박충근 아나운서가 공채로 또 비슷한
시기에 남정준 아나운서가 들어왔습니다.
최아지아나운서는 경기 여고 출신으로 이름이 兒지여서 강아지, 송아지 등 놀림을 많이
받기도 했던터라 결국 이름을 최정석으로 바꾸셨고 인기를
누린 아나운서였지만 교육계에 뜻이 있어 1935년방송국 퇴직후
학교 선생님으로 가셔서 당시의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 퇴직 하실 때 까지 계셨습니다.
김문경 아나운서는1981년 미국으로 이민 하후 말년을 뉴욕의 플러싱 너서 홈에서 지나시가다 2007년 4월14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2007년 5월 1일자 미주방송 참조)
최아지 여자 아나운서 시절 / 최아지님 글 내가 JODK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첫발을 내 디딘 것은 1932년이다. 그 무렵 나는 경성여자
고등 보통학교 ( 현 경기여고의 전신) 졸업반 학생이었다.
때마침 한.일어 이중방송이 본격화 하면서 방송국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아나운서를 공모했다. 그것도 그해 여학교 졸업반 학생을 대상으로. 그래서 나는 경성 여고보의 추천을 받아 응모 했는데 그때 아나운서는 새로운 직업이어서 무척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방송국에는 시내 각 여학교에서 추천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재법 웅성거렸고
시험은 작문, 낭독, 마이크 테스트 등이었다. 시험결과 두 사람이
합격 합격 되었다. 나와 같이 합격한 학생은 숙명여고 출신 김문경이었다.
그 때가 7월 20일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와 김양은 3개월간의 수습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사령장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프로그램 편성은
일본인 위주였고 우리말 방송은 밤이 깊은 오후 9시40분 이후에
한꺼번에 몰아서해 치웠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지금처럼
다양 하지도 않아서 지극히 단조로웠다.
그러나 “JODK...JO아...여긴 경성방송국입니다.” 하고 콜싸인을 외칠 때는 떨리면서도 신명이 났다.
그런데 33년 4월이 되면서 우리아나운서들은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한.일어 단일방송에서 이중방송으로 전환되어 우리말 전용의 제2방송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나운서들의 근무시간도 2부제가 되었고 1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부는 오후 5시부터
11시 30분까지로 구분되었다. 당시 우리말 아나운서로는 우리 여자아나운서외에 박충근씨와 남정준씨가
있었는데 박충근씨는 아주 멋장이었다.
그리고 장난도 좋아하여 쉬는 시간이면
그 당시 내이름인 "아지"를 들먹이면서 "강가면 강아지,
송가면 송아지, 박가면 박아지, 망가면 망아지" 하고 곡까지
붙혀가며 흥얼, 흥얼 놀려댔다. 그럴때면 나는 약이올라
그의 등을 때려주곤 했는데 어떤때는 울기까지 했다.
그렇건만 내가 근무하던 제 2 방송과는 화기
애애 했고 과장이던 윤백남선생은 나를 무척 아껴 주셨다.
그래도 나는 여학생처럼 삼단같은 긴 머리를 내리 드리우고 다녔다.
그러나 나와함께 입사한 김문경양은 머리를 쌀뚝 잘라 버린다음
대담하게 틀어 올려서 멋진 숙녀태 ? 를 과시하기도 했다.
김양이 그처럼 단발을 해 버리니 나도 언제까지
긴 머리채로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윤백남 과장은 기회 있을 때 마다
머리를 들어 올리라고 권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나도
긴 머리를 쑥닥 잘라 버렸던 것이다. 마이크에도 익숙해지고
맨트에도 침착성을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꼭 하나 싫은것이 있었다.
그것은 창이나 단가가 시작되거나 끝났을 때의
소개맨트를 방송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우리
고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기피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행위라 그저 뉘우치기만 하지만 아뭏든
그때는 소개맨트만 방송 해 버리면 아예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버리거나 마이크 앞에서귀를 들어막고
엎드려 있기가 일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은 엎드린체 졸아 버렸다.
그새 창이 끝났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졸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종료 소개 맨트를
잊어먹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음순간 얼굴이
빨그래가지고 스튜디오를 뛰쳐 나왔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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