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자유대한의 소리 (Voice of Free Korea) 해외방송 (전편)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방송해 드리는 자유대한의 소리방송입니다. 타령과 아리랑의 가락에 실려 언어별 국제방송국 콜싸인은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전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을 알리는 메신저 국제방송국의 전파는 또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 국내에 사는 외국인들에게도 다정한 친구였습니다,
실시한 것은 1953년 8월 15일 자유대한의 소리
( Voice of Free Korea ) 영어방송이 UN군을 포함한
국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15분간의 방송을 실시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전파가 비록 해외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가 외국어로 방송한 최초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경축식 실황이 하와이를 비롯해서 미국등지에
최초로 중계방송 되었고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을
대상으로 자유중국 대사관에서 제공한 “반공인민지성”을
방송한적은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이었거나 우리가
직접 제작한 방송은 아니었습니다.
1955년 12월 1일에는 자유대한의 소리 일본어 방송이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 된 이래 일본에서
침투하는 일본방송은 들을 수 있었어도 국내에서 실시하는
일본어 방송은 이때 처음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나
제반 사장으로 보아 가장 가까운 나라중 하나이면서도 정치적 상황으로
갈등국면에 있던 때 대일방송의 실시는 양국의 이해증진과
60만 재일교포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56년 수원에 새로운 송신소가 설치되어 국제방송 전용 송신소로 활용되고 10월부터 단파방송
50Kw송시기 두대가 전파를 발사할 수 있게 되면서 하와이에
보내는 단파 시험방송이 실시되었고 1957년 9월 2일을
기해서 11.925Mhz를 통해 영어와 우리말로 된
최초의 방송이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이때 실시된 방송은 30분간의 짧은 방송이었지만 KBS가 전 세계를 향해서
해외방송을 할 수 있음을 알리는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1958년 4월 10일에는 영어와 불어로 대 동남아 방송이 시작 되었고 1959년 4월 12일부터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1960년에는 아세아를 대상으로
단파를 통해서 영어방송과 일본어 방송이
실시되었고 1961년부터는 러시아어, 중국어방송도
실시했었습니다. 유럽을 대상으로 방송을 실시한 것은 1960년 3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은 처음 영어와 불란서어로 했지만 1962년 8월
19일부터는스페인어로도 방송을 했습니다.
1956년 수원송신소에 두 대의 50Kw단파 송신기가 놓인 이래
6년 만에 우리말을 비롯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러시아어, 스페인어의 7개 국어로 모름지기
세계를 향한 방송망이 구축되어 해외방송을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오랫동안 7개 국어로 방송을 하다가 월남전이 확대 되면서 대 월남 방송을 실시했지만
대월남전에서 우리나라가 협력한 미국이 패망함에
따라 이 방송은 중지 되었습니다.
1975년에는 국제방송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김제의 대출력 송신소가 준공되면서 6월 11일부터
인도네시아어 방송이 시작되었고, 9월 10일부터는 아랍어 방송이
실시됨으로서 남산시절이 다 하가전, 국제방송을 시작한지
20여년만에 5대양 6대주를 향한 대한민국 전파가
미치지 않은곳이 없을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대한민국 방송을 듣는
청취 구릅이 형성되고 세계각처에서 수신보고가
매달 수천건씩 날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인연이 없었던
외국인들도 국제방송국을 통해서 끈끈한 인연이 맺어졌고
한국을 모르던 사랍들도 한국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태평양 멀리 떨어져 있는 원양어선에서
월남전에서 싸우고 있던 우리 군사들이, 이역만리
낯선땅에 이민을 떠난 우리 동포들이, 이밖에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타향땅에서 삶을 이어가던 우리동포들은
국제방송의 정다운 목소리와 음악을 통해서 고국의
소식을 들으며 향수를 달랬고 고국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때의 수신보고서 한편을 인용합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온 박태룡님의 편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항상 정겨운 사연을 실은
우리를 찾아주시는 KBS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의 수단 - 이곳의 한국인은 대사관직원과
그리고 현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라디오를 듣는것은 수단의 항구도시인 포트
수단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듣는 우리말 방송을 수단의
수도인 카르통의 동료들에게 보내주기도 합니다.
그곳은 내륙지방이라 수신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녹음한 테잎이
늦기라도 하면 제 동료들은 독촉이 성화 같습니다.
저는 자재 통관 수송관계로 이곳에 파견 되어 있어서 그래도
고국소식을 직접 접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항상 반가운소식을 많이 보내 주시고 방송을 위해
수고 하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내내
건투 하시길 바랍니다,
남산시절 해외방송요원들의 모습입니다. 그시절 해외방송을 하셨던 김남규님이 사진을 보내주시면서 성함을 함께 넣어 보내 주셨습니다. 번호따라 1. 원명희. 2. 김현숙. 3. 백선기 4. 박용순. 5. 신주옥 6. 박 철 7. 곽명수 8. 신병운 9. 최장훈 10. 11. 이남만. 12. 임우재, 1 3. 김남규. 14. 은광우 15. 김성수 16. 최남칠 17. 김성범 . 18, 김기길. 19, 최경호 20. 21. 한희주 22 23. 전종구
1. 신현국, 2, 박용순 3. 윤석영 4. 5, 김기길 6, 신주옥 7. 강찬선
여의도로 옮긴 신사옥 앞에서 해외방송인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김남규님이 성함을 넣어 보내주셨습니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군요. 1. 김기경. 2. 이복남, 3. 4. 이해양, 5. 안숙경. 6. 박용순. 7, 한희주 8, 백선기, 9. 10. 신주옥, 11. 박배식 12. 이정석. 13, 한 숙 14, 조성민 15, 16. 최경호, 17. 배덕환, 18. 장명근, 19. 이남만, 20. 김남규, 2 1.조용수 22. 23,최남칠, 24. 황대윤, 24 박형숙 (남자 ) 25. 26. 27. 정영호 28. 김기길. 29. 박완수, 30. 이인순 (남자 ) 31. 32 최장훈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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