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공방송 (전편)

이장춘 2010. 5. 22. 02:52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공방송 (전편) 
 

 

3.8선이 가로막힌체 나라가 두동강이

났습니다. 해방되고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북한에서 중계방송되던 KBS의 전파는 북한 중계방송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전파는 국경도 없고 철조망도
없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멀리 멀리 퍼져 나갑니다.
때로는 방해 전파를 발사 하거나
라디오 채녈을 
 조작해서 인위적으로 전파가 날아드는것을
막는경우도 있었지만 방송을 듣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KBS는 1948년 이 땅에
우리 손으로 수립한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던날 북한동포들을 위한 30분간의
방송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했습니다. 
그로부터 북한동포들을 위한 방송은
오랜세월 계속되었습니다. 
 
철조망이 가로막혀 남, 북간에 혹은
동, 서 간에 왕래가 불가능 했던 그 시절에도
KBS전파만은 한반도 저 북녘 끝 압록강, 두만강까지,
강 건너 북간도까지, 사할린까지, 바다건너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도 메아리 쳤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음악에 실린
갈메기소리는 1960년대 남산시절에 방송되던 , 
자유의 메아리 씨그널입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사람들이 남북간을 넘나들며 비방방송은
하지않기로  약속을 하기도 했지만 북한동포를
위한 방송은 계속 되었습니다. 대공방송을 할때의 
기구는
중앙방송국 방송과, 제2방송과, 그리고 5.16 이후
대공 방송과     해외방송을 강화하면서 국제방송국이
탄생했고         
1968년 KBS 3국이 통합해서
하나가     될    때는 대공과에서
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남북 교류가  이루워지며 비방방송을
하지 않기로 했을 때 KBS 한국방송공사 탄생과
맞물리면서 사회교육방송이라는 이름으로 대 공산권
동포를
위한 방송이 실시되었고 그 때의 방송기구는
사회교육부가 되었다가
        사회교육국으로  
승격 되었으며 지금은 한민족방송
이라는
 이름으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에는 국내에서 방송전파가
쉬고 있던 심야에도 대북방송은 그치질 않았
습니다. 밤 12시가 넘으면 KBS지방방송,  민영방송을
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은 KBS 대공과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웠습니다.  대공방송은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중요 했지만 냉전시대에 공산권 실정을
잘 모르는 국민들이나 중국, 소련, 일본 등 해외동포들
에게도 남과 북의 실상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제방송의 대공산권방송의 
주 콜싸인은 
HLSA였지만  HLCA도 사용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30분으로 시작한
대공방송은 세월이 지나면서
    24시간 밤, 낮없이
 방송을
내보낸  종일 방송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출
력도 10Kw에서 1, 500Kw에 이르기까지
대 출력으로, 주파수는 중파 600Khz, 또는
970Khz등으로  단파
 6.135Mhz를

비롯해서
 9.640Mhz, 6.015Mhz등
여러 체널로 송출
 되었습니다. 국제방송국의
공산권방송은  북한이나 사하린을
중심으로 한 소련, 
그리고
일본, 동남아나 유럽에서까지
 이 방송을
들었다는
수신보고서가 오기도 했습니다. 
 
 
HLSA나 HLCA의 중파, 
단파 대공방송
전담 체널 외에도 
제1방송에서 심야 2시간, 제2방송서
 새벽과
심야 4시간,  대구, 광주,
춘천, 강능, 속초, 여수등
 12곳의 지역방송에서 심야 두 시간씩 (부산은 시간에
대일방송을
 했음)의 대공방송이 송출 되었습니다.

동아동아방송국 서울의 애인을 비롯,
TBC, CBS. 극동방송국 등 민영 방송에서
심야
30분간 방송되었던
대공 방송에도   KBS
대공과에서
제작된  페케이지 프로그램이
일부 지원되기도 했습니다. 
 

냉전시대
 그 시절, 밤 12시를 지나서
들을 수 있는 심야  방송은KBS 대공과에서
제작한 대공방송
 프로그램들이 주를 이루웠습니다.   
민영방송을 주로 들으시던 일부 청취자분들은
 실제로는
KBS에서 제작해서
민영방송국에 제공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듣고
 계시면서도  KBS에서        대공방송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갖거나  항의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대북방송은
국내방송보다 
 그 방송량이 
더 많았지만 국민들은
이것을 잘 몰랐습니다.
누가 알아  주는 이 
없어도  대북방송  요원들은
사명감

으로  일을 해냈습니다.


프로그램의 집필진은 대부분 전문적인
 분야의 인사가 고정적으로 써 주시는 경우가 많았고
난의 일기나, 희망의 속삭임, 소녀의 일기, 노래의 화원,
통일의 그날까지 등의 글도
공산주의사회 실상을 잘 알면서도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으신 분 들이 집필을 맡아
주셨습니다. 그 유명한 북조선 공산당수 허헌의 딸 허근욱님을
비롯해서 이범선, 하중희님등 좋은글 써 주셨습니다.
 




대공방송 작품공모에 입선 수상자들 -1963-
 

그 시절 대공방송에는 방필주, 최호님이
국제방송국 자문위원으로 계시면서 많은 글을
써 주셨고  한재덕, 최광석, 모기윤, 오기완, 신상초,
이철주, 유완식, 이기건님 등 저명인사들이 많이 출연 해
주셨습니다.  북한에서 귀순 대북방송에 많이 출연해 주신분은
 이필은, 정낙현, 김신조, 김익풍, 조응택, 김용구, 최송식, 오손석,
오정숙, 이시영, 윤진영, 우길명, 등이었습니다. 이중 최광석,
우길명,  오기완님은 대공방송의 전문위원이 되어  
대공방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대공방송에 방송되는 드라마 글은
 
그 특성상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특성에
 맞도록   연구 하시면서 써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의 대공방송드라마를 쓰시던 작가로는 최요안, 주태익,  
김희창, 박서림,
백전교, 김영수, 최풍, 박우보, 이철주,
 이희복,윤혁민, 이기명님등이 많이 써 주셨습니다.

 
성우가 대공방송에 출연하는 경우 
드라마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지만 일반
프로그램에 출연 할 때에는 대공방송의 특성에 맞는
이혜경, 오정한, 구민, 고은정, 최흘,  이광자, 박민아, 
김순자,
김인배,  임옥영, 김순원님이
많이 출연 해 주셨습니다. 
 
 

1963년 국제방송국 시절 대공방송 제작진과 기술진



대공과장 박은상

편성계장 이상설

연예계장 이규철



프로듀서

엄복영, 김운채,  박건주,  김태주, 
이인호,
 신현규,  최춘,  이순자, 이창옥,
김신옥, 권화영,
강장석,  정찬응, 
이경남, 김화용,  이장춘
 





프로듀서 엄복영(마이크 든분).
김운채(녹음기 맨분)님의 취재현장

 얘기하는 분은 음악가  한동일님
-1964년-
 


왼쪽 앉은분부터  최봉식, 이평우,
곽창곤, 권병실, 박준병, 유병은, 전해종,
이완규,
 김용국, 이의대, 박용주, 손대철님
 (방우회 이사 정항구님 이 성함을
가려 주셨습니다.)





기술과장 이중집

기술계장 김선영



엔지니어

장용섭, 김순구, 유진동,
이의대,   김영선,   이홍상, 박상수,

정관언, 주창욱, 박용수, 유병일


 수원송신소는 따로 올리겠습니다.  



정동방송국 앞에선 방송기술인들 왼쪽부터 곽창곤, 정항구, 이의대, 박수환님



1953년 9월 21일,  미그기를 몰고 월남 귀순한 노금석대위와 어머니
 

위는 1959년 1월 27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평양 특파원 이동준 기자가 월남해서 기자 회견 하고 있는 장면
 
 
1960년 정낙현 북한공군 소위의  정낙현
북한 공군소위 귀순장면 (위)   
방송하는 모습 
첫 기자회견에서 KBS를 듣고 왔다고 했음.
 
  
 월남 귀순한 정낙현이 김신 공군참모총장과 만남
 


1965년 11월 11일 월남 귀순한
이필은 북한해군 대위는첫 기자회견
에서    대북방송을 듣고
감명을
받아귀순 했노라고 했음



국제방송국 간부들(1963년) 왼쪽에서
첫번째 이상설 편성계장
 두번째부터 박은상
대공과장,
강찬선(아나운 책임을 맡아 강과장님이라고
불렀음),
송재남해외과장,김순경 서무과장, 노정팔
국제방송국장,김창희 서무계장, 아래는 간부들과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대북계로 부터 국제방송국 대공과까지의 직제
 

1956년 3월 10일 출력 100Kw
수원송신소가 새로 문을 열고 10월부터

대북계를      신설하면서   대공방송 시간을

늘려 방송 했습니다.       이때부터 중앙방송국

대북방송이라는 말 대신에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으로 호칭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습

니다. 대공방송을 포함한 대외방송은

모두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

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앙방송국 제2 방송과에서

실시하던   대북방송은   5.16직후

방송기구가       개편되어   1961년 7월

1일자로 국제방송국이 정식 발족 하면서

방송시간도 대폭 늘려 14시간의 대공방송이

편성됐습니다.       새로 발족한 국제방송국에는

대공과와 해외과, 기술과,서무과, 수원송신소가

있었는데    대공과와 해외과는 제1과 제2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 되어서    혼돈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부를 때에는

대공과와 해외과로 통했습니다.

 

국제방송국의 초대 국장은

그 유명했던  윤길구님이었지만

1개월후 중앙방송국장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황기오 국장이 그 뒤를

이었으나 KBS TV가 문을 열면서

TV방송국장으로 가셨습니다.

 

그 뒤로도 이재현, 이용상,

김득성 등 모두 1개월에서   7개월

까지의 짧은 기간을 거쳐가신 후

노정팔 국장이 1963년 4월부터

3년을 계셨습니다.

 

1967년 8월 15일을 기해서

국제방송국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종일 방송을 실시함으로서 국내 종일방송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했습니다. 이날

심야방송 행사는 홍종철 공보부장관등

각계방송관련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8월 14일12시 8월 15일 0시를

기해서 국제방송국 주조정실에서 있었

습니다. 사진은진은 그 때 촬영한 사진으로

당시 주조정실에서 일하고계시던 이홍상님이

스스로 일하시는 모습이 담긴사진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국제방송국 주 조정실  


 
서울 국제방송국이 발족되어 초대 국장으로
부임한 윤길구님과
최고회의에서 내려보낸 방송감독관
박인양 대위가 함께 서울 국제방송국
현판을 거는 모습입니다.
1961년 5.16이 일어나고 반공이 국시로 선포되면서
서울 중앙방송국에
속해있던     
제2방송과를 주측으로 그 해 7월 1일자로 국제방송국이
 발족
했습니다.  그때 제1방송과는
남산으로 옮긴 뒤였지만 제방송과는 정동방송국에

있어서 정동방송국 현관에 현판을 걸었습니다.  비상계엄령 하에서 방송국은 군 부대가
 있었고 또 군이 방송국을 감독했습니다. 그 감독의 책임자는 김창파 대령이었지만 정동
방송국에는 박인양대위가 나와있었습니다. 박인양 대위는 뒷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인 11기생이었지만 80년  이전에 현역 중령으로 예편했습니다.
  그 시절의 KBS 문복순 아나운서와  박인양님의 부인은 이화여자대학교
동기 동창이기도 합니다. 박인양님에관한 얘기는 방우회
정항구이사님이 잘 알고 계셔서 그 얘기를
바탕으로 간략히 요약했습니다.
 




이후재 선생님 이산가족찾기  글
 
 
이산가족찾기의 시초는 KBS사회교육방송의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였다. 6. 25 전후 헤어진
혈육을 찾는다는 사연을 듣고,  국내와 해외(사할린, 연변,
흑룡강성 등) 동포들의 사연이 쏟아져 들어왔다. 생사확인 후
 1980년 여의도 본관 5층 스튜디오에서는 35년만에 혈육을 재회하는
 극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최세경 사장, 김순경 국장도 눈물을
 흘렸다. PD 장민구, 윤군 등은 중매장이처럼 흥분했고, 이를 당국에
 제안해서 TV 로 6.25 특집 생방송을 진행하게 되였다. 정말
 공영방송의      위력을 실감했고 영원히 마음 뿌듯하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은 당연한 결과이다. 당시 여의도
광장을 메운 사연벽을 잊을 수 없다.

대구 이후재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북방송 후편 보기 영문자 클릭http://blog.daum.net/jc21th/17780472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북방송 전편 보기 영문자 클릭http://blog.daum.net/jc21th/17780471
  국내 최대의 다목적 송신소 KBS 김제송신소 http://blog.daum.net/jc21th/17781044
 

  
정동에 있던 국제방송국 주조정실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