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남산시절 뉴스와 기자 (2) 후편
KBS 남산시절 20년은 이 나라 방송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방송사적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TV방송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여러 민영방송이 출현해서 극심한 경쟁속에 TV수상기 보급이 급속이 늘어나면서 라디오방송을 듣던 청취자들이 점차 TV방송으로 옮겨가던 시기 이기도 했고 국영방송이던 KBS가 공영방송으로 출범하던 때였습니다.
보도방송 측면에서 보면 기사만 쓰던 기자들이 뉴스에 직접 등장하고 여러방면에 걸친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기자들이 숫자나 기구도 확대 되었습니다. 계단위가 과단위로 확장되고 얼마 안가 국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해외취재망이 신설돠어 세계 곳곳에 지국이나 특퍼원이 파견되었습니다. 또 남산시절의 얘기는 아니지만 뒷날 본부단위로 바뀌면서 보도방송과 기자들의 위상이 급속히 향상되었습니다.
방송의 중심이 라디오방송에 있었던 1960년대까지의 남산시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라디오 방송뉴스는 하루라도 걸러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농어촌의 인구가 70%에 달하던 시절 보도로 분류되던 일기예보 또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덕분에 방송국 직원은 아니었어도 기상대의 김동완 통보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뉴스는 거의 매시간 마다 편성되었고 그 중에서도 낮 12시와 저녁 9시 뉴스는 가장 중요시 되어서 청취자들은 이 두 번의 뉴스를 꼭 들어야만 했던 시절 이었습니다. 낮 12시 뉴스는 임택근님이나 이광재님이 아나운서실장 일 때, 실장이 직접 담당 했을 만큼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지역에는 하루에 낮 12, 오후 5시, 7시, 9시. 아침 7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서울 뉴스가 끝난 후 지역뉴스를 할 수 있도록 허용 되었는데 밤 9시 뉴스 배정시간 때문에 지역에서 불만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12시 뉴스는 지역 뉴스가 끝나고 자체 로-칼 생방송이 나가기 때문에 시간을 좀 초과 해도 생방송을 줄이면 그만이었지만 밤 9시 뉴-스는 서울에서 시간을 초과하면그만큼 지역에서 시간이 적어지기에 시간을 엄격히 지켜 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역뉴스 역시 낮12시와 저녁 9시가 중요 했고 다른 시간대는 기사가 없을 때는 재방송하는 기사가 많았지만 낮12와 밤 9시는 언제나 새로운 기사로 채워 졌습니다. 서울에서는 PD, 기자, 아나운서의 영역이 따로 있었지만 지역에서는 그런 영역 구분을 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은 적고 일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기자증을 해당방송국장이 발행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기자증을 발행하고 취재 명령을 하면 기자활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PD나 기자나 다 같이 취재도 하고 프로그램도 제작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8년 7월 25일 KBS가 통합 되면서
중앙방송국의 방송과와 국제과가 합쳐 보도부로 승격 되고 보도부에 보도과, 국제과, 방송과를 두었습니다. 방송국 전체가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어서 보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두 단계를 한꺼번에 뛴 샘이지요.
곧 이어 1970년에는 국제과를 라디오부로 보내고 방송과를 아나운서실로 바꾸어 국장직속으로 하면서 기자들만으로 구성된 보도과가 보도부로 승격되어 급격히 확대된 형국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방송의 무게중심이 보도 쪽으로 옮겨지고 또 매체 별로 보면 라디오에서 TV쪽으로 그 중심이 옮겨지는 획기적인 전환기가 되어 보도중심의 TV방송시대를 예고했습니다. TV에서 뉴-스시간이 대폭 늘어나고 기자 리포터가 자주 등장 하는가 하면 아나우서가 자리하던 뉴스 스튜디오에 기자가 등장하면서 아나운서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아 졌습니다.
이때 보도부는 부장 밑에 과장대신 차장제도가 생겼고 그 밑에 10개의 반장이 있었습니다. 직제 상에는 반장이지만 다른 언론사와 격을 맞추어 부르기는 부장이라고 했었습니다. 10개의 반장은 정치, 경제, 사회, 외신, 체육, 전국, 편집, 제작, 카메라, 자료 그리고 편집은 또 라디오와 TV로 나누어 졌습니다.
지역방송의 보도도 60년대 초 중반까지 2-3명의 기자로 취재에 임하는 방송국이 많았고 큰 지역방송국도 5-6명의 기자가 있을 정도 이었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숫자가 늘어났고 공사창립 후 보도과의 신설과 70년대 중. 후반의 TV 자체방송실시 등을 계기로 그 수도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출연 기회를 늘려주고 그러면서 취재능력이나 방송테크닉도 향성 되었습니다.
이토록 본사나 지역을 막론하고 TV방송에서 보도방송의 확대와 기자 앵커 등의 등장으로 기자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활동영역도 넓어지고 또 정계진출등도 이루어져 국회에서도 여러 명의 방송기자 출신의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3년 보도부의 인원구성
부 장 ( 2급 을 부이사관 ) 이 정 석
차 장 ( 3급 갑 서시관) 김 도 진 반 장 ( 3을 10명 사무관)
박진우, 이인원, 이창원, 홍삼용, 신정호, 이인기, 배학철, 전희령, 김선초, 이성한, 박세호,
구 성 원
(자료관리나 카메라기자, 해설위원, 행정 모두 포함되어 있음)
정인걸, 이길영, 김학영, 이석희. 박성범,권용중, 장만복, 황규환, 임연택, 김근복, 나형수. 전병채, 송장길, 이명환, 문 청, 유동수, 최정광, 박민웅, 정종표, 전준모, 이 휘, 김자규, 임용균, 김두석, 민광성, 남승자, 윤건웅, 박춘병, 유민원, 김상사, 심상대, 서복석, 이재현, 문동휘, 김광남, 조용준, 이윤성, 전정치, 공정표, 김기후, 조두현, 김호진, 이준호, 김광일,
남정판, 김난희, 김선기.강명수, 이대섭,
윤한중, 이상갑, 이무기, 이태행, 송행복, 김복영, 김진하, 김진모, 이영일, 이홍기, 호천웅, 김기후, 차병현, 백재하, 정건일, 남궁창국.이춘임, 김하규, 신전우, 이이규, 정찬무, 박홍수,홍윤호, 유인목, 이혜복, 이원춘, 이팔웅, 정희우, 김용현, 최태욱, 김억현, 이태영, 정화룡, 최이섭, 오순오, 백호빈, 문창권, 최권식, 정회준, 나득용
이분들 가운데 박성범님은 공사후 방송총국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되셨고 이윤성님은 엥커를 하시다가 역시 국회의원에 당선 되셨으며 박찬숙님도 오랫동안 라디오의 와이드 프로를 진행하다가 국회의원이 되셨습니다. 황규환님은 기회조정 본부장, 라디오 본부장을 거쳐 아리랑TV사장, 인천 I TV사장, 스카이라이프사장, 원음방송 회장을 지내셨니다. 남정판님은 문화공보부 차관을 지내 셨습니다.
참고 사항
중앙, 국제, TV방송국이 따로 있었지만 취재보도의 중심은 중앙방송국 보도실이고 여기서 취재한 기사는 편집기자가복사지를 대고 눌러 써서 4부를 작성 했습니다. 중앙방송국의 방송용으로 편집해서 한부 쓰고 대공방송용, 해외방송용,TV방송용으로 각각 배부 하지요. 채널별로 배부된 뉴스 원고는 각 부서별로각기 채널에 맞게 기사를 재 작성해서 다시 편집을 했습니다. 대북방송용 기사는 보도실에 있는 국제방송국 뉴스 편집책임자가 편집 해 오다가 1968년 7월 3국이 통합된 뒤로는 복사 분을 받아서 대공과 에서 재작성, 방송 했습니다. 해외방송용은 해외과에서 각 언어별로 채널 특성에 맞도록 재 작성해서 방송했습니다.
TV방송의 방송초기에는 뉴스에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뉴스시간이 하루에 두 번 밖에 없었고 편성과에 보도계가 있기는 했지만 중앙방송국 취재 분을 TV체제에 적합 하도록 재편집 하는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뉴스 영상물은 사진이나, 슬라이드 등을 이용했고 동영상이 필요 할 때에는 영화계에 의뢰해서 하루에 3- 4건의 필름을 시용하기도 했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막이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지 자막만 사용하다가 뒷날 스크롤 자막을 사용했습니다.
뉴스가 적은 일요일 등에는 계절적인 스케치 등을 필름 영상에 담아서 방송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대한 뉴스, 리버티뉴스등도 편성 방송 되었습니다 해외 소식은 각국으로부터 받은 영상물을 편집해서 일요일에 방송 해 주기도 했습니다.
TV방송 초기에는 초창기의 TV는 하루에 4시간 반 정도의 방송을 했지만 뉴스는 10분짜리 2회 정도에 불과 했습니다. 연예 오락 방송에 국책방송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 손쉬운 외국 영화나 연예위주의 방송과 정책프로를 방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절에 뉴스는 라디오의 몫이었습니다. 기자들에게 무비카메라가 주어진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고 그것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지역에도 무미카메라를 한대씩 제공했는데 지방에서는 TV방송 기능이 없었기에 찍은 사진은 서울로 올려 보내야 했고 서울에 올려 보내려면 마이크로 웨브 등의 시설을 활용 할 수 없었던 시절에 버스나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편을 이용해서 보내곤 했습니다. 그때 외신은 주로 텔레타이프를 이용해서 통신사의 뉴스를 받아서 썼고 보도실외의 다른 부서에서필요한 통신은 별도 요금을 납부 하고 썼습니다.
1960년대에 일제 SONY, 영국제 EMI등, 아이스케이크 통이라고 불리던 휴대용 녹음기가 들어와 기자나, 프로듀서가 단독으로 현장 녹음취재를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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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방송 70년 방송기자 인맥과 인명록(KBS 기자 명단) http://blog.daum.net/jc21th/1778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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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초기 보도방송의 인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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