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천부적으로 타고난 방송국 아나운서 윤용로님

이장춘 2010. 2. 9. 23:50

 

 

 

천부적으로 타고난 방송국 아나운서 윤용로님  

 

 

땡’ 하고 도쿄에서 오는 오후 5시

시보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꺼버려!’하고

제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달려들어 스위치를

끊고, 윤용로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국말 방송은 이제부터 제1방송 50㎾로

방송 합니다’하고 마이크에 대고

알렸습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일본 총독으로부터
 항복 조인을 받던 그날 ! 오후 5시!  제2방송으로 하던
 우리말 방송을 제 1 방송으로 바꾸던 그 감격적인 순간을  
묘사 하신 문제안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들려 오는 목소리는 문제안 선생님 육성입니다.
 
 
 
 
 해방정국에서 방송기자 1호로
활동 하셨던 문제안 선생님이 윤용로
아나운서와 연계되어 일 하셨던 몇가지 예를
들어 말씀 하신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15일 아침 10시에 윤용노아나운서가
출근전에 동맹통신에 들려 새로 들어온 통신
다섯 벌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일본 천황이 낮 12시에
항복하는 이른바 “옥음방송” 의 원문이었다.
 
이 통신을 받아든 이혜구 과장님은
통신을 쥐고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있었는데
한국인 직원들은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12시가 되자
누군가가 “기립 ” 이라고 하여  모두 일어서서
천황의  방송을 들었다.
 
위의 내용은 문제안 기자가 그 전날 해방소식을
취재 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감금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 세벽에 잠시 집에 들렸다가 아침 10시쯤
출근하는길에 손에 항복내용이 담김 통신 내용을 들고
방송국에 들어오는 윤용로 아나운서를 만나 함께
 방숭국에 들어 오셨을때의 얘기입니다.
 
 
 
 
1945년 10월 17일 오전 11시 30분 !
서울중앙 방송국  제3스튜디오,    3평도  못되는 작은
방송실에서 윤용로 아나운서가  “본 방송국 문제안 기자가
 지금 방송실에 뛰어들어 와, 중대 기사를 쓰고 있으니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하면서 신나는 행진곡을 틀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서 나는 전날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4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환국한 후 당시의 주한
 유엔군 사령관 하지중장의 안내로 다음날인 10월 17일
토요일 10시에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내기자단과
첫 회견을 한 이승만 박사 환국 기자 회견
 기사를 쓰고 있었다.
 
첫 장을 다 쓰자 윤용로 아나운서는
더 참을 수 없어 첫 장을 낚아채다시피 해서 방송을
하고는 다음을 기다릴 수 없어서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한번
되풀이 읽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둘째 장을 쓰고
그러면 윤용노 아나운서는 다시 첫 장과 둘째 장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 하고 나는 계속해서 셋째 장을
 쓰는 그야말로 숨 가쁜 순간의 연속 이었다.
 
바로 내 옆에는 기사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검열하던 미군대위 검열관도 너무 흥분한 탓인지
검열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내 옆에 묵묵히 선채
기사 쓰는 내   바쁜   손끝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렇게
쓰여진 나의 기사는 써지는 대로 전파를 타고 전국방방
곡곡에 퍼져 나갔다.  이시간이야 말로 내 일생
최고의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해방정국에서 활동하던 아나운서가
몇분 안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윤용노 아나운서는 
 민재호, 윤길구, 전인국아나운서와 더불어
국민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윤용로 아나운서와 같이 근무 하셨던
노정팔 선생님의 자서전 방송과 50년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 하겠습니다.
 
 
 
 
윤용로씨는 성우출신이었으나 음성이 곱고
 발음이 정확하여 아나운서로 발탁되었다.  마이크를 통한
그의 음성은 더욱 또랑 또랑하여 아나운서로 타고난 인물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뉴스는 물론,
축구중계,   행사등도 일품이었으나   특히 무대
중계에서 솜시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당시는 극장에서 연극 상연이 많았고
이것을 실황중계하는것이 대단한 인기였다.
그런데 이것을 중계할 때 속삭이는 목소리로 배우들의
동작, 표정등을 소상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여 절찬을 받았다. 
극장에 가서 보는 것 보다도 윤용로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을 듣는것이
 더 재미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가히 짐작이 간다. 그는 매우 노력하는
아나운서였다. 무대중계나 스포츠 중계때는 며칠전부터 현장을
익히고 하나 하나 메모 해 두었다가 실감나게
방송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윤용로 아나운서는 1920년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나 인천 문학 보통학교와
서울 수송중학교를 거쳐 연희 전문을 나오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 윤규섭님이 공직생활로 한곳에 정착이 안되어
인천 구월에 사시는 큰 아버지 윤길섭님댁에서 지내며 보통학교까지를
그곳에서 다니셨습니다.  원래의 집이 효제동이어서 그 인근의
수송중학교를 다녔고 연희 전문학교를 다니셨습니다.
 
방송국 생활은 성우로 출발해서 해방을
맞을때는 아나운서가 되어 있었고 6.25가 일어나기까지
방송과 함께 젊음을 불태우셨지만 갑작 스러운 전쟁이 일어나고
그때 피난을 못한 윤용로 아나운서는 1950년 7월 7일 방송국에서
 전인국 아나운서와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당한 후 납북 되셨습니다.
 그때 사시던곳은 원남동 177번지 중앙방송국 사택이었고 
이 사택에서는 윤용로 아나운서 외에도 여러분의
 방송인들이 살고 계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모잘트의 리퀘엠  

 

문제안님 육성.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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