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일제 강점기 최후의 일본인 방송인들

이장춘 2009. 4. 21. 02:30

 

 

 

 일제 강점기 최후의 일본인 방송인들






  

 

해방 되던때 조선방송협회에 근무하던
직원은 모두 1,034명이었고 이 가운데 일본인은
281명이었다. 일본인이 숫자는 적었어도 보직이나
 주요 직책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보직을 갖은  우리방송인은
 
 이혜구 제2보도과장과 

 이정섭 기획과장,  권태웅 총무과장,

 한덕봉 기술과 부과장,  이리 업무과장

  신경석이  있었을뿐이다. 

 
일본 방송인 가운데 특징적인 인물을 살펴본다.

  

 

 

 

해방 될 때 방송의 최고 책임자였던
조선방송협회장은 간쇼 (甘蔗)였고,   상무는

야키였다. 방송의 핵심적인 책임자였던   경성방송국장은

 시노하라 쇼조 (篠原昌三)였다.

 

 

 

 

 

그는 경성방송국 창설 실무책임자였고 
개국으로부터 오랜세월 기술책임을 맡고 있다가
 1943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경성 방송국장이  물러

나면서 경성방송국장을 맡아서 해방  될때까지 계속되었다. 

시노하라는 1987년 첫 방송터 유허비 준공식전에 세상을 떠 그해

9월 3일에 있었던 첫 방송터 준공식에는시노하라 아들  요이지(陽一)

부부와 여자 아나운서 출신 고가가 참여 해 주셨다, 첫 방송터

 유허비에는 시노하라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래

사진은 방우회 문시형 회장과 시노하라 아들 부부,

이인관이 함께 한 사진이다,   

 

 

 

 

해방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향 후꾸오까에서
생활하던중 1971년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옛동지들을
만났고 1972년 일본에 있던 조선방송협회 출신들을 모아 조방회를
구성했다.   조방회는 2007년 4월 해체 될 때까지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만났고  1977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방문을 가졌다.  시노하라는

1987년 세상을 떴다. 조방회에서 발행한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나  

시노하라 회고록은 그 때를 이해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경성 방송국 설립시부터 해방될때까지 있었던
또 한사람은 뱃쇼 요시히로  (別所義博)다.  뱃쇼 요시히로는
서무과장, 이리방송국장, 함흥방송국장을 거쳐 오랜기간 서무과장을
하다가 해방되기 직전 협회의 업무부가 발족되면서 업무부장으로
해방을 맞았다.  조선방송 협회에서 18년 여에 걸친  얘기들을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 기록 해 놓았다.

  

 

방송부장은 무타였고 편성과장은

야마자키 긴 사브로 (山崎金三郞)였다. 

 

  

  편성과에는 김진섭, 송영호, 남정준, 모윤숙등

우리 방송인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 방송인과 접촉이

많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조선방송 협회 회상기에서

 

 해방을 맞을 때의 얘기와 모윤숙등에 관한

얘기를 기록 해 놓았다. 

 

 

 

 

 

기술과장은 와가미아 요지마 (若宮義磨)다.
기술과에는 우리 기술인들이 많아서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1943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일어났을때  많은 우리 기술자들이 끌려가 방송수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회상기에 그런 얘기들이 있다.  

 

 

 

 

최후까지 남아서 일본어 방송을 한 사람은
나까무라 쇼시치(中村 正七)다.  일본어 방송을 하던
제1방송은 미군이 총독부에서 항복조인을 받던 날  9월 9일
오후 5시부터 우리말 방송 채널이 되었다. 1945년 10월 2일을 기해서
 일본인은 모두 해직 되었지만 쇼시치는미군정의 요청으로 12월
초순까지 약 15분간의  뉴스방송을  이어갔다.   
 
윤길구  아나운서의 그때 얘기를 옮긴다.
 
  그가 하는 일본어 방송은 뉴스에 한했는데
나는 그 번역을 구술로 해 주곤 했다. 내가 일본 천황
히로히또는 ........하면 그는 하이하고 원고에 적고는
방송을 할때는“ 천황폐하께 옵서는 .....”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마지막 연희 방송소 소장은
조유 쇼이지(長友正一)다.  1931년 경성방송국
기술부에 들어와  1945년  9월  종전처리가  끝날 때까지
우리나라에 있었다. 해방을 맞을때 연희 송신소에서 있었던
 일을 비롯해서 그가 조선 방송협회에서 근무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좋은 자료가 된다.  
 

 

 

 

 

1929년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와

해방될때는 신의주 방송국장을 한 오노다 다까유끼

(小野田  0 之 ) 라는 사람이 있다.  남한에 있던 일본인들은

10월 2일까지 해직되고 11월 중순까지 때부분 일본으로

건너 갔지만  다까유끼는 북한에서 소련군에 억류

되었다가 1946년에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해방될 때까지 방송을 한 고가 도기애

(古賀登惠) 여자 아나운서 다.  혼인을 약속했던

일본군 중위가 전사하면서 일생을

홀로 산 사람이다.   

 

 

 

올해 93살로 1977년 조방회  한국 방문때 

우리나라에 온적이 있고  1987년첫 방송터 유허비  

준공식에도 시노하라 아들 부부와 함께 참여했다. 사진은

경성방송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송영호,

이덕근과 함께한 장면이다.   

 

 

 

시노하라가 1989년 세상을 뜨면서 뒤를 이어

조방회를 이끌어 온 사람은  오까다 가즈오 (岡田 一男)다.

1941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방송기술 일을  하다가 1944년

전장으로 간 사람이다. 1943년 항일단파 방송 연락운동 때

단파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잡혀 가기도 했지만

3일만에 풀려난 사람이다.  

 

 

1995년 8월 해방 50년을 맞아 조방회원들과 함께

한국에 와서 항일 단파 방송 연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물망비를 참배하고 홍두표 KBS사장을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누는등

여러날을 우리 나라에서 보냈다. 오까다는 방우회와

종종 만남이 있었고 인연이 깊었다.  

 

 

조선 방송협회에 재직하던 일본인 방송인들의 모임

 

 

 조방회가 1972년 구성되어 2007년 4월

막을 내리기 까지 35년간  만남을 같이 하면서 여러

활동을 했다.   다음은 1993년에 오오사카에서 있었던 21번째

모임의 기념 사진이다.  단파사건으로 곤욕을 겪으셨던 성기석이

1990년 세상을 뜨게 되어  성기석과 함께  해방전일폭파된 청진방송국

사망자 분들과 함께 영혼의 명복을 비는 천도제를 올리기도 했다.  이 때

오오사카 고야산 ( 高野山 ) 에 있는 大圓院 이라는 절에서 올린 
천도제에는 한국 방송인 동우회 문시형 회장을 비롯해서
이인관, 왕종현, 정항구회원도 함께  참여했다. 

 

 

 

한국방송 동우회와 조방회 구성원은
민족적 의식이나 생각은 서로 달랐지만 인간적인
 정감은 있어서 그 동안 서로 오 가면서 만나고
도울일이 있으면 돕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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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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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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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기술간부가 쓴 항일 단파방송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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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일제강점기 한국에 있던 일본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