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1)

이장춘 2011. 7. 17. 11:14


 

위의 사진은 대전 방송국이 처음
개국할 때부터 있던 목조 건물에 나무로 된
안테나가 있었습니다.그 시절 지역방송국은 대부분
방송국안에 나무 안테나를 세우고 방송 했습니다.
 
대전 방송국은 1961년 말까지
여기에 있었고 1962년방송국이 대흥동으로
옮기면서 대전 방송국 목동 송신소로 되었다가 
송신소를 회덕으로 옮긴후 TV방송 자체방송을
실시할 무렵1978년 대전방송국을 지어서 
현재의 청사로 옮기기까지
여기에 있었습니다.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1) 

 
 


대전방송국이 대전시 목동
( 당시에는 大田府 北町 15번지)
대지 6,600평에 기와를 올린 단층건물
130평의 건물을 지어  출력  50W, 주파수
880Khz로  방송을 실시한 것은 1943년
7월 15일의 일 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어서
방송국을 세우는데도 어려움을 겪었고 또 방송국을
 세운 후에도 오직 전쟁 일변도로 또 방송마저 전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 하려던 때였습니다. 단파수신 독립운동으로
 방송계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대전방송국이 전파를 실제로 발사한 것은

 

1943년 7월 15일이지만  이곳에 출장소를 열고
일을 시작 한 것은 1940년 8월 5일의 일 이었습니다.
방송실시를  위한  준비도  필요 했지만   이곳에 설치된
청취료도  받아야 되고 또 라디오 보급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했으므로   방송국을 세우기 전에   출장소가
먼저 세워졌습니다. 출장소 직원이 14명이었고 소장에는
일본인 一丸尙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출장소 시절에 찍은 직원들의 모습입니다.

 

 
지역국의 경우 개국일자에 혼선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개국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짐작합니다. 대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첫 방송실시 일자를 1943년
 7월 15일이라고 했지만 같은 자료에서도 각각 다른 날자가 있음을 봅니다.
 출장소에서 방송국으로 승격한 날은 1942년이지만 방송실시일은 그 1년 후인
1943년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문입니다.
 

 

 

 

 
 
처음 방송을 내 보낸 목동은 언덕바지 야산으로
 대전시내를 한눈으로 내려 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전파발사의 적지로 지목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출력도 낮고
송,수신 시설도 같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방송청취권역이
좁아서 방송국 터를 잡을 때 시가지에서 좀 떨어져도
언덕에 자리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목동이 지금은 시가지 중심권에 들어 왔지만
그 때만 해도 시가지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야산 언덕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6,600평이라는 비교적 넓은 부지를 이곳에 확보 했습니다.
여기에 기와를 올린 벽돌조 단층 130평의 건물을 지어 연주실,
송신기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고 방송을 했습니다.
 따로 면련 된 송신소는 없었습니다.
 
대전 호출부호는 JBIK였습니다. 경성중앙 방송국의
 호칭이 JODK인 것은 일본의 방송국으로 도꾜, 오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 설치된 방송국이었다는 의미 입니다.
대전방송국의 호출부호가 JBIK인 것은 조선 방송협회에 속한
알파벳 I 번째 설치된 방송국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B,C....순으로 나가다가 중간에 E가 없어서
 I가 아홉 번째 글자지만 실재로는 지역국 중 여덟 번째 설치된
 방송국입니다. 북한에 설치된 방송국 까지 포함해서 입니다.
지역국 호출부호 E가 왜 없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임께서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대전방송국을 설치할 무렵 여건이 어려웠습니다.
 방송망 확장 구상 1차 때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것이
 2차 구상이 시행 되면서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만 폭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자재의 구입이나 인력이 여의치 않고
 방송 청취에도 통제가 강화 되는가 하면 방송이 전쟁 도구로
 이용 되는 등 여건이 아주 불리 해 졌습니다.
  
처음 구상은 우리말을 방송하는 제2방송과 함께
세울 계획이었지만 1942년 4월 27일 전파관제가 이루어지면서
 제2방송 전파발사가 일단 중지 되었기에 제1방송만 공사가
진행되어 다음해 7월 15일에 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우리말방송은 4개월 후인 11월 10일부터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문을 열때 그 기념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처음 방송국장은 一丸尙이 그대로 임명되었고

 

가술과장, 업무과장 모두 일본인 이었습니다. 우리 방송인으로는
 민병설, 조철영 님등이 계셨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날
국장님은 한국인으로 바뀌어 김봉열님이었고 1948년 9월 20일
 진말봉님이 오셨습니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분) 
 


 
진말봉님이 방송국장으로 취임하면서
500W출력증강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1949년 7월 26일 그 실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6.25비극을 맞이하면서 대전방송국은
임시 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됩니다.
 

 

500W출력증강 준공식 모습입니다.
 
 
대전 방송국 편은 대전방송국과
 총국시절을 거치면서 오레 근무 하셨던
정석균님이 보내 주신 자료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