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이장춘 2011. 7. 17. 11:13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대전 임수수도시절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긴박한 순간 이었습니다. 통신과 교통이
두절되고 사람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때 대전방송국은6월 28일부터 임시중앙
방송국 역할을 했습니다.
 
방송도 중요했지만 방송을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국무회의에 보고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대전방송국에 비밀 방송 수신실을 마련하고 VOA를
비롯해서 북한측이 방송하는 서울방송, 일본, 중국, 소련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모니터해서 분석보고서를 작성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 나가는 것이어서 
이 보고서가 들어가지 않으면 국무회의가 제대로
 진행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전 임시 중앙 방송국시절  이승만 대통령
특별담화 방송 등 여러가지 얽힌 사연이 있지만
그 얘기는 6.25와 방송편에 있으므로 
생략 하겠습니다.
 
임시중앙 방송국 역할을 하던 
대전 방송국도 1950년 7월 15일을 기해서
 대구를 향해 피난을 떠나야했고 6.25전란을 지나면서
방송국은 파괴 되었습니다.12월에 잠시 복구 되었지만
 1.4후퇴로 또다시 피난길에올랐습니다. 이때는
잠시 후에 돌아와서 정규방송을
다시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중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대전방송국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전시중에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10Kw 송신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정부와 방송국이 부산에 있었고 서울의
송신소가 가동이 되고 있어도 불시에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오면 어느때던지 키 스케이션이 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기 위해 1951년 11월 8일 전시중에  10KW
출력 증강 공사 착공을 보았습니다. 
  

 

  안테나기초공사 현장을 돌아 보는 노창성중앙방송국장

 

 
 
전시중이었던 1951년 착공한지 1년만에
1952년 11월 5일 공사를 마치고 충청남도 의사당에서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대전이 남한의 중심에 있어서 지역국 중에서는
 제일 먼저 10Kw출력의 송신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전쟁중이던
그때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대구의 10KW건설도
그 뒤에 추진 된 일입니다.
 
이때 10Kw송신 시설을 설치한 목동은 원래
방송국을 새웠던 자리로 송신시설을 한 되에도 방송국이
이곳에 있었지만 시국이 안정 되면서 대흥동으로 옮겼다가
이곳의 송신설비가 회덕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에
새로운 방송국을 지어 지금의 방송국으로
 옮길 때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방송국에 큰 방이 없던 시절 10KW준공식은
충청남도 의회 의사당에서 갖었습니다.
 

 
이때 대전 방송국장이셨던 진말봉님은 원래
목포에 계시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될 무렵 이곳에 오셔서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500W출력 증강의 결실을
 보았고 6.25 이틀 전 청주 방송국장으로 가셔서  미쳐 자리도 잡지 못한채 
 6.25전란이 일어났습니다.     부산으로 피난 떠나자는 권유를 뒤로 하고
대전 인근에서 피신하다가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대전방송국이 적치하에서
벗어나면서  다시 대전 방송국장으로 오셔서 1953년 5월까지 대전방송국의
 발전에 기여 하신 분입니다.대전 방송국의 어려움을 몸소 채험 하신
분이고  방송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진말봉님 ( 3대, 5대 대전방송국장 )
 
 

 
 
대전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 할 수 있게 된 것은
1966년 5월 16일 식장산 중계소가 준공되면서 부터입니다.
1978년 자체 방송을 실시 하기 전 까지는 지역에 설치된  TV시설은
서울 TV방송을 중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이 때는 서울 말고는
모두 중계소라고 불렀고 송신소라는 이름은 1977년
자체방송을 하면서 부터 불려진 이름입니다.
 
대전은 서울에서 가가운 지역이어서 이곳에 중계소가
세워지기 전에도 부분적으로 서울서 오는 TV방송을 시청 할 수는 
있었지만 높은 안테나를 세우고도 상태가 좋질 않아서 실제로
시청한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역 TV가 확장될 때 식장산 중계소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이곳 식장산은 이곳을
통해서 전국 TV방송 링크가 구성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설치된 다른 곳의 출력이 500W미만이었던것 과는
달리 이곳은 1KW로 설치되었습니다.
 
 마이크로웨이브 등 적절한 중계수단을
활용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고지와 고지를 연결하는
링크를 활용 할 수밖에 없었기때문에 식장산은 그만큼
중요시 되던 중계소였습니다.  남한의 중심에 있었던
대전은 방송적 측면에서도 항상 중요시되던 지역이어서
1980년대에 대전 신도시를 조성 할때는 이곳에
1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계룡산에 중계소가 선 것은 대전이 자체방송을
하면서 충청남도 전역을 대전방송국 가 시청권으로
해야 된다는 계획을 추진 하면서 10Kw로 계획되어 
1978년부터 전파를 발사했습니다. 자동차 출입이
불가능 했던 지역이라 자재 운반용 삭도까지
건설하면서 공사를 추진 하느라 많은  힘이
들었습니다.그 삭도는 지금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대전 방송국의 라디오 자체 방송 
 
1973년 KBS가 공사로 전환 될 무렵
하루에 4시간 정도 자체방송을 했습니다.
 KI노래자랑등  공개 방송 프로는 계속  되었고 
이런 프로들이 있어야 지역방송의 역할을 제대로
하던때였습니다.     60년대에는   KI극장 등의 
지역 자체에서 드라마를 제작 방송 했지만
 70년대에는 어려워 졌습니다.
 
 70년대에 군민위안 노래자랑이나
 인근 군부대를 찾아 공개 방송을 했습니다. 
공개 방송 장면들을 보시겠습니다.

개국 31주년을 맞아 실시한 공개방송 장면입니다.

 
 
위, 아래 사진은 인근에 있는 공군부대를 찾아 위문 공연하는 모습입니다.
여기 나오는 고 조창동님은 1950년대 중반부터 청주, 대전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아나운서로 공사 발족뒤에는 대전방송국의 간부를 지내셨습니다. 아래 사진은 
위 공개 방송을 방청하는 방송국 간부들을 포함한 방청인들입니다.
정석균님을 비롯해서 방송국 간부님들이 보입니다.
 



 
인근에 있는 육군 통신학교를 찾아 노래자랑을 끝내고 찍은 기념 사진입니다.


농촌 위안 공개 방송을 위해 찾아온 방송차에
주민들이 나와 구경하고 있습니다. 차 곁에 까만띠 중절모를
쓰신분은 대전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조창동님입니다.

매주 나가는 어린이 공개 방송도 있었고 새로운 충남,
 메아리 880, 명소를 찾아서 등  지역 특성에  맞는 프로들이  
 있었습니다.   대전방송  경음악단과  전속 가수회도 있었고
 소녀 합창단, 성인합창단, 어린이 노래회도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할 때는 대전방송 극회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대전 방송국 성인 합창단

 

 

 1963년의 대흥동 대전방송국

 

대흥동 청사에서 공사 창립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1962년 1월부터 78년 9월 9일 까지 있었습니다.
 

TV 자체방송을 위해서 목동 청사를 새로 지었고  1978년 11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있었습니다.
 

1978년 7월 1일부터 TV자체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아직 목동 청사가 완공이
 
안 되었을 때라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사 발족 직전 대전 방송국에 근무 하시던 분들
 
 
국  장     엄 정 흠님

방송과장 유 우 열님,

전응우, 정종헌, 민석동, 오철환,
심혁재,박종권, 강호경, 박종명, 강천섭,
길쌍석, 이정복, 오광진,이영화,
박용필, 한석훈, 유동은님,
 
기술과장 엄 동 훈님

윤창신, 김경철, 안준상, 정일화, 강홍규 님
 
 
목동 송신 소장 김영선님

지희하, 지정웅, 안양근, 연준환, 이범태,
신춘길, 박건수, 최승룡님
 
 
부여중계소장 홍성환님

이광태. 송동호, 이현철, 박천산, 전한증님
 
 
홍성중계소장 강영순님

이민복, 송동웅, 임종만, 정덕해, 장광훈 님
 
 
식장산 중계소장 서정원님

진영수, 길호갑, 송태선님
 
 
대전방송국 연혁
 

 

 

 

2010년 대전방송총국 재직사원

 

총국장 : 이세강

 

위원 : 정기웅

 

 편성제작국

 

국장 : 신경섭

선임 : 이기홍, 김영교, 배명자

직원 : 손지화, 전유미, 함혜영, 김웅식, 김문식, 황혜지, 최연수, 윤진영,

강남경, 정경아, 김한솔, 신병호, 이종인, 유병택, 조순미, 김은옥,

이순희, 한기홍, 황인례, 이창식, 박성준, 곽철웅, 임 정, 김연선,

박지호, 문봉서, 조신호, 박형노, 곽한범, 김애란, 김병조, 최학석,

이명용, 김선필, 이해경, 최연철, 왕종원, 박윤도, 김현식, 노영호

 

 보도국

 

국장 : 방석준

 

선임 : 김용만, 이종국

직원 : 박지은, 심각현, 김태석, 송민석, 홍정표, 최선중, 박장훈, 김삼희,

구본철, 홍순용, 김훈식, 이동훈, 김동진, 조영호, 이용순, 오종훈,

박해평, 임홍렬, 유진환, 양민오, 서창석, 서영준, 박종오, 곽영지,

김점석, 윤정, 황정환, 이정은, 임태호

 

 기술국

 

국장 : 김영찬

 

선임 : 최정규, 배석준, 정호영, 안상복

직원 : 이상훈, 신수진, 이형준, 김형진, 이대로, 송 환, 민경수, 박상규,

이경희, 유창완, 유기용, 나영석, 김상우, 손석환, 손승구, 김동주,

 

강우식, 이원재, 정하웅, 구형모, 장시봉, 강석원, 신광희, 김석경,

 

정종문, 임재곤, 배두호, 홍성근, 전우영, 김오현, 이근원, 최관영,

신봉현, 신택진, 강동원, 장성준, 강구철, 신태섭, 오진석, 윤용택,

이승면, 이웅재, 전영일, 김문섭, 강홍규, 정진엽

 

 총무국

 

국장 : 강광석

선임 : 김진규, 신재현, 신영식, 엄태규

직원 : 김주현, 정병문, 송광석, 강혜숙, 이성우, 전은미, 최금예, 최경숙,

김시회, 오민원, 김기찬, 지규섭, 박준의, 신찬수, 나팽열, 변재흥,

신치식, 이범장, 류춘옥, 안상철, 백옥현, 김종순, 조능호, 방주식,

강성호, 김규환, 범영철, 최임식, 노준현, 김형배, 박만식, 김운태,

최연수, 이창호, 김용달

 

 

 
1979년의 대전방송국 간부들의 모습입니다.

 



  

 

 


대흥동 대전방송국 사옥에 관해서


옮겨온곳

http://blog.naver.com/shin2340/80028152049





설 계 감 리 ; 미상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214
지 역 지 구 ; 일반상업지역 방화고도, 주차장 정비지구
대 지 면 적 ; 2,579㎡
건 축 면 적 ; 967㎡ 건 폐 율 ; 37 %
연 면 적 ; 2,329㎡ 용 적 율 ; 90 %
규 모; 지하 1층 지상 3층
구 조 ; 철근콘크리트 라멘조 + 조적조
주 요 외 장 ; 자기질타일 붙임
용 도 ; 도서관, 공공업무시설
준 공 년 도 ; 1958년, 1967년도 일부 증축

건축물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면서 많은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도항상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다. 현재 중구청의 뒷켠에서 주차장으로 복잡하게 쓰여지는 공지 한쪽에 덩그러이 서 있는 연정국악원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우남(雩南) 리승만(李承晩/1875~1965)대통령의 탄신 8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도서관으로 화려한 출발을 하여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아주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준공 시에는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살폈으며, 그 당시에 도립이던 충남대학교의 국립대학 승격을 위하여 부속 도서관으로 공공 기능을 마친 후, 60년대 초반에 4.19의거 때에 규탄의 대상 건물이 되어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버림을 받다가 61년 1월 20일부터 78년 11월 17일까지 17년 동안 KBS 대전방송국이 목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대전방송국의 연주소외에 홍보부 충남홍보관으로도 함께 사용된 바 있다.
1965년 12월 22일에 앞 대지인 어린이 놀이터(한국동란시에는 국군 주둔지이었음)에 3층의 베이지 색조를 한 시립도서관(현 중구청사)이 세워 지었다. 그 건물이 다시 옆에 있던 우유처리장과 함께 중부출장소로 사용되다가 중구청으로 바뀌고 대전방송국이 있던 자리의 일부만을 중구청에서 별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시립 연정국악원에서 1982년 2월 1일부터 이전하여 와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국악원은 임윤수(호;燕亭)씨가 80평생 모은 국악에 관한 자료를 시에 기증하여 구 시립전당포(대흥동 209)자리에서81년 7월 14일 설립된 시립 국악연구원이다. 추후 대전 종합예술의 전당으로 이전할 계획이 있고, 중구청사의 건립이라는 명제로 구도심 개발 계획에 밀리어 철거하자는 자치단체의 일부 주장이 대두되어 이를 아끼는 많은 시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전이 1920년 초에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으로 발달을 시작한 근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시내에 반듯한 근대 건축물이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이유는 일제의 잔재라는 불명예와 사용이 불편하고, 보수 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등의 보존하려는 자체 의식의 결여가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개인주의의 발달로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세에 이 경우는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자라는 반목으로 인하여 기록조차 사라져 버리고 있다. 우남도서관의 입면은 밝은 갈색의 자기질타일을 정성껏 붙인 우아한 형태로부러움을 산 당시 최고의 기술을 총동원한 신식건물이었다.
평면상으로는 서측부분의 선큰가든, 몰탈의 거친 뿜칠 마감에 덥게문을 단 북측의 서고동과 연결복도를 이용한 연계성, 내부 출입구의 중간인방에 까지 세겨 넣은 처마와 같은 문양과 세밀한 거멀접지로마감한 양철 모임지붕의 수려한 모습 등은 이용자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한 외양이 빼어난 건물이었다. 그러나 전면의 넓은 어린이놀이터에 중구청 본관이 들어서서 남쪽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인하여 지금은 답답한 건물의 배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심의 화려한고층건물과 공해에 찌들은 소시민의 가슴을 열어 주는 휴식 공간을 갈구하는 시민의 소리는 흩어지고, 무심히 지켜보는 우리의 발자취는 서서히 사라지려 한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 무관심으로 우리의 근대사는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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