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방송인 장기범 ( 1 )
장기범님은 우리 나라에서 방송이 처음 시작되던 1927년 5월 5일 테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 들어서던 1948년 10월에
방송에 입문 하셔서 1982년 6월 정년퇴임 하실 때까지
34년간 KBS에서 방송 한길만 걸어 오신 분이고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하던 1988년 3월 18일! 아직 젊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신영원한 방송인입니다.
1950년대 부터 7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방송인 이라면 장기범님, 임택근님, 강영숙, 이광재님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뒤에 들어온 아나운서들은 중간에 다른 길을
택해서 방송과는 다소 멸어 졌지만 장기범님은 1948년 아나운서로
들어와 1982년 정년퇴임 하실 때 까지 34년간 라디오. TV제작,
보도, 지역방송국장 등 방송인으로 할 수 있는 제반 업무를
두루 섭렵 하신 전천후 방송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력
노정팔님 본 장기범
스무고개나 재치문담의 사회를 맡아서는
능란한 말솜씨와 재치 있는 유머로 장내를 휘어잡아
방송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진행했다.
특히 “에치켙 선생” 프로그램 진행에서는 부드러운 말솜씨와 담담한 어조로 너무나 의젓하게 방송하여 예의바르고
덕성과 수행이 높은 인물로 화재에 올랐다.
언잰가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다동 음식점을 갔더니 거기서 장기범씨 얘기가 나왔다.
그 집 여주인은 부드럽고도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음성에 매료 되었다면서 그를 모시고 오면 언제나 성찬을 배풀겠다고 제의 할 정도 였다“
스무고개 사회는 오래도록 장기범 아나운서가
담당했다 점잖은 음성,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높지도 낮지도 않은목소리의 고저를 잘 조절해 가면서
때로는 박사들을 미궁에몰아넣기도 하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주기도 하면서 능수 능란하게 이끌어 가는
모습은 가히 일품이었다."
노정팔님의 글이 었습니다.
60년대 아침시간 5분간의 에치켙선생은
안 듣는 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2년간의 미국 VOA방송에서 돌아와 방송과장 보직을 맡으면서 현업에서는 물러 났지만 30분간의 공개방송 재치문답과 아침에 5분간 방송되는 에치켙선생은 계속 방송을 했다. 1966년 춘천방송국장 시절에도 재치문답은 출연할 수가 없었지만 에치켙선생은 계속 방송을 했습니다.
에치켙선생이라면 의례히 장기범 아나운서가 떠 올라 다름사람이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춘천방송국에 익살 좋은 한 기자가 있었는데 장기범님의 흉내를 내면서 좌중을 자주 웃기기도 했습니다. 휘어잡는 것입니다. 아나운서가 절대로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스포츠 중계 등에서 아나운서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흥분하는 경향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중계방송 방식에 대해서못 마땅해 하시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장기범 아나운서와 필자와의 인연
아랫 부문은 참고사항으로 올렸습니다.
제가 장기범님을 처음 접한 것은 1963년 첫 부임해서 방송과장실에 인사를 갔을 때입니다. 모르면서 선배님께서 인사를 시켜주신다고 해서 각 방을 돌아 다녔지만 중앙방송국과, 국제 방송국, TV방송국이 각각 다른 기관이면서 같이 근무할때라 어느 분이 어느분인줄도 모르고 몇개월이 지냈습니다. 1년 후 제가 춘천방송국으로 갔는데 그로부터 1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 장기범님이 춘천방송국장으로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게 되어 친숙 해 졌습니다. 기술과 포함 전직원이 20명도 안되고 제 위에 방송과장 한분 걸러 바로 국장님이 계셔서 아주 가까이 모실 수있었습니다.
장기범님이 춘천에 근무하실 때 닭갈비를 구워서 파는 집이 한집 있었습니다. 지금의 춘천방송총국 부근 허름한 작은집에서 부부가 하는 음식점 이었는데 그 집에서 막국수도 팔았습니다. 그 막국수와 닭갈비 참 좋아 하셨습니다. 근무시간이 끝나시면그 집엘 가시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그때 사택이라는 것도 없고 하숙 생활에 불편하심도 컸지만 남는 시간 보내시는 것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 닭갈비에 막걸리가 위로 해 드렸지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 때 춘천에 한 집밖에 없던 막국수 집이전국 어딜 가나 수 없이 많더군요. 얼마 전 춘천에 바람 쐬러 간 일이 있어서 그 집을 찾아보려니그 집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승진 하실 줄 알고 “축하 합니다.” 라고 인사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장기범님의 아니운서 후배이기도 한 공보부 해외과장으로 계시던 분이 오셨습니다. 장기범님은 서울TV방송국의 제작과장으로 떠나셨습니다.
세상을 뜨셨습니다. 장기범님은 이날 대전에서 후배와 해어지면서 벚꽃이 필 때 다시 대전에 오시겠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떠나셨으나 바로 몇 시간 후 저녁 9시 뉴스에서 장기범 님의 사망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몇일후 벚꽃이 필대 다시 대전에 오신다던 장기범님은 저 새상으로 가셨습니다. 저와 친분이 깊은 정석균님이 제 불로그에 이사진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어떨까. 해서 다른 자료와 함께 정성들여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 오셨습니다.
장기범 선생님 관련 글 더 보기
영원한 방송인 2 http://blog.daum.net/jc21th/17780157
영원한 방송인 3 http://blog.daum.net/jc21th/17780158
장기범 아나운서를 아십니까? / 그때의 국회의원 이계진님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3
한시대를 풍미한 장기범 / 당시 방우회장, 문시형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0
장기범 선생님 VOA생활 / 이세진 아나운서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2
장기범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재치문답 http://blog.daum.net/jc21th/17780187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18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159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22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452
장기범 아나운서 가신지 24주년의 날에 http://blog.daum.net/jc21th/17781238
장기범선생님 삶과 가신지 25주년 추모모임 http://blog.daum.net/jc21th/17781725
영원한 방송인 1 http://blog.daum.net/jc21th/17780156
방우회의 지도를 받아 이장춘이 글을 써서 춘하추동 불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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