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승만 박사 성대모사 대명사 성우 구민

이장춘 2009. 5. 19. 04:29

 

 

이승만 박사 성대모사 대명사 성우 구민

 
구민님은 1948년, KBS성우가 된 이래
천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할만큼  그 목소리는 다향 했습니다.
특히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실제로 어느 분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구민의 목소리가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고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구민의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 역에는 의례히 구민이 등장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든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는 구민님의 목소리로 꾸며졌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1980년대 초에 길주님이 월간 방송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구민(具珉)이라는 예명은
 대구, 대구극장에서 송범(宋笵)씨가
구교문(具敎汶) 문하생에게 붙여준 예명이었다.
구교문은 당시 서울중학교 5학년생으로 6.25사변을 만나
대구로 내려갔는데 그는 이미 현대 무용연구소에서 본과 2년
연구과 1년 등 모두 3년 동안 송범(宋笵)씨에게 현대무용을 사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송범(宋笵)씨는 구교문(具敎汶)이라는
이름이  간판에  올리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해는지 자 신의
무용발표에 앞서 그의 이름을 구민(具珉)이라고 지어 버렸다.
 
구민은 송범씨가 옥돌민(珉)자 이름을
 왜 붙였는지 아직도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 이세상에서
옥구슬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에서 붙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그 후부터
구민(具珉)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예도 한길을 살아 왔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무상의 행복이라면
누군가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고 구민은
 정말 옥돌처럼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는 스스로도
행복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민은 서울중학교 2학년 때 합창단원으로
과외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 그의 특유의 기질이
 발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서석준 선생님의 지도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 중앙방송국 어린이
극회에  입회한 것은 구민의 인생을 크게
가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 중학교 2학년이던 구민은
덕수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서울 중앙방송국을
처음 갔을 때 호기수 아나운서(미국거주)를 보고 방송에 관한
꿈을 처음으로 부풀렸을 때 삼단 같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멘트를 넣는 호기수씨를 보는 순간 그녀가 마치
하늘나라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로 보일
정도로 매혹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가 방송에 뜻을 가지게 된 것은
 김래성 원작 진주탑의 낭독자 목소리에 매료당했기
때문이었다. 구민의 성우 데뷔는 48년 초 연속 시리즈 랜돌프,
브라운, 유호, 김래성, 김영수 등이 연작 집필한 똘똘이 모험 중에서
 김영수씨가 쓴 박쥐와 쌀 편에 출연하고 부터였다.
 
그때는 성우라는 직업 명칭이 뚜렷하지 않는 가운데
통틀어서 성우도 방송인이라고 불려 졌으며 서울 중앙방송국의
 똘똘이 모험은 유일한 연속극이자 어린이 드라마였다. 구민이 성우로
갓 데뷔했을 때 서울 중앙방송국은 서월영, 복혜숙, 이혜경, 이상만, 장민호,
유계선, 남해연, 정애란 등이 성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부산에 내려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구민은
 단 한차례의 무용공연 후 오패라단 꽃초롱에 학생신분으로 입단했다.
 
 “부산에 내려가야만 방송국에 들어 갈 수 있는데.......”
구민은 성우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오패라단 일원으로
김효봉작, 김백봉 안무의 을지문덕 공연차 남한 일대를 순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얼마 후 구민은 노역이라는 명성을
잉태시킨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마침 이향 씨가 아파 대역을
하면서부터 특유의 그의 목소리는 잠재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구민이 직업성우로 성우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 한 것은 6.25가 지난 1954년
여름 중앙방송국 방송극회 특기회원으로 입회하면서부터
그해 12월에는 제 1회 성우모집이 실시돼 (현재까지) 고은정,
신원균, 김소원, 김수일, 오승룡, 박용기, 윤미림 등 22명이
선발되어 가히 라디오 연속극의 전성기를
 이끌어온 주역이 되었다.
 
구민이라는 이름을 떠 올리면 우선 노인과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연상 되지만 정작 노역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56년 조남사씨가 쓴 청실홍실에서
김 사장 역을 맡은 것과 역사물 세종대왕에서 황희 정승을
 하면서 부터였다. 그중 청실홍실은 성인 드라마로는
그의 첫 작품, 그러나 그에게는 1인 7, 8역을 해냈던
 이인직의 치악산을 입체낭독 했을 때가
가장 추억에 남는다고 한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에 출연한 구민
 
 
 모든 역할을 다양하고 특색 있게
구연해야만 되는 입체낭독을 50 여 편이나 소화 해 냈다.
그래서 구민에게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팬을
확보(?) 하기에 이르렀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구민에게는 60대 이상의 노인,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셀 수 없는 격려 편지을 받는 성우가 되었다. 구민이 노역과
함께 이승만 박사 생시의 목소리로 세인을 놀라게 한 한 작품은 17년 전에
방송된바 있는 DBS의 “잘 돼 갑니다. 다.
 
 한운사 작 안평선 연출의 잘 돼 갑니다는
이발사가 본 이박사의 얘기로 당시 안평선 씨는 노역을
 워낙 잘한 그 이유로 구민을 선택했던 것이다.  노역만 했으니까
 한번 해 보라는 안평선 씨의 한마디와 함께 그에게 전해진 것은
 공식 석상에서 행한 이박사의 연설 녹음 테이프뿐, 구민은
 없는 녹음기를 빌려다가 밤마다 이 박사의 목소리를
익혔는데 그의 목소리는 방송회수가 거듭
되면서 예상외의 반응을 일으켰다.
 
어느 때는 20분짜리 드라마를
이박사의 연설로 채울 때가 있어 이럴 때는 아무래도
 변성이기 때문에 식은땀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즈음 각직장의
회사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천연덕스런 구민의 이 박사 목소리에
관한 논란을 벌리며 내기를 걸곤 하는 진풍경이 속출했다.
 

 

 

 
구민의 이 박사 목소리는 15년 전
TBC의 광복 20년과 함께 구민은 곧 이박사라는
함수관계를 구체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때는 이박사의
측근인 고 임병직 대사로부터 “어쩌면 이 박사님과 목소리가
같으냐.”는 칭찬과 함께 저녁대접을 받은 일도 있었다.
 
봄가을이면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방송국에 찾아와 막무가내 구민을 만나보곤 실망하고
돌아 갔던 일이 비일 비재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
예의 노인들은 구민을 동년배로 알고 찾아 왔으나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우 구민―
 
그러나 그는 성우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배우로 사회자, 무용인으로, TV탤런트로
 드라마 주제가을 부른 가수로 그야 말로 각 분야에서 다양한
재능을 굵게 발휘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수복 후 주동운, 김범석등
 몇 사람과 동인제로 예술 소극장을 만들어 동양극장에서 “성자의 샘”을
 공연했을 때 그는 서울 고등학교 3학년의 신분이었다. 지금부터 8년 전
대표 차범석 씨와 임희재, 이기하, 남성우, 이순재, 김성옥, 남일우, 전운,
강부자, 천선녀, 남오희 등과 극단 산하를 조직한 후 잉여인간,
강무재의 밀사 등 33편의 연극에 출연 한 것은 다만
연극을 동경하고 좋아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극단 산하의 한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1년에 한 번씩은 무대에 서야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구민은 81년도 6.25특집극에서 얼굴을 안 내 보낸다는
 조건으로 이승만 박사 역할을 해 냈는데, 그가 내세운 조건은 자칫

 

 이박사의 목소리의 이미지에 손상을 줄까봐 염려한 탓이다.

 

 

 

 

 
 
구민은 지금까지 단 한편의 영화에
출연한 일이 있는데 바로 전창근 감독의 백범 김구에서
 둘째아들 역할이었다.  이것은 TV인형극 부리부리 박사에서 주제가를 불러
레코드로 출발하기까지 했던 가수 데뷔와 함께 다채로운 경력을 보여준
일면이었다. 성우생활 30년 구민에게 이 세월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갈고 닦아온 세월이었다.
 
그의 인기가 누구보다도
높다는 것은 타고난 재질도 있겠으나 소리의 흐름,
말의 시대성, 사회성을 소리 없이 연구하면서 자기 발전을
 해 왔기 때문이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은 송곳과 같이 어느 한 점을 향해
돌진했듯 구민은 부단하게 전력투구 했던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는
 점선과 호흡과 사이의 연결이므로 보다 섬새하고 보다 세밀하게
구사해야 된다는 그의 한마디는 지금까지의 자세를
 엿보이게 하는 일면이다.
 
 

 

 

 
구민은 1년 전부터 서울 예전 방연과에
 나가 라디오 연기와 실습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방송인으로서 성우란 화술의 새로운 감각에
뒤지지 않아야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 한다고 한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진 않는다.” 이것은
 연기생활을 뒤 돌아 보면서 털어 놓는 좌우명이다.
 남의 그릇 떡이 더 크고 더 맛있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소화하고
만족하며 살아왔다. 여기서 인간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은 언제나
 가장 욕망이 적은 사람이라는 말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소박한 꿈이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또 다시 성우로 태어나고 싶다는 구민 ㅡ
그는 지금도 성우라는 직업이 심오한 작품 동을 수행하는 예도라고 확신하며
살아간다. 성우라는 직업이 대본을 읽기 때문에 예도에서 소외 된 듯
하지만 연출, 대본, 조명, 음악, 음악효과등과 연기의 호흡처리 등이
 곧 심오한 작품 활동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이다.
 

 

 

1964년 대천 해수욕장에서 스무고개, 아마츄어 쇼,
스타탄생 공개방송의 시회를 보고 있는 구민과 오승룡 
 
 
구민은 잦지는 않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다. 술도 즐겨 마시지만 그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지방 풍물을 눈 여겨 볼 수 있고, 사라져가는 지방방언을
발견 할 D\수 있고 향토를 지키는 웃어른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잊혀진  한국의 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가끔 털털 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후미진 곳에서 노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는 확실히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인정 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행복이라는 단어를 실감 할 수 있듯 그의 애도 반생은 모름지기
 해야 할 일을 찾으면서 살아 왔기 때문에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제 5, 6대 한국 성우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또 세종초등학교 교장인 부인 최성숙씨와 1남 3녀를 두고 있는
 구민은 공사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해 주려는 그의 특유의
부단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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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VOA 이승만박사 최초방송 육성과 단파방송 연락운동
  

구민님의 목소리로 듣는 이송만대통령의

성대모사와 초창기 성우에 관한 얘기입니다. 

 

 

 

동아방송 행복이 열리는 꽃나무에 줄연해서

 열연하는 구민님 앞줄 오른쪽부터 이은미, 고은정, 구민,

장미자, 뒷줄, 김영식, 장건일, 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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