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1월 11일생 공교롭게도 여로 여자주인공 태현실과는 생년월일이 같다.참으로 희귀한 인연으로 여로에서 만났다. 이토록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끼리 결혼을 하면 처재를 낳는다고 했다. 태현실은 그래서인지 본인의 인생은 물론 방송사상 최고의 돌풍 화제작을 낳아 일생의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여로에 관한 얘기는 춘하추동방송에 여려편이 올라있다. 여기서는 장욱제 삶의 요악하기로 한다. 여로의 주인공 장욱제 연기생활과 그의 삶
면세점 사장에 이어 무역회사 대표로 살아온 성공 인생 풀 스토리 말하자면 ‘여로’는 전설적인 드라마였다. 70년대, TV 드라마가 아직 정착되기 전이었던 시절. 이 작품을 통해 TV 드라마, 아니 TV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로’의 주인공인 ‘영구’ 역을 맡은 장욱제(66) 씨의 인기는 우리가 지금 접하는 유명 탤런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개그맨 심형래가 ‘영구’를 패러디해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그것 역시 원조 영구에 비할 수 없었다.
도대체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였을까? 당시로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으므로 주로 출연 배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로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마치 구전되는 전설처럼, 하지만 절대 부풀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방영 시간이 저녁 7시 30분부터 50분까지였어요. 그 시간이 되면 거리에 사람이 없었죠.
군대에서 점호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사가 정확히 되지는 않았지만 시청률이 70%에 달했으니까, 사실 아기들 빼고는 다 본 셈이죠.
당시는 TV가 별로 없었을 때였는데, ‘여로’를 통해 TV 보급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만약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면 시청률은 더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피서지 해수욕장에 놀러간 사람들이 ‘여로’를 보기 위해 TV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해변이 썰렁했다는. 또 주부들이 저녁을 준비할 시간에 드라마가 방영되어 전국의 부엌에서는 밥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는. 이 정도면 시청률 계산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이 정도면 주연 배우의 인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극중에서 머리에 ‘땜빵’을 하고 나왔던 장욱제 씨를 따라 전국의 어린이들이 일부러 머리에 구멍을 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장욱제 씨는 그 외에도 여러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필적할 만한 경쟁자가 없는 국민배우였다.
좋은 사람들 만나 성공적인 인생 살았다.
전설적인 배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서울 장충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다. 무역업이라기보다는 잡화를 취급하는데, 최근의 주력 상품은 발모제이다. 한국 드라마의 새 장을 연 주인공은 이전 화려한 시절에 대해 ‘그저 옛날 일일 뿐’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그는 옛날 이야기보다는 장욱제라는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고 싶어했다. 지금은 거의가 기억 못 하는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했다. “전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 덕분에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죠.
첫 번째 분은 ‘여로’를 연출한 이남섭 씨였어요.” 장욱제 씨는 KBS TV 공채 연기자 4기생이다. 2천9백93명이 응시해 여자 20명, 남자 13명을 선발했는데, 그도 이 중 한 명이었다. 4차에 걸친 시험을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씨는 당시의 합격을 ‘ 기적이었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함께 기적을 맛본 연기자 중 지금까지 활동을 하는 사람은 탤런트 이일웅 씨와 반효정 씨 정도. 3년 동안 다른 신인 탤런트와 마찬가지로 단역만 맡았다. 그러다 ‘임자 있었네’라는 드라마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역할은 역시 단역이었지만 출중한 연기력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 그 후 ‘의리의 사나이 돌쇠’에서 주연을 맡고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3년 동안 3부작으로 방영된 이 드라마를 통해 장욱제라는 연기자의 진면목을 보였다.
또 ‘10분 쇼’라는 시사 풍자극에서는 지금도 ‘전국노래자랑’의 MC를 맡고 있는 송해 씨와 함께 열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드라마 ‘여로’를 맡으면서 말 그대로 국민배우가 되었다. “‘여로’는 야외 촬영을 처음 시도한 작품이기도 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냇가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면세점 사장으로 20년 가까이 근무
73년, 그의 나이 33세에 결혼을 했다. 아내는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연극공연을 보러왔다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겼다, 10년 만에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싹틔웠다고 한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어릴 때 미국에 유학을 보냈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들은 마케팅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 딸은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애들이 모두 연기에 소질이 있어요. 특히 아들은 길거리 캐스팅이 된 적도 있었죠. 그래서 저도 내심 연기를 해봤으면 했는데, 애들이 싫대요. 걔네들 말이 ‘지금 연예계에 뛰어드는 건 인생의 큰 모험이다.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말이 맞아요. 저도 겪어봤지만 수천 명 중에 한 명이 간신히 스타가 되거든요. 제가 KBS에 합격한 일도 기적이었습니다.” 아내는 이남섭 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덕분에 또 좋은 분을 만났다. 바로 아내의 삼촌인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이었다. 처삼촌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연기자 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최고의 국민배우였던 그가 77년, 홀연 은퇴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다.
“한번은 제주도에 갔는데, 서귀포 파라다이스 호텔에 묵게 되었어요. 아내의 삼촌인 전 회장이 경영하던 곳이었죠. 점심을 먹다가 처삼촌을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연기는 그만 했으면 됐고 나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하세요.
저는 그냥 인사치레로 하신 말씀인 줄 알고 ‘좋다’고 했죠. 4일 후에 전화가 왔어요. 처삼촌께서 ‘지금 하는 일을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하세요. 그래서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분이 발령을 냈으니 한 달 후에 근무를 시작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참 어이없는 결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연기자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는 전 국민의 인기를 뒤로하고 제주도의 호텔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과장부터 시작했다.
차근차근 호텔리어로서 경력을 쌓아가다
또 한 사람의 귀인을 만나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한테는 또 한 사람의 좋은 분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근무하는 서귀포 파라다이스 호텔은 조그마한 호텔이었는데, 거기에 박 전 대통령이 연락도 없이 온 거예요. 보잘것없는 호텔을 방문해서 점심을 드셨죠. 다음날부터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가 하루 5백 잔이 팔렸어요.
호텔 예약은 2~3개월 전부터 완료되었구요. 그분이 왜 제가 근무하는 호텔에 오셨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는데, 박 전 대통령이 장욱제의 팬이라는 얘기도 있었죠.” 호텔이 장사가 잘 되면서 그는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근무한 지 6년 만에 사장이 되었을 정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파라다이스 면세점 사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처음 제가 갔을 때 직원이 57명이고 연 매출이 30억원 정도였어요. 20년 가까이 근무하고 그만둘 때는 직원이 4백 명, 연매출이 7백억원에 달했죠. 그렇게 나름대로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다 99년에 은퇴를 했습니다.”
옛날의 인기를 우려먹고 싶지는 않다
은퇴를 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골프를 쳐도 재미가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무엇을 해도 흥이 나지 않았다. 다시 연기를 해보기도 했다. 2000년에 드라마 ‘여로’가 악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었을 때 참가했고,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에 출연하기도 했다.
악극은 꽤 괜찮은 흥행을 기록했지만 드라마는 중도 하차했을 정도로 실패했다. “한라산을 오른다고 칩시다. 이미 정상을 밟아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한 번 정상에 올라가보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지난번에 올라가다 그만둔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상을 정복하려고 하죠.
연기자 생활로 치자면 전 이미 정상을 밟아본 사람이에요. 다시 연기를 해도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더라구요.” 결국 다시 찾은 일이 잡화를 취급하는 무역업이었다. 장충동에 작은 사무실을 열고 이것저것 팔고 있다. 최고의 연기자였던 그가,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린 사장이었던 그가 하기엔 너무 소일거리에 불과한 일이 아닐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면세점 사장을 할 때는 정말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절 찾아오는 사람이 루이뷔통 같은 해외 명품 브랜드의 사장들이었죠. 지금 이 사무실보다 몇 배는 더 큰 사장실에서 일하고…. 하지만 그건 다 겉모습일 뿐입니다.
회사 경영으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죠.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혼자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고민을 하기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는데, 지금 사업이 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이 일이 너무 좋습니다.”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한다. 당연히 지금의 삶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최근에는 언론사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수필동호회에 다 니면서 글 쓰는 걸 배우고 있어요. 또 이태리 악기인 오카리나도 배우고 있죠. 이렇게 골치 아프지 않은 일을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지금이, 최고입니다!”
70년대 최고의 배우였던 그와 당시의 드라마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다. 요즘처럼 드라마가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초기 드라마가 많은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 시절과 배우에 대해 평가 절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 그때 활동했던 것으로 끝이에요. 우려먹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는 그저 그때일 뿐입니다. 저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많았어요.
죽었다는 얘기도 세 번이나 들었죠. 전 상관없어요. 지금 생활이 좋으니까요.” (퀸 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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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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