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한국전쟁과 유엔군 총사령부방송 VUNC의 탄생

이장춘 2009. 6. 14. 03:40

 



 한국전쟁과 유엔군 총사령부방송  VUNC의 탄생


VUNC는 6.25와 함께 탄생한 방송국이다.

 

 

전쟁에서 방송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척도이기도해서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하면서 제일먼저
방송국을 손아귀에 넣고 1950년 6월 27일 자정을 기해서 KBS의

대한민국방송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6월 28일 저녁방송에서 적의

방송이 흘러나옴을 확인한 도오꾜오의 유엔군 사령부는 바로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향한 방송을 하기로 하고 방송을 시작한것이 29일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을 당시의 주 일본 전권공사

(주일 한국대표부단장) 를 역임한 김용주는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1950년 6월 27일밤 전화통과 라디오 앞에서
밤을 새우던 우리 대표부는 빔 10시경 모윤숙 여사의
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 방송이 끊겨 버렸다. 당시 서울방송은

밤에은 들을 수 있었으나 낮에는 청취가 되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28일밤이 되어우리는 다시 라디오 앞에 모였는데 뜻밖에도 라디오에서는 공산당의

적기가가 울려나오면서 북괴방송이 나오지 않은가? 서울방송이 북괴에 점령당한 것을

직감한 나는 무었보다도 국민들이 허위방송을 듣고 어떻게 동요할지가

제일 우려되었다. 특히 지하에 잠복 해 있던 공산당들이
어떤 만행을 야기시킬지 심히 걱정 되었다.

 

 

 

 
나는 29일 새벽 맥아더 사령부의
윌로비장군을  찾아가 어제저녁 방송얘기를
 했더니 그도 방송을 들었다면서도대체 서울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도리어 반문했다. 나는 방송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갈 경우 일어날 수 있는모든 불리한 상황을 설명 해 주고

전 국민에게 미국의 참전과 UN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정을 속히 알려

UN군이 상륙 할때까지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참고 반격할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니까 그런 사실을 고취할 전파매체를 곧

마련해서 적침을 받은 한국민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맥아더 사령부가 쓰고 있는
두개의 방송국 중 하나를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윌로비 장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 면서
내가 단독으로 결정 할 수 없으니 곧 간부 회의를 열어서
귀하의 뜻이 관철 되도록 최선을 다 해보겠다고 약속 했다.
이윽고 그날 오후 2시경 그로부터 우리가 NHK 제2방송을
사용해도 쫗다는 결정이 내렸다고 연락이 왔다.그 런데
오늘저녁방송은 9시부터 하되 미리 녹음 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오늘 밤 만은 김공사가
직접 방송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것이 20여년에 걸쳐 방송 된 바 있는
 UN동경방송의 시초이다. 그런데 우리 주일 대표부의
부족한 인원으로는이 방송업무를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워
 약 3주일이 지난뒤에  다시 윌로비 장군을 만나 고충을 전하고
  UN군 사령부에서 인수해서 계속 해 달라고 부탁 했더니 그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의사가 있었으나 차마 먼저 제의 할 수가 
없었다면서 쾌히 응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 방송은
당시 6.25전쟁중에 우리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넣어주는 유일한 방송이 된 것이다.
 
 

 

 
 갑자기 시작한 방송국이어서 방송요원이
 있을리 없었던 VUNC에 방송과장이던 민재호가 급히

파견된것은 7월 3일의 일이다. VUNC는 6.25로 한국방송이

부산, 대구,마산에서만 방송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을 해야 했기때문에 후꾸오가방송국의

대출력을 활용했다.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는

우리방송보다 잘 들렸다고 한다.

 

 

VUNC는 도오꾜오에서 방송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군용 BC-610, 300W송신기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
반도호텔 (지금은 롯데 호텔을 새로 지음)에서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때  민재호도 함께 들어왔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후에는 파괴된
KBS재건에 협조하고 UN군이 북진하여 평양방송을
점령하자 한국의 방송인들을 특파원과 함께 평양방송에 보내

 "자유의 소리"를 12월 4일 후퇴 할 때까지 방송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정부와 KBS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하자 KBS방송 활동을 돕기위해

상주 특파대를 파견 하기도 했다. 아울러 중공군을

대상으로 중국어방송 곁들이기도 했다.

 

 

 VUNC는 부산피난시절 하루 두차례씩
프라임 타임대인  밤 9시와 10시에 각각 30분씩 
  KBS를 통해 중계방송 되었다. 방송국에 주둔 해 있던

UN군사령부 심리전과는 텔레타이프를 통해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를 보내줄뿐 아니라 뉴스해설을 도와 주었고 " 할머니의

얘기" 라는 프로그램을 제공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공산당의 실체를 알기쉽게 얘기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김경자 아나운서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능숙하게 내어 아예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1951년 11월 공비들이 남원지구에서
약탈을 감행 할 때에는 국군의 공비 소탕을
돕기위해 남원지구에 공비귀순을 종용하는 방송팀을
파견했다. 1951년 3월 16일 서울이 탈환되자 KBS의 파괴된

시설복구와 공중파 송신을 원조하기도 했다. 서울을 완전히 수복한

후에도 한참동안 동경에 있다가 1958년 일부는 서울로, 일부는 오끼나와로

각각 이동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72년VUNC가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KBS에 제공해서 대북방송채널로 

오후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 해 왔다. 

 

 

 

 

VUNC에서는 민재호를 비롯해서
홍양보, 유덕훈, 위진록, 이상송, 김유선, 김기형,
김덕빈등 많은 우리 방송인들이 방송을했다. 작가 김영수,

김희창 양씨도 VUNC에서 집필했으며 배우 김복자씨도 성우로

참여해서 우리방송의 연장같이 느껴졌다. 서울 함락후 숨어서

듣던 미국의 소리방송과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이 있어서

전황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가지고 들었다.

 
6..25한국전쟁과 함께 탄생한 VUNC는 
22년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후복구를 위해  
힘쓰는 등 우리와는 끈끈한 인연을 맺으면서  
그 임무를 다하고 1972년 막을 내렸다.
 

 

 

1958년 KBS예술단이 VUNC가 있던 일본 오끼나와에서

공연을 하던때 공연단으로 갔던 KBS교향악단 임원식 지휘자와

김백봉 무용단장, VUNC에 근무하던 김영수, 김복자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왼편뒤에 김익모님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VUNC직원들이 함께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