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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KBS방송터와 옛 여의도

이장춘 2009. 5. 16. 08:06

 

  

 

 

  여의도 KBS방송터와 옛 여의도 

 

 

    
여의도에 방송터를 마련하고 집을지어
이곳에서방송을 내 보낸것도 어언 40여년의
(2019년 현재) 세월이 흘렀습니다.  1974년 초부터
 짛기 시작한 집이 2년 6개월만에 완공되어 1976년
10월말에  공사가 끝나, 12월 1일 준공식을 가졌

습니다. 본사 청사와  터를잡은 얘기,  또 

여의도 옛날 얘기를 썼습니다.

 

 

먼저 준공식때의 동영상 한편을 보시겠습니다.
 

 

KBS 여의도사옥 준공식때의 동영상 / 1976년 12월 1일
 

 

 

 

 

 

 

  

본사 여의도 청사는 남산 청사가 비좁던 터에
연희송신소가 소래로 옮겨 가면서 그 땅을 활용해서
 남산청사의 비좁음을 해소하려는데 서부터 비롯됩니다.
 방송국을 연희송신소 자리로 옮기려고도 했었지요.
 이 때는 주변에 집들이 들어선대 다가 보안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다른 터를 찾았습니다.

 

 


 

 여의도 종합청사 공사모습과 준공 때의 사진을 담았습니다.

 

 

 

 

 

그 시절 KBS임원진과 간부들을 볼 수 있는 사진이기도

 합니다.앞에는 홍경모사진, 서 계시는 분들 두번째부터 민두식

총무국장, 김성열 센터 건설 본부장, 이인관 기술총국장(이사),

 최서영 이사, 김재중부사장, 한숙이사, 손영호, 박종국


 

 



 

 

 

 

 

 



항공촬영도 어렵고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지도가 잘 되어 있을 때도 아니어서 방송국 적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부서는
공보부 방송관리국 시설과였는데 권오진과장님,  김성배

 계장님,   실무자 지승표님에게 방송국 적지를

찾아내야 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김  성  배  원로 회원님
 
 

 지승표회원님
  
 시설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지승표님이

그 일을 하자니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중  자그마한 지면에서

서울시청 지하실에 가면 서울시 도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지도를 모두 뒤진 끝에 방송국이  들어 설만한 곳

세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71년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끈 김종필

국무총리가  제 2인자가 되어있을 때 김종필국무총리는 그 보고를

듣고 바로 결정을 내려주어서울특별시와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서울시로서도 환영 할만 한 일이었습니다.

 

 

 연희송신소 부지와 여의도부지조성

 

 

채비지 와  교환하고 모자라는것은 주변 땅을 

더사서  2만평정도 마련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이상의

건물을지으려고 했지만 국회가  들어오고 높이가 제한되면서

지금의 본관청사로 되었습니다.  공사가 되면서 이곳 건설공사는

 본격적으로 추진 되었습니다.공사 특별기구로 방송센터 건설본부가

 마련되고 본부장 최창봉님, 부본부장 이인관님, 건설국장 김성열님, 

 기술부장 김광식님, 관리부장 김일영님이 맡아 보셨습니다. 




김  성  열 님   

 

 

김 광 식 님, 

 

 

김 일 영 님 

 

준공 초기의 여의도 청사 입니다.

 


 

1978년 의 청사 와 주변 모습입니다.

아 때는 부근에  국회와 KBS밖에 없었습니다.
뒤에는 지금의 연구동 당시의 의원회관을 짛고 있습

니다. 오른쪽 자그마한 건물은 보이스카우트입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보이스카우트 총재를 한적이 있습니다. 이러 저런

사정으로 보이스카우트가 여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뒷날 KBS가

 이 건물을 사려고 했지만 워낙 요구조건이 까다로워 포기했지요.  KBS

한쪽 모습이 찌그러져 모양이 좋질 않습니다. 이때 KBS 뒤에 짛고있는

 의원회관은 국회가 의원회관을 의사당 안에 짛으면서KBS가

 인수해서 오랜세월 연구동이라는 이름을 붙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관을 짛기 전의 야경입니다. 

 

방송국이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뒤에 있는

땅에 운동장을 만들고 잔디를 심어서 잘 활용 했습

니다. 그러고 나서 86 아세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우리

라에서 하기로  되고 또 KBS가 주관 방송사가 되니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했기에 운동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IBC

국제방송센터 지금의 KBS신관이 들어선 것입니다.

  KBS가 이곳으로 오면서 다른 방송사들도
여의도를 찾았습니다.

 

 

 별관은 TBC동양방송이 짛어

1980년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었는데

바로그해 방송 통례합이 이루어져 불과 몇달만에

TBC가  KBS로 흡수되면서 KBS건물이 되어 별관

이라는 이름으로 활용되고 었습니다.

 

 

 

 


 

위, 아래 1980년 사진은 칼라 방송

테잎 커팅 할 때의 모습입니다. 위  왼쪽부터

김광식, 한사람건너 이광표 문화공보부장관, 오른쪽 끝

이원홍 KBS사장, 아래 이원홍, 이광표 정순일 이사등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지금은 여의도 안에 KBS도 있고국회도

있고 현대적인 도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여의도에 KBS

청사를 옮긴지 32년 세상은 너무 많이변해 버렸고

칼라방송, 디지탈 방송 등 세로운 방송

환경이조성되었습니다.  

 

 

 

 

KBS영의도 청사 건립의 두 주역 최창봉, 김성열님입니다.

뒷날 KBS사우회 회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1980년대 초 여의도 청사앞에 선 KBS간부 사원일동 앞줄 오르른쪽부터

손영호, 정순일, 이덕주, 이원홍, 김수득,차종호, 윤혁기, 김광식, 그리고 순서

없이 송재극, 조찬길, 이동린, 채유석, 신윤생, 박미정, 김은구, 최장훈, 정종표,

변형하,배학철. 박진우, 김현국, 장한성, 양휘부, 서정원, 조창화, 박중길,

장영국, 원철재, 김학영님 등의 모습이 보입니다.  

 

 

1945년 9월 9일에 찍은 여의도 항공 사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시진이기도 합니다. 

 


 
 
1968년의 여의도 모습입니다. 


 

 

1930년경 여의도 비행장

 

 
 

 

63빌딩에서 본 여의도 입니다.

 

 

 


 
 
옛날의 모습을 더 알아보기 위해
글을 찾아 보았더니   이곳에 사시던 분이
마음의  여정이라는 블로그에  써 놓으신
옛날 얘기가 있어 여기에 옮겼습니다.
 
몇편의 글이 있는데  두 편을 옮겼습니다. 



여의도. 37년 전 나의 어린시절 15년을
살았던 마을이다 그때만 해도 여의도엔 그리 높지

않은 긴 산이 있었고 산 정상엔 작은 미군부대가 있었다. 

그 미군부대 맞은편 아래엔 나무들도 꽤 많았고 거기엔 뻐꾸기도

울고. 토끼도 노닐고. 뱀도 있었다. 겨울엔 예쁜 색깔의 청둥오리도 보고.. 

그리고 그 미군부대옆 아래 산에서부터 산 아래 평지까지 우리 마을이......

마찬가지로 산넘어 마을에도 사람들이 옹기 종기 모여 농사를 지으 며 살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면 마포 당인리 발전소가... 

우리마을 앞쪽 넓은 논과 밭을 지 나면  여의도 비행장이 있었다. 

그 산꼭대기 미군 부대 정문엔한국인 수위 아저 씨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친구들은 그 아저씨를 코가 

 뾰족하다고 해서 뺑코 아저씨라 고 불렀다

 
 우리 마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미군부대엔 저녁이면 전기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나와 내친구들은 저녁을 먹고나면 전기불이

 훤 한미군 부대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고무줄 놀이 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빙 둘러앉아 오제미 돌 리기.오제미 차기. 아니면

도란도란 앉아서 돌아 가며 노래 부르기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특히 나는 노래 (가요) 를 즐겨 불렀는데어느날 뺑코

아저씨가 나를 부르시더니 나보고느닷없이 노래를 부르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노래 2곡만 부르면 부대안에

널려있는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마음껏 

따가도 된다는 말씀이었다

 
난 부끄러워 하면서도 이미자의 동백꽃

피는항구.저강은 알고있다.를 멋드러지게(?)

불렀다 뺑코아저씨는 미소를 띄시며 박수를 치시면서

잘 불렀다는 칭찬과 함께 나보고 작은 바구니를 가져 와서

산딸기를 다 따가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줄달음질해 산을 뛰어

 내려와서 집에서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다시 미군부대 정문안으로

들어가서 철망 안쪽으로 아저씨가 가지말라고하신 지뢰가 묻혀

있는곳은 피하면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낮은 언덕에

빠알갛게 널려있는 산딸기를혼자 신바람이 나서 따서

 먹기도 하고 부지런히바구니에 하나 가득 따 담아서

 친구들과도란도란 앉아서 새콤달콤 쌉싸롬한

산딸기를 정답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15살이 되던해 5월에 정부 시책에

의해서(보 상을 받고) 철거를 해서 정답던 친구들과

 여의도 사람들은 시흥으로.신정동으로. 봉천동으로 나라에서

배분해준 땅에서 터를 잡고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그 산은

 온데 간데 없고국회의사당을 위시해서 63빌딩.각 방송국. 고층빌딩.

아파트등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변모된 발전된

여의도의 모습을 보노라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만감 

(어린시절의 여러 기억들) 이 교차한다. 

 



 
여의도와 땅콩 

 


여의도 하면 땅콩 . 땅콩하면 여의도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옛날 (44년전)

여의도는 농작 물의 절반이상이 땅콩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량진 한강다리 못미쳐 드넓은  모래사장엔

 거의 전부가 땅콩을 심었고 또 산넘어 마을과 달 리 우리 마을

앞쪽 여의도 비행장 안쪽의 드넓은 들판에도 농작물의 절반이상이
 땅콩을 심었다. 땅이 좋은 밭에는 땅콩도 여물고 거의 땅콩알이

찼는데 광활한 모래밭에 심은 땅콩은 쭉정이 (땅 콩이

들어있지 않은) 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행장 안쪽

큰 들 판에 땅콩을 심었는데 가을철 땅콩을

수확하는 날 엔할머니.아버지.오빠.나.모든 가족과 인부

여러명이땅콩잎을 잡아뽑고 그 땅콩을 날라다 소달구지에

싫고 인부아저씨들이 집앞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으면

다시 또 기계에다 잎줄기와 땅콩을 분리해서 털어내는

 일을 하고나면껍질땅콩을 집안 마당에 .집앞에

널어 말리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말린 땅콩을 다시 또
기계에다 까서 그 깐 알땅콩을 가마니에
담아서 아버지는 도매꾼에게 싸게 넘기거나
 영등포 시장에 내다 파셨다. 땅콩은 바로캐서 삶아

 먹어도 특별한 구수한 맛이 있고 날것으로 먹어도

비릿하지만 맛있고 볶으면 더고소하고 더 맛있다.

그시절. 우리집엔 땅콩죽도 많이쑤어 먹었는데

그 고소한 맛에 할머님과온 가족이

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땅콩을 먹으면 그시절의
그 아름다운 정서와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10년전인가. 그 추억을 반추하며 시장에서 날땅콩을

사다가 믹서에 갈아서 남편. 우리아이들에게 땅 콩죽을

쑤어 주었더니 아이들은 맛 없다고 한두수저 먹고는 더이상

 먹지를 않는것이었다. ^^ 남편과 난 잘 먹었지만.. (그러나 옛날

그맛은 아니었다) 7년전인가도 여의도의 추억을 떠 올리며

멀리 떨어진 풀밭에 가서 벼메뚜기를 꽤 많이 잡아

다가 아이들에게  볶아 주었더니 약간 맛을

보고는 더이상 먹지를 않았다
 
하긴 내가 먹어봐도 옛날 여의도에서
 볶아먹었던 그 고소한 맛좋은 맛이 아니었다.

여의도. 나의 어린시절의 정겨운 추억이 묻혀 있는곳...

이세상 떠나는 날까지 나의 아름다운 여의도의 추억은

여의도 사람들.정다운 친구들의 추억과 함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으리라.


 

 

 
 
KBS여 영원 하시라 !

 

 

 

 

 

 
퍼   온  글
 
 여의도는 前日에 잉화도(仍火島), 라의주(羅衣洲)로

불리웠던 섬으로 유래는 이 섬이 홍수로 잠길때에도 현재

국회의사당이 자리잡은 곳에 있던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의섬), (너의섬)하고 부르다가 여의도라고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잉화도(仍火島)라는 이름은 중종(中宗)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

전지승람(新增東國典地勝覽)에 소개되어 있는데 "서강(西江)은 남(南)쪽에 있고 

축목장(畜牧場)이 있다. 사축서 전생서(司畜署 典牲署)의 관원 한사람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한다" 라고 하였으니 조선초부터 이곳 땅이 넓고 편평하여

풀이 잘 자라므로 축목업(畜木業)이 적당한 까닭에 양과 염소를

기르는 국립목장(國立牧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부에 씌어진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

2권(卷)에 의하면 밤섬과 여의도는 서로 붙어 있었는데

홍수로 갈라졌다고 하고 라의주(羅衣洲)를 라의도(羅衣島)라고

적은 것을 보면, 여의도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영등포동에 이어진

삼각주(三角洲)였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여의도는 1913년 홍수 이전까지는

 한강물이 북측으로만 흘렀던 것이 수로가 변경되면서 여의도 남북으로 갈려

 흐르게 되어 하중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등포와 연륙(連陸)되어 있던

여의도는 샛강이 흐르게 된 까닭에 영등포와 교량을 통해 왕래하게 되었다.여의도

조선후기에 이르러 목장으로 사용된것 외에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조 27년(1751)에 기록된『守城冊字』『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북부 연희방내에 汝矣島契 가 처음 나타난다.    그후 조선말까지

변함없다가일제때인 1911년 4월 1일에는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일제가 도성밖의 지역을 경성부에서 경기도로 편입시킴

으로서 이곳은 률도와같이 고양군 용강면 여률리로 개편 되었다.

그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감부령 제8호에 의해 여의도는

경성부에 편입되어汝矣島町 으로 명명하였으나 광복이

 되면서 일제식 동명인 汝矣島町 은 汝矣島洞

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목축장이나 척박한 농지로 사용되던

 여의도는 일제때황정이라는 일본인이 이곳에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고, 경마장으로 쓰이기도 했으나 세태변화와 함께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16년 비행장을 만들면서부터 였다.

즉 1920년 5월 25일 이탈리아의 비행기 두대가 동경으로 가는 길에  여의도에

착륙함으로써 신기하게 여긴 10여만명의 시민이 모여들어 대대적인 환영속에

 이착륙을 지켜보았다.이로부터 2년뒤인 1922년 12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고국방문비행을 시도하여 여의도에서 시범비행을

 보이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로부터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1929년 4월에는 여의도비행장이 일본-한국-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의 요지로 되어 크게 넓혀졌다. 일제때는 이 비행장을
 경성항공사가 이용했고, 광복후에는 KNA항공사가 한때 이용했으며
 1953년 부터는 국제공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비행장은 여름철
장마때면 침수로 사용이 불가능해지자 1958년에 김포공항으로
국제공항을 이전했다. 따라서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기지로만
사용되다가 1971년 2월에 폐쇄되었다.

여의도비행장에는 광복 직후인 8월 18일에

광복군 지휘관과 미군사절단 일행이 중국의 서안을 떠나

 C-47수송기를 타고 착륙했다.이들은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군인을

 인수하고 일본군의 무기접수를 지휘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철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전에는 水沒되기 일쑤이고 국립목장이나 비행장으로 쓰였던

모래섬의 여의도가 오늘날과 같이 현대식 도시로 된 것은 1968년 서울특별시가
 한강개발계획을 수립한 이후부터이다. 당시 서울시는 쓸모없는 이 섬을 새로운

꿈의  도시,  이상적인 지역으로 조성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는 여의도가 입지

조건으로 보아 도심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중심부의

 과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합한 곳이며 태양과 녹지와 공간이

있는 주택단지로서 잇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여의도개발계획을 세워 그 기초 건설의

하나로서섬의 높이를 9m에서 13m로 돋우고 섬 주위에

높이 16m, 폭 21m, 연장7km의 수중제(輸中提)를 쌓아서 87만

 600평의 새로운 땅을 신도시로 꾸미기로 하였다.이에 따라 서울시는

경치좋은 인근의 밤섬을 폭파시켜 강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여의도 땅을 돋우는데 필요한 토석을 채취해다 썼다.

여의도는 1970년에 마포와 이어지는 마포대교가,

1976년에 대방동과 연결되는 여의교, 영등포로 나가는 서울교는

 샛강에 놓여지고 원효로와 연계되는 원효대교가 놓여져 있는데다가

1990년 6월 27일에는 지하철5호선이 착공되어영등포,마포와 이어질 수

있게 되었고, 국회의사당에서 영등포로 이어지는 파천교와신촌방향

및 강변북로와 직접연결되는 서강대교가 건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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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 창립 44년 KBS, 한국 방송역사 90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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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KBS방송터와 옛 여의도

http://blog.daum.net/jc21th/17780075 


KBS 한국 방송공사창립 그때 그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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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한국방송공사창립 40주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645

 

KBS 방송 개시 86주년 공사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와 축시(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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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방송공사창립 37주년 기념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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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한국방송공사 창립 3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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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창립 41주년 특집 ‘K-POP 국악에게 길을 묻다’ 가 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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