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목포는 항구다> 《대망의 푸른 꿈》 등의 대표곡을 불러 대중가요 가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 무대가수로 활동하였고, 남편 김해송(金海松)이 납북된 뒤
KPK악단을 운영하였다.
1958년 “목포의 눈물” 같은 제목의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관중.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41년 만에 고향 목포로 돌아와 노랫말 속 ‘
삼학도’에묻혔습니다.이난영기념사업회는 2006년
3월 ‘귀향’을 기념해 22~25일 목포시내 일원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경기도 파주의 공원묘지에서
옮겨온 유해를 25일 삼학도에 안장했습니다.
안장식은 이씨의 유해를 화장한 뒤
20년생 백일홍 나무 밑에묻는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졌습니다. 안장지인 삼학도(대삼학) 삼학사 옆에는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세워졌고, 인근 780여평에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돼 그해 4월 11일
문을 열었습니다.
이난영의 환혼(還魂)
2005년 9월 22일 이규태 코너
1930년대 중반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동화시키고자 문화말살정책을 강화했고 이에
조선일보는 그 문화를 지키려
맞대응했다.
조선의 학술문화를 발굴 선양 보급하는
조선학(朝鮮學) 운동을 비롯해 한글 보급운동,
향토물산 장려운동 등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조국애를 대중가요를 통해 심으려는 애향가(愛鄕歌)
가사 현상모집을 했다. 이때 입상한 가사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 목포가
고향인 18세의 무명가수 이난영이 부른 이 노래
는 억눌린 채 잠재된 민족의 공감대에 불을 댕겨
발매되자마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당황한 총독부는 발매 금지시키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를 했다.
이 노래의 가사 가운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가 조사의 초점이었다.
노적봉은 유달산의 별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적 섬멸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산이다.
곧 삼백년 원한이란 300년 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대목이 암암리에
민족공감의 고리 구실을 한 것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원한’이 아니라 남녀사랑을 상징하는‘원앙’
이라고 변명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삼백년 원한 품’은 ‘三柏淵 願顔風’ 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게 바꿔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곡절이 담긴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노래가
아니라 민족 저항의 표출이었다.
민족가수로 아로새겨진 이난영은
작곡가요 악극단을 거느린 대중가요의 대부였던
김 해 송과 결혼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의
납북으로 생이별, 자녀에게 노래를 가르쳐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가 활동하게 했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시신은 파주 광탄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 이듬해에 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져 그녀가 읊었던
저항정서만은 귀향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연고 없는 땅에서 방황해왔다.
그 고독한 영혼을 40년 만에야
태어난 고향이요 노래의 고향이기도 한
목포로 이장해서 고향을 찾았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라는
노래비 속의 구절을
‘당신이 흘린 눈물은 보석입니다’로
바꿔 새겨야 할 판이다.
이난영의 약력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에서 아버지 이남순 씨와
어머니 박소아 씨 사이의 장녀로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 녹음. 1933년 10월 OK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 취입 가수 데뷔. 1934년 2월 <봄맞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출연.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6년 7월 오까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 대히트 기록. 1939년 1월 문일석 작사, 이봉룡작곡, <목포의 추억> 발표.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2년 오빠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8년 <목포의 눈물>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 관중 동원.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시민 기금으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2004년 목포문화연대 측에서 이난영 묘지 이전 및 추모사업 제안. 2005년 목포에 이난영 기념사업회 발족. 2005년 이난영 유가족들과 묘지 이전 및 기념사업 협의. 2006년 3월 묘지 이전, 유가족 초청 추모 콘서트 등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