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이 말하는 영원한 내 방송국

이장춘 2008. 7. 26. 19:00
 
믿거나 말거나.
 현역 방송인들이야 믿거나 말거나.
 방송국은 언제나 “나의 마음의 고향”이다.
마치 시집간 딸이 친정을 잊지 못하듯이.
 나는 방송국을 잊을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시집가서 아들 딸
주렁주렁 많이 낳고 시댁에서 잘 살고 있으면서도
친정은 언제나 “내 집”이듯이 신문사나 대학은 아들 딸 모두다
고등교육까지 끝내 주었을 뿐만 하니라 이날 이때까지 우리 식구들을 
먹여주고 입혀주는 고마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지 벌써
까마득한 방송국은 언제나 “ 내 방송국 ”이다.
 
남의 어느 누구의 방송국도 아닌,  바로
“내 방송국이다” 영원히……. 영원히.......그야말로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내 방송국”인 것이다. 왜?
방송국은 내 잔뼈가 굵은 곳이기 때문이다.
 
1983년 11월호 월간 방송지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잊지 못할 내 방송국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선생님 글
 
 
문제안 선생님은 1943년, 방송국에 오셔서
 해방되던 다음날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가 되셨고
1945년 9월 9일 제1방송을 우리말 방송 채널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일생을 언론인으로, 학자로
특히 한글연구에 힘을 기울이시면서 살아 오셨습니다.
이글을 쓰실 때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처음 우니라라에 오셨을때
경무대에서 기자들과 만남의 장입니다.프란체스카 옆
검은 양복 입으신분이 문제안 선생님입니다.
 
 
(그래서―이건 펴 놓고 할 말은 아니니까
비밀스럽게 하는 말 이지만 어쩌다 혹 방송국에서
 미련한 짓을 한다거나 사회자가 멍청하게 논다거나, 연출자가
급한 자기 사정으로 어디를 갔는지 다음 장면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거나,
더욱이 아나운서가  우리말의 고저장단을 어기고 함부로  지껄여  댄다거나
할 때에는 마치 제가 방송국의 총감독이 되는 것 같이, 아니 방송국의 주식을
 내가 몽땅 사버리기라도 한 것 같이, 아니 방송심의 위원회 ―- 위원장보다도
더 높은 것은 없나? ―- 어쨌든 내 자신에 전 책임이 있기라도 한 것 같이,
 그 보다도 내가 직접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 같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라디오나 텔레비전 앞에서 소리소리 지르고, 삿대질 하고
때로는 마구 핏대까지 올리곤 한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방송국을 “내 방송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1943년 입사동기 아나운서입니다,
문제안 선생님을 비롯해서 윤길구, 장운표, 홍준,
이덕근님이 같이 들어 오셨습니다.
 
 
어쨌든 나는 방송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방송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내 나이 스물네 살, 일 하기도 쑥스럽지만 그야말로,
“이제 막 피어나려는 인생의 꽃봉오리”였다. 그때―- 1943년
 6월의 어느 날 오후―- 지금도 눈에 서언하다. 
 
경기고녀 어느 교실 때 묻은 납작한 나무
책상에 꼬부리고 앉아서 시험지에 답안을 쓰고 있었다.
 그 시험이 바로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사건으로 선배님들이
많이 잡혀가서 그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방송국이 실시한 조선인
아나운서시험이었다. 이것이 내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방송국과 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시험 감독은 민재호 선배님이었고
이계원 선배님이나 이혜구 박사님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험장에 들르셨더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당시 나는 방송국 채용시험에
 꼭 붙어야 할 까닭은 없었다. 일본에서 연출공부를 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문화 영화 회사에서 연출 조수로 일하는 한편 신극운동을 한답시고
예술 소극장이라는 일본사람들의 신극 운동단체에 가담해서
 쯔끼지 소극장의 무대에 올라서기도 했었고 서울에
돌아 와서는 그 당시 연극 상설극장으로서는
단 하나 밖에 없었던 동양 극장에서 연출 조수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험이란 자기 자신을 테스트
해 본다는 뜻 이외에는 아무런 의의도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일본에서 갓 돌아와 나이 겨우
스물넷인데다가 얼굴은 뽀얗고 몸은 자그마해서 꼭 어린
아이같이 보였었던지 동양극장 스텝들이나 청춘좌(靑春座)나 성군 (星群)
 두 극단의 연기자들 까지도 모두 다 나를 얕잡아 보는 것만 같아서 ―- 사실이
그렇기도 했을 것이고, 또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었겠지만 ―-
이 기회에 한번 내 실력을 과시해 보여 주어야 하겠다는  어린 아이
장난 같은 생각에서 응시 해 보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합격통지서가 집에 배달되고 보니, 제일 늙으신 어머님께서
 “든든한 직장”이라 해서 반가워하신데 다가 나 자신도 관심도 있었고
 매력도 느끼고 해서 결국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붙었다고 해도
 장난기 섞인 응시태도였던 만큼 꼬마리로 붙었을 것은 
뻐언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도
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나운서 훈련에는 응하기로 했다.
더욱이 방송국에 들어와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글자 그대로 따뜻한 피가 통하는 다정하고 깨끗한
“신사들의 보금자리” 바로 그것으로 느껴졌다.  
 
1947년 방송과 직원들과 함께한 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분이 문제안 선생님이고 두루마기 입으신 분이 이계원 방송과장입니다.
 
 
문제안 선생님은 이때 방송국에서 들어 오셔서
2년후이 해방을 맞으시고 그 다음날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가
되셨습니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지내시면서
방송 일에 임하셨지만 군정청과의 뜻이 맞질 않아  1946년
 7월 25일 군정청으로부터 해직 통보를 받고
방송 기자직을 물러 나셨습니다.
 
 근무 하시던 기간의 방송국 분위기나
일 하시던 상황 등을 상세하게 잘 묘사 해 놓으셔서
그때 그 분위기와 시절을 이해하는데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전문을  올리려고 했지만  방송 인물편에 다소의  얘기가 있고 
 다음기회도 있어서 다음으로  미루고 결론 부문만 더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하신 분에게는 메일이나 팩스로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1946년 7월 25일 오전 10시에 군정청
뉴먼 대령의 해직통보를 받고 그날 오후 2시에
조선 통신사에 취직하고 말았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연극계로
돌아가려던 나를 억지로 잡아 끈 당시의 중앙청 출입기자들의
인정이 나로 하여금 내가 원치도 않는 길로
 걸어 나가게 하고 말았다.
 
이때가 나로 하여금 한평생 연극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년 후 1947년 7월 1일 송영호(당시의 편성과장)선배님의
 강권으로 서울 중앙방송국 PD로 복귀해서 이계원 선배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스무고개” 프로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해
들여오고 “라디오 3면”이라는 사회 담당 프로를
새로 창안 해 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들어 갔을 때에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과신한 국장님이 계셔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신문계로 나가고 말았으나
 스무고개 박사로, 라디오 유머의 작가로, 전국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오후 방송의 두 시간 동안을 진행하는 와이드 프로그램의 앵커맨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서울 중앙 방송국에  드나들었다.
역시 서울 중앙방송국은 “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방송국”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