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10월 2일 이장춘과 안병천 관악공동체라디오대표가 출연해서 이성화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인생은 아름다워 시간에 방송된 내용입니다.
이성화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 푸른하늘 방송이야기에서 옮겼고 방송은 어느때던지 관악방송 100.3MHZ나 인터넷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인생은 아름다둬 ~~~~~~~~~~
오늘 스튜디오에는 춘하추동 방송 이장춘 국장님 그리고 관악 공동체 라디오의 안병천 대표님 이렇게 두 분 모셨습니다.
두분>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성화 >저는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국장님 뵙기만 하면 참 대단하신 분 귀하신 분 존경스러운 분 그런 생각이구요, 제가 왜 귀한 발걸음 부탁을 드렸냐면 여기 안병천 대표가 관악 공동체 라디오 시작한 지가 한 2~3년 지나면 20년이나 돼요. 그래서 지난 9월에 63빌딩에서 방송의 날 기념 행사가 있었잖아요. 거기서 이장춘 국장님도 뵙고 여러 방송인들을 봤잖아요. 그때 무슨 생각이 딱 떠오르냐면 아 이장춘 국장님 모시고 안병천 대표와 마주한 자리를 하면 좋은 말씀 많이 들을 수 있겠구나. 그런 욕심이 생겼고요. 또 안병천 대표가 18, 9년 전에 그 30대 젊은 나이에 시작해서 지금 이 관악 방송을 많이 키워놨어요. 그래서 방송 총괄 하면은 이장춘 국장님 계시니까 무슨 얘기든지 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방송의 날에 매해는 못 갔지만 한 2, 3년 계속 참여하다보니까 그 현수막에 방송의 날 날자가 달라져서 헷갈리는데요, 우선 그 해설부터 좀 해주세요.
이장춘 > 제 가 먼저 말씀드릴까요? 우리나라 방송호출부호가 『 HL 』 이거든요. 여기 관악방송은 호출부호가 어떻게 되시죠?
안병천 > HLMA 입니다.
거운데 허가증
이장춘 > 그렇습니까? 이 『 HL 』 이 안 들어간 방송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대한미국방송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는 모든 방송은 『 HL 』이 들어가고 이 이것은 국제적으로 『 HL 』로 인정된 방송국이에요. 대한민국에서 하는 모든 방송은 이 『 HL 』이 들어가고 이『 HL 』 과 더불어서 방송국이 생긴 건데 그러면 이 『 HL 』은 언제 어떻게 해서 받았느냐. .우리가 일제 때는 jo라고 그랬어요. 호출부호를, 그런데 우리가 해방이 됐으니까 우리 호출부호를 받아야 되지 않겠어요? 이것을 1947년부터 방송의 날 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처음에는 10월 2일날, 그게 지금 방송 날이죠. 그. 그런데 이걸 처음에는 10월 2일 날 했어요. 왜냐 kbs가 10월2일 날 처음으로 『 HLkA』라는 호출부호를 넣으면서 방송을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1960년대들어 민영방송이 생겼잖아요. 그러고 1974년에 『한국 방송협회』라는 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kbs하고 민영방송까지 다 합쳐서 한국방송협회가 된 거예요. 이제 협회차원에서 보니까 그 ★ 방송의 날 ★ 앞의날은 국군의 날, 다음 날은 개천절 그러다 보니까 방송의 날이 빛이 안 난단 말이에요. 거기다가 또 그 민영 방송국에서 생각할 때 그날이 처음 방송 민영방송에서는 처음 방송한 날도 아니고 별 의미가 없어요 . 그러니까 민영방송에서 제안을 했어요. 국군의 날, 개천절이 사이에 낀 10월2일로 할 것이 아니라 호출부호를 처음 받은 9월 3일로 합시다. 그래가지고 방송의 날을 9월 3일로 바꾼 거예요.
이성화 >그렇군요. 중간에 날자가 달라져서 궁금했어요.
이장춘 >그런데 이것을 10월 2일로 시작할 때가 언제냐. 1964년 10월 2일입니다. 저도 처음으로 할 때 참석 했는데 그때 중앙청 옆 경복궁 옆에 진명여고라고 있었어요. 여기에 「삼일당」 이라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행사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중간에 방송협회에서 한 것까지 합해서) 60주년이 된 거예요. 그러면 안 대표 얘기 좀 듣고 내가 얘기 좀 더 하겠습니다.
안병천 >지금 말씀 내용 처음 알았어요. 방송의 날 하면 9월 3일로 바꿔서 60년째인가요?
이장춘 >그건 아니고 1964년 10월 2일 방송의 날이 처음 생긴 날 부터 60년이고 우리나라가 1927년에 처음 방송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96년이 된 거예요. 우리나라 방송 역사는 96년을 했는데 그 중 17년은 일제강점기에 방송을 했어요.
안병천 >그 러니까 그거 빼고
이장춘 > 일제강점기에 방송을 하고 또 해방이 됐어도 2년 후 1947년 9월 3일에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1947년부터 계산해서 60년이 아니라 「HL」을 받은 날을 기념해서 1964년에 아까 제가 진명여고에서 했다는 행사 있잖아요. 그때부터 계산하니까 60년이 된 거예요 . 그래서 올해가「방송의 날 60주년 기념일」이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kbs가 원래는 국영방송이었어요. 일제 때는, 사단법인이었는데 1948년 우리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영방송으로 됐어요. 이 국영방송이 또 공영방송으로 됐단 말이에요. 공영방송이라는 건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민을 위한 방송을 해야 되는 특수법인인데 국영방송에서 공영방송으로 바뀐 게 1973년 3월 3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안병천 > 또 50주년이
이장춘 > 그 50, 그건 국영에서 공사로 바뀐 「공사 창립 50주년」이고 방송 날의 날은 이와는 전혀 개념이 다른 날로 60주년이 되는 거예요. 올 해는 「9월 3일 방송의 날 60주년, 3월 3일 KBS 공사창립 50주년」이렇게 정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성화 > 올해를「KBS」공영방송창립 50년」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KBS」라는 호출부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요?
이장춘 >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공사되기 전 중앙방송국을 KBS전신이라고 표현하시는 분도 계셔요.
심지어 KBS 현직 사원도 올해를 KBS 50년이라고 하는 사원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그게 아니라고 일러줍니다.
「KBS 공사창립 50주년」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말입니다.
더 설명을 드리자면 해방 직후 군정청 시절부터 Korean Broadcasting Seoul, Korean Broadcasting Station, Korean Broadcasting System 등 사용되는 단어는 달랐을지라도 이니셜 KBS는 해방 직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공사될 때 정관에 한국방송공사의 영문자는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 로 명문화 했습니다.
공사되기 전에도 「KBS 여기는 자유의 소리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Seoul Korea HLKA」
「KBS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국제방송국 대공방송에서는 「KBS 여기는 서울입니다. HLSA」
해외방송에서는「KBS 여기는 서울에서 방송 해 드리는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입니다. HLSA」
그런데 hl이라는 것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세요. 「HL」을 안 쓰는 방송국은 대한민국 방송국이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방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어도 법적인 방송국은 아니어요. 내가 그랬어요. 관악방송이 「HL」를 안 쓰면 나 그 방송 안 나간다. 왜? 국가로부터 인정도 못 받는 방송에 못 나간다구요. 하하하하.
안병천 >맞습니다.
이성화 > 그렇군요. 중간에 날자가 달라져서 궁금햇어요.
이장춘 > 그런데 이것을 10월 2일로 시작할 때가 언제냐.. 1964년 10월 2일입니다. 저도 처음으로 할 때 참석했는데 그때 중앙청 옆 경복궁 옆에 진명여고라고 있었어요 여기에 『삼일당』이라고 있었어요. .그 진명여고가 큰 강당인데 삼일당이라고 있어요. 이것에서 행사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중간에 방송협회에서 한 것가지 합해서) 60주년이 된거예요. 그러면 안대표 얘기좀 듣고 내가 얘기좀 더 하겠습니다.
안병천 > 지금 말씀 내용 처음 알았어요. 저도 방송의 날 하면 이제 9월 3일로 바꿔서 60년째인가요?
이장춘 > 그건 아니고
이성화 > 헷깔렸다니까요.
이장춘 > 1964년 10월2일 방송의 날이 처음 생긴 날부터 60년이고 우리나라가 1927년에 처음 방송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그때부터는 96년을 했는데 그 중 17년은 일제강점기에 방송을 했어요.
안병천 > 그러니까 그거 빼고
이장춘 > 일제강범기에 방송을하고 또 해방이 됐어도 2년 후 1947년 9월3일에 국재적인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1947년부터 계산해서 60년이 아니라 『 HL 』 을 받은 날을 기념해서 1964년에 아까 제가 진명여고에서 했다는 행사 있잖아요. 그때부터 계산하니까 60년이 된 거예요 . 그래서 올해가 방송 60주년 기념일 이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kbs가 원래는 국영방송이었어요. 일제 때는.. 사단법인이었는데 1948년 우리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영방송으로 됐어요. 이 국영방송이 또 공영방송으로 됐단 말이에요. 공영방송이라는 건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민을 위한 방송을 해야되는 특수법인인데 국여방송에서 공영방송으로 바뀐게 1973년 3월 3일이란말이예요. 그러니까.
안병천 > 또 50주년이
이장춘 > 그 50, 그건 국영에서 공사로 바뀐 『공사 창립 50주년』 이고 방송 날의 날은 이와는 전혀 개념이 다른 날로 60주년‥이 되는 거예요. 올해는 『 9월 3일 방송위의날 60주년, 3월 3일 KBS공사창림 50주년 』 이렇게 정리하면 되는것입니다. 그것을 구분을 잘 못 하시는분들이 계시고 또 hl이라는 것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세요. 『 HL』을 안 쓰는 방송국은 대한미국 방송국이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방송이라는이름이 붙었어도 법적이 방송국은 아니예요. 내가 그랬어요. 관악방송이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방송이에요. 내가 우리 이 선배한테 그랬어요. 관악방송이 『 HL』 을 안쓰면 나 그 방송 안 나간다구요 . 왜 ? 국가로부터 인정도 못 받는 방송에 못 나간다구요.하 하하 .
안병천 > 맞습니다.
이장춘 > 그러고 이 「HL」을 인정을 받았어도 또 순서가 있어요. 맨 처음에 「HL」 받은 게 「HLKA」 그게 맨 먼저 받은 거예요. 거기서부터 쫙 이어온 거예요. 이어오다가 지역 공동체 방송, 딱 들어가면 거기에 그 호출부호가 있습니다. 지금 관악방송 호출부호 말씀해 보세요.
안병천 > hlma입니다. 저희는 ma이에요.
이장춘 > hlma에서도 또 맨 위에 지역 관악공동체방송이 있는 거예요. 그게 맨 먼저 생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 역사에 있어서 관악 방송이 지역 공동체 방송으로 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안병천 >네 그렇군요.
이장춘 > 내가 그 말씀을 대표님께서 잘 아시겠지만 제가 객관적으로 해드리고 싶어서, 해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오늘 왔어요.
안병천 >감사합니다.
이성화 >그러니까 이 관악 라디오가 우리나라 소 출력 지역 방송에 첫 번째 생겼으니까 역사적으로 안병천 하면은 이제 앞으로 서울 소 출력 방송의 첫 번째 주자로서 자리가 매겨졌네요.
이장춘 >시작이 중요하잖아요. 우리나라 네이버가 처음에는 조그맣게 했잖아요. 지금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 되고 모든 국민들이 네이버를 쓴단 말이에요. 또 카카오, 지금 안 쓰는 사람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안병천 대표가 조그마한 지역 공동체 방송을 했지만 이것이 시작이에요. 역사적으로 시작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지역 공동체 활동이 커나가면 다 안병천 대표의 후손들이에요. 말하자면..
그러고 또 이 『 HL』을 인정을 받았어도 순서가 있어요. 맨 처음에 hl 받은 게 hlka 그게 맨 먼저 받은 거예요. 거기서부터 쫙 이어온 거예요. 이어오다가 지역 공동체 방송에 딱 들어가면 거기에.. 지금 말씀해 보세요
안병천 > hlma입니다. 저희는 m이에요.
이장춘 >내가 그 말씀을 대표님께서 잘 아시겠지만은 해드리고 싶어서 제가 객관적으로 해드리는 게 더 좋을것같아서 오늘 왔어요.
안병천 > 감사합니다.
이성화 > 그러니까 이 관악 라디오가 우리나라 소출력 지역 방송에 첫 번째 생겼으니까 역사적으로 안병천 하면은 이제 앞으로 서울 소출력 방송의 첫 번째 주자로서 자리가 매겨졌네요
이장춘 > 시작이 중요하잖아요. 우리나라 네이버가 처음에는 조그맣게 했잖아요. 지금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 되고 모든 국민들이 네이버를 쓴단 말이에요. 또 카카오, 지금 안 쓰는 사람 없잖아요. 조그맣게 썼어요. 그리고 우리 안병천 대표가 조그마한 지역 공동체 방송을 했지만 이것이 시작이에요. 역사적으로 시작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지역 공동체 활동이 커나가면 다 안병천 대표의 후손들이에요. 말하자면..
안병천 > 아닙니다. 어쨌든 이렇게 좀 개념을 잡는 것 자체가 저희들이 또 어쨌든 관악의 표현 역시 방송의 날 통해서 뭔가를 되돌아보는 것이죠.. 계기가 되는 것 같아서 일단 좋은 것 같습니다.
이장춘 > 그래서 안병천 대표도 왜 그런 방송 문화 참여 안 하냐 ...그런데 거기서 이제 원래 우리가 지상파 방송끼리만 그걸 방송협회가 지상파 방송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주가 돼서 하기 때문에 이런 지역 공동체 에는 초대장은 안 가지만은 그러나 방송 문화적 의미는 다 똑같이 누리는 거예요.
안병천 > 네네.
이성화> 그렇게 해석을 해 주시네요. 여기가 생긴 지가 언제죠?
안병천> 2005년도 4월이니까 이제 올해로 19년째..
이성화 > 그러니까 1년 후면 20년이니까 대단한 과정을 밟아오신 안병천 대표예요. 그래서 걸어온 길도 보람 있는 것도 듣고 싶고 관악 라디오를 시작하고 몇 년 후에 작년인가 나라에서 소출력방송 허가를 여러 군데 내줬지 않습니까?
안병천 > 네 2021년도 벌써 이제 2년이 지났어요. 저도 놀랐는데 1년밖에 안 지난 줄 알았거든요. 시간이 벌써 2년 전이더라고요. 2021년도 때 8월경에 20개를 더 허가를 해준 거죠. 저희가 애초에 7개밖에 없었거든요.
이장춘 > 처음에 하나 관악방송이 있고 그게 우두머리였고 그 밑에 7갠가 6개가 또 생기고 그 밑에 또 생겼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안병천 대표로부터..
안병천 > 아니 아닙니다. 첫 시작은 사실은 저희들은 이제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어쨌든 7개사가 동시에 허가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냥 7개사를 같이 약간씩 좀 차이는 있지만 시험 전파 쏘는 데의 차이에 따라서 약간씩의 차이는 기껏 해봤자 며칠 며칠 차이밖에 안 나요. 그래서 그냥 7개사가 한꺼번에 시작하는 그룹 그다음에 이제 20개, 이렇게 저희들이 일단은 정리를 하고 있긴 있어요.
이장춘 > 내가 보기에는 허가 맨 앞에 있더라고요. 관악방송이
안병천 >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저희야 이제 감사하죠.
이장춘 > 내가 일부러 다 찾아봤는데 .팀이 세 곳에서 동시에 했다 할지라도 현재 활발하게 쭉 길을 걸어오고 관악방송이 처음 이렇게 해서 쭉 잘해오니까 그 영향으로 다른 데도 지금 허가를 받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안병천 > 맞습니다.
이장춘 > 그럼 그쪽에도 다 hl이 붙나요?
안병천 > 네 맞습니다. 「HL」 붙고 그다음에 허가 과정도 사실 이제 kbs mbc sbs 봤듯이 거의 유사해요. 초창기 때는 저희들은 너무 생소했죠. 시민사회에 왔는데 하는 방식을 kbs하고 똑같이 허가를 받으니까 너무 어려워 죽겠는 거예요.
이장춘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그게 허가 받으면 다 하나의 방송국인 것입니다. 방송국 허가가 안 나왔어요. 절대로 안 나왔어요. 그런데 부산에서 우리 이 선배님 근무하셨던 부산 문화방송이 우리나라에서 민간방송으로 최초로 생겼잖아요. 일본 방송이 부산에 아주 선명하게 잘 들어와. kbs보다 더 잘 들려. 그래서 정책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걸 내준 거예요. 물론 이제 우리 김상용 또 정환옥 분들처럼 수고를 하셔서 신청하고 했지만 그런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부산에서 맨 먼저 부산 방송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말씀드린 건..또 한 가지는
이성화 > 저 이장춘 국장님 노래 좀 들으시면서.
이장춘 > 예 그러세요 너무 얘기만 많이 하는 것 같네. 기왕이면 우리 아나운서가 부른 노래 하나 듣고 싶습니다. 이규항 아나운서가 노래를 불렀는데 <가는 길>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이게 김소월 시 입니다. 김소월 시면 가곡으로는 부르지만 대중가요로 부른 노래는 거의 없어요. 이건 대중가요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누가 작곡을 했냐면 서영춘 아세요? 서영춘의 형이 서영은이고 작곡가이십니다. 이분이 작곡을 했어요. 이분하고 이규항하고 친해요. 그러니까 이분이 가만히 그 곡을 만들어서 노래를 하나 해야 되겠는데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이규항 아나운서예요. 그런데 이규항 아나운서가 69년에 불렀어요 . 이 노래를 부르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이 노래를 소월 책을 쓰신 분하고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그 양반하고 연계돼가지고 노래를 찾아서 유튜브에다 올렸어요. 이규힝 아나운서한테 그 유튜브 보냈더니 몰라요. 깜짝 놀래가지고 이제와서야 자기가 노래 부른 기억이 난다면서 한바탕을 얘기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미국에 있는 90대 여성 시인한테 이걸 보냈어요. 자기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를 들어본 적이 없대요.
이성화> 함께 듣겠습니다.
이성화 > 노래 잘 들었습니다.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국장님께서는 방송의 날이 이렇게 저렇게 해가지고 날짜가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하고 여러 가지 역사적인 날짜를 어쩜 이렇게 다 기억을 하십니까? 그냥 술술 말씀을 하시는데 놀라겠어요.
이장춘> 방송에 제가 36년을 몸담아왔어요. 방송의 날 60주년 제가 40회 이상을 참여를 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면 어떡해요 제가 제1회 방송 날에도 갔었어요. 1964년 10월 3일 진명여고 거기부터 엊그제도 갔고 거기서 우리 이성화 선배님 만났잖아요.
이성화 >방송 사이버박물관에 들어가면 이장춘 국장님의 많은 자료와 땀방울과 기획력과 지식이 전부 아우러져 있는데요. 소 출력 방송 최초설립이 라는 그런 거에 관악방송 안병천 대표가 세 사람이 동시에 했다고 그래도 지금 선두 주자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18년 이상 19년을 걸어온 안병천 대표의 발자취도 한 줄기로서 존재가 될 수 있나요?
이장춘 >방송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옛날에는 kbs에 중계소라는 게 있었어요. 각 지역에 그 중계소에서 그 지역 주민들의 뜻에 따른 방송을 했어요. 편의상 그렇게 했죠. 원래는 법적으로는 그거 잘 안 되는 거지만 필요하니까 하지. 그런데 지금은 위성 시대가 돼가지고 그게 이제 돈만 들어가지고 별로 필요가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났어요. 그래서 중계소를 다 없앴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그 지역 주민들을 대표하는 공동체 방송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 방송을 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 안 대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셔야 돼요. 말하자면 선도자 원래 선도자라는 건 그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성화 > 그래서 이장촌 춘하 방송국장님하고 안병천 관악 공동체 라디오 대표, 두 분 뵙고 있으니까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하고 대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안병찬 대표도 그러고 보면 중견 방송인으로서 방송은 언론을 뺄 수가 없는데 책임감이 무거워질 것 같아요.
안병천 > 그렇죠 초창기 때는 뭘 몰랐으니까 그냥 온 거고요. 한 이제 10여 년 지나면 지날수록 방송의 책임에 대해서 더 알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20여 년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는 예전같았으면 3~4년 뒤 4~5년 이랬을 텐데 10년 뒤를 바라보는 이제 고민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후배들한테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또 지역 주민들한테 어떻게 이 관악의 범위를 잘 돌려드릴까 지금도 많이 참여하고 계시지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성화 > 여기 관악 구에 사는 분들이 관악 라디오를 많이 접하게 될 것 같아요. 여기는 큰 방송국 공중파하고는 경쟁이 안 되니까 지역의 특성을 많이 살리고 방송합니까?
안병천 > 아무래도 이제 지역의 특성을 많이 살리는 건 맞긴 한데요. 가장 큰 건 그런 것 같아요. 시민들과 지역 주민들이 참여를 많이 하게끔 하는 게 가장 큰 특징인 것 같고요. 다만 이제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건 속된 말로 이런 거 있잖아요. 제작 단가가 가장 비싼 게 역시 지역 소식을 전달하는 거더라고요. 저희 같은 경우는 그래서 지역 소식을 전달하는 것을 하루에 1시간만 전달해도 정말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일단은 저희 목표는 하루에 딱 1시간만이라도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역사회, 로컬에서의 역할을 한다라고 지금 보고 그 목표량을 채우는 데 일단은 집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장춘 > 지역 소식이라는 것은 분야가 크게 어떻게 어떻게 나눠져요?
안병천 > 가장 가까운 건 지역 주민들한테 가장 큰 도움이 될 건 역시 관악구청 소식이죠. 구청에서 행정 소식들을 전달하는 게 하나 있을 거고 또 한 축으로는 지역의 정치적 소식이나 지역에서의 그런 사회적 약자 소식들, 저희 같은 경우 지역의 다양한 소식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좀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게 상대적으로 돈도 안 되고 알아봤자 별로 가치는 없어 보일 것 같지만 사회적 약자분들한테는 너무 소중한 정보들 그런 게 좀 더 눈에 들어와서 그런 걸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걸 어떻게 잘 전달할까 또 지역사회에서는 kbs는 다양한 기자들을 전화 연결도 할 수 있잖아요. 관악구에는 전화 연결을 할 만한 지역 매체가 별로 없어요. 그렇게 있다 손치더라도 다들 바쁘셔갖고 “죄송한데 시간이 없어서 참여가 어렵네요.” 이렇게 워낙 열악하거든요. 그래서 이제 지역 소식을 전달하는 것 자체를 계속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이런 이제 공동체 라디오의 역할이지 않나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성화 > 그런데 이장춘 국장님 지금 관악 그 안에서 일어나는 지역 소식이 주민들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얘기에 들어갈지 모르지만 많은 국민의 관심사가 생길때는 그런 내용도 소극적 소식으로 취급해도되지않나 하는생각인데요. 예를들면 요즘 역사적 이야기로 이승만 박사 기념관 짓자는 얘기들이 있더라고요. sns에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그러면 이렇게 존경스럽고 국부로 모시는 분의 하와이에서 운명 하시고 한국에 이화장에서 국립묘지로 가실 마지막 시간, 그때 tbc에서 저만 현장에 나갔었거든요. 이화장에 가서 보니까 다른 방송에서는 하나도 안 나왔어요. 요즘은 언론의 자유가 된 세상이고 그때만 해도 조금 위축됐던 것 같은데 역사문제는 수십년 후에도 재론되고 하는데요 이장춘 국장님게서 방송전체에대한 정리를 하셨으니까 이승만 박사에 대한 짧은 말씀 좀 듣고싶어요
이장춘 > 이승만 대통령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완전히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좋아하시는 분 애국지사 독립운동가가 이 나라 건국 대통령 이렇게 추앙 하시는 분도 계시고 , 독재자 고집쟁이 이렇게 비하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참 어렵지만은 저는 이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아주 자세히 글을 써놨어요. 그랬더니 이 글을 본 사람들이 아주 마음에 와 닿는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해요. == 나는 세상 살면서 이승만은 나쁜 사람이다 박정희 독재자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여기(방송박물관) 와서 글을 보니까 또 새로운 면을 알았다 참 고맙다 대한민국 근대사를 하는 데 있어서 이승만 박사의 역할을 모르고서 참 부끄러운 세월을 나는 지나왔다== 그런 얘기를 하신 분도 계세요.
이성화 >그렇군요. 시대 시대마다 움직이는 그 내용이 참 다르지 않습니까? . 제가 이 화장에 나가서 이승만 박사 영구차에 실려지기 직전에 그 안방에서 장의사에서 관을 모시고 나올 때 그 장면이 떠오르고 요즘 활발하게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관 짓자는 얘기가 적극적으로 돌기 때문에 방송박물관장님으로서 기억을 조금 듣고 싶었던 거예요.
이장춘 >저는 이승만에 대해서 하와이에 가서 세상 뜨실 때까지 또 장례할 때까지 또 여기 국립묘지까지 다 나름대로의 사진이랄지 자료를 마련해서 글을 썼습니다. 목소리랄지.. 잠시 이승만 대통령 목소리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옛날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 있을 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야 되잖아요. 이 얘기를 잠깐 듣고 또 설명 좀 할게요. 지금 이승만 박사 목소리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겠습니까?
이성화 >네.그러면 녹음 들려주세요.
====나는 이승만입네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네다. 어디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제일 중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천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사이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악행과 학대를 받는 우리 친애하는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
이성화 > 안병천 대표님 들어보니까 참 이승만 대통령 옛날 그 음성 또렷또렷하고 그렇죠?
이장춘 > 이승만 박사의 이 방송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놓여 있을 때 우리나라가 독립을 해야 되겠다고 미국에서 외치는 소리예요. 그런데 이것을 국내에서 이런 방송들을 듣고 독립 운동가들에게 전했어요. 누가 전했겠어요? 그 당시는 아무도 못 듣습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그 특수한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들어요. 그래가지고 이것을 독립운동가 들에게 전했거든요. 그러면 이 독립 운동가들은 이걸 기초로 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게 일본 주장하는 것만 알지 아무것도 몰라요. 일본이 이긴다는 것만 알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 몰라요. 그러면 이것을 갖다가 이런 방송을 듣고 전파하는 독립운동가 들은 그것을 기초로 해서 독립운동을 해요. 그래서 소문이 자꾸 나요. 그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놈들이(일본) 큰일 났거든요 . 자기들 주장만 해야 되는데 이거 자꾸 음지에서 많이 퍼져 나가니까 방송국 주변으로 수사관들이 확 둘려 싸가지고 계속 수사를 했어요. 어디서 이런 소문들이 나오느냐. 말하자면 국제소식 같은 거, 어디 필리핀이 미군한테 점령당했다 무엇이 어쨌다 하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그래서 방송국을 집중적으로 총력을 기울여서 수사 하니까 안 잡힐 수가 있어요? 그래서 잡혔어요. 단파로 들은 사람들이 잡혔어요. 잡혀가지고 거기서부터 이제 막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또 고문을 해서 찾아서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 조문자 아나운서 여사 아버지도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을 했잖아요. 잡혀서 감옥 가고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성화 > 단파 방송이죠.
이장춘 >항일 단파 방송 연락 운동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래서 그런 독립운동을 한 거예요. 이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여섯 사람이 옥사를 했어요.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면 옥사를 했겠어요. 350명이 끌려갔는데 75명이 형을 살았어요. 이런 아주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다고요. 이게 일제 강점기 말에 조선어문회 사건이라는 게 있어요. 이 사건하고 이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사건하고 제일 큰 지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이성화 >근데 이장춘 국장님은 그런 많은 자료 이런 육성까지 언제부터 다 이렇게 보관을 해 오셨어요?
이장춘 > 참, 요 얘기 하나 말씀드릴게. 이 녹음물이 경무대에서 잠자고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가 가져왔지만 잠자고 있었는데 그때 경무대를 출입하는 기자가 누구냐 한영섭 기자예요. 한영섭 기자는 혹시 아실는지 모르지만 강영숙 아나운서 부군이기도 해요. 올해 96세입니다. 그 양반은 방송인으로서는 최초의 종군 기자가 돼가지고 이번에 6.25 참전 용사 영웅 칭호를 받으신 분인데요. 이분은 6.25 때 청진까지 가서 흥남 철수 작전 아시죠? 흥남 철수 작전에 있어서 " 우리는 안 가도 좋으니 이 흥남 사람들을 배에다 태워서 보내야 된다."고 간곡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호소했던 그런 분이에요. 그래가지고 그분이 경무대를 출입했는데 그분이 이것을 방송국으로 가져왔는데 이게 상태가 안 좋으니까 방송국 엔지니어들이 이것을 또 상태를 개선해 가지고 그래서 레코드를 만들어서 전해온 것을 제가 제 블로그에다 처음 올렸어요. 아주 사람들이 이걸 듣고 환호를 올리는 거예요. 한영섭 회장님도 사람들한테 그 얘기를 듣고 아주 흐뭇해가지고요. 그 양반 이름도 내가 올려놨으니까 . 이러이러해서 이게 나왔다. 그래가지고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요. 이 소리가. . 그런데 요즘은 보편화돼가지고 여기저기 블로그에 많이 올라 있더라고요.
이성화 > 6.25 참전 용사 몇 분 안 남으셨는데 나라에서 그분들 좀 잘 대접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그런 자료가 지금 저기 이장춘 국장님은 어떻게 다 보관하고 계세요?
이장춘 > 제가 보관하는 방법이 있고요. 저한테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성화 아나운서 그러니까 다 이렇게 모아서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니까 자료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이렇게 주신 거 가지고 한 거예요. 그리고 아까 어차피 이승만 박사 얘기가 나왔으니까 얘기인데 이승만 박사가 여기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 사형 선고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감형되고 해가지고 나중에 7년으로 되고 또 참 주위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서 풀려나와가지고 미국에 갔어요. 미국을 갈 때 그 미국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고 이런 얘기를 하고 그 왕의 친서를 전달하고 그러고 독립운동을 그곳에 했어요. 그런데 임시정부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김구 대통령이 이렇게 김구가 표인 줄 알더라고요.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에요 그런데 그때는 처음에 국무총리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제도를 원해요. 그래가지고 대통령을 만들어서 대통령을 했는데 이 양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중국에 그 상해에 있었거든요. 임시정부가 중국에서만 있어가지고는 엇이 안 돼야.. 그러니까 일단 임시정부에서 떠나서 미국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고요. 외교위원장이라는 자격으로 . . 그래서 프랑스고 어디고 유럽이고 전부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제 미국에는 그다음에 그 임시정부에는 박은식이라는 분이 있다가 나중에 또 김구 선생이 하고 김구 선생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런 역할을 했지만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을 했어요
이성화 > 그런데 지금 이장춘 국장님 말씀이 역사 강의 듣는 것 같이 시간이 다 돼서 아쉽긴 한데요. 안병천 대표님하고 다음 월요일에 한 번 더 수고해 주시면 감사드리겠고 희망곡 하나 오늘 듣고 끝내기로하시죠.
안병천 > 저는 그냥 뭘 들려드릴까 하다가 갑자기 최근에 다른 라디오에서 들었다가 ‘맞아 내가 참 어렸을 때 좋아했었던 마이클 잭슨 노래를 요즘에 너무 안 듣고 살았네’ 싶어서 같이 듣고 싶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영화 프리윌리라는 ost로 수록된 곡이거든요. 윌류비데어라는 곡 함께 듣고 싶습니다.
이성화 > 네 듣겠습니다. 그럼 오늘 두 분께 감사드리고 여러분에게 마지막 노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윤항기가 부르는 –노래하는 곳에-
지금까지 기획 진행 이성화 기술 편집 김우신 프로드였습니다.
이 방송은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 미디어 재단의 후원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출처] 2023년10월2일.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대표님,안병천 관악공동체라디오대표님 출연,-인생은 아름다워- 쾌지나 청춘 FM100.3Mhz 관악공동체라디로|작성자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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