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성실 대한민국 순직방송인 1호 · 1951년 7월 29일

이장춘 2020. 1. 27. 15:08

 


    

천재라고 일컬었던

방송기술기사 이성실 (李成實)!

6.25전쟁 중 부산피난길에서 비상송신기를

제작하다가   감전사고로 23살의 꽃다운 청춘에

세상을 떠, 대한민국 순직방송인 1호가 된, 이성실! 

1951년 최초의  방송국장 (放送局葬)으로 례를 치룬

주인공이다. 방송국 최고 책임자 공보처장 이철원

(李哲源)을    장의 위원장으로 하고 노창성

중앙방송국장이 집행위원장으로

장의를 주관했다.

  

  

 

노창성 장의 집행위원장(중앙방송국장) 추도사 그때의 모습

 


  

 

위 이성실 묘에서의

추모 현장과 시인 노천명이

묘비(아래)가 세워졌고  부산

일보에는 아래 부고가 실렸다.

 

 

부산일보 訃告 원문

    

 

本局 局員 李成實技士는

단기 4284년 7월 29일 오후

6시 15분 순직하였기에 玆以訃告/

단기 4284년 7월 29일/공보처

방송국장 盧昌成/

 

단기 4284년 7월 29일

오후 6시 15분 순직한 故 李成實

기사의 장의는 공보처 방송국 국장으로

집행함./영결식 7월 31일 오전 시/영결식장

방송국/장지 釜山市 共同墓地/단기 4284년 7월

29일/  葬儀위원장 李哲源/부위원장 李軒求/

집행위원장 盧昌成 /  위원 李健赫 金昌朝

李載坤 宋永浩 이홍직 金東益 돌겟다

大尉 權五鎭 李寅觀 金昌模 이규일

甘次昆 李元英 陳承弘 李鎬永/

主禮 盧震현 牧師

    


 


 

묘비문 / 노천명

    

 

마지막 1초까지 나리위해 바친

순직청년 李成實이 여기 누었다.


송신기를 고치던 손이 감전돼

스물 세살이 꽃봉오리 모양 꺾였다.


자유의 소리 大韓과 함께 영원히 있을 그대

동지들의 동지들의 꽃다발을 안고

고이 쉬시라.

단기 四二八五년 칠월 일

   



이성실의 삶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 장로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성실의 뛰어난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 등지에서 최신 서적을 구하는 등

최선을 다했고 그 재능이 널리 알려져

이리방송국(후에 전주로 옮김)에

입문한 것이다.

 

이리 공업고등학교시절

이리방송국에 입문한 이성실은

1950년 서울공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 중앙방송국    연희송신과로 옮겨

방송 송신업무를 수행하던 중 6.25를 맞아

최후까지 방송을 내 보내고 김도현(金道鉉)

소장 승인 하에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남은

김도현 소장은 납북되었다고 하지만

한강변에서 공산군에게 학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1950 6월 27일 밤 12시!

중앙방송국   방송요원들은

방송을 종료하고 가까이 들려오는

공산군의 포성을 들으며 방송국을 철수

피난길에 올랐으나   중앙방송은 27일 아침

까지 울려 퍼졌고 피난길에 올랐던 방송인들은

안양 부근에서 이 방송을 듣으면서 영문

몰라 어리둥절했고 또 한편으로는

감격에 벅찼다고 했다.

 

1945년, 방송국에

들어와 일생을 방송과 함께 한

노정팔은 저서「한국방송과 50년」

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28일 새벽 새날이 밝아 5시,

아침방송시간이 다가왔다. 이성실은

아무도 없는 기계실에 들어가 송신기를

가동시킨 다음    정동 연주소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비상 스튜디오에

준비 해 두었던 음악을 방송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공산군에 들어갔으나 방송은

28일 아침 7시 45분까지 계속되고

씩씩한 행진곡은 오래 울려

퍼졌던 것이다.

 


 

 


부산 피난방송국에서는

만약에 대비해 제주에 방송국을

새우기로 해서 1950년 8월 7일 이성실을

포함한 제주방송국 개설요원으로 22명을

인사발령 하고 8월 14일부터 공사에

착수해서 9월 21일 방송을

내 보낼 수 있었다.

    

 

   


9.28수복 후 연희송신소에

복귀한 이성실은 1·4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에 가지고

갔던 500W 송신기를 이용해서 제주

방송국의 출력을 증강할때도

함께 했다.





또 단파송신기를 각 방송국

링크용으로 개조하기 위한 작업을 하던 중

감전사고로 세상을 떠 짧은 생 · 파란만장한 삶을

순직이라는 영예로움으로 세상을 마쳐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국가나 사회로부터는 순직을 인정받지

못했고 묘나 묘비 등은  온데 간데 없으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니     그의 넋은

아직까지도 편히 잠들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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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과 제주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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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제주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http://blog.daum.net/jc21th/1778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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