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윤백남 尹白南과 방송 윤교중尹敎重

이장춘 2019. 5. 12. 06:51

 

 1932년 10월, 정동연주소 정문 앞에서

방송부 직원들, (성함이 없는 분은 일본인) 


      

윤백남! 경성방송국,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전담방송,    방송과장,

우리나라 극영화의 시작 「월하(月下)의 맹서」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극 영화의 원조!     복혜숙,

이경손 등 수많은 연극 영화배우를 배출, 경성방송국,

방송극의 기반을 굳혔던 윤백남 尹白南 Yoon, Baek-nam,

교중(敎重)은 그 시대에 사용하던 야담이라고 하던 말을

사화 史話라는 말로 승화시켜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반열에 있던 문필가요,

연극, 영화인! 문화예술인이었다.

    


윤백남 尹白南과 방송 윤교중尹敎重


 

1927년 2월 16일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 4월 16일

우리말 전담방송,  제2방송 실시를 앞두고

1932년 그 책임자로   윤백남을 영입해서 초대

조선어 방송과장에 취임했다..   제2방송부장을

약속받은 것이었지만  준비기간    6개월간이나

발령을 하지 않다가     방송실시 직전에 나온

조선 방송협회의 사령장은  제2 방송부장이

아닌 제2 방송과장이었다.      일본인

방송부장 밑에 조선어 방송과장

직책을 둔 것이다.

  



  

1932년 10월부터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33년 제2방송의

문을 열어 1933년 10월까지 우리말 방송의

기틀을 마련하고 제2대 방송과장 김정진에게

직을 물려주고 방송국을 떠났어도 그의 방송을

아끼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     1954년 세상을

뜰 때까지 때로는 방송 책임자로, 출연자로

이러 저런 인연을 맺으며 초기방송

역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올해로 (2019년) 한국영화

백년을 맞는다.    이것은 1919년

단성사에서 최초로 상영된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Fight for Justice)」 로 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극영화는 1923년

윤백남의 「월하(月下)의 맹서」로

부터 시작된다.

    


 


1888년 10월 4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학을 했고 1910년

도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11년

보성전문에서 근무 한 적이 있다.        1912년

극단 「문수성」을 조직, 제1회 공연을 원각사)에서

가졌다. 새문안 교회 앞에 있던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그 자리에

가면 작은 안내 석비가 있다.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1916년 반도문예사를 설립,

월간지 예원을 창간하는 한편     극단

예성좌를 조직, 단성사에서 초연을 가졌다.

선생님이 쓴 최초의 현대소설 대도전은 널리

알려져 있고 KBS-TV에서도 드라마로

각색되어 방송된 적이 있다.

 

1917년 백남(白南)프로덕션을

창립해서,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제작

했고 1920년대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이 창간되면서 신문에   많은

글을 썼다.    1922년에는 민중극회를

조직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1929년부터 경성방송국에

자주 출연해서 만담(史話)에 우리나라

제 1인자로 자리를 굳혔고 1931년 7월에는

극예술 연구회를 결성해서   방송극 분야에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님의

방송 야화는        단순한 야담이 아니고

역사에서 소재를 얻는 얘기   國史로

역사속의 실화여서 야화라는

말을 사용치 않았다.

      

드높은 명성과 덕망으로

제2방송부장 보직을 약속받고 방송국에

오셨지만 약속이 달라졌어도   일체의 불만이

없는 속에서 과원들에게도       잘 대해 주셔서

방송인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으면서 직무를

수행하셨다.      우리말 방송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편성, 제작하면서 새로운 방송 기틀을 마련했고 육당

최남선을   자주 초청해서 우리나라 산수와 역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바로 세워가려는 노력을 기울

이시는 등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말 전담

방송의   초창기 방향을 잘 잡아

주셨다는 의미가 있었다.

    


 


선생님은 1954년 9월 29일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 당대 손꼽히는

연극인, 영화인, 소설가, 史話가로 눈부신

활동을 하셨으며 신익희 선생님이 국회의장을

할 시절 잠시 국회의장 비서실장도 지냈다.

선생님이 방송국에 계실 때의 더 자세한

얘기를 직접 모셨던 이혜구님의

글로 알아본다.

 

 

이혜구 선생님 글

1956년 11월 <방송> 지

 

    

 


그분은 눈웃음을 치시고 코밑에

단정한 수염을 기르시고 미소를 띠우

시고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선생의 마음씨도

그 얼굴같이   둥글고 춘풍 같고  명랑 하시였다.

내 기억엔 과장이 노기를 띠고 직원을 꾸짖으시는

일이 없다. 또 선생이 이사장 실에서 불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나 한두 시간 후    다시 자리에 오셨을

때나 태연 하셨다.   ..   한번은 과장의 상석에

있는 일본인 부장이   “윤상의 이사장실대와

하이 하이또 고다에 낭아라      가엣데와

(즉 2층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삿빠리 과원니 시라생가라네”라고

두덜두덜 우리보고 하면서 이사장의

잔소리를 윤 선생님 대신 전하였다.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과장을 모신 과원은 참 행복하였다.

종알대는 이사장의 잔소리 굵은 소리를 모두

선생의 하이 하이 대답으로 한손으로 막아 놓으시고

돌아가서는 그 사정 모르는 벽창호 같은 말을 과원에게

한마디 전하지 안하시니 그 아래 사람이이 오직 좋아!

우리뿐만 아니라 그 윗사람만 하더라도 자기 흉이

과원에게까지 퍼지지 않을 적이 더 많았을

테니 도리어 윤 선생에게 치하했어야

옳을지도 모르지!

 

선생이 애초엔 제2방송부장으로

대접 받을 약속을 받으시고 이중방송 실시

까지는 사령장도 없이   집무하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바람이 불었는지 이사장의 변덕이었던지

그전 약속과는 딴판으로 과장으로 떨어지셨다.

이사장의 이 같은 식언은 약과이었다.

 

이러고 보니 우리말 방송은

한방 살이 하다가 딴채로 살림 나간 게

아니라 겨우 뜰아래채로 옮긴 것 밖에 안 되는

샘이었다. 선생은 퇴근 후에도 매일 중앙일보의

연재소설을 집필 하시느라고 과로 하시면서

신경통으로 고생하셨다.

 

하루 이틀에 낫는 병이 아니라

오래 자리를 비는 수도 있음직하건만

방송 간부는 가끔 양양댔다. 하루는 사무

연락 차 심부름꾼이 댁에 갔더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할 환자가 댁에 안 계셨다. 방송국에서는

그게 웬일이냐고 소동이 났다.    그 사정을 알고

보면 지극히 간단하였다. 집은 협착하여 더워서

누워 있을 수 없어서   경성 그라운드 넓은

야구장의 맨 끝 구경꾼도 없고 시원한

스코어보드 뒤에 들어 누워 잡지나

읽고 더위를 잊으시는

까닭이었다. 

 

선생은 미소를 띠우시면서

시내에서는 거기가 제일 시원한

곳이라고 가르치시고 가깝고 값싼 피서

발견의 기쁨을 자못 금할 수 없으신 듯하였다.

선생은   제2방송을 낳고   그해 가을에 방송국을

떠나셨다.    근 1년 동안 선생 밑에서 그 부드러운

마음의 태양을 쏘이면서 유쾌하게 일 할 수 있었다.

그분은 연극 영화, 레코드 계에서 거의 초창자 였을

뿐만 아니라 방송계에서도 초대 방송과장이었고

또 야담방송에서도 제1인자였다.

 

소설을 쓰시는 분이라 그 솜씨로

대화로 얘기를 살릴 뿐 아니라 클라이막스로

차츰 차츰 이끌어 가서 그분의 야담은 다른 분들의

옛날 얘기와는 다른 한 예술품이었다. 선생은

한번 남모르는 고심을 술회 하셨다.

 

야담 방송을 한때 가량 눈을 떨고

방에 들어 갈 때란 대목을 방송 하려면 비록

청취자가 볼 수는 없지만 방송자가 손으로 실제

마이크 앞에서     툭 툭 눈 터는 시늉과 소리를

내고 나서 “눈을 떨고 방에 들어 갈 때” 라고

말 하여야 그 어조에 실감을 띠게 할 수

있다고 일러 주셨다.

 

그 분의 능숙한 기술 뒤에는

이런 細細한 조심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선생께서 노심 작성하신

친필의 제2방송 모의 프로그램이

지금도 눈에 암암하다.

 

 

1956년 11월 <방송> 지에 실린

글이었습니다.



선생님이 1920년 5월 4일 부터 동아일보에

연재 하신 글 열편중 제 1 편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