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KBS부산방송국 TV방송 개국비화 이규항 아나운서

이장춘 2017. 8. 19. 18:12

 

 



1972년 11월 15일 부산 TV방송국이

지역방송으로는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1935년 부산방송국이 창설된 이래 라디오 방송만 

해왔던지라 TV방송을 할 수 있는 방송요원이 없어

 부득이 본사의 지원으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규항 아나운서가    본사 파견 팀의 책임자로 선발되어

 프로듀서 한사람과   엔지니어   다섯 사람이 현지로 가

4개월간에 걸쳐 직접방송에 임하면서 TV방송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서 오늘의 부산TV방송 기초가 확립

되었다. 오늘 글은 이규항 아나운서가

45년이 지난 그때 그 4개월간

추억을 더듬어 쓴 글이다.





이규항 아나운서의 KBS

방송생활 중, 지역에서 활동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진솔하고

 상세하게 쓴    4개월간의 생활과 특히 부산

방송국이 처음 TV방송을 실시하면서 행정기관의

무소불위 행정관행으로 파괴되어가는   한려수도의

현장을 고발하는 특집방송을 자체방송은 물론 전국방송

까지 실시함으로서 그 아름다음을 지켜냈던 비화 등이

담긴 자칫 사라 질 뻔했던 얘기들이 이 글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써 주신

 이규항 아나운서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올린다.



KBS 부산방송국 TV방송개국 비화 이규항 아나운서


 

부산 TV 개국을 앞두고 있던

1972년 11월 초에 나는 책임 인솔자(?)

 파견되었습니다. 나의 당시 직급은 방송관보

 (지금의 사무관)였습니다.      동행했던 방송인은 

김성순 PD와 5명 정도의 엔지니어로 기억 됩니다.

 그때 나는 결혼한 지 1년이 된 시절이라서 마음에

 내키지 않는 발 이었습니다.     그 무렵

KBS 부산방송국은     김득성 국장님,

 방송 과장 서용수, 기술과장은

박한국 씨였습니다,



역사적인 KBS 부산 TV 테잎커팅



 방송과에는 무골호인 황희두씨와

붙임성의 성격을 가진 문수복씨 보도실에는

 61년도 저와 KBS 입사동기인 이기우 형(다혈질의),

강직한 성격의 진한석 기자와 두주불사의 양영곤 기자가

 떠오릅니다. 아나운서실에는 김무중, 로맨티스트 윤두식.

애교가 넘치는 강미란 그리고 채연식 아나운서가

생각납니다. 모 아나운서는 TV 개국을 앞두고

성형수술 했는데 아나운서들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부산방송국 TV개국 첫 방송실황 카메라 2. 에

 비친 이규항 아나운서  뉴스진행 화면



서울방송 요원들의 파견근무

발령은 교육 차원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첫 방송은     12시 뉴스였는데  나는 중견

아나운서     방송 공포증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된 사람 이었지만 일찍부터 몰려오는

 인파에 주눅이 들어 숙직실에 누워서

호흡하면서 마믐을

진정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인사들 가운데는

서울에서 내려온 문화공보부 홍경

차관 (윤주영 장관은 며칠 뒤 격려차 방문)

 정해식(丁海植) 경상남도지사, 박영수 부산시장

 부산의 모든 기관장과 유지들 그리고 서울의

대한뉴스 팀과 서울과 부산의 각신문사

기자들이 취재차 모였습니다.





위 : 부산 TV 첫방송을 지켜보는 모습

홍경모차관, 김득성 국장, 이기우기자 등의

모습이 보인다. 스튜디오에서 이규항 아나운서가

뉴스를 하고있다. 아래 : 개국방송때 참석치 못했던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며칠 후 격려차 방문

이규항 아나운서와악수를 나누고 있다.





나의 임무는 매일아침 국장실

회의참석 하는 일과 뉴스와 프로그램

 진행자였습니다. 어느 날 회의에서 있었던일,

방송국 옆에 ‘KBS 제과점’이라는 가게가 있어

상호를 갈아달라고 항의를 하니까 주인의 답변

 「나 이름이 김복순이라고 머리글자를 땄습

니다」라고 하여 한동안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었는데    한참 뒤에야

 바뀌게 되었습니다.


 황희두 선생의 자택은

 광복동 입구에 자기소유 빌딩

옥상에서 사셨는데 나는 그분의 호의로

바다가 보이는 특실 창가 방에서 약 4개월간

무료 숙식을 하였습니다. 황 선생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분이었는데 마음도 너그러워서 서울

에서 출장 온 본사 직원들에게 자주

저녁 대접을 하였습니다.


여담으로 한 마디 황 선생 아들

 「원찬」이가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당시 유명했던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라는

노래를 소파에서 춤을추며 노래하다

 넘어져 한동안 붕대감고

 다녔습니다.


그 시절 서울이나 지방의 아나운서와

 PD들은 퇴근 후 거의 매일   음주의 풍속이 

있었습니다.  부산방송국에서는  광복동과 남포동이

「酒무대」였는데 어묵 안주전문집 「초롱」이 단골이었고

주머니가 넉넉한 날은  일식집「樹林」에 들르기도 하였는데

   어떤 날은 2차로 막 개발이 시작 된 먼 거리의「서면」까지도

 갔고 겨울바다를 감상한다고 객기로 해운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취향의취객을 맞이하기 위해

모래사장 한 가운데 제법 큼지막한 프라스틱 주점

 있었습니다.우리 일행은 앰프 기타반주에

 맞추어 안다성의 「바닷가에서」를

주제가로 불렀습니다,


제가 매일 음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TV 뉴스를 보고 반갑다. 고 찾아오는

고등학교와 대학 심지어는 사업차 내려와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 덕분이었습니다. 우리 방송인들이

다니던 술집은 대체로 싸구려 선술집이었고 어쩌다

술을 사겠다는 스폰서가 있는 날에는 5인조

밴드가 반주를 해 주는 무대가 있는

 맥주홀 일 때도 있었습니다. 


 무대에서는 전속 가수의 노래가

끝나면 손님 들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제가  노래를 하면 반드시 앵콜이

 나왔습니다.  네잎클로버 (1968년 취입,  ‘69년

무궁화 대상 남자 신인상 수상)를 부르고 여러번의

신청곡이 나왔을 때 주인 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부산에 있는 동안 사례금은 충분히 드리겠으니

전속 가수가 되어 달라는 간청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신혼 초 나는 서울에 있는

집에 전화가 없어 소식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상경 길에 그동안의 미안한

마음을 독일산 비로도    (밀수품이 많았음)

치맛감을 사 들고 올라 와 나의 그동안의 미안한

 마음을 아내에게 전달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깝게

 지냈사람은 불의를 보고 못 참는 전형적인

 기질의 「진한석(陳漢錫) 기자였습니다. 


당시 정국은 유신체제의 삼엄한

「군인 정치인」의 시절로 모든 뉴스는

 부산 국에 파견 나와 있는 요원들 검열을 반드시

거쳐야 방송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는 묻혀 버릴 수밖에 없는 일화입니다.   왜냐하면

 유신체제 政局이었기 때문입니다. 陣기자와 나는 시국관이

비슷했습니다. 나는 4.18 의거의 주역들을 동지로 둔

 30대 초반의 비분강개 청년이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마을 길 넓히는 바람직한

 일면도 있었으나 자연을 파괴하는 몰상식한

새마을 운동도 있었습니다.   부산방송국 책임자를

 두 번 역임하셨던 故 仁泉 장기범(張基範)의 말씀대로

 진 기자와 나는 「술도 마셨지만 일도 했습니다.」 당시

 「통영은 세계적인 미항인 나폴리와 시드니와 비견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진한석 기자가 심각한 표정을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요즘 통영항 입구 우측의 기암괴석

을 깨부수어 바다매립을 하는데 고발 뉴스 기사로는

 약하니 특집 기획을 하자는 건의였습니다.


  진 기자가 정식 채널로 건의하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직급은 방송 과장과 같았으나 나는 명색이

 부산 KBS-TV개국 요원으로 손님 대접을 받아 국장님도

 언제나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었습니다. 나는 즉시 진 기자

의견을 받아드린 후 김득성 국장에게  허락을    받았습

니다.   「오순오 촬영기자 (고인) 와 3인이 한 팀이

 되어 출장을 떠나기 전 니의 기획의도를

 진 한식 기자에게 전했습니다,


우선 시청자들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일본     「세토나이카이」보다

 아름답다는   한려수도 아름다운 명승지를

 찍읍시다.  내레이션의 글은 당연히 진 기자가

 쓰는데   다음의 문구는 반드시 넣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었을 때 나무는

다시 심을 수 있으나 기암괴석(奇巖怪石은

 심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반부의 배경음악은

「자크오펜바흐」(독일 태생 프랑스

작곡가)의 「뱃노래」로 하고 후반부는

참혹하게 파헤쳐진 몰골의 현장 (채석장)을

보여주자고 하였습니다. 우리 팀의 출장지는

 남해대교까지였는데 주로 후반부의 그림화면은

 통영으로 「통통배」한대를 대절한 후 기암괴석

 채취 장면을 찍은 후 그 돌을 바다에 매립하는

 장면을 촬영하였습니다.   나는 중견 아나운서

 인데다가  부산 KBS-TV에서 매일 뉴스를

 했으므로 얼굴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통영은 일정 때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조경이 잘된

지역입니다.     통영시에서는 수십년

 플라타너스를 베어내고 옆으로 퍼져 자라는

「호랑가시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우리 팀은

육지의 장면도 촬영하였습니다. 통통배 주인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애향심

(?)에서 「이 아무개」 아나운서와 두 사람의

 행적을 통영시에 보고했던 듯 합니다.


우리 일행(진한석 기자.

오순오 촬영기사)은 출장비의

 형편상 호텔에는 갈 수 없어 장(莊)급

여관을 들어가는 순간 「고양이 trauma」가

 있어서 내가 질겁을 하고 뛰쳐나오니 두 사람도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싫어하는 동물이 있는데 90% 이상이

「뱀/쥐」라고 합니다. 저의 고양이 trauma는

 거의 모든 아나운서들이 알고 잇는데

 세익스피어도 저와 같다고 하여

 위안을 하고 있습니다.


특집 팀은 나 때문에 불편한

전화가 없는 여인숙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들은 이야기인데 郡內숙소를

통영군의 전 간부가 샅샅이 뒤졌으나 전화가 없는

여인숙에 있는  우리 팀은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의 고양이 트라우마가 우리의 일을 살려준 셈입니다.

특히 진한석 기자 (사천출신/자택은 삼천포)의 사돈이

 통영시 간부로 있었기 때문에 만일 저의 일행이

발각 되었다면 매수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취재중 한려수도에서 촬영한 사진

통영 앞바다에서 왼쪽부터 오순오, 이규항

진한석 아래는  준공되기 전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규항 아나운서사진. 왼쪽  한구간 상판

남아있는 상태로 준공이 임박했음을 말 해준다.

남해대교는 1973년 6월 22일 개통되었다.





 출장을 끝내고 부산으로 들어와

진 기자가 쓰고   제가 내레이션 한 특집

(30분)방송이 방송되자 경남도청은 긴급회의를

하는 등   초상집 분위기로 KBS 부산방송국장에게

재방송을 만류했으나 나의 고집으로 재방송을 하였

습니다. 서울 보도국의 김도진 차장이 Tape를

보내달라고 하기에 보내주어 전국 방송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방송 위력으로

 당시 통영시장 (K모씨)은 좌천

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진해에 머물고

계셨는데 통영 관광호텔에 투숙 일정이

 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광호텔 바로

맞은편 언저리  기암괴석이 사라지고 시뻘건

흙만 보이게 되었습니다.       통영시는 또 다시

 비상이 걸려 통영시내 모든  양복점에서 옷 만들고

버린「짜투리 헝겊 (일본말로 기리빠시)을 있는대로

 모아 「바위산」이    아닌       「흙덩어리 산」에

 눈가림으로   덮어놓은 후 콤프레셔로 초록색

페인트를 뿌려 위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다행히 오시지

않고 상경 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여담

부산 KBS 주당들은 酒舞臺가

자갈치 일 때도 많았습니다. 우리들

 봉급으로 매일 매일의 술값을 충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酒席의 주제는 늘

같지 않았습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늘 보는

 「멍게」의 어원을 서울사람인 제가 부산

친구 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국어학을 좀 한답시고

 털어 놓았습니다. 「멍게」는 방언

이고 표준어는 「우렁쉥이」라고 하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리고 「멍게」는

외관상 수류탄처럼 생긴데다가 붉은색을 띄기 때문에

해산물 같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해서 기를

 「이 뭔기요?」했던 것이 「멍게」가 되었다고 하니

 주석의 친구들이 재미있어 하였습니다.


연이어 취흥에 겨워

즉흥시를 지어 읊으니 술김에

 좋다고 하였습니다. 


 「原色의 바닷가,

原心의 마음씨,

 原音의 사투리

부산을 배운다.」


 이 즉흥 졸 詩를 서울의 지인

 平步 서희환 (한글 서예로 최초의

대통령상 수상자) 선생에게 보내 작품을

 받았습니다.   그 작품은 부산시청으로 가

시장에게 선물한 후 상경 하였는데 지금도

부산시청에 걸려 있는지 궁금합니다.





위 : 개국방송 12시 뉴스에 이어 방송된

 프로그램 강미란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되었다.

아래 : 처음 TV방송을 실시한 부산 초량 신사옥

그 이전에는  1935년 개국이래 부산항과 영도가

보이는 복병산 중턱의 사옥에서 방송을 했다






부산방송국 TV방송 개국무렵 사진을 골라


1970년 부산방송국 사원들


왼쪽부터 채연식, 김무중, 황하주 구연도,


신창기, 양영곤, 구연도



 

TV기술 조정계장을 하셨던 오승룡님이

부산 TV개국과 진해군항제를 계기로 부산에

와서 촬영한 사진 번호따라 1-지찬수, 2-한백수,

3-김병환, 4-안영순, 5-오승룡, 6-민흥식,

7-팽광철,   8-이정오,   9-이관종,

10-고윤기, 5,6뒤 이만희(운전)




구연도(聖南) 전 부산 사우회장님

2019. 3. 3 

 

오랫만에 또 보니 옛날을

회상하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여

러가지 자료를 통하여 초량동 이전 TV개국

기념 방송 등 이규항 아나운서의 편지도 공개했네요.

거기에 나오는 진한석 기자는 저와는 초등학교 동기인데

오랜 전 세상을 떠났고요~~특히 녹음기 메고

시외 버-스타고 "새마을 사업 실적"

취재하느라 고생 많이 했습죠.

감사합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 2017.08.20 12:25  
  • 이렇듯 현존 해 계시는 방송역사의
     인물들을 이 블로그에 조명하시고 기록
    으로 남기시는 일들을 춘하추동방송에서
     다루시는 국장님의 깊은 뜻과 열정과
     노고에 큰 박수로 응원을
    보냅니다.



    강미란 아나운서님 글


    이규항 실장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미쳐 몰랐던 사실들, 그리고 이실장님께서

     그렇게 젊은 신 혼때 오신 것도 몰랐어요.

    이장춘 국장님 감사합니다. (굿)



    황인우 아나운서님 글 


    참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글이네요초창기 방송인들의 노고,

     아나운서가 언론임임을 입증하는 귀한

     글 쓰신 선배님이나     올린 분이나 제가

    선배님으로 부르고 있으니       자랑스럽습

    니다 이런 이야기를 지면의 한계로 아나운서

    클럽회보에 실을 수 없으니   안타깝고,

    긴 글 그대로 육필 원고까지 실을 수

    있으니 블로그에 질투납니다



    차기정 아나운서님 글


     

    이국장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국장님께서 올려주시는 귀한

     글과 소중한 자료들.. 감사한  마음

    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하시는지놀랍습니다.


    마음으로부터의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셔서 우리

       아나운서클럽과 한국 방송계에   

    더 많은 기여를 부탁

    드립니다. ~~



    윤성원 아나운서님 글


    이규항 선배님! 정의와

    의협심등 주위에. 모든분들은

     잘 알고 있지요. 한 시대를 선도하며

    후배들의 정신적인 지표로 영원한

     아나운서이기도 하시고요.


    획 하나 하나에.

    힘이 실려 있는 문장, 예술이자

    감동입니다. 여전히 반주 즐기시지마는

     늘 건강에 유의하세요..비오는 일요일 아침,

     글 페북에 올려 준 이 이사님 감사합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후배드림



    이상필 선생님 글

    .

    81년 신입사원으로 부산국에

     갔는데......채연식, 강미란, 송광자

     아나운서님들이 계셨죠 . TV카메라는

    서울서 쓰던 게 내려왔네. 당시 없었음.

    영도송신소는      Ch9 RCA 10KW 출력

     송신기도   남산50KW 증설 후 남는 걸

    부산으로 와서 사용했는데 카메라는

    ch5가 붙어 있네요.



    김병래 아나운서님


    감동 감동 감동

    입니다.  참 값진 내용을

    실감있게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유경환 여사님이 또 쓴글


    그 시절을 함께 하시던,

    또는 현직에 계시는 방송관계 여러

     인사들께서 이 글을 읽으시고 관심의

    댓글을 써 주신 것을 보고이 댓글들이

    역사와 현실을 이어주는 귀한 한마디

    한마디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구연도 전 KBS부산사우회 회장님

    (KBS부산사우회카페지기)



    이장춘님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도 풍부하고 저희들이

     몰랐던 이애기들이 많군요. 모든 회원들이

     두고 두고 감상하며  KBS 부산방송총국의

    발전과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다시 감

    사 말씀 드립니다.건강하세요.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KBS TV 부산방송 개국 동영상과 사진으로 본 그때 그 현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821


    KBS 남산방송국의 추억, 이규항 이팔웅 아나운서 (현장탐방 동영상)

    http://blog.daum.net/jc21th/17782782

    .

    마음의 향기 (전편) 석성우 스님(대종사) 명상어록,

    http://blog.daum.net/jc21th/17782879


    마음의 향기 후편

    http://blog.daum.net/jc21th/17782880


    이규항 이장우 김승한 3인 아나운서 이야기 이세진 이계진

    http://blog.daum.net/jc21th/17782600


    네잎크로바 이규항아나운서 노래 이인선작사 김영종작곡

    http://blog.daum.net/jc21th/17782798


    KBS 아나운서출신 가수 이규항의 꿈의 그림자

    http://blog.daum.net/jc21th/17780637 


    KBS 부산방송국 개국 40주년 동영상. 1975년 그때 그 사람들. 그 사연

    http://blog.daum.net/jc21th/17782822


    KBS 부산 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085


    KBS 부산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http://blog.daum.net/jc21th/17780086


    사진으로 본 KBS 부산방송총국 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0087


    최초의 지방방송국 부산 JBAK가 건설 되던 때 1935년 9월 21일 (HLKB)

    http://blog.daum.net/jc21th/1778147


    노정팔 선생님 육성으로 듣는 6.25 부산 피난방송 그때 그 시절

    구연도 원로장로 전 KBS 부산사우회회장 그때 그시절 그리고 오늘

    http://blog.daum.net/jc21th/17782371


    6.25때의 부산방송국과 40계단 영도다리 고갈산 이별의 부산정거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804



    이규항 아나운서 친필 원고



    일생동안 만년필로 쓴 글로

    일관해온 이규항 아나운서가 이번에도

    만년필로 쓴 원고를 보내 오셨다. 귀한 원고로

    서체도   독특해서  다시 보기 힘든  이 원고를

    춘하추동방송 기록으로 남기고저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