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김영팔 아나운서

이장춘 2017. 5. 20. 01:29

 

 


김영팔은 1927년에 방송국에

들어온  최초의   남자 아나운서로

 뉴스와 연예방송  프로그램에 능통했고

 1927년개국 후  얼마 안 되어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다가 폐쇄되고 지금은

 동대문    문화역사공원이 들어섰음) 에서 있은

 야구실황을 중계방송한 일이 있어 이것이

 우리 아나운서가    최초로 실시한

중계방송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팔 아나운서






1901년 김영팔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길을 걸어온 방송인

최승일이 있다. 동경유학시절에도 같이

했고 소설, 연극 분야 등 문에 활동도 함께

했으며 공산주의 활동도 함께했다. 이 최승일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큰  오빠로 최승희를

무용가로 만든 주인공이고 1925년부터 방송국에서

 활동한 방송인이다.  최승일은 문사이고 연출가이며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도 했다. 최승일은 아나운서가

 없던 시험방송 시절 필요한 방송을 하기는 했어도

본격적인 아나운서를 한 것 은 아니기 때문에

최초의 프로듀서라고          지칭하며

 아나운서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시험방송 중에는 노창성 등도

 방송을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남자들만

방송을 하다가 청취자들에게 좀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방송으로 내 보내기 위해 어렵게

 채용된 아나운서가 노창성의 부인 이옥경이다. 그리고

경성방송국이 개국 할 무렵 각 학교 추천형식의 모집

시험을 통해서 들어온 아나운서가 최승일의 부인

마현경 아나운서이고 이 무렵에 들어온

남자 아나운서가 최승일과 함께 일

 해오던 친구 김영팔이다. 





  이옥경은 시험방송 중 1926년

 6월부터 방송을 했고 김영팔과 마현경은

 1927년 개국할 때부터 아나운서를 한 것이다.

KBS아나운서실에 걸려있는 족보를 보면 맨 위에

 이옥경이 올라있고 두 번째로 김영팔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현경은 없다. 1964년 이 족보를

 처음 만들 때 착오가 있었던듯하다.





 최승일과 김영팔, 최승일의 동생

최승희 등은 공산주의 신봉자로 해방 후

월북한 사람들이여서 1970년 80년대까지 국내에서

 이 분들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왔지만   

동서장벽이 헐린 이래 널리 알려졌고      김영팔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그가 남긴 문학작품도 책으로 발간되었는가

 하면 네이버 ‘뉴스라이버리’ 등에   김영팔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있는 등 사이버 상에서도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1946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양미림(楊美林)이 쓴    '아나운서의

 세계'라는 글이 있다. (아래)




위 글에는 김영팔을 비롯해서

초기아나운서에 관한 얘기가 있다.

이 글에서도 김영팔은 최초의 아나운서라고

 기록되어 있고      1995년에 발간된 노정팔의

‘한국방송과 50년’에 마현경은 남자 아나운서

 김영팔과 함께 오래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담당하며 아나운서 자리를 지켰다.

 기록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1_SIxOSaoWc 




김영팔이 정확히 언제까지

방송국에 근무했는지는 기록이

없다.1931년부터 박충근, 남정준 등

 아나운서가 근무한 기록이 있어서 그 전에

아나운서생활은 접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

이나 방송극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영팔은 1929년

조선아동극 방송연구회를 조직했으며     1931년

경성방송극협회 고문을 맡았다.   이로 인해서

 공산당 단체로 민족주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KAPF) 에서 제명되었다. 



1991년 12월 24일자 한겨레신문사진과 함께 한 글



 1935년 신경방송국으로 간

김영팔은 해방후 평소 신봉하던 

 공산주의 길을  택해서 북에 남게 되고

 결국 6.25전쟁 시기에 사망 했다. 신경은

 지금 만주의 長春으로 만주로 간 우리 동포들이

이곳 언론계에서 근무한 분들이 많았다. 1947년 

 이혜구의 뒤를 이어 중앙방송국장이 된 “홍양명”

신경에서 신문사 편집국장을 했고 해방정국

에서 KBS   기자 활동을  한    조동훈도

신경방송국에 있다가 돌아왔다.





문학가로 많은 활동을 한

  김영팔은 남긴 작품이 많다.



희     곡


「미쳐가는 처녀」「싸움」,


소    설


「해고사령장」 「검은 손」

「불쌍한 사람들」


수     필


「직공생활 10년의 감상 일부분」

「통쾌할는지도 모르는 이야기」

「신출잡필」,


평 론 집


「동지중서씨를 영하야」

「문단 대풍년」등


2000년대 들어 중앙대학교

   박명진 교수가 김영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발간한 책이

있어 그 일부를 인용한다.



1920년대 한국 대중문학계의

 마당발이며, 초기 근대극을 관통해 온

 김영팔의 작품세계!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14편의 희곡과 13편의 소설,

그리고 각각 1편씩의 방송극과 시나리오 등을 비롯

하여    그 외에도 적잖은 수의 수필과 평론을 남겨

해당시기   가장 왕성한     작가 활동을 했었던 이가

김영팔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가 세운 경성방송국

 활동을 계기로 20년대에서     30년대 중반까지 한국

문학의 주류였던 KAPF에서 축출된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하게 된 탓에 그에 대한 후대의 연구와

평가는    그의     왕성했던 활동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활동시기 중

 가장 왕성한  활동시기였던  1920년대에

만들어낸 희곡 작품들은 그 시기 근대극 계통

에서 가장 큰 기둥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KAPF

에서활동했던 작가답게 반봉건 · 반계급주의를 

 목표로 한 투쟁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1920년대 당시 KAPF의 주류가

가지고 있었던 이데올로기 및 체제상의

경직성에 대한 그의 고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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