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 이장춘이 KBS 사우회보 9월호에 기고한 글로 특별기고 「아십니까? 6.25참전 유공자 8인의 방송인」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위 사진 생존 3분의 유공방송인 가운데 7월 22일 박경환 선생님이 29일에 김성배 선생님이쎄상을 떠 지금은 정관영 선생님이 유일하게 생존하십니다.정관영 선생님은 현재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감사로 재직중이십니다. 지난 7월, 한국방송계의 큰 별 두 분이 꼭 1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 국립 이천 호국원에 안장되었다. 박경환 님과 김성배 님이다. 두 분은 인연도 그런 인연이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 1947년, 48년에 방송국 (KBS) 기술자로 들어와 일생을 같은 길을 걷다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금요일에 같은 곳으로 가 신 것, 국가 유공방송 공적 사항도 같다. 행여 충격을 받을까 해서 1주일 먼저 별세한 박경환 님의 부음을 병환중이던 김성배 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김 성배 님은 박경환 님의 별세를 모른 채 1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짜 맞춘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삼가 명복을 빌며 두 분이 6.25전쟁 국가유공방송인으로 국립호국원에 안장된 사연을 소개한다. 마침 두 분으로 부터 6.25 당시 상황을 생전에 정리해 놓았기에 여기에 인용한다. 특히 박 경환 님은 96페이지에 달하는 그때 쓴 6.25 전쟁 일기를 보관하고 있어 주요방송자료가 되고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6월 25일 낮방송은 그런대로 방송국 자체에서 편성 운영했다. 그러나 저녁부터는 사 정이 달라져 방송은 군의 검열을 받아 시행되었고 다음 날 26일 첫 방송부터는 국방부 관리 하에 비상방송이 실시되었으며 종일방송을 하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 신 성모,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 국방부 보도과장은 김현수 대령으로 28일 새벽 방송국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순직 했다. 방송국 파견장교는 홍천중위였다) 27일 낮부터 적기가 서울 상공을 날고 날이 어두워지 면서 멀리서 들려오던 대포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렸다. 한치 앞을 바라다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대전방송국 유병은 과장으로 부터 중요 방송이 있으니 무조건 대전의 방송을 받으라는 전화가 와서 한참동안 실랑이들 하다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 음을 알고 저녁 9시, 유선으로 육성을 받아보니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방송 내용이었다. 긴급 상황에 대통령이 실시코자하는 방송인지라 어 느 방송보다 우선시되는 것이어서 몇 번이고 반복 방 송했다. 이날 밤의 방송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방송과 행진곡, 군가 등 레코드를 틀고 군이 제공하는 전황을 보도하면서 애국 시 등을 낭송하는 것이 모두였다. 밤 12시 이날의 방송시간이 끝나면서 만약에 대비해 서 방송 거부 장치를 해 놓고 비상 방송기기를 트럭에 실어 놓았다. 새벽 1시가 넘어 더 이상 방송국에서 머무 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한강 건너 영등포 전화 국에서 비상방송을 할 계획으로 군에서 나온 사람들과 트럭에 올라타고 떠났다. 송신소에도 그렇게 당부 해 놓았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남산이나 용산에서 쏘아 올리는 공산군의 예광탄은 영등포를 향해서 수 없이 나르고 있었고 칠흑 같은 어 둠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 빗속을 헤쳐 한강다 리를 앞에 두고 헌병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유 여하 를 막론하고 자동차가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 자동차를 길에 놓고 갈 수밖에 없었고 비상방송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부터 각자 행동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여덟 사람의 방송인은 손에 손을 잡고 한강다리에 ㄷ자로 설치된 사과상자 같은 다이너마이트 상자를 보며 한강을 건넜다. 방송인들이 한강을 건너자마자 (지금의 노량진 수원 지를 지날 때) 뒷전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렸 다. 방송인 일행 중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 정신이 들면서 서로가 서로를 불러 마음을 모으고 길을 재촉했다. 잠시만 더 늦었어도 이때의 방송인 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불과 2-3분 사이에 삶 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어둡고 험한, 알지도 못하는 관악산 언 저리 길을 따라 안양부근에 도달 했을 때는 28일 아침 6 시였다. 방송이 나올 리 없었지만 그래도 라디오를 켜 보 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명 KBS 채널에서 행진곡이 흘 러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방송 마저 사라짐을 확인 하면서 남으로 향했다. 뒤에 안 일 이지만 방송인들이 그날 아침 피난길에 들은 그 방송은 이성실이 연희 송신소에서 송출한 것이었 고 이성실은 공산군이 지척에 와 도저히 방송을 더 내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피난길에 올랐다. 그날 밤 한강 을 같이 건넌 사람은 8명으로 방송 기술책임자 박능상 과 박경환, 왕종현, 김성배, 정관영, 전주호, 박문순, 김홍린이고 미리 헤어진 하정용은 한강을 건넌 다음에 만 났다. 웬일인지 아나운서들은 그날 밤 방송이 끝날 무렵 부터 보이질 않았다.」 그때 마지막까지 방송국을 지키고 장비를 옮기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8분은 6.25 전쟁 중은 물론 그 후 우리나라 방송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 2006년 이 8분은 방송인 신분으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2007년 영천 호국원에 안장된 왕종현 님에 이어 박경환, 김성배 님이 나란히 이천 호국원에서 영면에 드셨다. 8분 가운데 현재 유일한 생존자는 방우회 감사인 정관영 님이다. 생사를 다투는 전쟁상황에서도 끝까지 방송국을 지키고 장비를 옮겼던 선배님의 훌륭한 정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우리 후배 의 책임이자 도리가 아닐까. 글 : 이장춘 회우 1958년 기술인들이 함께 한 사진. 1 한기선, 2 이종훈, 3 이인관, 4 이현철, 5 박명희, 6 임시현, 7 노익중, 8,오신팔 9 정유언, 10 전창식, 11 김성열,12 윤은상 13 박경환 14 박능상, 15 정경순, 16 김성배, 17 박준병, 18 윤각노, 19 이성근, 이중집 님. 아래는 김성배님이 생전에 친필로 한강 폭파시 함께 한강을 건넜던 방송인들입니다. 박능상, 왕종현 박경환, 김성배, 정관영, 김홍린, 하정용, 박문순, 전주오님 입니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전쟁중에도 방송을 목숨처럼 지키신 분들께서 세월따라 한분한분 떠나시니, 이렇게 옛 방송사료들을 모으고 모아서 특별 기고 해 주신 이장춘 국장님 덕분에기록으로 남아, 방송역사의 귀한 자료로 보존됨을 높여 큰 박수를 드립니다. 그 많은 사진의 방송역사에 공훈을 세우신 분들중에 유일하게 제가 알아볼 수 있는 노익중 선생님의 모습을 반가운 마음으로 알아봅니다. ^ ^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한강교 폭파현장을 목격한 6.25참전 유공방송인 박경환님 방송의 역사 김성배 선생님 http://blog.daum.net/jc21th/17782935 박능상, 전쟁의 사선(死線)을 넘으면서 방송과 함께 했던 방송인 http://blog.daum.net/jc21th/17781160 6.25참전 유공방송인과 왕종현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272 중앙방송국의 6.25 마지막 방송과 피난길 김현수 대령 (장군)순직 KBS중앙방송국에서 1950년 6월 28일새벽 http://blog.daum.net/jc21th/17782612 회보 종이신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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