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울릉도 최초의 TV방송 그때 그 얘기 TV중계소 설치 고세혁 정근춘님

이장춘 2016. 4. 1. 05:47

 

 

 

1973년 2월 20일 새벽 5시 포항부두에서

포항기술과장 고세혁 선배와 함께 울릉도행 청룡호에

 승선했다. 속초 앞까지 돌아서 울릉도를 가야 하는 뱃길,  출렁이는

 배를 타고 12시간이나 시달리며 배 멀미에 혼 줄이 났다.  지금이야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3시간이면 간다지만 포항에서 속초 앞까지 돌아서 가는로이던 그시절엔

무려 12시간이나 걸렸다. 새벽에 출발한 배가  저녁에 도착,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쏟아지는 그 함박눈은 순식간에 울릉도를 하얀 눈 섬으로

만들어 버리고 길들은 막혀버렸다.  울릉도엔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2~3일씩

계속 된단다. 그리고 그 눈이 녹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이곳까지 와 해야 일을 멈출 수 있는가? TV시청을 학수고대하는

 울릉도민들의 여망을 저버릴 수  있는가? 무리한 일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임무는 수행해야 했다

 

 

울릉도 최초의  TV방송 그때 그 얘기 TV중계소 설치 고세혁 정근춘님

 

 

 포항방송국 고세혁 기술과장님과 함께 

 눈에 덮여 없어진 산길을 오르내리며 현지인들의

 협조로 공사를 강행했다. 그리고 울릉도민에게 처음으로

일본방송이 아닌 KBS TV를 시청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973년

 2월 27일,  그 공사를 마치고 28일 본사에 돌아왔을 때 모두의 환영과

노고에 대한 칭찬을 받으면서 10일 동안 쌓인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공사를 위해 나는 7차례나 울릉도를 내왕했다.  고세혁, 윤은상, 임진철,

유재철 등  다른 선배, 동료 분들도  현지에 가 이런 노고를 치루었다. 벌써

43년의 세월이 흐른 얫 이야기이지만  내 젊음의 추억,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때의 앨범을 열고 보니 그 장면들을 담은 사진들이 있다.

 고세혁 선배에게도 연락했더니 그때의 그 기록 사진들이 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방송역사를 정리하는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부산에 사시는 고세혁 선배를 찾아 얘기를 나누며

 그 사진들을 받았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울릉도에서 TV방송을 시청 할 수 있는 

마지막 중계시설을 위해 현장출장에 나섰던

 정근춘님 (전 KBS사우회 회장)은  눈덮여 길이

없어져 버린 산길을 오르내리는 등 힘들었던

 그때 시절을 회상했다. 그 글중에서 옮긴

 글이고 끝부분에 관련글이 있다. 아래는

 그때의 사진이다. 

 

 

 

 

위 사진은 정근춘님이 TV송 시설을위해

기재를 가득 담은 무거운 가방을 매고  길도 없는

산길을 TV중계소 설치 목적지 울릉도 가두봉오르는

 장면이다. 울릉도 최고봉 성인봉은 해발 984M로 여기에 중계소를

세우면 좋겠지만 그러나 여기에 중계소를 세우는 것은 전기사정등 제반

 사정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강원도 함백산 TV중계소와 전파길이 터진 성인봉

중턱, 가두봉에 있는 기상대에 송, 수신점을 잡아 중계시설을 하고 여기서 발사하는 

전파를 성인봉 줄기 도동항 뒷산에 안테나를 세워   여기서 가정에 보내는 TV방송을

송출하기로 했다.   어려웁고 복잡한 공사지만 그렇게 할 수밖엔 없었다. 가두봉

 까지도 해발 500M 넘는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 할 수 없는 현장에서 

어서 오르내려야 하고 필요한 자재도 사람의 힘으로 날라야 했다. 

전봇대 같이 무거운 자재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는 목도로 날라야 했다.   

 

 

 

 

   이 사진은  새로 설치되는 가두봉에 전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공사를 하는 실재모습으로 이렇게

해서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는 것이다. 그 시절 울릉도에는

인구 2만이 살았다지만 자전거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낙후한

곳이었다. 울릉도가 바닷가운데 있기 때문에 바닷가 평지에서부터

 해발이 시작되어 높이 500M 이상을 올라야 기상대나 가두봉 등

 목적지가 있어서 이러 저런 어려움이 참으로 많았다. 그 목적지까지

가다가 눈위의 낭떠러지 등에서 행여 발이라도 잘 못딛어 미끄러지면

 낭떠리지 밑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진

이라도  보존되어 있어서 그때 그얘기를 더듬어쓸 수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아래 사진은 위 정근춘님의

사진과는 다른 사진이다.

 

 

 

 

 

울릉도에 라디오방송이 시작된 것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특단으로 1962년 12일

25일 부터지만 텔레비젼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선결

조건이 있어서 1973년에니 가능했다.  지금처럼 인공위성 등을

활용 할 수 없던시절 그 선결조건이란 우선 TV전파가 울릉도에

미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했다.  KBS가  1961년 말부터 TV방송을

시작했어도 서울에서 350Km나 떨어진 서울의 방송전파를 그 당시에는

 어떤 특수시설로도  울릉도에서 방송전파를 수신 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울릉도에서 TV를 중계할 수 있는 방송신호를 수신하기 

위새서는 1971년  4월 22일에 준공된  백운산 1KW TV중계소, 

 71. 4. 24.    강능방송국 함백산 500W TV 중계소가 

완성되어 방송을 내보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위 지도 도면은 서울에서 울릉도까지

가는 TV방송 전파의 흐름 계통도다. 그리고

아래는 을릉도의 중앙에 있는 높은 봉우리 성인봉

때문에 울릉도에 사람이 많이 사는 곳, 도동, 저동항 까지

TV방송 전파가 직접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두봉에

있는 기상대에 중계시설을 해서 전파를 발사하고 다시 이 전파를

울릉중계소에서 받아 울룽도민들에게  보내면그 전파를

 받아 방송을 시청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전국의 고지

에는 여러곳에  TV송중계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 ·중계소들은 가정에 방송을 직접 보내기도 하지만

 송·중계소들간의 연결을 통해서 TV방송을 다른 지역으로 연결하

기능을 수행 하기도 했다.   부산이나 울릉도에서 서울의 텔레비젼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수 많은 중계소를 세워 연결된 그 중계소를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에서 대전이나 김천에서 보다

늦게 텔레비젼을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사항들이

고려되어 높은 산의 TV중계소가 설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TV중계소 하나를

 설치하려변 수많은 절차를 거치면서 길도 없는 그 산들을 오르내리면서

피, 땀어린 노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마이크로웨이브, VHF, transmitter, translater 등등

 여러 씨스템을 활용한 선결과정을 거쳐야 한다. 

 

 

 

 

위 사진은 포항방송국 기술과장 고세혁님이

TV방송 전파 송 ·수신 점을 찾기위해 안테나를 들고

산을 해메는 장면이다. 울릉도 현지에서 사는 분이 아니라

포항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기술자가 안테나를 메고 수차례에

여러날을 돌아다니며 적지라고 생각해서 찾아 놓으면 또 서울에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기술자가 현장을 찾아 점검을 하면서 시험을

하고 기술적인 검토를 거쳐 중계소 설치장소를 정한다. 아래

 사진은 고세혁 포항방송국 기술과장과  임진철 전문

방송기술자가 현장을 점검하는 장면이다.

 

 

 

 

 

적지가 정해지면 전기를 끌어오는등

제반 공사가 시행된다. 배편으로 운반되어

항구에 내려진 자재가 섬 안에서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 옮겨지고 기술자들의 손이 닿아야 한다.

 항구에 도착한 자재는 앞에서 본것처럼 목도

등의 수단으로 목적지에 옮겨지고 인력

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수많은 절차를 거치면서

피나는 노력 끝에 철주를 세우고 그 위에 안테나를

얹어 울릉도 도동항에 최종적으로 1W 중계시설이 완공되어

울릉도에서 최초로 TV방송을 송출 할 수 있게 된 날 1973년 2월 27일,

출력 1W 울릉도 간이 TV중계소,        울릉도 TV방송 시작의 역사다. 흔히

TVR이라고 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대수롭지도 않은 이 시설,  안방에서 TV를

보시는 분들은 생각하시기  어려운 일들이지만 TV방송이 우리 안방에 들어오기

지는 수많은 분들의 피와 땀의 결정이다.  이 시설을 위해 그토록 힘들었던

 방송 기술자들은 문명의 총아  TV방송을  모든국민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그 어려운 일들을 해 왔다. 울릉도의 이 일을

최종 마무리한 방송 기술자 정근춘님은 그 TVR이 완성되어 방송을

송출 할 수 있게 된날 그 TVR 앞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섰다. 이 글 끝부분에 정근춘님의 회고담이 있다.

 

 

 

 

 


이 공사를 끝내고 돌아오던 포항기술과장

고세혁님은 그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멀리서 그

 TVR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렇게해서 설치된  

중계시설을 평소에는 울릉도에 미리 설치된 라디오중계소에서 

관리를 하지만 또 중요한 고장이 있들때 등 중계시설을 손 보아야

 때가 많다.  이럴때면  포항이나   서울에서 전문 기술자가 장비를 들고

현지 출장을 해야 한다. 고세혁님은 포항방송 기술과장으로 재직 하던 75년

까지 다른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이곳 울릉도의 라디오나 TV가정상적으로 방송 

될 수 있도록 많은 힘을 기울였다. 위성방송, 디지털 방송 등   시대가 달라져

고도 孤島  울릉도에서도 이제 전국의 다른 어느곳이나 다름없는 양질의

 TV방송을 시청 할 수 있고  2010년 부터는 DMB 방송을 통해서

 울릉도 독도 그곳 소식을 전국에 전하는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다.  관련 글을 아래 연결한다.

 

 

 

 

위는 방송시설 관리차 울릉도를 찾으면서

 선상에서 촬영한 고세혁 KBS포항방송국 기술과장님과.

KBS본사 유재철님 (오른쪽)이고,   아래는 TVR을

향에 눈길을 오르는 고세혁님과 TVR기술자다.

 

 

 

 

 

가두봉 기상대에 있는 TVR을 손보고 있는

고세혁님과 기술자들이 기기 수리중 점심식사

 

 

 

 

 

최최초의 울릉 TV중계소 개설에 힘을 기울였던 주인공 고세혁, 정근춘님이 부산에서 만나 / 2016년 3월 17일

 

 

 

정근춘 선생님 회고담 중에서

 

 

울릉도 R & TV중계소 설치의 필요성을

정리하여 본다. 위치는 서울의 위도로서 동쪽에

위치한 지도상의 직선거리는 350여 Km 울릉도 성인봉

 중턱에서 나오는 물로 수력 발전하였다.  낮에는 물을 모아

 저녁에 발전하는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울릉도 저동항에

 어업 전진기지가 완성되고 어업전진기지의 냉동시설로 디젤엔진

 발전소가 완공되어 많은   어업 종사자들의 인구가 대폭

늘어나 라디오와 티브이의 수요도 늘게 되었다.

 

그 당시 울릉도민의 인구가 대략 2만 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어업에 종사함으로 도동항과 저 동항에

밀집되어 생활들을 하였다. Radio 방송은 단파방송을 Link로

중계방송이 시작되었다,  TV방송 프로그램은  남산 연주소에서 M/W로

  원주방송국까지 원주방송국 연주소에서 백운산(제천)중계소로 전송되어 송출

되었다. 백운산중계소(원주) ~ 함백산(황지)중계소 ~ 울릉도(가두봉중계소) ~

울릉도성인봉자락에 중계소를 설치 울릉군청과 도동항 (인구밀집지역)에  서비스를

 어렵게 완공을 하였다.     많은 찬사를 받으며 돌아왔다. 사전답사 타당성조사

 예산계획 사업시행 등 시간. 인력, 예산이 필요했다. 이때 참여하신분들이

  대충 생각이 난다 고세혁, 윤은상, 임진철, 유재철, 정근춘, 등 서울 본사

(남산시절)에서 출장을 울릉도에 가려면 기차를 이용 포항으로가

 부두 인근 여인숙에 자고(다음날 부두와의 이동거리가

가장 편리하다) 선표는 포항방송국 기술과장

 고세혁 선배님이 예약 발권하여주셨다.


새벽 5시에 부두에서 청룡호에 승선을

 하였다. 기상상태와 바다의 상태에 따라 10시간

 ~ 12시간이 소요된다. (왜 이렇게 오래시간이 걸리느냐고

  물어보니 포항에서 육지를 따라 북상 속초항 근처에서 우측으로

 울릉도 방향으로 간다. 고하였다 ㄱ 자로 항해를 하는 거죠 ~ 일본에서

여객선 사고가 나서 우리나라도 안전을 위해서 랍니다. 울릉도에는 동해호와

 청룡호가 교대로 운항을 하였다. 배 멀미에 혼 줄이 나고 저녁에 도착, 여관

에서 자고 아침 되니눈이 오기 시작합니다. 울릉도엔 눈 이오면 2~3일씩

온답니다. 무리한 공사를 현지인들의 협조로 강행을 하였다.

며칠 후 눈은 그쳤으나 배편이 없어서 계획보다 3일

 늦게 9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울릉도의 출장이 6~7 차례로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시간이 흘러 TV방송의 로컬화

 도 단위 방송되었다. 울릉도는 경북 포항권이라

 ~ 왜 강원도 로컬을 보아야 한단말입니까 휴 ~ 너무나

열악한 재정으로 시청자들의 욕구에 충족치 못함이

지금도 많이 아쉽게 생각이 납니다.

 

 

 

 

 

 

  울릉도․ 독도 DMB, 방송국


  

 

KBS와 경상북도, 울릉군은

2010년 3월 17일 오후 울릉군 한마음회관

에서

DMB (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 방송 개국식을 열고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울릉도

반경 70킬로미터와 독도 반경 50킬로미터 안에서 KBS 1TV

(스타)와 2TV(하트), KBS FM 라디오(뮤직) DMB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KBS와 경상북도, 울릉군은 지난해

 이를 위한 공동사업 협약을 맺고 3억 5천만원을

 들여   울릉도에   100W급, 독도에 50W급 DMB 중계기를

 설치하는 등 시설구축을 모두 마치고 방송을 시작한 것입니다.

 

 DMB를 설치한 것은 제주도 이외의 섬 지역에서는 이번이 처음으로 

동해를 항해하거나 조업하는 선박과 관광객 등에게 다양한 방송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져 각종 재난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고

대처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기대됩니다.

 

 

 

 

 

 

울릉도 라디오 방송 

 

 

울릉도에 라디오는 비교적 일찍 들어갔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던 울릉도에는 1950년대 또

1960년대 초 까지 국내 방송보다도 출력이 강한 북한

방송이나 일본 방송이 더 잘 들리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박정희 최고의장이 시찰에 나섰고 현지 행정책임자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깜작놀란 박정희 의장은 울릉도에서 즉시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급해진 당국에서는 

 울릉군청에  방송기계를 설치하고 방송을 실시했다. 1962년 12월

 25일 그로부터 호출부호 KLCU, 출력 250W,  울릉중계소가

 생긴것이다.    대구방송국 소속으로 있던 울릉중계소가

포항방송국 소속으로 바뀐것은 1971년 1월 부터다.

 

 

1962년 10월 11일 울릉도를 시찰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울릉군청에 있던 중계소가

새로운 사옥을 마련해서 KBS울릉중계소

건물로 옮긴것은 1975년 10월 21일이다. 고세혁님이

포항  기술과장이던  시절에 터를잡아 기초를  마련하고

포항을 떠났다면서 그때의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위 사진은

새로운 중계소 건립에 관한 검토를 위해 서울 본사에서 온

윤은상님과 함께 한 사진이다. 그 무렵 산중턱에 자리한

 허술한 고택 바로 아래 있는 건물이 있는곳을

적지로 선정 중계소를 세웠다.

 

 

 

 

 

 

안테나 부지를 선정해서 표시하고 촬영한

사진이다. 여기에 중계소를 지어 1975년 10월 21일

 준공을 본 사옥이 바로 울릉방송중계소였다.   

 

 

 

 

 

 

 

춘하추동방송이 말하는 참고사항

 

 

방송이 안방에 도달 하기 까지는

기계적인, 기술적인 수 많은 과정을 거치며

 때로는 글과 말로 표헌하기 어려운 눈물겨운 일들을

겪는다. 이나라 방송초기 역사는 그렇게 해서  이루워졌다.

그들의 노고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는 방송의 기술을 뿌리라고 표현한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워 좋은 열매를 맺는다. 시, 청취자는 그 열매를 맛있고

탐스러운 열매를 따 먹지만 그 열매가 내손에  들어오기까지 생각

하는 경우는 많지않다. 속에 뭍혀 나타나지 않는뿌리, 필자는

방송에서 그 뿌리가 어떤작용을 하는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몇편의 글을 썼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초기 기술방송역사는 위성, 디지털시대 만을

머리에 넣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1960년대

말까지 전국의 TV방송중계망이 대체적으로 갖추어졌다.

위성은 물론 마이크로 웨이브도 없던시절 VHF를 연결해서

고지와 고지를 잇는 중계시설을 통해서 방송망을 확충해 나갔다.

 일방통행이나마 마이크로 웨이브를 활용해서 TV방송 링크망을

구성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물론 70년대에 들어서도

TV방송 사각지대는 많이 있었지만 육지에서는 그런대로

고지와 고지를 연결해서 링크를 구성 해 나갔다.

그러나 인구 2만이 살고 있는 동해안의

고도 울릉도는 사정이 달랐다.

 

육지에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도 매우

불리한 악조건이었다.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TV방송 송신시설은 500W 출력의 강원도

 함백산이었다. 함백산에서 울릉도까지는  160Km가 넘는거리다.

100Km까지는 그런대로 전파를 송, 수신 할 수 있다지만 그 거리를

넘으면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더군다나 울릉도는 중앙에 해발 984m나

되는 성인봉이 자리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도동항이나 저동항까지

전파가 바로 도달 할수 없고 또  큰배가 다니는 뱃길(船路)이 있어서 전파장애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전기도 울릉도 자체에서 해결해야 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해야  울릉도 TV시청이 가능했다.   그 시절 울릉도는 어업전진

기지로, 활기를 띠고 있었고 우리나라 동단의 멀리 떨어진 큰섬이어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대한민국 TV방송의 사각지대

였다. TV를 갖은 사람이 간혹 있었어도 일본방송을 듣고 있어서

 이곳에서 TV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급선무였다.

 

이곳에 전파가 도달하기까지는 여러

 선결조건이 있었다. 제천에 있는 원주방송국

백운산중계소로 마이크로 웨이브를 통해 쏘아올린

전파를 다시 함백산으로 송출하고 여기서 165Km가 떨어진 

울릉도 가두봉까지 보냈다. 이 가두봉에 있는 경찰통신대의 시설을

 빌려 중계기를 설치하고 함백산의 방송을 받아 5Km가 떨어진 도동항

 뒷산에 울룽중계시설을 해서  도동항과  인근의 저동항에서  TV방송을

시청 할 수 있도록 한것이다. 당시 울릉도 인구 2만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렇게해서 울릉도에서 TV방송을 볼 수있도록 된것은

1973년 2월 27일이다. 그렇다해도 1W출력으로는 시청이 원활하지

않았고 또 경상북도인 울릉도에서 서울방송, 강원도

 방송만들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일까

개선된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울릉도에서 TV를 시청 하기 까지는
정근춘 전 사우회 회장님!의 노고가 너무나

 많으셨습니다. 이 소식을 접 하니 어릴적 고향에서

라디오를 청취 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저 어렸을때 150호

고향 마을에 라듸오가 딱 2대 (우리집, 또 하나는 라디오 기술자 집)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라듸오를 들으려 오는지라
그 분들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식사도 제때에 먹지를
못하였습니다.

궁리 끝에 제 부친이, 5군데( 마을회관, 산밑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마을

입구동네)로 분산하여, 높은 나무에다 대형 스피커를 달아서  전 부락민이

 저희집을 오지 않고서도 라듸오를  청취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기억이

 떠 오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방송을 접하는 최초의 시기인지라,
TV 처럼 화면 없이 소리로만 들을 수 있는 방송 이였지요. 방송

기술과 방송중심에서 활동 하셨던  이장춘 사장님!이 자상한

해설을 곁들여서 설명을 잘 해 주셨습니다.      소식

감사합니다.늘 현장에서 수고 하시는  춘하

추동 방송 이장춘 사장님!^0^ ^0^ ^0^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꽤나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등에 메고
보기에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속을 뚫고, 목적지를

 향햐는 저 사진의 주인공 정근춘 선생님이 이 기사를

보신다면 고생스럽고 힘들기는 했으나, 사명감으로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열과 성을 다해 일 하던 그 시절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그리우실까요? 이렇게 작은 자료라도 있어서 다행

이고, 그냥 세월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울릉도의 T.V.개통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세상에 알려주시는이장춘 국장님이 계셔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결해 놓으신 정근춘선생님에 대해,

또는 방송기술인들에 대한 글을 올리신 이정부 아나운서님의

 글을 읽으며공감하며,      아나운서이셨으면서 오히려

 방송기술인들의    노고와 업적을 높이시는

 이정부 아나운서님을 배웁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방송인 고세혁선생님 방송역사를 말하다. 1950년부터 사진과 육성 

 

 방송인 정근춘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2502

 

포항방송국 55년


울릉도․ 독도 DMB, 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780407

 

 
 

KBS TV방송시작(1961년)과 방송 엔지니어들, 공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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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부 아나운서가 말하는 방송기술인 엔지니어와 정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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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 90년, 그 발자취와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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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남산시절 방송기술인들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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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남산시절 방송기술인들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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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방송협회(해방되기까지) 방송기술인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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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의 부산방송국과 40계단 영도다리 고갈산 이별의 부산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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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울릉도에 TV방송을 듣게 해주던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얘기를 나누는 두 주인공

포항방송국 기술과장 고세혁님과 본사의 기술책임자로 최초의

중계시설을 완성하고 그 뒤로도 출력증강 등 업무수행을 위해 여러차레

울릉도를 들린 정근춘님이 그 시절의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고 아래는 고세혁님이

포항방송국 기술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직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번호따라 

1.임도교  (본사 인사부 차장), 2.김헌수(국장), 3.김경호(방송과장), 

4.최규열 아나운서(후에 대구, 창원방송 총국 편성제작국장), 5. 신의웅 기자,

6.조정묵 기자, 7.이광태

 엔지니어(후에 기술 본부장), 8.김선관(기자로 있다가 행정으로 바꾸었으며

 나중에 본사 총무국 총무부에 근무하다 지병으로 별세),

 9.김순명 아나운서(여),

 10.고세혁 (기술과장), 11.김태자 아나운서(여), 12.김학근 PD(후에 안동방송국장), 13.유재호(후에 관재국장,  대구방송총국장), 14.김병율 PD 행정직군에서 PD로 전직 했음.KBS사우회 김지문 편집장 확인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고세혁 정근춘 울릉도 편집.wma

 

 

 

 

고세혁 정근춘 울릉도 편집.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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