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나운서클럽
이정부 아나운서 감동 동영상
이정부 아나운서가 김영우선생님에
관한 글이 올라 있음을 보고 특별 감동 동영상을
제작 보내오셨기에 글 머리에 올립니다. 이 동영상을
먼저 보신 다음에 글을 보셔도 좋으실듯 해서입니다.
이정부 아나운서가 동영상과 함께 보내오신 글입니다.
음악을 먼저 끄시고 동영상을 감상하셔요.
좀 늦었습니다. 최근 몇개월 사이 이사를 자주 하는 통에 회보를 잘 보지 못하여.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춘하추동을 보고 김영우 선배님 초대석에 나오신 걸 알았습니다. 늦게나마 댓글을 대신하여 김영우 선배님께 간단한 동영상 하나 만들어 올립니다. 동영상에 관한 김영우 선생님 답글 이국장님과 이정부아나운서님 이정부 아나운서의 갑동적인 동영상 고마웠습니다. 배경음악도 좋았지만 이정부 아나운서의 유화 작품도 퍽 안상적이였습니다. 제주가 많습니다. 우리 춘하추동방송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적품 많이 만들어 보십시오. 고맙습니다. 북가주 된뷜에서 김영우 드림 위 글은 이정부 아나운서의 동영상과 관련된 글이고 아래 글은 원래 올렸던 글입니다. 지난 주말 저의 후배 이병훈이 이곳 덴뷜 양로원에 다녀 갔습니다. 미국의 노동절 연후를 틈타 잠시 들렸습니다. 이 국장님께 소식과 기념사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곧 연락. 갈 겁니다. 2015년 9월 10일 김영우선생님으로부터 온 이메일 내용이다. 이병훈선생은 필자가 KBS 남산방송국에 근무하던시절 군방송실에 근무했기에 잘 알고 지내던 터여서 미국 LA애 사는 이병훈선생 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사진과 함께 답이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멜을 보낼려고 하던 참에 이 형께서 먼저 군방송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먼저 김영우 선배 얘기부터 하고 군방송 얘기는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하기로 합시다. 지난 주일에 이곳은 노동절 연휴였죠. 그래서 신병관계로 LA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있는 실버타운인 양로 아파트로 이사 하신 김영우 선배 내외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소요시간이 LA에서 편도로 7시간정도 됩이다. 김선배 내외와 점심을 함께 했죠. 그리고 3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건강 안좋아 무거운 마음으로 LA로 돌아왔습니다. 김 선배께서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 주신 이 형께 안부를 꼭 전하라고 해서 그날 함께 찍은 사진과 안부를 전합니다. 김영우, 이병훈 선생 내외분이 함께 촬영한 사진 (2015년 9월) 김영우 선생님! 불모지 미국 땅에서 한국어 방송을 게척해서 키워온지 50년 반세기가 되던 해 2014년 방송을 접으면서 50년간 모아온 방송자료를 DVD에 담아 모두 춘하추동방송에 보내주셨다. 2014년 약 6개월에 결쳐 그 글을 춘하추동방송 형식에 맞추어 올려 안창호, 안병원, 권길상, 위진록, 이경원, 김봉구, 이민휘 등등 미주 이민사를 이끌어 오신 분들의 얘기와 함께 100 여년의 미국 이민사와 우리동포들의 삶, 미주방송역사 등이 새로 등재되어 춘하추동방송에서 미주 부분이 새로 채워지면서 획기적으로 변화되었기에 너무도 큰 공헌을 해 주신 분이다. LA에서 노 부부가 살던 김영우 선생님이 방송을 접던 때 두분의 건강이 나빠져 딸이 살고있는 미국 북가주 산호세. San Jose로 옮기고 거기서 가까운 덴빌 Danville 요양원에 들어가 기거한지 1년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1주일이 멀다하고 안부말씀과 춘하두동방송 글을 보신 소감 등을 보내오시면서 때로는 사진을 함께 보내 오시기도 했다. 글은 종종 춘하추동방송에 올렸지만 사진 올리는 것은 마음에 내키질 않아서 받아 놓기만 했다. 일생동안 쉼없이 활동 하시던 왕성한 모습의 사진을 보아오던 필자가 요즈음의 허약해진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였다. 이번 이병훈 선생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어차피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고 지금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도 괜찮치 않을까. 하는 아음으로 그동안 받아 놓기만 했던 사진을 올리고 아울러 2015년 6월 15일자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초대석에 실린 「미주한인방송의 50년 역사를 연 개척자」라는 제목의 클럽 미주편집위원 정영호 선생 인터뷰 취재 글 전문을 올린다. 2015년 5월 27일 보내온 사진 위는 1967년 도 HOLLYWOOOD 에 있는 Hanna Barbera Animation Studio에서 만화 영화 배경을 그리고있는 젊은 시절의 김영우 님이고 (Richard Khim) 아래는 반세기 후 2015년 5월 북 가주 Brookdale(Danville) 양노원에서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고있는 김영우님 내외분. 위 왼쪽에서 2번쩨의 부인 김인광님 옆에 키가 큰 미술 학생 Bud 그리고 완쪽 어레에 앉아있는 화가 Alice. 올해 91살의 여류 화가 Alice 여사와 같이한 김영우님.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18호 초대석 -2015년 6월 15일 발행 취재 정영호 편집위원- 미주 한인방송의 초석을 놓은 지 50년, 얼마나 감개무량 하시겠어요! 그 추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친애하는 교포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1965년 6월12일 토요일 아침, 그립던 우리말 방송이 이제 이곳 미주에서 드디어 역사적인 첫 방송을 시작했습 니다. 그처럼 듣고싶었던 우리 음악, 이제 이국의 상공을 메아리치며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합니다.”라는 오프닝멘트가 우리 이민사移民史에서 최초로 시도한 우리말 방송 <라디오 코리아>였습니다. 1961년 4월 원종관, 이장우, 박진현, 장인숙 등과 함께MBC 공채 1기 아나운서로 뽑혀 뉴스, 음악 프로그램 진행, 권투중계 견습 등을 하다가 1963년 6월에 콜롬비아방송대학으로 유학 가 1964년 2월부터 만화영화사에서 배경을 그리며 아르바이트도 하던 때 였습니다. 1년 반 정도의짧은 경험으로 타국에서 맨주먹으로 방송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러나 한인회의 여장부 소니아 석 여사의 헌신과 기술을 맡아준 친구 이순재(Joh Lee), 그리고 둘째 주부터 참여한 서정자 현 시애틀 라디오코리아 사장 등의 도움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미주한인이민사에 <라디오 코리아>가 자랑스러운 한국어 첫 방송으로 기록, 보존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계기로 한국어 방송을 추진하게 되었나요? 그 때방송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우연히 일본어방송을 접하고 자극을 받아 ‘한국어방송을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됐지요. 그래서 미8군 AFKNTV엔지니어 출신으로 로욜라 기독교방송국에서 근무하던친구 이순재(Joh Lee)를 만나 상의한 후 남가주 한인회 섭외 이사였던 소니아 석 여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2주 후 희소식이 들려왔어요. 석 여사가 잉글우드의 KTYM 방송국에 회당 30달러의 전파료를 내기로 하고 토요일 오전 30분 방송을 계약했으니, 3일 내로 방송 할 준 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재가 로욜라방송국에서 녹음 허가를 받기로 하고, 저는 MBC에서 복사해온 녹음테이프 몇 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작 준비에 들어갔지요. 아리랑을 시그널뮤직으로 <라디오코리아> 개국 고지에 이어 안광수 LA 총영사, 조영삼 남가주 한인회장의 축사 사이사이 <대한 팔경> 과 <번지 없는 주막> 등 음악으로 엮어진 28분짜리 <라디오 코리아>란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방송 당일인 6월 12일(토) 로욜라방송국 정규방송이 끝난 새벽 1시부터 철야 제작에 들어갔는데, 다 끝마친 시각이 6시. 익숙하지 못해 4시간 넘게 걸린 겁니다. 부랴부랴 석 여사의 차로 잉글우드의 방송국으로 이동해 방송 개시 10분 전에 녹음테이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오전 7시 30분부터 30분간, 미주 최초의 한국어방송 ‘라디오 코리아’를 무사히 송출하고 나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소수小數지만 방송을 들은 교포들이 ‘미국 이민 온 후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들으니 설레고 기뻤다, 처음 들어보는 우리말 방송에 감격해 눈물이 나왔다.’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방송부터 대학에서 만난 KBS 성우 출신 서정자 씨가 합류해 공지사항, 시, 소설 등을 낭독하니 훨씬 부드럽고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MBC 엔지니어였던 김세대 씨와 KBS 국제방송 서선벽 아나운서도 도와주었지요. 하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11개월간 지속되다가1966년 5월 49회를 끝으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한인방송을 뿌리내리고자 애쓰셨지요? 한국일보 LA지사 장재구 사장과 인연을 맺으며 더 열정 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1974년 12월 16일(월) ‘TV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KVST TV(ch68)를 통해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맹경원(전 DBS) 아나운서와 함께 앵커를 맡아 최초의 TV 생방송을 실시했고, 1975년 10월 12일(토) 한국일보 미주 본사가 설립한 ‘라디오 코리아’에서 방송을 재개, KTYM AM(1460Kc)을 통해 매주 토요일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한인 방송 최초로 AM 전파를 쏘아 올렸고 이것이 지금의 ‘라디오 서울’로 이어졌지요. 15년간의 만화영화 일을 접고 1978년 11월 미주 한국일보에서 설립한 ‘한국 TV’와 ‘라디오 한국’의 방송국장으로발령받아 1979년 6월 11일(월) KMAX FM(107Mh)을 통해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주6일, 최초의 우리말 FM 매일 방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1991년 2월 ‘한국 TV’ 방송을 재개하고 그 해 5월 6일포르투갈에서 열린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위성 생중계했고, 1990년 2월 한국일보가MBC와 제휴해 설립한 KTAN TV(현 KTN)의 부사장으로뉴스, 연속극, 교육 등으로 정규방송을 편성하고 방송 실무를 총괄하다 2001년 퇴직했습니다. 그 후 프로덕션을 설립해 <오늘의 신앙> TV방송을 제작한 것을 비롯해 이민 1세대 노인들의 이야기, 위대한 한인,미국의 자연 등을 비디오에 담아왔고,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재미동포후원회의 의뢰를 받아 <자랑스런 한인들> 수상자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습니다. 또 1974년부터 1 986년까지 12년간 5월에 남가주 미스코리아와 주니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975년부터 1991년까지 16년간 9월에는 한국의 날 행사 피날레인 코리안 퍼레이드의 사회를 맡았던 것, 그리고 1977년 미주방송인협회 창설을 주도해 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 작년 2월 12일, 이역만리에서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던 방송의 역사를 남기고자50년간 쓰던 방송장비를 미국의 USC(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동아시아 도서관에 기증하고 방송현장에서 물러났습니다. 근황은 어떠십니까? 모쪼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931년생이니 올해 86세입니다. 최근 저의집 사람까지건강이 양호하지 못 하자 아이들의 권유로 지난 4월 둘째딸이 사는 북가주 덴빌로 이전했습니다. 브룩데일 양로원 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아시아인은 저희 부부뿐입니다. 덴빌을 지나 콩코드에서 1시간 더 북상하면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 나파벨리가 나오지요. 이제 양로원 생활이 적응이 되어 취미활동으로 그림도 그립니다. 만화영화사에서 배경을 그렸던 실력으로 많은사람들의 환영도 받았습니다. 몸만 건강하면 홍익대 미대서양화과 출신답게 그림 으로 뭔가 보여주고 싶은데, 건강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습 니다. 남은 생애 동안 이민사移民史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마무리하고 싶은 의욕뿐입니다. 그동안 <자랑스런 한인들>의 비디오 회고록에 많은 협조와 도움을 준 동료와 후배들. 김봉구 회장, 이민휘 이사장,민병용 사장, 변홍진 회장, 그리고 이병훈, 김흥수, 또한 로버트 김 등 모두 고맙고, 특히 춘하추동방송의 이장춘국장, 한국아나운서클럽 황인우 편집장의노고에도 감사 인사를 드립 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미주 한인방송 개척사가 본국의 권위 있는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에 실린다고 하니 영광입니다.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한국아나운서클럽 회보에 이 글을 실키로 제안하고 또 실어주셔 김영우선생님 공적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주신 한국 아나운서클럽 황인우 편집장께서 이 글이 춘하추동 방송에 올라 있음을 보고 글을 보내오셨다. 춘하추동방송이 있어 김영우 선배님 공로를 널리 알릴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김영우 선생님 글 미국에서 이 글을 읽으신 김영우 선생님께서 이메일로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이 국장 님! 불록에 올린 깁영우의 글 고맙습니다 특히 본국의 아나운서 클럽 회집에도 소개가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특히 환인우 편집장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 내가 아끼는 이병흔 후배의 서신에 보답하여 보낸 불록에 올린 김영우 과거사 이야기 이것은 반세기 미주방송사의 사료이기도 합니다. 국장님의 노고에 다시 한 번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 요새 저의 건강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힘 다하는 한 견뎌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국장님의 글을 일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북가주 덴뷜에서 김영우 드림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한국에 계시던 젊은 시절이나, 미국에 건너가신 후에도 이나라 방송문화 발전에 큰 발자욱을 남기신 김영우 아나운서님께서 남기신 크나큰 업적들은 그분의 춘하추동 사랑과 함께 영원히 이 춘하추동방송에 길이 길이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옛날만은 아니라해도, 함께하시는 날까지 건강하셔서 사랑을 나누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최철미 (최세훈 아나운서님 딸) 님 글 안녕하세요? 김영우 선생님과 연락이 되어서 책 한 권 보내드렸어요. 댄빌은 제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아주 부자 동네에요. (윙크) 이성화(1959년 부산 mbc개국) 아나운서님 '공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김영우선생님. 이장춘국장님 우리나라방송사 기록에 큰 공헌의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그 보람을 축하드리면서 이나라 방송의날에언젠가 고마운 상을 받게돼시기를 기대하갰습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미주에 한인방송 50년 역사의 첮 장을 연 개척자" 김영우 아나운서! 이 글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서 한국말 첮 방송이 LA상공에 메아리 치게 하셨다구요.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요즘 근황에 그림을 그리시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몸은 비록 초췌 하시지만 이장춘 사장님!에게 보내온 글 속에는 젊은 시절의 기개가 살아 있는 것 같습 니다. 이장춘 사장님!의 춘하추동방송 불로그!를 보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 신다고 하니 이 또한 보람된 일이라 생각 됩니다.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고생하시는 김영우 아나운서 내 외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 드립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김영우 선생님 두번째 글 자난 번 불록에 올려주신 미주방송50년사 해설중이성화 아나운서와 황인우 한국아나운서클럽 회보편집장 유경환, 최철미 그리고 윤후연 선생 영러분들의 이야기가줄을 이어소개 되니 내용이 다양하고 좋았습니다. 글내용을 편집 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이국장님의 글 또 기대하겠습니다. 북가주 된뷜에서 김영우 드림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미국내 한국말 첫방송 1965년 그때 그 목소리 김영우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2086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그 이름(명단) 그 얼굴 사진 http://blog.daum.net/jc21th/17782218 다음 사진은 위 글 중간에 실린 사진입니다. 밤의 플랫폼(이사도라).mp3
좀 늦었습니다. 최근 몇개월 사이 이사를 자주 하는 통에 회보를 잘 보지 못하여.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춘하추동을 보고 김영우 선배님 초대석에 나오신 걸 알았습니다. 늦게나마 댓글을 대신하여 김영우 선배님께 간단한 동영상 하나 만들어 올립니다. 동영상에 관한 김영우 선생님 답글 이국장님과 이정부아나운서님 이정부 아나운서의 갑동적인 동영상 고마웠습니다. 배경음악도 좋았지만 이정부 아나운서의 유화 작품도 퍽 안상적이였습니다. 제주가 많습니다. 우리 춘하추동방송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적품 많이 만들어 보십시오. 고맙습니다. 북가주 된뷜에서 김영우 드림 위 글은 이정부 아나운서의 동영상과 관련된 글이고 아래 글은 원래 올렸던 글입니다. 지난 주말 저의 후배 이병훈이 이곳 덴뷜 양로원에 다녀 갔습니다. 미국의 노동절 연후를 틈타 잠시 들렸습니다. 이 국장님께 소식과 기념사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곧 연락. 갈 겁니다. 2015년 9월 10일 김영우선생님으로부터 온 이메일 내용이다. 이병훈선생은 필자가 KBS 남산방송국에 근무하던시절 군방송실에 근무했기에 잘 알고 지내던 터여서 미국 LA애 사는 이병훈선생 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사진과 함께 답이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멜을 보낼려고 하던 참에 이 형께서 먼저 군방송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먼저 김영우 선배 얘기부터 하고 군방송 얘기는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하기로 합시다. 지난 주일에 이곳은 노동절 연휴였죠. 그래서 신병관계로 LA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있는 실버타운인 양로 아파트로 이사 하신 김영우 선배 내외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소요시간이 LA에서 편도로 7시간정도 됩이다. 김선배 내외와 점심을 함께 했죠. 그리고 3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건강 안좋아 무거운 마음으로 LA로 돌아왔습니다. 김 선배께서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 주신 이 형께 안부를 꼭 전하라고 해서 그날 함께 찍은 사진과 안부를 전합니다. 김영우, 이병훈 선생 내외분이 함께 촬영한 사진 (2015년 9월)
좀 늦었습니다. 최근 몇개월 사이
이사를 자주 하는 통에 회보를 잘 보지 못하여.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춘하추동을 보고 김영우
선배님 초대석에 나오신 걸 알았습니다. 늦게나마
댓글을 대신하여 김영우 선배님께 간단한
동영상 하나 만들어 올립니다.
동영상에 관한 김영우 선생님 답글
고마웠습니다.
아나운서의 유화 작품도 퍽 안상적이였습니다.
제주가 많습니다. 우리 춘하추동방송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적품
많이 만들어 보십시오. 고맙습니다.
위 글은 이정부 아나운서의
동영상과 관련된 글이고 아래 글은
원래 올렸던 글입니다.
지난 주말 저의 후배 이병훈이 이곳 덴뷜
양로원에 다녀 갔습니다. 미국의 노동절 연후를
틈타 잠시 들렸습니다. 이 국장님께 소식과 기념사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곧 연락. 갈 겁니다.
2015년 9월 10일 김영우선생님으로부터
온 이메일 내용이다. 이병훈선생은 필자가 KBS
남산방송국에 근무하던시절 군방송실에 근무했기에
잘 알고 지내던 터여서 미국 LA애 사는 이병훈선생
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사진과 함께 답이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멜을 보낼려고
하던 참에 이 형께서 먼저 군방송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먼저 김영우 선배
얘기부터 하고 군방송 얘기는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하기로
합시다. 지난 주일에 이곳은 노동절 연휴였죠. 그래서 신병관계로
LA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있는 실버타운인 양로 아파트로 이사 하신
김영우 선배 내외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소요시간이 LA에서 편도로 7시간정도
됩이다. 김선배 내외와 점심을 함께 했죠. 그리고 3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건강 안좋아 무거운 마음으로 LA로 돌아왔습니다. 김 선배께서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 주신 이 형께 안부를 꼭 전하라고 해서
그날 함께 찍은 사진과 안부를 전합니다.
김영우, 이병훈 선생 내외분이 함께 촬영한 사진 (2015년 9월)
김영우 선생님! 불모지 미국 땅에서
한국어 방송을 게척해서 키워온지 50년 반세기가
되던 해 2014년 방송을 접으면서 50년간 모아온 방송자료를
DVD에 담아 모두 춘하추동방송에 보내주셨다. 2014년 약 6개월에
결쳐 그 글을 춘하추동방송 형식에 맞추어 올려 안창호, 안병원, 권길상,
위진록, 이경원, 김봉구, 이민휘 등등 미주 이민사를 이끌어 오신 분들의
얘기와 함께 100 여년의 미국 이민사와 우리동포들의 삶, 미주방송역사 등이
새로 등재되어 춘하추동방송에서 미주 부분이 새로 채워지면서 획기적으로
변화되었기에 너무도 큰 공헌을 해 주신 분이다. LA에서 노 부부가 살던
김영우 선생님이 방송을 접던 때 두분의 건강이 나빠져 딸이 살고있는
미국 북가주 산호세. San Jose로 옮기고 거기서 가까운 덴빌
Danville 요양원에 들어가 기거한지 1년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1주일이 멀다하고 안부말씀과
춘하두동방송 글을 보신 소감 등을 보내오시면서
때로는 사진을 함께 보내 오시기도 했다. 글은 종종
춘하추동방송에 올렸지만 사진 올리는 것은 마음에 내키질
않아서 받아 놓기만 했다. 일생동안 쉼없이 활동 하시던 왕성한
모습의 사진을 보아오던 필자가 요즈음의 허약해진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였다. 이번 이병훈 선생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어차피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고 지금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도 괜찮치
않을까. 하는 아음으로 그동안 받아 놓기만 했던 사진을 올리고 아울러
2015년 6월 15일자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초대석에 실린
「미주한인방송의 50년 역사를 연 개척자」라는 제목의
클럽 미주편집위원 정영호 선생 인터뷰
취재 글 전문을 올린다.
2015년 5월 27일 보내온 사진
위는 1967년 도 HOLLYWOOOD 에 있는
Hanna Barbera Animation Studio에서 만화
영화 배경을 그리고있는 젊은 시절의 김영우 님이고
(Richard Khim) 아래는 반세기 후 2015년 5월 북 가주
Brookdale(Danville) 양노원에서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고있는 김영우님 내외분.
위 왼쪽에서 2번쩨의 부인 김인광님
옆에 키가 큰 미술 학생 Bud 그리고 완쪽
어레에 앉아있는 화가 Alice. 올해 91살의
여류 화가 Alice 여사와 같이한 김영우님.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 18호 초대석
-2015년 6월 15일 발행 취재 정영호 편집위원-
미주 한인방송의 초석을 놓은 지 50년,
얼마나 감개무량 하시겠어요!
그 추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친애하는 교포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1965년 6월12일 토요일 아침, 그립던 우리말 방송이
이제 이곳 미주에서 드디어 역사적인 첫 방송을 시작했습
니다. 그처럼 듣고싶었던 우리 음악, 이제 이국의 상공을
메아리치며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합니다.”라는 오프닝멘트가
우리 이민사移民史에서 최초로 시도한 우리말 방송
<라디오 코리아>였습니다.
1961년 4월 원종관, 이장우, 박진현,
장인숙 등과 함께MBC 공채 1기 아나운서로
뽑혀 뉴스, 음악 프로그램 진행, 권투중계 견습 등을
하다가 1963년 6월에 콜롬비아방송대학으로 유학 가 1964년
2월부터 만화영화사에서 배경을 그리며 아르바이트도 하던 때
였습니다. 1년 반 정도의짧은 경험으로 타국에서 맨주먹으로 방송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러나 한인회의 여장부
소니아 석 여사의 헌신과 기술을 맡아준 친구 이순재(Joh Lee),
그리고 둘째 주부터 참여한 서정자 현 시애틀 라디오코리아
사장 등의 도움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미주한인이민사에
<라디오 코리아>가 자랑스러운 한국어
첫 방송으로 기록, 보존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계기로 한국어 방송을 추진하게 되었나요?
그 때방송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우연히 일본어방송을 접하고 자극을
받아 ‘한국어방송을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됐지요. 그래서 미8군 AFKNTV엔지니어 출신으로
로욜라 기독교방송국에서 근무하던친구 이순재(Joh Lee)를
만나 상의한 후 남가주 한인회 섭외 이사였던 소니아 석 여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2주 후 희소식이 들려왔어요. 석 여사가 잉글우드의
KTYM 방송국에 회당 30달러의 전파료를 내기로 하고 토요일 오전
30분 방송을 계약했으니, 3일 내로 방송 할 준
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재가 로욜라방송국에서
녹음 허가를 받기로 하고, 저는 MBC에서
복사해온 녹음테이프 몇 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작 준비에 들어갔지요. 아리랑을 시그널뮤직으로
<라디오코리아> 개국 고지에 이어 안광수 LA 총영사,
조영삼 남가주 한인회장의 축사 사이사이 <대한 팔경>
과 <번지 없는 주막> 등 음악으로 엮어진 28분짜리
<라디오 코리아>란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방송 당일인 6월 12일(토) 로욜라방송국
정규방송이 끝난 새벽 1시부터 철야 제작에 들어갔는데,
다 끝마친 시각이 6시. 익숙하지 못해 4시간 넘게 걸린 겁니다.
부랴부랴 석 여사의 차로 잉글우드의 방송국으로 이동해 방송 개시
10분 전에 녹음테이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오전 7시 30분부터 30분간,
미주 최초의 한국어방송 ‘라디오 코리아’를 무사히 송출하고 나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소수小數지만 방송을 들은 교포들이 ‘미국 이민 온 후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들으니
설레고 기뻤다, 처음 들어보는 우리말 방송에 감격해
눈물이 나왔다.’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방송부터 대학에서 만난 KBS
성우 출신 서정자 씨가 합류해 공지사항, 시,
소설 등을 낭독하니 훨씬 부드럽고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MBC 엔지니어였던 김세대 씨와
KBS 국제방송 서선벽 아나운서도 도와주었지요. 하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11개월간 지속되다가1966년 5월 49회를
끝으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한인방송을
뿌리내리고자 애쓰셨지요? 한국일보 LA지사
장재구 사장과 인연을 맺으며 더 열정
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1974년 12월 16일(월) ‘TV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KVST TV(ch68)를 통해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맹경원(전 DBS)
아나운서와 함께 앵커를 맡아 최초의 TV 생방송을 실시했고,
1975년 10월 12일(토) 한국일보 미주 본사가 설립한 ‘라디오
코리아’에서 방송을 재개, KTYM AM(1460Kc)을 통해
매주 토요일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한인
방송 최초로 AM 전파를 쏘아 올렸고 이것이
지금의 ‘라디오 서울’로 이어졌지요.
15년간의 만화영화 일을 접고 1978년
11월 미주 한국일보에서 설립한 ‘한국 TV’와
‘라디오 한국’의 방송국장으로발령받아 1979년 6월
11일(월) KMAX FM(107Mh)을 통해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주6일, 최초의 우리말 FM 매일 방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1991년 2월 ‘한국 TV’ 방송을 재개하고 그 해 5월 6일포르투갈에서 열린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위성 생중계했고,
1990년 2월 한국일보가MBC와 제휴해 설립한 KTAN TV(현 KTN)의
부사장으로뉴스, 연속극, 교육 등으로 정규방송을 편성하고 방송
실무를 총괄하다 2001년 퇴직했습니다.
그 후 프로덕션을 설립해 <오늘의 신앙>
TV방송을 제작한 것을 비롯해 이민 1세대 노인들의
이야기, 위대한 한인,미국의 자연 등을 비디오에 담아왔고,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재미동포후원회의 의뢰를 받아 <자랑스런
한인들> 수상자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습니다. 또 1974년부터 1
986년까지 12년간 5월에 남가주 미스코리아와 주니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975년부터 1991년까지 16년간 9월에는 한국의 날
행사 피날레인 코리안 퍼레이드의 사회를 맡았던 것, 그리고
1977년 미주방송인협회 창설을 주도해 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 작년
2월 12일, 이역만리에서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던 방송의 역사를 남기고자50년간 쓰던
방송장비를 미국의 USC(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동아시아 도서관에
기증하고 방송현장에서 물러났습니다.
근황은 어떠십니까? 모쪼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931년생이니 올해 86세입니다.
최근 저의집 사람까지건강이 양호하지
못 하자 아이들의 권유로 지난 4월 둘째딸이
사는 북가주 덴빌로 이전했습니다. 브룩데일 양로원
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아시아인은 저희 부부뿐입니다.
덴빌을 지나 콩코드에서 1시간 더 북상하면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 나파벨리가 나오지요. 이제 양로원
생활이 적응이 되어 취미활동으로
그림도 그립니다.
만화영화사에서 배경을 그렸던
실력으로 많은사람들의 환영도 받았습니다.
몸만 건강하면 홍익대 미대서양화과 출신답게 그림
으로 뭔가 보여주고 싶은데, 건강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습
니다. 남은 생애 동안 이민사移民史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마무리하고 싶은 의욕뿐입니다. 그동안 <자랑스런 한인들>의
비디오 회고록에 많은 협조와 도움을 준 동료와 후배들. 김봉구 회장,
이민휘 이사장,민병용 사장, 변홍진 회장, 그리고 이병훈, 김흥수,
또한 로버트 김 등 모두 고맙고, 특히 춘하추동방송의 이장춘국장,
한국아나운서클럽 황인우 편집장의노고에도 감사 인사를 드립
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미주 한인방송
개척사가 본국의 권위 있는 한국아나운서클럽회보에
실린다고 하니 영광입니다.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한국아나운서클럽 회보에 이 글을
실키로 제안하고 또 실어주셔 김영우선생님
공적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주신 한국
아나운서클럽 황인우 편집장께서 이 글이 춘하추동
방송에 올라 있음을 보고 글을 보내오셨다.
춘하추동방송이 있어 김영우 선배님
공로를 널리 알릴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김영우 선생님 글
미국에서 이 글을 읽으신
김영우 선생님께서 이메일로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이 국장 님! 불록에 올린
깁영우의 글 고맙습니다 특히
본국의 아나운서 클럽 회집에도 소개가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특히 환인우 편집장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 내가 아끼는 이병흔 후배의 서신에 보답하여
보낸 불록에 올린 김영우 과거사 이야기 이것은 반세기
미주방송사의 사료이기도 합니다. 국장님의 노고에 다시
한 번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 요새 저의 건강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힘 다하는 한 견뎌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국장님의 글을 일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북가주 덴뷜에서 김영우 드림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한국에 계시던 젊은 시절이나,
미국에 건너가신 후에도 이나라 방송문화
발전에 큰 발자욱을 남기신 김영우 아나운서님께서
남기신 크나큰 업적들은 그분의 춘하추동 사랑과 함께
영원히 이 춘하추동방송에 길이 길이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옛날만은
아니라해도, 함께하시는 날까지 건강하셔서
사랑을 나누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최철미 (최세훈 아나운서님 딸) 님 글
안녕하세요? 김영우 선생님과
연락이 되어서 책 한 권 보내드렸어요.
댄빌은 제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아주 부자 동네에요. (윙크)
이성화(1959년 부산 mbc개국) 아나운서님
'공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김영우선생님. 이장춘국장님 우리나라방송사 기록에 큰 공헌의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그 보람을 축하드리면서 이나라 방송의날에언젠가 고마운 상을 받게돼시기를
기대하갰습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미주에 한인방송 50년 역사의 첮 장을 연
개척자" 김영우 아나운서! 이 글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서 한국말 첮 방송이 LA상공에 메아리 치게 하셨다구요.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요즘 근황에 그림을 그리시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몸은 비록 초췌 하시지만 이장춘
사장님!에게 보내온 글 속에는 젊은 시절의 기개가 살아 있는 것 같습
니다. 이장춘 사장님!의 춘하추동방송 불로그!를 보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 신다고 하니 이 또한 보람된 일이라 생각 됩니다.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고생하시는 김영우 아나운서
내 외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 드립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김영우 선생님 두번째 글
자난 번 불록에 올려주신
미주방송50년사 해설중이성화
아나운서와 황인우 한국아나운서클럽
회보편집장 유경환, 최철미 그리고 윤후연
선생 영러분들의 이야기가줄을 이어소개 되니
내용이 다양하고 좋았습니다. 글내용을 편집
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이국장님의
글 또 기대하겠습니다.
북가주 된뷜에서 김영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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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한국말 첫방송 1965년 그때 그 목소리 김영우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2086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그 이름(명단) 그 얼굴 사진
http://blog.daum.net/jc21th/17782218
다음 사진은 위 글 중간에 실린 사진입니다.
밤의 플랫폼(이사도라).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