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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방송(宋芳松) 음악계의 큰 별, 최초의 박사출신 국립국악원장

이장춘 2022. 2. 6. 07:14


 

  
고 송방송(宋芳松)음악박사!
일생동안 국악을 비롯한 동양음악과
현대(서양)음악을 넘나들며 새로운 음악이론을
정립하고 2021년 8월 영면한 고 송방송 박사에게
2021년 12월 29일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을 맞아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훈장증은 부인
유경환 여사 께서 대신 받았습니다.


훈장증 수여식 동영상






 



송방송(宋芳松)! 1960년,
서울대학교에 신설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악과 지망생, 박사출신이자
30대
대한민국
국가공무원 부이사관으로 보직된 최초 국립국악원장,

 영남대학교에  최초로 국악과를 설립한 교수,   남북한은
물론 세계 
여러
곳에  사는  한민족의     음악인을   수록한
"한겨레음악인대사전"과    "한겨레음악
대사전" 등 50여권의
저술과 200여 편의
연구논문, 수많은 번역서를
 냈다. 국악, 중국,
일본등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함께하며, 
서로 연계지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음악 이론을 정립한
 학자
그 이름 송방송(宋芳松)박사다.

 


송방송(宋芳松) 최초의 박사출 국립국악원장, 국악이론정립의 선구자
 


전통문화의 밑바탕이면서도
서양음악에
뒤져있던 국악이론을 새롭게
정립하고 국악인들의
대우를 서양 음악악인들의 
수준
으로끌어올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온 송방송박사의 
국악인생은
 1960년 서울대학교에 신설된
 국악과에 최초의
국악지망생으로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성악의 꿈을 키워오던 송방송이 대학
입학시기가
 가까워
지면서 주변의 권유에 따라
갑자기 진로가 바뀐 것이다.

국악이라면
 거들떠보려고도 않던
그 시절에 
제 1지망으로 국악을 선택하고
 
대학시절, 조선왕조조실록을 모두 독파
하면서
음악색인을 만들었다.  





그 어려운 한자 초서로 작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대학시절에 독파했다는
말에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선
왕조실록을 독파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옛 문헌도 쉽게 접 할 있었다.
과연 지금의
대학생들 가운데 그리 할 수 있는 학생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국악이론은 옛 문헌에서부터 출발하고
학사학위,
석사학위 논문을
 비롯해서 수많은 저서들이
다른 학생이나 학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논리를 펼쳐
 나갔다.   

그때 만들어 놓은 색인, 
그 오래도록
공들여
어렵게 만든  귀한 자료가 
나다.  
유학길을떠날대 화물편에서 분실되어 1980년대 
다시 만들어 활용해야만
다.  일본어, 중국어까지
  능숙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저서들   ‘악장등록연구’ 
‘한국음악사연구’,   ‘한국 음악통사’,   ‘한국고대음악사
연구’,
  ‘동양음악개론’,
‘조선왕조실록   음악기사 총색인’.
‘조선음악인열전’,  ‘고려 음악사연구’
 
‘악악궤범용어총람’
조선왕조
정재사연구‘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상, 하권‘,  
’한겨레 음악
대사전‘      일반인들이 책 이름도
생소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저서들이
송방송에 의해 쓰였다.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은
송방송은 국가자격고시를 거쳐 캐나다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에는 국가에서 자격시험을 치르고 인정을
받아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어려운 자격시험이었지만 거기에
합격을 해도 유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캐나다 토론토
(Toronto)대학교에서 연간 3,000불의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던 중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하다보니 어려움이 많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등을 외국어로

인정 해 주는 미국의 웨슬레얀
(Wesleyan)대학교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맥길대학교로 돌아와 조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국립
국악원장 제의를 받고 외국생활
9년 만에 귀국해서     대한민국 국가공무원 부이사관
국립국악원장이 된다.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
있는 맥길대학교는
    캐나다의 하버드대학으로 불려
그곳에  계속 근무하라는 권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내나라에 와서 일을 해햐
된다는
일념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오셨다. 고 했다.
 

그때의 공무원법에는 박사학위를 갖은 사람은
 부이사관에 바로 임명될 수 있는 규정이 있어서 별정직이
아닌 일반직 국가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 시절 중앙부처의 국장이
이사관이나 부이사관으로 되어 있었고 지방의 도지사 다음 부지사가
부이사관이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기간 중 1억 8천만원
 정도이던 국립국악원의 1년 예산이 두배가 넘는 4억으로 늘어났다.
서양 음악인들의 반 밖에 안 되던 보수가 서양 음악인들의 수준
으로 올라갔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입던 악사들의 갑사
연주 복이 실크로 바뀌는 등 새바람이 불었다.
 
송방송의 나이 30대 후반 국립국악원의
 최초 박사 원장, 30대 원장을 맞아 새 활력을 찾았다.
송방송이 영남대학교로 옮긴것은 1980년으로 1998년 서울의
한국 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의 교수로 옮길때까지 재직하는동안
 1982년 국악과가 신설되고 곧이어 음악대학장이 되어 후학을
기르면서
 저술활동을 했다. ‘한국 음악통사’ 등 주요저서가
이때 나왔다. 1998년부터
 한국 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교수 재직중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
했고,
2008년 교수직 정년퇴직후 중앙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와 1988년 부터
 이어온
 사단법인 한국음악사학회 
회장, 이사장 직을
맡으면서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사는동안 직책도 직책이지만 일생동안
출간된 저서들을 보면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발휘하신 분이라는 생각이다. 최근에도
2010년에 출판된 ‘악악궤범 용어총람’ 2011년에 출판된
현대음악인
 사전 상, 하권, 2012년에 나온 한국 음악인
대사전 상, 하권과 한겨레
 음악대사전, 2013년에
나온 조선왕조 정재사연구 등 80평생

 그의 저술활동은 계속되었다.

음악학도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꼭 필요한    서적들이다.
 저술의 양도 중요하지만 쉽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
그 분야를 뿌리부터 새로 정립하면서
깊고 넓게
펼쳐지는
 저술 활동이야 말로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일이다.

국립 중앙도서관 송방송 문고









그의 저서도 고대로부터,
오늘의 “한국”이라는 용어를
 넘어
 “한겨레”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한국이라면
남한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겨레가  
어디에 살던
한민족 모두를 어우르는 저서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생동안 모아온 손때 묻은 책 9,700여권과
레코드   1,500여점은 
국립 중앙도서관에 이관되어
 “송방송 문고” 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1930년대 유행가의 음악사회사적
접근',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예기들의
공연
활동'     ,한국 근대 음악사 연구'
등의저서는필자에게도
필수
불가결의
저서들이다.
 





이혜구, 장사훈, 성경린을 국악
1세대라고
한다면 1세대 국악인이 떠난
자리에 송방송이 2세대
국악인으로 우뚝섰고
동서양을 어우르는 음악이론을 함께 한
첫번째 음악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취약하기 짝이 없는 국악이론을
뿌리부터
새로 정립하고  동서양 음악을 접목시켜 국악이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음악이론을 한겨레 음악으로 거듭나게 한
송방송
선생님은 이 땅의 국악의 큰 별이고
음악인의
본보기다.

 




선생님은 후학들에게 말한다.
앞부분은 
생략하고 본문부터 올렸다.


....글쌔 또 그런(앞에 설명을 생략)
 재미 붙혀서 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나는
계속 내 연구하는 파일(file)에 뭍혀 가지고 그저
그런 작업이나 하지, 다른 거는 몰라, 그래서 우리 아이들
말마따나 아버지는 구석기시대에 살아도 아주 구석기 시대에
 사는 사람이고 요즘의 문명하고는 담을 쌓구, 난 서울 살아도 맨날
땅속으로만 댕겨서 이렇게 가끔 가다 보면야, 이게 언제
생겼지?
아! 이거 서울 스카이라인(sky line)이
그냥 막 달라지더라고,
 그렇지만 나는
내 삶을 즐기면서 산다.

 그러니까 젊은이들도 자기 삶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그거를 모색해, 그러면은 많은 업적을
 낼라고 해서 하면 안 돼, 열심히 살다보면 그런 게 막 생겨,
그렇게 살아야지, 난 유명하기위해 책 낸 적은 없어, 내 가는 길,
꿈을 향해서 열심히 살다보니까 부산물로 그기 다 생기더라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후학들에게 내 삶이 조금 참고가
될 수 있다며는 그런
면으로 참고해서 살면 보람된 삶을
살 수 있고 또 관(棺) 뚜껑을 닫고
나서,
나는 늘
생각이 뭐냐 하며는

내가 살어 생전엔
평가 받고
 
싶지 않어, “관 뚜껑을 닿고 난 이후에 평가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하는
 그런 꿈을 가지고
 살면은 학자도 될 수 있고
다 될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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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의 큰별 송방송박사 방일영 국악상 수상 · 인생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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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리나(모송-慕松)와 오카리나 춘하추동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1697


 
 
송방송박사님 국립국악원장
재임시 방한한
카터 미국 대통령 영부인,
 "로잘린 여사"를 환영하는
국립국악원 연주회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 송방송원장이
 함께 했습니다, 
악수하는이가 로잘린 여사,
에이미
-창덕궁후원(비원)-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원 (Smithsonian) 박물관에서
 공연후 국립국악원단원들과 송방송국악원장, 김용식
주미대사,  달런 박물관장이 함께 촬영한 사진.













위는 1984년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장
시절 기족이 함께 한 사진으로  송방송박사님
내외분과
왼쪽은 딸 혜원, 뒤는 아들 상원이고, 아래
사진은 고희기념
 출판회에서 가족, 친척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유카리나 아리랑.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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