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방송인 정근춘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이장춘 2015. 5. 22. 03:22

 

 

 

이 사진을 보는순간 필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수 없이 들어온 방송기술인들의 피땀어린 애화 哀

현장을 이 사진을 통해서 나마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눈이 앃

고지에 있는 송신소의 길이 맊혔다. 쌓인 눈으로 어느곳이 길인지도 분간이

안되고 눈은 사람의 무릅까지 올라온다 길을 안내하는 개는 몸통의 윗 부분만

 보인다. 그래도 송신소에 물자를 운반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때 이와같이 눈이

 쌓여 길이 막혔어도 물자를 운반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개를 앞세워 길을 찾고 

사람이 물자를 끈으로 연결해서 끌고 밀며 올라가야 했다.   1973년 2월

덮인 원주방송국 백운산 TV송신소 오르는 장면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실재로  있었던 우리방송

기술인들이 겪은 일들이고 이나라 방송역사의

 단면이다.  얘기로는 수 없이 들어왔다.

 

 

방송인 정근춘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산 봉우리에 있는 TV송신소 자체기술과

 장비로 고칠수 없는 고장이 나서 수십만, 수백만 시청자가

TV방송을 시청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상상 해 보자. 지금의 디지털,

위성방송시대, CATV시대를 머리 속에 넣고는 상상 할 수 없다. 마이크로

웨이브도 없어 고지와 고지을 연결하는 TV방송 그 자체를 링크로 해서 방송을

 이어가던 1960년대 70년대를 머리에 널고 생각해야 이해 할 수 있다.    그래도 

피나는 현장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송인들도 대부분은

 모르고 살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얘기들을 

말로나마 수 없이 들어왔고   또 이런 얘기를 들을때 마다  기록으로

 남기라고 권유 해 욌지먼  필자가 부분적으로 남긴 기록

외에는 다른 기록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방송기술의 비화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한 방송선배가 계셨다. 그런 얘기를 들을때면 기록으로

 남겨주시면 좋겠다고 했고 그 선배는 그렇게 하겠다면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암이라는 중병이 왔다. 글을 쓴다던 그 글을

보여주시지 못한체 그 분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행여 유고라도 있을까.

그 아들에게 부탁을 했어도  찾지못했다는 말만 들은체 벌써 몇달이

지났다. 방송기술인들은 말은 해도 기록으로는 남기지 않는다.

 

1961년 그 추운 겨울 남산송신소를 건립하던 때의 얘기,

말로는 들어 왔지만 실감나는 기록이 없어 고심하던 중, 어느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촬영한 동영상 한편을 보았다, 음향이 없어 무심코

보면 아무것도 아닌 동영상이었다.  필자는 그 동영상을 수십차례 보면서 

현장을 확인, 정지화면으로 갶쳐해서 동영상과 함께 글로 써 블로그에 올렸다.

그 글을 보신 분들은 "어찌 이런일이" 밎기지 않았지만 동영상이 있기에 실감 할 수

있었다. 그 글을 본 남산송소에서 KBS사원들이 보는 사이트에 올리고 필자에게

그 사실알려왔다. 우리방송걸어온 피땀어린 진짜 방송역사는 숨어

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방송역사는 없는 것이다,

말로만 전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방송을 연구하는 학자, 방송인들은

어디에 무슨 기계를 설치해서 아떻게 방송을 듣게

 했다는 얘기는 기록으로, 방송역사로 전해 그 기계를,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설치했고 그 일을 위해 또는 그것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송신소 건물에 관한 기록이나 사진있어도 그 안에서 또는 송신소를

 운영하기 위해 일어난 애화 話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의 얘기도 1973년 2월 백운산에

 물자를 나르기 위해 피눈물나는 장면을 정근춘이  사진으로 담아 이장춘에게 전해주어서 

 이렇게라도 기록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떤 기록도  남지 않는다.       그 추운날

 명절에도 공휴일에도 100M내외의 철탑을 수 없이 오르내어도 그런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이장춘은 말한다.       당신들이 그런 일을 했으면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런 기록을 내 놓는 분들은 많지 않다. 없이 살던

시절 이룩한 우리 방송기술 역사는 피눈물로 얼룩진 역사다. 그 역사

위에 오늘의 방송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음 기회에 더 쓰기로

 하고 정근춘님이 보내주신  방송사료 사진을 더 올린다

 

 

정근춘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정근춘은 1965년에 KBS 입사 본사와

지역방송국 등 여러분야에 걸쳐 핵심적인 업무

수행한 분이고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KBS 사우회

회장을 지내셨으며 MBC에서도 근무한적이 있어 많은록사진을

보유하고 있을것으로 생각 해 와서 이런 사진들을 춘하추동방송에 제공 해

 주실것을  요청했던바 앞에 올려드린 3장의 참으로 꼭 구하고 싶었던 사진을

 포함해서 여러장의 뜻있는 사진을 보내오셔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리고 앞으로도

춘하추동방송 글을 쓰면서 활용할 것입니다.  오늘 부족한 명은  차츰 수정 보완

것이고 사진에 있는 분들의 성함도 확인되는대로 모두 써 넣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아직도 차인태 아나운서가 사회를 본 결혼식 사진을 비롯해서  그 시절의 방송인들이

 함께 참여 했을법 한 여러장의 사진을 보유하고 계신다고 함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내주시는 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올린 사진

부분에 오승룡선생님이 보내주신 정근춘선생님

 사진도 함께 올렸습니다.

 

 

 

 

1960년년대 高地산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 전파신호를 연결해서 TV방송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가던 시절의 사진이다. 대구 금오산에서 대전 식장산 TV중계소의

 방송신호를 받아 대구역을 TV 가시청권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금오산에 있는 군막사를 사용하면서 그곳에  오는 군사용 전기를 사용,

TV방송중계시설을 해서 대구지역을 가시청권으로 만들었다. 대구나

 부산 등 아무리 사람이 많이 사는 큰 도시 일지라도 서울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TV방송을 볼 수 밖에 없던 시절이라 TV방송에 관한

 문화혜택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TV방송 신호가 중간

 링크 중계소 없이는 바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판에는 "서울텔리비년 방송국

대구중계소" 라고  쓰여있다. 대구방송국

소속이 아니라      서울 텔레비년방송국 직속

중계소라는 말이다. 대구지역 TV방송을 연결하기

위해 위치좋고 군사용 전기를 사용 할 수 있는곳에

중계소를 설치하고 산 봉우리롸 봉우리간

방송신호를 연결하는 것이다.  

 

 

 

 

 

 

1968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 대회실황

중계방송 하던때의 모습으로 남산을 향해 파라보라

 안테나를 조정하는 정근춘님의 젊은모습이다. 여기 사용된 

 중계방송차는 포항이동방송국용으로 쓰던 라디오 이동방송차를

 텔리비젼 중계방송차로 개조해서 1962년 3월 21일 명동 국립

극장 개장때 처음 사용된후 1971. 3. 30. TV녹화 중계차가

 도입 될때까지 약 9년간 사용되었다.

 

 

 

 

 

 

위, 아래 사진은 1971.년 3월  30일 도입된

 당시로서는 최신형이라고 했던 TV녹화 중계차다. 

서울은 물론 전국을 쉴사이 돌아다니던 중계방송차이고

특히  세마을 방송과 꽃피는 팔도강산등 유난히도 이밴트가

많던 그 시절 이 중계방송차는없이 움직였다. 

성함이 확인되는 대로 써 넣을 것이다.

 

 

 

 

 

 1974년 4월 14일부터 다음해 10월 5일까지

밤 9시 40분부터 10시까지1년 6개월에 걸쳐 398회가

 방송되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 자긍심을 갖게 해주던  프로그램

꽃피는 팔도강산을 위해 프로듀서 김수동 작가 윤혁민은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를 돌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한대밖에 없던 중계방송 녹화차가 자주

 배정되었다. 스탶과 출연진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 이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위, 아래 사진 1968년 맥시코 올림픽 방송

신호를 부산 금련산에서 받아 서울로 송부하는

장면이다. 우리나라가 여러모로 악했던 시절 맥시코

올림픽 방송신호는 전적으로 일본 NHK에 의존했다고 그때

이 일을 담당했던 정근춘님은 말한다.  우리나라가 위성을

 이용해서 신호를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간혹 보이

지만 잘 못된 기록임을 강조한다.

 

 

  

 

 

1960년대 청주 중앙공원에 있던 KBS청주방송국 모습이다. 

 

 

 

 

1989년 양평 한화콘도에에서 있었던

 KBS 관리자 워크숖때 한 사진으로 서영훈

KBS사장, 정근춘님을 비롯해서 조찬길, 김은구, 성대석,

문영수, 이후재, 정기채, 이석희, 오승룡, 황규환, 장용섭, 변정호,

 이상욱, 채유석, 김우철, 김무열, 김세일, 백운학, 임춘규, 이규임,

최종림, 김승한, 손종만, 유신박, 심갑섭. 박병학, 이병열,

임건재, 최평웅, 김진평, 이상덕, 이상원 님 등,

 

 

 

1992년 청주방송총국 청원송신소

 

 

 

 

위, 아래 사진 1992년 대전 식장산 방문.

 

 

 

 

 

동   영   상

 

정근춘 선생님 KBS사우회

회장시절 2015년 을미년 새해에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오승룡선생님 방송사료 사진 중에서

  

 

 1974년 7월부터 9월 사이애 촬영한

 여의도 방송센터에 설치예정인 장비교육 기간중

 영국 하이랜드쪽 Glasgow 소재 Thomson Foundation

 Televion College 에서 촬영한 사진을 비롯해서 오승룡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진 중에서 정근춘님과

 함께 한 사진을 골랐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KBS 사우회 13기 새로운 출범 회장 정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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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남산시절 방송기술인들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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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남산시절 방송기술인들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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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남산 TV방송국과 송신소, 육성과 영상으로 보는 시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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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방송협회(해방되기까지) 방송기술인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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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 90년, 그 발자취와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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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 남산송신소와 남산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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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눈속에 길을 만들어가는 고난 중에서도
사진을 찍을 여유가 있었다니 정말 대단 하십니다.
"어제 부터 쌓인눈이 허리까지 차는데, 송신소 에 갈 물자를 지고
길을 만든 님들아,~~~( 모 노래 가사 인용)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불편없이 사는 것은, 어려운 시절, 힘들게 살아온 선인들의 노력과 땀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鄭根春)선생님의 방송역사 사진 제공, 또 정근춘

선생님과 관련된 사진들을 제공 해 주신 오승룡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눈길을 헤쳐가며 임무를 완수하는 불굴의 의지와 사명감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꼭 본 받아야 할 것으료 사료 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가수 김미성 팬카페 회장, 팔방미남 윤후현!~

 

 

 

이성화 (부산 mbc개국) 아나운서님 글

 

 

처음 눈을 밟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알프스 원정대의 모습인가? 하면서 시원험 마져

느꼈습니다. 그 것은 잘못 안 순간이고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이장춘 국장님의 마음처럼 울컥했습니다. 정말 그런 고생과 사명감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런 감동과 성찰을 갖는 시간의 존재도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국장님의 방송역사 기록 사랑과 열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디 이장춘 국장님의 건강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건강 보존 잘해가시기 기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윤군성 선생님 글

 

 

옛일이 많이 생각나네요.

더운날씨에 건강하세요. 잘

보았습니다.

 

 

정미영 선생님 글

 

 

안녕하세요?  정말 귀한 사진과

방송소식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들께서 이렇게 힘들게 닦아주신 기반

으로, 저희 후배들이 편하게 방송을 하게 됐음을

 새삼 깨닫게 한 감명깊은 소식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미영 올림

 

 

김헌수 선생님 글

 

 

kbs를 지켜온 생생한 증인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는 감명깊은 사진  ...옛날 생각하며 잘

보았습니다... 1960년대 kbs.tv개국초 온갖 고충 고난 겪으며

 남산 송신를 올르시던 선배님들의 모습이 떠올릅니다 존함을 잊은

     인자하신  계ㅇㅇ (주: 계수경)소장님,  고 하용득선배님그리고 지금도

건재하신 최용순님 등등 수고하시고 땀흘리신     선배님들의 노고의    

 대가가 오늘의 kbs 송 중계소를 이룩하신 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  

방송 기술 선후배 모든님들 참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공하신 정근춘 전 사우회장님 그리고 이를 옮겨 춘하추동

 방송에 올리신 이장춘 이사님 참으로 귀한 사료    

볼수있게 해주심 감사합니다

 

 

김정숙 (카리너)여사님 글

 

 

대단한 산 역사를 보는것같아

감명깊습니다 격세지감이라할까요^^^

발전이라는것이 이리도 빠르고 대단하구나

방송에 대해서 모르는 저도 가슴뭉클한 세월입니다

그 한자락에 국장님도 소중한 획으로 귀한 자리 매김하셨겠

구나 짐작됩니다존경스러워요!!!근데 국장님 ,역시 방송인들은

 예나 제나 멋쟁이시군요그 오래 전 이분들 차림이 얼마나 멋지셔요 ㅎㅎ

국장님 역시 멋진 세월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해봅니다귀한자료 보게되어

감사합니다저는 글쓰는 재미를 잠시 느낄만하다가 이즈음 다른일에

마음빼앗기다보니글은 되질않고 써야 겠다는 열망에

잠만 달아나고 말았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로사오카리나 김정숙드림

 

 

박서림 (1958년 장마루촌 이발가) 선생님 글

 

 

이장춘 선생, 내 듣기로 개미는

 20%만 일을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빈등빈둥 논다네요. 사람사회도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편한 도리만 찾는

이가  많죠 누가  행복한가 묻는다면  힘들어도

 성취감을 얻는 이가 행복하지 않을 까요. 고생은

되었어도 추억한면 아름답 행복하실 것

입니다 귀중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건강하세요.  박서림.  

 

 

정관영(흰구름)선생님 글

 

 

시설 개시에 반짝 빛나고

그 다음엔 말없는 뒷자리에 잏하는

엔지니어일부 만이라도 파 헤쳐 주시니

 대신 감사드립니다. 아는 얼굴있나 열심히

 흐릿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부 (강아지 아범) 아나운서님

 

 

70주년을 맞는 광복절 만세!  

KBS 방송 기술인 만세!  

정근춘 회장님과 청사없는

춘하추동방송의 연봉없는

 국장 이장춘 선배님 만세!  

 

 

기사가 폭주할 때이기도 합니다만,

나날이 폭이 넓어져 가는 장르... 가시청 지역의

 급속한 지구촌화..,커져가는 영향력과 기여도에도 불구,

청사조차 없어, 정확한 번지 없인 이제 찾아들어오기도 힘든 이곳,

그러나 이번만은 꼭 찾아 들어와야 겠다고 메모해두었던 17782502에

어렵게 당도하니...아니나 다를까...첫 페이지를 열자 마자...눈에

 덮힌 설산에서 무거운 기자재들을 맨손으로 끌고 올라가고

계신 이나라 방송기술 선구자들의 낯익은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에야 절감하는 일

입니다만, 이나라 방송의 주인은 우리 아나운서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저분들이였구나, 저분들이 길을

 닦았고, 집을 세웠고 , 험준한 고지에 철탑을 세웠고, 70미터

송신탑 위를 수십번 오르내리며 라디오와 TV 전파가 흘러 온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회선을 설치했고, 밤낮없이 방송이 끊기지 않도록 감시하고  

정비하느라, 피와 땀, 혼이 서릴 수밖에 없는 저분들이야 말로 빙송의 주인이요,

방송의 유산 상속의 적자요, 칭송과 명예를 안겨드려야할 주인공이 아니겠는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쾌적한 자동차 여행,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한 해외여행을

즐기며 문명의 이기인 승용차, 비행기, 선박등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이라는

 생각만 하고  고속도로와 항로 등 길을 개척하고 건설한 기술인들의

 고마움을 간과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화시대를 살면서 전파로

 지구촌을 한지붕으로 연결하는 선진 기술을 지닌 방송

기술인들의 절대적인 기여와 헌신과 박봉속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근춘 선배님이 제공한 자료를 통해,

이장춘 국장님이 구성하신 화면을 통해 방송이

 흘러나갈 길을 닦은 기술인들이 진정한 방송의 주인이요,

 빙송은 누구도 아닌 그들의 헌신의 산물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의미있는 광복절에 의미있는 공간을 마련

해주신 "청사없는 동지적 언론 춘하추동방송의

 연봉없는 국장" 이장춘 선배님 만만세~


                            삼가   아나운서  이정부 드림

 

 

전주호(상암) 선생님 글

 

 

방송기술자는 예나 지금이나

들에서나 산에서나 바다에서나 강에서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춥거나 더웁거나 태풍이 불거나

 강풍이 불거나 사시사철 주야장철 하루 24시간 아니 25시간

1년 365일 아니 366일을 공휴일과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단 1초의

방송중단도 허락되지 않는 아니 해서도 안되고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운명으로 오직 방송만을 위하여 살아온 방송기술자의 피 눈물 나는

현장의 한 단면을 보니 감희가 무량합니다, 사진으로만

잘 보고 갑니다.  2015.08.18 상암 전주호

 

 

 

 

 

샌디에고 새소리 금잔디.wma

 

 

샌디에고 새소리 금잔디.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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