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시는 동안 마지막 악수를 나누신 분 송재극! 그는 공식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마지막 악수( "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악수" )를 나눈 인사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1980년 바로 그곳 KBS 당진송신소가 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일터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하는 자리에서 영애 박근혜 님과의 또 다른 만남이 있었다. 그때의 영애 박근혜님은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세상에 이런 일, 이런 인연이 언제 어디에 또 있을까. 그 애기와 함께 송재극 공인으로 살아온발취를 더듬어 방송역사와 함께 알아본다.
방송인 송재극
송재극! 195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된 방송생활은 KBS 수원송신소로 부터 시작되어 2001년 KBS 이사직을 거쳐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방송공학회 부회장과 대학교 강단에서 연구, 교육 등을 통해 쉼없는 활동으로 큰 발자국을 남겼기에 대한민국 방송 기술사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필자는 2010년 10월「방송인 송재극님을 통해 본 방송역사의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발길이 닿은 생생한 현장 사진기록과 함께 글을 올린적이 있고 2015년 1월 1일자 KBS사우회보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을 통해 양띠 중 최고령이라는 제목으로 이상수 KBS사보 편접위원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지나온 얘기들을 자세히 올렸기에 두편의 글을 종합해서 다시 올린다.
<학회활동>
방송인 송재극님을 통해 본 방송역사의 현장
30대의 젊은 시절 전주방송국 이리 송신소장을 지내고 곧 이어 1962년 최초의 대 출력 500Kw 남양송신소 건설에 참여해서 기술현업과 이론적인 바탕을 인정받으면서 1968년 문화 공보부 방송관리국 기술행정의 중심역할을 했다. 제1방송의 연희송신소를 소래로 옮기면서 500Kw의 대 출력 송신소를 세우는 기획부터 공사 진척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71년 소래송신소 준공식.
1973년 KBS가 공사체제로 바뀌면서 잠시 기술본부 시설부장을 맡았던 님은 곧이어 기술행정의 핵심인 기술관리부장을 맡아, 전국 난청, 난시청지역의 해소를 위한 시설의 확대, 마이크로 웨이브 등의 전국망 확대 도단위 방송실시를 위한 링크의 재구성, TV의 지역방송 실시를 위한 지역방송 청사 신축등 제반 준비와 시설 등, 한꺼번에 밀어닥친 수많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밤, 낮이 따로 없었다. 현직 재직시 본사는 물론 전국 각지역방송국이나 송,중계소에 이르기까지 시설업무 전반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님은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전화를 통해서 신속히 정상화 되도록 지도해 왔으며 필요시에는 현장을 방문, 처리해 왔다.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성품을 지닌 송재극은 KBS에서 기술국장, 시설국장, 기술본부장 등을 지내셨고 한국전기 통신공사 (현 KT)에서 송신본부장을 지내면서 재직 중에 많은 업적을 남겼도 현업에서 떠난 뒤에도 잠시도 쉬지않고 두차례의 KBS이사, 방송공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오랜기간 방송기술 정책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대학 강단에서 오랜기간 방송기술에 대해 후학지도 및 연구활동과 집필활동을 해 오셨다. 선생님의 행적은 KBS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방송기술에 미친 영향, 실로 지대한바 크다아니할수 없으며. 한 시대의 우리나라 방송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방송관련 국제회의 참석, 활동
1975년 10월 2일부터 11월 22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 T. U 총회는 세계 각국의 대표와 국제기구 등에서 787명의 관계자들이 참여한 방대한 규모의 제2차 장파, 중파 주관청 회의로 방송국의 출력, 위치등 세계 주파수 질서를 재 확립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중요성을 더했고 특히 남북간에는 주파수 전쟁이라고 불릴만큼 불꽃튀는 경쟁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한 송재극님은 우리의 의사를 관철시켜 우리나라가 주파수 경쟁의 우위를 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도록 했다. 이때 세계 각국에 할당된 주파수와 출력은 1978년 11월23일을 계기로 새로운 주파수로 방송되었고 이때의 공로로 님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15년 1월 1일자 KBS 사우회보에 자세한 얘기가 올라 있어서 그 얘기와 함께 님의 방송인 으로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중앙 송재극 선생님 우 정근춘 KBS사우회 회장, 좌 이상수편집위원
KBS사우회보 2015년 1월호 송재극 선생님 인터뷰 전문
대담 KBS사우회 이상수 편집위원
회보 글중 사진과 노란 글씨로 설병된 글은 필자(이장춘)가 삽입한 것입니다. 잘못 삽입된 부분이나 설명은 차츰 수정보완 하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먼저 새해를 맞이하는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회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월이 참으로 빠릅니다. 제 나이 85살이 되는군요. 실제 출생은 1930년 12월 31일생인데 호적에 양띠해인 1931년 1월 1일로 되어 있습니다. 새해엔 누구나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체력적으로 남에게 덜 의지하고, 회우 여러분 모두가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여 복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을미년은 청양의 해라고 합니다. 온순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활동성과 진취성을 가진 양의 특성대로 모든 회우분 들이 건강하고 소망을 이루길 바랍니다. 특히, 금년은 광복 7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고, 스마트방송환경에서 공영방송 KBS가 시청자 중심의 공적 책임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수신료 현실화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 건강해 보이십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노후 건강인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병원을 찾은 일이 아무래도 많아지고 있지요. 50살 무렵부터는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국내외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했어요. 80살까지도 가벼운 산행과 가끔씩 골프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기력이 약해져서 마음의 치유에 노력하고 가벼운 걷기 운동과 실내에서 자전거를 쉬엄쉬엄 타고 있어요. 그리고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뇌활용을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퇴직후 후학들을 위해 경희대학교와 청운대학교에서 10여년간 강의와 저술에 힘을 쏟은 것이 삶의 에너지를 불러 온 것 같아요.
● KBS와의 인연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는지요?
1956년 4월 1일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공채제도가 없었어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할 무렵, 학교와 당시 국가기관 이었던 KBS가 협의하여 추천을 하고, 정동에 있던 방송국에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 5급 공무원(기원)으로 들어왔지요. 그 무렵은 6.25전쟁 후라서 국가건설에 당장 필요한 후방요원(제 2예비역)을 확보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초등학교 교사, 철도 기관사, 기상대 요원, 체신부 요원과 방송 요원 등 3,000명을 국무회의 의결로 뽑았지요. 임택근 아나운서도 이 때 국가 후방요원으로 편입되었지요.
그 후 의무복무기간 5년이 끝나갈 무렵에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전자공학을 공부한 인재들이 많지 않아서 금성사 같은 곳에서 전자공학과 출신이라면 모조리 데려가는 상황이었어요. 이때 KBS에 특례로 들어왔던 동기들이 하나 둘 산업계로 옮겨갔지만 나는 개인의 영달보다는 필수요원 제도의 취지는 물론 방송 현대화에 공헌해보자는 당초의 마음으로 KBS에 잔류하였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끝까지 KBS를 지킨 이는 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KBS와 일생을 같이 하게 된 계기는 대학 3학년 때 연희송신소 (현 소래송신소의 전신으로서 KBS 1R 송출)로 실습을 나갔던 것도 인연이 된 듯합니다.
● 당시의 KBS 시설이나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제 때 구축된 시설이 대부분으로 Radio 시설만 있었고 라디오도 대도시에서나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전국 중계는 반송전화 케이블로 연결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소련 등 주변 국가로부터의 전파 영향으로 특히, 야간에는 공간파의 침투로 우리의 방송 전파환경이 열악하기 한이 없는 등 요즘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북한이 선전선동 목적으로 송신시설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주간에는 겨우 우리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으나 야간에는 북한 방송만이 들리는 형국이었습니다.
● 그래서 대대적인 방송망 확장사업을 추진한거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
그랬지요. 열악한 방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방송 송신출력을 소출력에서 중출력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세계적 흐름에 맞추기 위해 보다 강력한 방송출력 강화계획을 세워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미국 웨스팅하우스 100Kw 송신기를 연희송신소에 도입했고, 그 당시 민간업체에 방송기술을 소유한 기술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남양송신소(500Kw) 건설에 직접 투입되어 불철주야로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적으로 준공을 하게 되었지요. 그 유공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날로 발전하는 방송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 문공부 방송관리국에 발탁되어 그때부터 방송망확장계획을 마련하게 되는 기반을 닦게 되었지요. 1973년 3월,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었을 때 기술관리부장으로 전국 방송망현대화계획을 수립, 본격적으로 추진했는데, 가장 먼저 해외방송 강화를 위한 김제송신소 건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 확보 문제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어요. 자금 확보를 위해 경제기획원의 실무자에서부터 예산실장까지의 설득이란 당시로서는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과제였어요.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인맥구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관계기관과 연계되는 학교동창, 선후배 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국가적인 사업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하여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던 정부 설득에 성공하여 당시로서는 거대한 14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오늘날의 김제송신소가 탄생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제1차, 제2차에 걸쳐 전국 방송망확장계획을 마련하여 추진하게 되었고, 다소 미비했던 부분까지 보완을 거듭하는 등 전국을 가시청화하기 위한 제3차 계획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방송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방송시스템을 완료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추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이나 아쉬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었나요?
이와 같은 방송시설은 UN산하 국제기구인 ITU에 위치, 출력, 전파의 지향성, 운용시간, 호출부호 등을 국제 상호간에 혼신방지와 전파의 균등배분의 명분하에 엄격한 국제적 절차를 거쳐 등록되어야 비로소 합법적으로 운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의 일부로서 인정, 등록 운영되고 있었기에 거의 황무지였었습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데이터를 중심으로 기술적으로 분석하고, 6개월간의 NHK연수, ABU기술회의 참가, ITU 준비회의 등을 통해 준비한 기본기술을 토대로 ITU회의에 직접 국가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동안 준비한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설득을 하여서 주파수체계를 마련하는 등 방송시설의 현대화계획을 추진 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합법적인 방송운영(ITU 규정)은 물론, 직원들과 일치 단결하여 방송시설 건설을 위한 재원확보 등을 KBS 주도로 추진하여 오늘날 KBS의 기반이 구축되었음은 실로 자랑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불철주야 뛰어 다녔던 젊은 날의 기억도 생생하고~~. 그때 공로로 두 번째로 대통령표창도 받았지요.
1975년 ITU총회 회의장
ITU회의 참석(스위스 제네바, 1979)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제네바에서 열린 ITU총회는 콜싸인 전쟁이라고 일컬어졌다........
ITU회의는 그동안 정부에서 독점적으로 참여해 왔었고 KBS는 사무적으로만 대처해왔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송망확장계획을 KBS가 계획에서부터 네트워크설계 등 세부적인 사항을 추진 해왔기 때문에 그 방대한 사업내역을 일목요연하고 구체적인 데이터 등은 KBS가 아니면 이해도 되지 않는 방대한 사업이었습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ITU], 전기통신업무의 국제적 관리 기구로서 1865년에 설립 (한국은 1952년에 회원 등록)
또 체신부와의 협상을 통하여 도 단위로 KBS 단독 M/W Link 확장과 체신부 M/W망 현대화에 힘입어 1983년 ‘KBS 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비롯한 전국 네트워크방송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하였습니다.
아주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를 들자면, KBS가 방송망확장계획을 추진중일 때, 미국 웨스팅하우스 주도로 시험중에 있던 T-COM(약 700만달러) 사업으로 방송망현대화계획을 대체하라는 당시 정부기관 특수계층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15명의 전자공학박사 등 전문가를 통한 연구와 세미나를 통하는 등 면밀한 검토를 하여, 기술적인 면은 물론 기상여건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할 때 T-COM에 의한 방송망 확장(Radio, FM, TV방송의 양호한 방송권역 확보)은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청와대에 제시하여 추진방향을 정리했던 일이 있습니다. 결국 T-COM계획은 5차례의 국내 실험과정에서 강풍과 적설 등으로 인한 대형사고가 발생하여 실패로 끝났습니다.
1976년 9월 일본 교토에서 I. T. U주최로 열린 S.B(Sttellite Broadcasting) 세미나 모습
위 사진은 TCC에 참여한 분들이 함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이 회의에 우리나라에서 참여하셨던 송재극님(우)을 비롯해서 TBC 홍두표님(좌), MBC (중)
말레이지아 쿠아라룸플에서 열린 ABU기술 위원회-1976년 9월-
1978년 6월 교토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4차 CCIR총회에 참석한 송재극님
■.T-COM (Tethered Communication),
견인식 氣球 송신체계, 미국이 월남전의 밀림지대에서 원활하고 광범위한 통신수단 확보를 위해 개발. 고도 약 3,000m의 상공에 통신장비를 탑재한 기구 (氣球)를 줄에 매달아 띄어놓고 송신하는 장비로서, 지상 장애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원거리 통신이 가능 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다수 송신시설이나 중계시설을 갖추지 않고서도 넓은 지역을 한꺼번에 가 시청권화 할 수 있는 즉, 제대로 가동만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경제적이고도 이상적인 시설이었다. 한국방송총람, 방송문화진흥회편, 1991.12.30, 나남
그리고 상(賞)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후에 앞의 2차례 대통령 표창외에 타부처 소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신부장관 추천으로 국민포장(1986)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그때부터 KBS가 타부처 포상계획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1972.8.15. 대통령표창, 1976.5.1. 대통령표창 1985.9.3.기술상,한국방송협회장, 1986.4.22. 대한민국포장
1975년 ITU총회 관련 표창패와 이를 전달하는 박원근 체신부장관-1976년-
2003년 방송위원회 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받는 송재극님
KBS를 떠난후에는 방송기술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대상으로 ‘KBS방송기술인협회’에서 수여하는 ‘한덕봉 상’(2005)을 비롯하여 ‘한국방송협회’로부터 제12회 한국방송대상 개인상(기술상,1985)을, ‘방송위원회’로부터 ‘한국방송대상 특별상(방송주파수확립 유공, 2003), ’한국전파진흥협회‘로 부터 공로패(2009) 그리고 ’한국방송공학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여 한국 방송기술의 발전과 국제화에 기여하였다는 공로로 공로패 등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방송기술인협회 한덕봉상 시상(2005)
2005년 12월 KBS기술 후배들이 방송기술의 원조 한덕봉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서 제정한 한덕봉상을 송재극선배님에게 드렸다.
한국전파진흥협회 공로패(2009), 한국방송공학회 창립 공로패(2014)
● 방송국에서 근무하신 이력은 어떻게 됩니까?.
1956년에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중앙방송국 수원송신소, 이리송신소장, 남양송신소 계장, 문화공보부 방송관리국 시설계장 (1956~1973), 한국방송공사 기술국 시설부장/ 기술관리 부장/ 기술부장(1973~1978), 기술국장/시설국장/남양송신 소장/남산송신소장(1978~1981), 기술본부장(1981~1983), 방송기기종합정비소장/기술정책개발국장/종합조정실 (1983~1986)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이후 1986년 12월, 전국 공·민영 방송송신시설이 KTA(현 KT)로 이관, 운용되던 시기에는 KTA방송망사업 본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KTA 집행간부1, KTA 집행간부2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5월에 다시 각 방송사로 환원됨에 따라 KBS로 돌아와 그해 연말까지 KBS 방송연수원 교수실 기술위원(교수)로 있다가 퇴직했으니까 방송업무에만 32년간 근무한 셈이지요. 또 1991~1993년과 2001~2003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 으로부터 “KBS 이사”에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KBS 이사 활동
1986년 6.29선언이 있은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방송민주화의 일환으로 1988년 민주화된 제1기 KBS이사회가 구성되었다. 송재극님은 1991년 10월 부터 1993년 7월까지 제2기 이사회와 2001년 1월 부터 2003년 5월까지 제6기 이사회에 참여해서 KBS 경영은 물론 기술정책, 남북교류, 국제방송교류, 지역방송육성등에 힘을 기울였다.
제 2기 이사님들과 KBS간부들이 함께한 사진으로. 송재극님 비롯해서 노정팔, 강찬선, 김동철, 김동환, 김춘수, 박흥수, 윤여훈, 이혜복, 전응덕, 한남석, 홍기선님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는 이사회장에서의 송재극님.
지역방송국 실태파악시찰
송재극, 김춘수, 전응덕, 홍기선이사
아래는 제 6기 이사시절 2002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국제방송 교류와 해와방송 시찰을 위해 러시아와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으로 송재극님을 비롯 전응덕, 이연택, 김철수이사님과 박원훈, 정중석님이 함께 함
교향악단 남북 합동연주회 참관
2001.10월부터 제6기 KBS 이사시절 2002년 9월 교향악단 남북 합동연주회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때의 모습 연주는 평양 봉화극장 에서 있었다. 송재극 전응덕이사, 이정석 시청자 위원장, 강대영부사장이 함께했다
오랜 재직중에 그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사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려움을 참고 함께 한 동료들과의 팀워크가 공동으로 이룩한 결과였음을 지금도 가슴깊이 한분한분,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퇴직 후에는 경희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1999~2002), 청운대학교 방송산업학과1997~1999),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1999~2001)의 겸임교수와 초빙연구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 한국 DATA통신(주) 기술위원(1989~1991), 한국방송개발원 상임이사와 상임고문 ( 1991~1996 ), (주)DSM (Dacom Satellite Multimedia System) 상임고문(1997~2000)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 故박정희 대통령의 공무 수행중 마지막 악수를 하셨는데요?.
시설국장이었을 때인 1979년 10월 26일, 故박정희 대통령께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후 당진송신소에 헬기로 이동, 당진송신소 준공식(당시는 보안시설로서 외부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며, 당진송신소는 현재 KBS한민족방송을 송출하고 있음)에 공식 참석하였어요. 이날 오후에 송신소 준공식과 기념식수를 마친 후 준공식 시설안내와 설명을 한 저에게 수고했다고 격려 악수를 하시고 귀경을 하였습니다. 이 악수가 결과적으로 공식행사에서는 故박대통령의 마지막 악수였고 제가 그 악수를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 4월 22일, 당진 송신소 앞 정원에서 박근혜(現 대통령)님이 참석한 가운데 “故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일자리” 추모비 제막식과 기념식수 행사를 가진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최후일터 KBS 당진송신소와 송재극님 -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악수-
故박정희대통령 공무수행중 마지막 악수(197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날 당진송신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KBS기술관리국장시절의 송재극님. 박정희 대통령과 송재극의 악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악수가되었다. 얼마 안있어 시설국장이 된 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일터였던 당진송신소에 박정희 대통령 최후의 일터 추모비를 세우고 그 추모비 앞에서 명복을 빌다.
박대통령 마지막일자리”추모비제막(1980)
위, 박정희 대통령 영애 근혜님과 당시의 KBS 최세경사장님을 비롯해서 관계자들이 참여한 추모비 제막식때의 장면이고 아래는 송재극님(좌)과 김집님(중) 최순용 당진 송신소장님(우)이 함께 한 사진
추모비와 기념식수(現在 KBS당진송신소 경내)
또, 그동안 모아둔 방송관련 소장 도서 약 7,000여권을 서울대학교, 청운대학교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기증하고, 또 책을 필요로 하는 산·학계 후배들에게 분야별로 나누어 주었던 일도 의미있는 일로 기억에 남고... 이외에도 체신부가 주관한 정책자문위원회, 통신진흥협의회 전파이용분과위원회, 전파기술연구개발사업심의평가위원회를, 방송위원회의 방송제도연구위원회, 공보처의 종합유선방송추진위원회와 남북방송개방추진협의회, 문화부의 저작권 심의조정위원회, 상공자원부의 영상산업개발민간협의회, KBS와 EBS의 경영평가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현재까지도 대한전자공학회, 한국통신 학회,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학회 및 한국방송공학회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KBS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KBS와 사전에 조율을 하여 공사 정책에 도움이 되도록 했던 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 방송관련 저술과 연구활동을 많이 하셨는데요?
주요 저술로는
방송기술총람 (송재극, 커뮤니케이션북스, 2003), 한국방송 70년사(공동집필, 한국방송협회, 1997), 위성방송(한국언론연구원 총서, 1993), 한국방송총람(방송문화진흥회편 공저, 도서출판 나남, 1991), 뉴미디어기술입문(산업도서출판공사), CATV 기술(송재극, 임춘규 공역, 가남사, 1985)등이 있습니다.
주요 연구 논문으로는
“남북 방송 시스템의 상이성과 극복방안” (송재극,진용욱. 방송연구 1990년 여름호), “방송 전파의 현황과 효율적 이용방안”(방송연구 1991년 여름호), “CATV와 방송환경의 변화”(한국통신학회지 제7권 4호, 1990), “CATV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각 국의 현황”(한국언론연구원, 1989), “HDTV의 의의 및 개발현황”(한국언론연구원, 1989), “통합 디지털화에 따른 변용구도”(한국언론연구원,1989), “북한방송개방, 기술적 과제”(방송협회,1998), “한국방송기술의 발전과 전망”(한국방송공학회, 2000), “TV수상기 발달사, 발전과정과 향후전망”(방송위원회 방송21, 2001)등이 있습니다.
또한, 책임연구원이나 연구원으로서 참여하여 연구·발표한 내용으로는 남·북한 통신 방식의 비교 연구(1990-1991), 위성방송 시대를 대비한 남북 TV 방송방식 통합에 관한 연구(1991-192), 남북통일을 대비한 방송정책 기본방향에 관한 연구(1991-1992), 방송전파의 효율적 이용방안 연구(1992), 종합유선방송국 규모별 시스템 구성(1992), 직접위성방송(DBS) 도입을 위한 정책 연구(1992), 남‧북한 방송교류를 위한 제반기술과제 연구(1992), 통일에 대비한 방송체계(한국방송개발원,1995), T-COM과 방송망 구성의 꿈(문공회, 2007)등이 있습니다.
저서
●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삶의 좌우명이라면?
생활 신조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주어진 작은 힘이지만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면서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했습니다. 솔직히 주어진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해 준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의 팀워크였음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KBS에서 일하는 동안 다양한 일을 경험하고 실력을 튼튼하게 쌓기 바랍니다. 엔지니어 경우에도 기술뿐 아니라 다른 업무로도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일을 맡거나 처리해야 할 경우에도 할 수 있고 적응도 할 수 있습니다.
● 가족은?
1955년 결혼했으니 내년이면 60주년, 回婚이 됩니다. 2남 1녀에 2명씩, 6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는데 어느새 3명은 취직해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빠른 거지요 특히, 사위가 KBS에서 내가 걸어 온 방송기술인의 길을 걷고 있어 흐믓하고 자랑스럽습니다.
● 사우회와 회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KBS는 ABU회장社를 연속 3회째 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방송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해가고 있고, 사우회우도 3,000여명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큰 발전입니다. 사우회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그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온 귀중한 경험과 축적된 지혜 그리고 고귀한 노하우를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현직 사원과 공동 보조를 맞추어 사회적인 발전과 문화융성 강국으로의 발전을 견인하는데에 최선을 기울이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 100세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점차적으로 노령화 되어가고 있는 회우들의 갖가지 바램들을 큰 그릇에 담고 소화시키기 위한 원동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 온 정근춘 KBS사우회 회장님을 비롯한 역대 회장님, 모든 회우님들의 수고가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KBS한국방송이 사회적인 역할을 더욱 충실하고 활발하게 만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범 KBS가족 모두의 건강과 가치의 공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새해에 회우 여러분은 물론 KBS임직원 모두가 더욱 더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화 보
선생님의 발자취를 더듬는 수 많은 사진 중에 위 글에 사용하고도 미처 못올린 샂 사진중에서 골라 올렸습니다.
KBS 이사회 활동
지역방송국 실태파악시찰
아래는 제 6기 이사시절 2002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국제방송 교류와 해와방송 시찰을 위해 러시아와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으로 송재극님을 비롯 전응덕, 이연택, 김철수이사님과 박원훈, 정중석님이 함께 함
교향악단 남북 합동연주회 참관
2001.10월부터 제6기 KBS 이사시절 2002년 9월 교향악단 남북 합동연주회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때의 모습 연주는 평양 봉화극장 에서 있었다. 송재극 전응덕이사, 이정석 시청자 위원장, 강대영부사장이 함께했다
1969년 NHK기술 연수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 송재극님과 이용실님이 이 연수에 참여함.
국제방송 기기전 (인터비)에 참석한 송재극님.
1976년 4월 남양송신소에서 김영진님의 정년 퇴임때 촬영한 기념사진으로, 김재중부사장, 이인관 기술이사, 송재극, 박경환, 권오진, 최순용님을 비롯해서 본사 기술 간부들과 남양송신소 직원들이 함께 한 시진 아래는 퇴직 기술간부들이 남양송신소에서 함께 한 사진
‘이산가족을 찿습니다’. KBS본관(1983)
다음은 1960년대 70년대 선생님의 현지출장시 촬영한 사진으로 그 시절의 방송국이나 라디오중계소 모습을 보실 겸 해서 올렸다.
강능방송국이다. 1950년대 60년대에는 라디오방송국을 이런 모습으로 세웠다.
1958년에 세운 옥천동(시청앞) 춘천방송국이다.
여수방송국 순천중계소 HLKZ라고 기억되지만 건물이 달라서 더 확인 해 볼 일이다
광주관내 중계소
봉의산
영도
전주
수원송신소 마지막 모습 1995년
감악산 터를 잡던때
사북
원효봉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한평생을 초심으로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른의 모습을 보고 읽었습니다. 불구하고 건강해 보이신다는 점입니다. 애국이란, 목소리를 높여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초지일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새기고 또 새기며 살아가는 일이라 생각합 니다. 송재극 어른께서 살아오신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과 고개 끄덕임을 느낍니다. 모쪼록 건강하셔서 편안한 노후 즐겁게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한범 선생님 글
감사합니다.송재극 선배님의 일생은 방송기술발전에 다바치셨습니다. 가끔 뵈면 선배님에 존경심이 우러나옵니다. 우리 후배들은 그 뜻을 이어받아 한국의 방송기술을 발전시켜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를 향상시키고 산업도 육성시켜야합 니다. 편집하시느라 노고가 크셨습니다.
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 이한범 사무총장 올림
정관영 (흰구름)선생님 글
제가 남양송신소를 보았을때는 사각 자립식 안테나를 수직 지선식 안테나로 교체하는 중이었습니다. 김영진 선배 소장님 은퇴식 사진은 나중에 올려주셨는 데... 거기 사진 속엔 아는 전기직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장님은 뵈온 적이 없습니다.. 아마 춘천 사농송신소 근무 시절인 것 같습니다. KBS 근무 중 황금기가 그때였습니다... 나의 아들 둘도 거기를 제2의 고향으로 알고 있습니다..사택에서 살았지요....
김헌수 선생님 글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는 송재극 선배님 방우회 이장춘이사통해 선배님 걸어오신 길을 다시 볼수있어 참 반간가웠습니다 , 요즘은 건강이 회복되셨닌지요???또한 사모님 병환은 어떠신지요... 저도 나이가 먹고있어그런지 선배님들의 용안이 그리워집니다 김용준이도 그럭절거 잘있는데 거동은 불편한가봐요 송선배님 오래오래 사시고 건강하시글 기도합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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