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90%를 넘는 현 시점에서 2014년 말부터 방영된 화제의 영화 "국제시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며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영화의 출발점 "흥남부두철수작전" 그 상황을 재현 해주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6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그 상황을 겪었거나 목격 한 사람은 극소수다. 하고 또 그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발로 뛰었던 종군기자는 한영섭기자 한분밖에 없다.
회장이시다. 국내, 방송, 신문 등 많은 매체들이 그때의 한영섭기자에게 역사적인 증언을 듣기위해 찾아온다. 그 단체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 이사로 있는 필자에게도 자주 연락이 온다. 한영섭 기자는 말한다. "그 시대 그 상황을 알려야 할 사명을 띠고 있음으로 그 일이라면 발벗고 나설것이다. 라고 오늘 동영상은 한영섭 기자가 출연한 강원민방 DMZ스토리 등 방송프로 그램과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편집해서 한편으로 제작한 것임을 밝혀둔다.
흥남철수작전 그때 그 현장 취재 종군 한영섭 기자증언
한영섭기자, 방우회 회장, 종군기자회 회장
1949년 2월 공개경쟁시험을 거쳐 KBS 중앙방송국에 들어와 그해 8월, 국방부를 출입하게 되었고 6.25가 터지자 방송이 전시체제로 바뀌어 전쟁터 남북을 오가며 취재 활동을 수행했다. 한 기자 초기시절은 군이 창설되어 얼마 안 되었을 때로 국방부를 출입하던 선배기자들은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 시절부터 출입하던 분들로 육군 사관학교에서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김진섭, 이지웅, 방낙영, 박성환, 김군서등 베테랑급 기자들이었다.
한 기자는 2차로 1950년 2월부터 김우용, 최경덕, 이재형등 선배기자들과 2주간의 종군기자 교육을 받았다. 종군기자 훈련이라고 해서 별도로 훈련 반을 편성한 것이 아니라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과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6.25가 터지고 같이 훈련을 받던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졸업 1년을 앞두고 전쟁터에 나가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비참한 현실을 보아야만 했다.
북진을 계속하고 있던 수도 사단을 따라 한기자가 청진을 향해서 서울을 떠난 것은 9.28로 서울이 수복된 후 11월초 였다. 생사를 넘나들며 철원, 원산, 함흥, 청진을 거쳐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서 취재활동을 하고, 전황은 함흥방송국 등 북한에 있는 방송국을 되 찾아 단파방송으로 서울 중앙방송에 연결되어 전국방송이 이루어 젔다. 북한에 있던 방송국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인해전술로 닥쳐오는 중공군 앞에서 청진이 함락되고 UN군이 중공군 에게 포위당해 오고가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유명한 흥남 철수작전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영섭 기자의 취재 회상기가 이 글 끝부분에 안내되어 있다.
1.4후퇴로 부산에 온 방송인들이 함께 촬영힌 사진입니다. 송영호 방송과장 한영섭, 조한긍, 이근정, 조용하, 이용태기자와 조남사 연출계장, 배준호 PD, 윤길구, 홍양보 (VUNC에서 다니러 왔다가), 강익수, 양대석, 김경자 아나운서가 함께한 사진입니다.
북진하는 UN군과 함께 생과 사의 갈림길을 걸으며 청진까지 가서 취재활동을 하고 1.4후퇴로 부산 피난길에 오른 한영섭기자는 국방부나 UN군 등 주로 군관련 기관을 출입하면서 바쁜 취재활동을 했다. 전시중의 계엄령 하에서 모든 일을 군이 주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한기자는 취재 활동이라는 본연의 임무도 중요 했지만 군과 방송국의 연결 다리 역할을 하느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위 사진은 퇴로가 맊힌 영, 호남의 빨지산들이 몰려든 전북 남원지구의 민심수습과 공비들을 대상으로 심리전 등을 위해 이곳에 방송국을 세울 준비를 할 무렵,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는 장면 이다. 한영섭기자는 UN군 심리전 당국의 협조를 받아 구호품을 마련, GMC 추럭에 싫고 중 무장한 UN군 군인 5명과 함께 격전지 남원을 찾아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방송국 설립을 원만히 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방송인들은 6.25때 군복을 입고 HLKA가 쓰인 견장을 달았다. 이때 지리산을 끼고 있는 남원지구에는 퇴로가 막힌 영, 호남의 빨지산들이 모여들어 군과 전투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공산당이 지배 하면서 주민들은 극도의 시달림을 받았고 민심은 흉흉했다.
정부도 UN군도 이곳에 관심을 가졌고 KBS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송국을 새우기로 했다. 방송국 설립 책임자로는 춘천방송국을 설립한 경험이 있고 6.25가 일어 날때 대전방송국의 방송과장과 기술과장을 겸한적이 있었던 유병은님이 선임되었다. 위 사진은 한영섭기자, 방송국을 새우기 위해 와 있던 유병은님, 그리고 윤치호, 김봉완님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어린 학생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방송국이 개국한 후 윤치호, 김봉완님은 남원방송국장과 방송과장에 각각 임명되어 1970년대 초, 중반까지 이곳에서 근무했다. 남원방송국을 짛을때 안테나를 세우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때는 안테나를 나무로 세월다.
1. 윤헌영(시설과 목주 안테나설립), 2. 윤치호국장, 3. 전주호 기술과장 6. 우제탁, 7. 이택현, 8. 김경배, 9. 김봉완 방송과장. 10. 이영복 아나운서
1955년 KBS보도실에 처음으로 텔레타이프가 설치되고 외신부가 활동하게 되면서 보도가 한층 활기를 띠어 갈 무렵 한 기자는 내신부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1956년 3월, 우리 방송으로는 최초로 필리핀에서 개최된 아시아 민족반공대회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대회실황을 녹음으로 취재보도 했다. 한기자의 현지보도는 국제전화를 통해서 단독으로 송신 되었으므로 국내 신문사나 통신사의 기자가 방송국의 주조정실로 달려와 대회 현장보도 내용을 직접 듣고 취재 해 가서 방송의 속보성이 돋보였다. 1958년 한 기자가 KBS 보도책임자가 될 무렵 미국으로부터 초단파 중계 장치가 된 “라디오 카”(이동취재차-아래사진) 10대를 들여와 중앙과 지방방송국에 배치해서 현장감을 살린 녹음취재 방송이 더욱 강화되었다.
1958년 2월 16일에 발생한 KNA여객기(34명이 탑승한 창랑호) 납북사건은 3월 6일에 26명이 귀환될 때까지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보도방송에 대한 청취자의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보도 2원 방송을 처음으로 시도해서 판문점 현장에는 기자들이 직접 중계 장비를 가지고 나갔다. 그시절 방송인들은 극히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밤, 낮없이 공휴일도휴일도 없이 일하던 때였고 전 방송인들이 한마음 되어 일하던 때였다.
아래사진은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뤈 선거상황을 전화로 취재하는 모습이다. 부를때는 장관이라고 하던 오재경 공보실장이 남산 KBS 보도실에 나와 기자들과 함께 취재에 힘을 보태는 모습입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분이 오재경 실장이고 기사를 쓰고있는 분이 한영섭 내신부장이다. 오재경장관은 한영섭기자와 강영숙아나운서의 결혼을 직접 주선한 주인공 이기도 하다. 장관에서 일선직원까지 모두 하나된 시절이었다.
한영섭 기자의 활발했던 보도활동은 자유당 말기로 치달으면서 3.15부정선거, 4.19를 거치는 동안 제도적 제약으로 방송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을 아쉬워 하며 격동기 바빴던 활동을 뒤로하고 1960년 10월 방송국 문을 나섰다. 방송이 좋아서 방송기자가 되겠다던 입사할 때의 꿈은 14년 만에 끝났지만 세월이 지나 대한언론인회에서,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에서, 그리고 종군 기자회에서 옛 동지들과 다시 만난다.
처음 보도실장이 되었을 때의 한영섭님. 옛 정동 KBS방송국 앞에서 왼쪽부터 한영섭, 김재연, 박상진, 윤길구, 한기욱, 정순일님이 함께 한 자리인에. 윤길구, 한기욱, 김재연, 정순일님은 타계하셨다.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
내신부장시절에 오재경 장관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강영숙 아나운서와의 결혼은 오늘날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50년대로부터 70년대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여자아나운서로, 1970년대 여자 아나운서실장 1호라는 명예스러운 호칭에, 예절질서를 확립하려는 육영수 여사의 뜻을 받들어 1974년에 설립한 예지원 (30만이 넘는 국내. 외 회원이 있음) 원장으로, 또 세 아들의 어머니로 강영숙 여사와의 가정생활은 늘 행복한 모습이다.
60년 전, 사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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