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한국방송의 기원과 노창성 이옥경

이장춘 2014. 12. 26. 12:09

 

 

 

이 글은 KBS사우회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2014년 12월

19일에 발행한 현장체험으로 엮은

「한국방송사」에 올라 있는

필자의 글입니다.

 

 

한국방송의 기원과 노창성 이옥경

 

 

이 나라 방송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시험방송 1924년 12월 10일 그때의

기념사진이다. 노창성(盧昌成)과 이옥경(李玉景,

노라노(노명자-盧明子) 대를 이어 80여 년간 앨범 깊숙이

 간직해 오면서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던 이 사진을 “방송역사를

새로 써가는 「춘하추동방송」에서 꼭 필요한 곳에 사용 해 달라.”는

당부 말과 함께 이 나라 방송역사에 꼭 있어야 할 몇 장의 사진을 보내

왔다. 2007년 12월의 일이다. 실로 깊은 뜻이 담긴 이 사진을 소중

하게 간직하다가 KBS사우회가 방송역사가 담긴 사진과 글을

엮어 기록으로 남긴다기에 기꺼이 응했다.

 

 

 

 

이 사진속의 노창성(0안)은 이 나라

방송의 창시자요, 노창성의 부인 이옥경은

방송역사의 첫 머리에 올라있는 아나운서다. 이

사진을 보내준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1928년에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이너로 오늘날까지 쉼 없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이 사진에는 그때 시험방송이 울려나오던 확성기가

있고, 벽에 쓰인 글자, 앞부분이 잘려 「話 試送」과 오후 3시라고

 쓴 글자가 보이지만 다른 작은 글자는 필자로서는 판독이 어렵다.  

이 글을 판독하면 좋은 내용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시험방송 때는 오늘날 일상적으로 말하는

 방송을「무선전화」라고 했다.

  

1924년 12월 9일 11시 30분,

오복점 3층에 설치된 기이한 나팔형

확성기에서 기계적인 소리로 전해진 인사말과

 더불어 양악, 국악, 피리소리 등이 흘러 나와 백화점

고객과 지나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체신국 실험실에서

 방송한 무선전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이었다. 1924년 초,

일본 총독부가 이 땅에서도 방송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실무자로 선발된 사람이 체신국 공무과

 노창성과 일본 구라마에(藏前)2년 선배인

시노하라 쇼죠(蓧原昌三)다.

 

기술인 한덕봉이 참여한 것은

시험방송이 시작된 뒤의 일이다. 노창성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 함흥방송국장,

제2방송부장을 지냈고 6.25 전시 중앙방송국장을 거쳐

방송관리국장 재직 중 1955년 세상을 떴다. 시노하라는

마지막 경성방송국장을 지내던 중 해방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1924년이 밝아오면서 이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시험방송 중이던 일본 시바우라

(芝浦) 방송소를 견학하면서 시작된 방송준비는 밤,

낮 없이 진행되어 그해 11월 29일 체신국 관리들과 광화문

구락부라고 하는 체신국 출입기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첫 내부

시험방송을 거쳐 12월 9일 11시 30분! 광화문의 체신국과 京城府

本町 一丁目에 있는 三越 吳服店(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로

 1930년에 새로 지어 미스코시(三越)백화점이 되었고 해방되어

동화백화점이 되었음) 사이 800m를 무선으로 잇는

 역사적인 시험방송이 실시되었다.

 

 

 

 

12월 9일은 특정인들을 초청해서

실시했고 이어 12월 10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전, 오후 두 차례의 시험방송이 있었다. 이날의

 시험방송에 관해서 1924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에 그날의

사진과 함께 「공중에 우는 무성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사진은

판독이 어렵고 기사도 「일본뎐보통신 경성지국 주최로 10일 오전 오후로

열렸다.」는 것과 주최자인 「일본뎐보통신 경성지국장 吉川과 체신국장

原浦의 연설에 이어 연예 오락 방송의 순서로 진행되다.」라고 한

행사진행상황 그리고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허공으로부터

 들어와서 몇 천리, 몇 만리를 격한 사람에게 들린다는

 것은 참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하는 정도의

짤막한 기사로 처리되었다.

 

이때는 누가 방송국을 설립할

것이냐? 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라 신문사 등

 민간인들도 방송국 설립에 관심을 가져서 조선일보사가

12월 17일부터 19일 까지 하루에 3회씩 모두 9회에 걸쳐 시험

방송을 실시했다. 첫날은 수표동에 있었던 조선일보 본사와

관철동의 우미관을 잇는 시험방송이었지만 밀려드는

사람이 많아 둘째 셋째 날은 지금의 조선호텔

앞에 있던 경성회관으로 옮겼다.

 

이때는 조선일보의 큰 지면을

 할애해서 날마다 큰 사진과 함께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져 그때의 방송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시험방송의 실상을 알 수 있다.기사 제목에는

「驚異의 눈」,「驚異의 귀」, 「近世科學의 一大驚異」

「線畵로 映寫된 神秘한 無電의 原理」, 「奇蹟, 神秘」등

 쓸 수 있는 극찬의 용어로 장식되고 사진에는「줄업는

뎐화에넉을일흔군중」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신문사 등 민간인의 시험방송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수원, 인천, 개성 등을

 이동하면서 실시되었고 방송국 설립을 희망하는

사람도 많아져 체신국에 방송국 설립허가를 낸 단체나

개인은 11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미 한 도시에

 하나의 방송국만 세운다는 관례가 생기고 또 방송은 비영리

사업으로 해야 된다는 총독부의 방침이 수립되면서 방송국을

설치하겠다고 나섰던 개인, 단체들이 하나의 위원회를

마련, 1925년부터 방송국설립에 나서면서

시험방송도 단일화되었다.

 

그해 6월부터는 광화문 전화국의

뒤뜰에 있었던 체신국 건물의 서고(書庫)같은

가옥을 실험실로 개조해서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실시

했다. 매주 일요일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 4회의 정규

방송과 비슷한 시험방송을  실시했고  우리말 방송은  목요일과

일요일의 절반정도를 활용했다. 음반방송을 비롯해서 실연방송을

하는 등 방송내용을 다양화 하면서 출력도 총독부에서 만든

5W송신기로부터 시작되어 일제 50W, 100W, 마르코니

400W로 차츰 늘려 방송에 관한 관심을 높여 나갔다.

  

낮은 출력에도 전파장애를 받지 않을 때라

서울이나 경기지역은 물론 그 인근의 지역에서도

들렸고 야간에는 일본에서도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6년 2월 15일, 자본금 20만원의 비영리 사단법인

창립을 목표로 한 경성방송국 발기인 총회가 열렸고

 식산은행에서 설립자금을 융자받게 되어 식산

은행 안에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4월 30일 경성방송국 창립총회가

열리고 7월 1일에는 정동 1번지에 방송국

 기공식을 가졌다. 이 무렵부터 시험방송도 더

강화하면서 지금까지 노창성, 시노하라 등 남자들만의

목소리만의 방송으로는 한계를 느껴 여성아나운서 참여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때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엄격이

제한되던 때라 여성아나운서를 채용 하는 것이 여의치를 않은데다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 앵무새 같은 청산유수의 여성 아나운서를 뽑으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총독부에서는 노창성의 부인 이옥경을 지목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여성 인데다가 음성이나 미모가

출중해서 아나운서로서는 적격이었고 노창성의 말이라면 거절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노창성은 이옥경에게 그런 사연을 얘기했고

그녀는 남편을 돕는 일이라면 방송국에 나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1926년 7월,

이 땅에서 최초의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경성일보사 출신 방송주임

이기도 했던 일본인 남자 아나운서 미쓰나카와 함께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보는 가운데   이 땅의 첫 방송은 막이 올랐다.

사람 목소리가 공중에서 날아온다며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고

 특히 부드러운 여성의 말소리에 잠 설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방송국을 찾아와 이옥경을

보려고 밀치다가 유리창이 부서지는 경우가 생겼고 길을

나다닐 때는 인력거를 활용해야 할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옥경은 아나운서라는 새로운 여성 직업이 탄생했다는 대 대하서

 흐뭇함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의 아나운서 생활은 1928년 둘째 딸

노명자(노라노)가 태어날 무렵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의 딸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말한다.

「아직도 방송 역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어머니

 이 옥경 여사의 이름이 오르고 KBS 아나운서실에는

최초의 아나운서로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다. 어머니는

 82세로 1982년 별세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돌아가신

해까지 매년 방송의 날이 되면   반드시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특별 TV 방송에 출연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이 땅의 방송창시자 노창성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지만 한 일본인 여사장의 도움으로 만주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옥경은 이 무렵에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만난 길고 긴 인연이다.

 

만주에서 학업을 마친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구라마에 공업대학(당시 명칭은 전문학교)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총독부에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1943년

지금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라고 불리는「단파방송사건」

으로 자리를 물러나 1949년 중앙방송국장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년간

다른 일을 했지만 그 밖에는 일생동안 방송과 함께 해왔다.

 

노창성과 시노하라는 구라마에(藏前)

선, 후배로 만나 방송기술인으로 출발해서 방송국

 설립에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경성방송국 개국 후부터는

하는 일이 달랐고 생각도 달랐다. 시노하라는 처음부터

해방 될 때 까지 기술 총책으로 있었고 「단파방송

사건」으로 물러난 경성방송국장 자리를

겸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방송협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에 흩어져

살던 분들을 연결해서 1972년 「조선방송협회」를

결성하고 해마다 모임을 가져 왔으며,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에서 방송을 하던 얘기며 살았던 얘기, 또 패망 후 우리나라에서

 철수 하던 얘기, 일본에서 살아온 얘기들을 엮어 1981년, 「조선방송

협회 회상기」라는 책을 발간해서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1970년대

 8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몇 번 다녀 간적이 있고 정동 1번지에 있는

 첫 방송 터 유허비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1986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90세.

 

 

노창성

 

 

 

 

1897년에 3월 25일 테어나 고아로 자라면서

 만주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나왔고 일본 구라마에

(藏前) 공과대학 전기과를 졸업했다. 전기공학에 조예가

 있었던 분으로 총독부 체신국에서 방송국 설립을 위해 채용했고

 직책은 공무과 기수였다. 1924년 초 부터 일본인 시노하라 쇼죠와

 함께 (시노하라의구라마에 2년 후배) 우리나라 최초로 방송국

설립에 임했고 2년 3개월간 시험방송을 거쳐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개국 할 때는 기술부 직원이었다.

 

경성방송국 사업부장, 함흥방송국장을 거쳐

 제2방송부장을 지내던 중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단파수신사건)으로 퇴직했다.1949년 11월 중앙방송국장이

되어 6.25 전시중앙방송국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3년 환도와

함께 공보처 방송국이 방송관리국과 중앙방송국으로 이원화 될 때

첫 방송관리국장으로 취임 2년 반 동안 우리나라 방송행정을

이끌다가 1955년 1월 9일 영면했다. (1956년에 사망

했다는 설이 있어 제적등본을 확인했다).

 

 

이옥경

 

 

 

 

 

1901년 9월 7일 서울에서 구한말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이학인(李學仁)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아버지

직장 따라 인천으로, 또 만주로 옮겨가 살았고 만주에서

 소학교를 나왔다. 뒷날 남편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은 만주 소학교시절 같은 학교 선후배로 만나

뒷날 결혼으로 이어져 일생을 함께 했다.

 

만주나 국내에 한국인 여학생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어 부득이 일본 큐슈 뱃부에 있는 미션 스쿨에

입학, 학업을 계속하게 됐지만 재학 중 아버지가 세상을 뜨심에

 인천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일본에 있는 딸을 인천 여학교로 옮겨 졸업

했다 (인천 여자 고등학교 전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적었고 남성 

위이던 시절, 방송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청 전파를 탄 영광을 누렸다.

1928년 둘째 딸 노라노가 태어나면서 얼마후 가정으로 돌아와 9남매의

 어머니로 가정생활을 하면서 또 오랜 세월 방송인과 함께

하다가 1982년 5월 1일 세상을 뜨셨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한장의 사진, 한줄 한페이지의

글이라해도 역사적 가치를 지닌 귀한

자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되어 있다가

그저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경우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노라노 여사의 깨어있는 의식과 역사인식(우리나라 방송사)이

 국장님의 엠파스 시절 이미 귀한 자료들을 보내오셔서 다행입니다.
노라노 여사 자신이 이미 80의몸이시니 더욱 그러합니다. 100세

시대에 맞게 건강하신 모습을 TV에서 얼마전에 뵙긴했지만요.
블로그에 머물다가, 때가되어 책속에 실려 나오게됨을

 축하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가지고 계신 자료들을

정리하여 책에 실으신 국장님의 노고 또한

얼마나 값진일인지, 축하받으시어요.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두번째

 

 

제가 몇개월전에 KBS 1TV에서

TV자서전에 나오신 노라노 여사를 뵌것으로

 기억하는데그때 정말 어찌나 젊어 보이시던지 놀랐고,

자신의 생을 값지게 가꾸어오신,   많은 분들이 요즘 말로

Mentor로 바라보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훌륭하신

부모님과함께 더욱 빛나는 분이십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남몰래 간직한 비밀 앨범을 공개 하신

이장춘 사장님!의 용기와 결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kbs 사우회!" 책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여기에 수록된 "현장 체험으로 엮은
한국 방송사"는 수십년간 방송 현장을 누볐던 회원들이 자신

들의 경험담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는 자세로 꼼꼼이 편집

기록 하였다 하니 방송 역사의 높고 깊은 가치를 인정해 주는

 시금석이 될 거라 의심치 않습니다. 최초 방송인 노창성,이옥경

부부의방송사에 남긴 빛나는 업적 그리고 둘째 따님 노라노

여사의 자료 공개는 정말 뜻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 방송 이장춘

사장님!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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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NORA NOH) 패션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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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노가 쓴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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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개선행진곡-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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