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속초방송국의 추억, 고형렬 문학앨범! 등대와 뿔,

이장춘 2014. 11. 4. 19:02

 

 

 

뜻밖의 책 선물을 받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책을 쓰신다면서

이동방송국시절 속초방송국 사진 한 장을 사용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분이 계셔서 좋은 일이면

사용 하시라고 했던 일이 있다. 책이 발간되어 그때의 고마운

마음으로 책을 보내주신 것이다. 고형렬선생

추억과 삶을 수필로 써 엮은 책이다.

  

1956년 11월 속초에서 태어나신 분이고  

아주 어린 시절 방송의 추억을 더듬었다. 고형렬

선생님의 추억은 어쩌면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 모두의 

추억 일 수 있다. 필자가 속초를 처음 찾은 것은 1965년 어느 날

저녁이었다. 차가 분명히 속초시내에 들어왔다는데 시가지는 어둡기만

했다.   필자는 그때 속초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

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렇게 어둡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방송국을 갔더니 산언저리 작은 집에서 발전기를 돌려 방송을 하고

 있었다. 고형렬생님의 추억은 그 보다 더 전으로 올라간다.

속초에서 태어나고 등대 불에 얽인 추억에 이어 세 번째

「속초방송국」그 추억의 글을 인용한다.

 

 

속초방송국의 추억, 등대와 뿔, 고형렬 문학앨범!

 

 

이 지구상에서 방송이 없는 사회는

 상상 할 수 없다. 그 어느 변방에도 고독에도

낙도(落島)에도 말은 떠돌아다닐 것이다. 전기도 없던

속초 초가집들만 길가에 가득 했던 사진리는 저녁이 오면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그 호롱불 집으로 모두 귀가를

했다.1952년 미국에서 들어온 이동방송차가 1956년 속초시

중앙동에 고정배치하면서 정식으로 속초이동방송국이

 탄생했다.  5 〮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속초

방송국은 정식으로 개국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기다란 전선을 전공들이

사진리로 끌고 올라와 설치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뉴스와 노래를 상점 앞에 서서 듣곤 했다. 방송 소리에

따라 나의 정서는 달리 움직이고 뇌는 낮선 상상을 하곤 했다.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방송소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상상하고 판단하는 유기체 같았다.    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글에서도 문명 외의 것을

읽어내야 하는 것처럼 라디오에서 전해지는 것을 통해

다른 속내와 사정을 알아내며 들어야 하는 것이

 방송을 듣는 자의 몫 같았다.

 

많은 상상력을 제공한 속초방송국은

나에겐 신비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전파 속에

전해지는 음악은 한여름 밤의 은하수로 띄우는 편지와

 같았다. 그 존재는 등대와 같았다. 그 후 한국사회의 거대한

변화는 이 방송국이 전해 주었다. 역사적인 현장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이상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만 접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부소식이 전해지는 스피커를 가끔 쳐다보면서 불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방송이 나오지 않을 땐 그 앞을 지나다가 멈추어 서서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아무 기척이 없는 스피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처럼 무료하고 무서웠다.

 

 

 

 

속초방송국이 개국되면서 선친이

 듣던 일기예보는 우리 집의 단골메뉴였다.

일기예보로 우리 집은 날이 새고 기침(기침)을 했다.

생활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매력에 나는 한 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춥고 어두웠던 1960년

겨울 나는 잠이 깨어 새벽에 이불속에서 눈을 뜬 채 아버지가 켜놓은

라디오를 들었다. 속초방송국에서 오는 전파였다. 바람에 불리며

물결에 휩쓸리며 세월은 그 라디오 에서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았다. 그것은

어디론가 쫓겨나는 일이었다.

 

그 질이 좋지 않은 전파가 바람을 탈 때

함께 날아오는 찍찍거리는 잠음 속에서 오히려 나는

 어떤 고독을 느끼고 그것을 즐겼다. 진눈깨비 치는 시장바닥

 같고 어판장 항구처럼 을사년 서러웠다. 살아 있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한주파수에 고정하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던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정말 나와 친구들은 그 라디오 소리의 부름을

받고  어느 밖으로 나가 버린 뒤 돌아오지 않는 것만 같다. 언젠가

선친이 나에게 선물한 트랜지스터로 주파수를 돌리다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들이 잡히기도 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도 전파를 송출한다는 것을 알았다.

 

 

 

 

잘 못된 뉴스와 전파라 할지라도 그 소리가

 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은 용서되고도 남았다.

기다림이 있고 외로움이 있어서 그랬을까. 방송을 못 들은 것과

전파가 안 잡히는 것은 존재론적 실종이다. 극적으로 말한다면

 우주적 행방불명과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등대와 주파수를 잃은 게

 아닐까. 나의 영혼은 어느새 라디오의 시보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암흑 같은 시대 속에서 우리는 가냘프게 이어진 전파의 가족들이

아니었을까. 어디서 누군가 듣는다는 것은 기쁨이고 위로이며

그리움이 되고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성애 꽃이 얼어붙은 유리창에 분광이

들어왔다. 추운 겨울엔 아버지도 이불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양말을 신고 겉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밖으로 나가 덕장을 한 바퀴 살피셨다. 바람에

떨어진 명태가 있으면 주워서 코다리를 다시  덕장 고랑대 한쪽에

 걸쳤다. 굶주린 개들이 물어가기 때문이다. 꽁꽁 얼어붙은 유리창은

싸늘한 첫 인상을 남겼다. 손을 호호 불며 설악산 아래 사진리의

그 추운 겨울을 맞았다. 아침이 추워서 어서 한낮이 되었으면

했었다. 두 부부의 그 자식들이 옹성 그렸던

명태 덕장집의 겨울 아침이었다.

 

 

 

 

 

 

옛동산에 올라 유카리나.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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