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강영숙 : 최세훈 아나운서 특별대담 1968년

이장춘 2014. 6. 4. 05:13

 

 

 

미국 최철미님으로 부터 긴 글이 첨부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1968년 인기절정이던 강영숙

 아나운서외 최세훈 MBC아나운서실장이이 한 잡지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대담내용을 담은 기사를 파일로 만들어 보내오신 것입니다.

그때 그시절 그 시각으로 본  여러 얘기들이 생생하게 쓰여있어 기록으로도

 중요하고 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글이 다소 길어도

 "춘하추동방송" 기록으로 보존코저 전문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보내주신

최철미님은 최세훈 아나운서 큰 따다님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인회계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46년이 지난 기록을

 파일로 만들어 보내주신 정성과 노고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강영숙 : 최세훈 아나운서 특별 대담 1968년 

 

 

 

최세훈 대담 시리즈(2)

 

초대게스트/ 강영숙  

 

병역을 기피하시라구요?

 

 

이 달엔「여류방송인클럽」회장인 강영숙 아나운서를

초대 손님으로 모시고 우리나라 초창기부터의 여류 아나운서계보,

그리고 희소가치로서의 여자 아나운서에 얽힌 에피소드 등을

단골손님 최세훈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들어본다.

 

스피커가 소리통이고 라디오가 제 3의 괴물이라던

그 초창기부터의 여류 아나운서들을 살펴보면─。

 

최초의 여류방송 수상자 밀리운 밀월 여행도?

 

반도호텔 커피숍,

그리고 오후 5시 반에서 6시까지가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

그날따라 청명이자 식목일, 말하자면 공휴일.

 

한가하게 대담 게스트인 강영숙 여사 댁에서 대담을 갖자 했으나,

가족과 함께 산소엘 다녀와야 한다기에 부득이 장소와 시간을 따로 정했던 것.

하늘은 높고 맑았으나 바람결이 아직 쌀쌀했다.

저녁 땐 바람과 먼지 때문에 자연 피로한 표정─.

 

 

강영- 오래 기다렸죠?

최세- 아, 네─ 저도 지금 막─.

강영- 서둘러 왔는데도 한 1·2분 늦었네요.

 

최세- 준빈 다 되었겠죠. 이런 바쁜 때 시간을 쪼개게 해서 정말

미안스럽군요 예정한대로 낼(내일)은 떠나게 돼서 다행입니다만…

밀리우고 밀리운 밀월여행도 겸한 해외여행이신데 말이죠.

강영- 뭐 새삼스럽게 밀월여행은─쑥스럽게.

 

최세- 요 며칠 전에 제 17회 서울특별시 문화상두 받으셨고

부상 20만원은 서슴없이 방위성금으로 기부하셨으며 그리고 또 부군과 더불어

일본 방송계의 초청을 받고 해외로 떠나게 되셨고─

어쨌든 68년은〈강영숙의 해〉라 해도 되잖을까요.

이번서울특별시 문화상 방송부문에서 여류방송인이

수상되긴 최초의 테이프를 끊는 영광도 겸해서 가지셨고─.

강영- 여류방송인으로선 내가 처음인지 모르지만

딴 부문에선 몇몇이 있지 않았나요?

 

최세- 아마 열 손안일 겁니다.

통틀어서도 말이죠.

그만큼 딴 부문에서도 수상자가 희귀한 여류인데

강선배의 수상은 전 방송인도 물론 우리 같은 계통의 아나운서들 에게도

퍽이나 흐뭇한 일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밀월여행 겸 일본 방송계 시찰을 마치시고 언제쯤 돌아오시죠?

 

강영- 아까부터 자꾸만 밀월여행 밀월여행 하는데 제발 그 얘긴 좀 빼줬음 좋겠어요.

우리 집 동거인(여사는 부군을 꼭 동거인이라고 했다)은 동거인대로 딴 볼일이 있어

가는 거고, 난 나대로 딴 일이 있어 갈 뿐인데, 너무 짓궂으셔─.

 

최세- 어쨌거나 부군과 같이 가시는 건 틀림없는 일 아닙니까─ 부럽습니다.

어쨌든 이쪽 일도 많으실텐데 오래는 머물러 계실 순 없을 테고─.

 

강영- 오래 머물러있어야 할 이유도 없죠.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돌아올 거에요. 한 2주일쯤 후면 돌아올 수 있겠죠.

 

여자로 태어난 것 결코 후회 안 해

 

최세- 어쨌거나 강선배께선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활동적이셔.

저희들 MBC는 물론 TV에서두 나가시고 또「새싹회」에 관계하고 계시는가 하면

「여류방송인클럽」의 회장으로 활약하시기두 하고,

강선배께서두 그럭저럭 아나운서 생활이 17년쯤 되나보죠?

 

강영- 임택근 상무보단 한 3년 후배라고 생각하는데 벌써 그렇게 되나요.

어쩐지 나는「몇 년째다」하고 못 박아 버리고 싶잖은 아나운서 생활예요.

햇수를 따지기가 거북하다는 것보다 뭐랄까,

징그럽다 할까─.

 

최세- 저야 물론 그때 없었을 때니까 소상히 알 까닭이 없는 일이지만

강 선배께서 아나운서로 정식 입문한 게 아마 1953년 수복 후였을 겁니다.

말하자면 수복 후 제 1기인 셈이죠. 물론 피난부산에서 잠깐 수습생활을 할 일이 있겠지만.

 

강영- 내가 할 얘길 다해버리면 난 무얼 얘기하지(웃음)─

하여간에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촉탁 비슷하게 처음으로

방송계에 발을 내디던 셈이죠. 피난시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엉망이었어요.

스튜디오가 곧 숙직실… 어수선할 때 어수선한 아나운서 생활을 한 거죠.

대부분의 선배 동료 혹은 후배들까지도 아나운서가 된 동기를 국민학교 시절부터

연극을 좋아했든가 혹은 낭독을 즐겨했다든가 해서 시작했다는 얘기에요 허지만

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죠. 전시연합대학 법학부에 적을 두었던 것처럼

여류법학도가 되고 싶은 게 소녀의 꿈이었다할까─그랬는데

우연히 어느 교수의 권유가 결국 이 길을 걷게 했던 거죠.

 

최세- 아나운서가 된 것을 후회한 일은 없었나요?

강영- 전혀─없어요.

 

 

최세- 앞으로도?

강영- 물론이죠.

후회가 없으니 앞으로도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어요.

 

최세- 원체 건강하시니까 층계에서 한번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고지공포증(웃음) 외엔 전혀 앓아본 일도 없었으니까…

강영- 그래서 늘 그런 약점을 알고 다방도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2층으로 가자구하고─

너무 짓궂어요.

정말이지 높은데 올라가는 건 아주 질색이니까.

 

최세- 혹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후회해 본 일은 없으신지?

강영- (서슴없이) 없어요. 후회할 수두 없게 되었죠.

만일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3총사의 어머니도 될 수 없었을 테니 말예요.

동기생 어나운서 남자가 둘, 여자도 둘

 

최세- 3총사라? -아「원투조」의 아드님을 두고 한 얘기겠죠.

기원 기두─ 그렇게 계속 아드님을 둔 기쁨을

「원·투」로 명시(?) 했을 바엔 셋째 아드님은

「드리」의 음과 가까운 기류쯤으로 했음 좋았을 텐데─

셋째 아드님은 기조로 껑충 뛴 감이 없잖죠(웃음)─

아들만 3총사니 공주도 하나쯤 두었으면 싶을 텐데?

 

강영- 그러다가 또 아들이면 어쩌죠?

저보다는 우리 집 동거인이「공주」에 대해 더 관심이 없어요.

엄말 닮으면 어쩌나 해서죠.

 

최세- 엄마가 어때서?

강영- 여자가 아무리 사회생활도 사회생활이지만,

가정생활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동거인의 사회생활도 이해하려고 애쓴 형편에 딸까지….

 

최세- 그건 그렇고 수복 후 제1기생의 아나운서 동기라면?

강영- 지금 TBC의 기획위원으로 계신 최계환씨가 동기였고

지금은 고인이 된 이순길씨─

그렇게 남자 분 둘하고

여자로선 지금은 가정주부인 김 인숙여사가 동기생이었죠.

 

최세- 이순길선배는 자살을 했죠.

그리고 김인숙여사는 인기 방송작가 김석야씨의 부인이시고─.

 

강영- 김인숙여사와 김석야씨가 한 쌍의 부부로 결실을 맺은 건

다 같이 방송국에 있을 때였어요.

 

최세-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건 김석야씨가「희망」잡지의 기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고─

어쨌든 방송부부가 된 그 분들이 그 후 김여사는 가정으로 그리고 김석야씬 방송작가로 출발했죠.

헌데 그때 강선배와 김 사는 라이벌이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강영- 까닭 모를 라이벌이죠.

조금도 그런 감정이 없었는데 괜히들 옆에서 라이벌이다 어떻다 입방아들이더군요.

 

최세- 동기 중 여자 아나운서가 단 두 분뿐이기 때문에

그 은근한 경쟁심이 어쩔 수 없게 강했으리 생각됩니다만(웃음)─

어쨌든 강선배가 아나운서로 들어왔을 때 선배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강영- 지금「오끼나와」에 가계신 김유선씨가 계셨죠.

한마디로 말해서 그땐 지금과는 달리 여자 아나운서는 희소가치로서 한몫 본 셈이죠.

 

최세- 그렇다면 우마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부터 그 계보를 좀 더듬어 볼까요.

 

강영-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대충밖에─. 오히려 그런 계보라면 나보다두 더 잘 알텐데.

지난해에 낸《앵무새의 증언대》란 책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는 것 같은데─.

목소리 통에서 흘러나온 최초의 여자 목소리

 

최세- 외려 그와 정반대죠.

생생한 얘긴 아무래도 강선배가 더 자세히 알고계시리라 믿습니다.

어쨌거나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라면 최은희 여사가 아닐까요.

신문 초창기 최초의 여기자이기도 했고,

여자로서 맨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분이며 여자 아나운서로서

최초로 MC두 한 분이라 해서 흔히 3관왕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강영- 벌써 할머니가 되신 분이죠.

언젠가 만나 뵈었더니 3·1운동 당시 여자분 으로는 맨 처음으로 투옥됐다고도 말씀하시더군요.

 

최세- 그럼 3관왕이 아니라 4관왕이 되겠군요(웃음).

강영- 아무튼 최은희 할머니가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로서 처음으로

MC를 할 때의 얘기가 더 재미있어요.

 

최세- 그게 또한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무선전화방송 공개시험」때의 일이죠.

강영- 「조선일보」가 아마 주최한 최초의 공개방송이었죠.

「우미관」과 지금의 상공회의 자리인「공회당」에서 최초의「무선전화 방송 공개시험」을 가졌을 때

 소개「멘트」를 한게 바로 최은희할머니였어요.

 

최세- 그땐 할머니가 아니었죠. 선망의 숙녀가 아니겠어요.

「이제로부터 조선일보사 주최 무선전화 방송공개 시험을 시작 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최은희 어나가 발사한 최초의 MC멘트─그렇죠?

 

강영- 그때 고 윤백남 선생이 강의를 하고 사이사이 명창들이 나와 가락을 뽑았는데

그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한 아나운서가 최은희할머니였다니까요.

 

최세- 그때 그 인기가 굉장했다나 봐요.

소리통(스피커를 그때 그렇게 불렀다)과 제 3의 괴물이란 라디오의 신비 때문인지

인천이나 수원 같은 데서 일부러들 올라와서 몰려들었는데,

비록 상태가 좋지는 않았겠지만 최초의 일이니 방송사상 지울 수 없는

역사와 페이지가 된 셈이죠.

 

강영- 하여간에 여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전파를 탄 것으로도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일이기도 해요.

 

최세- 다음의 여자 아나운서라면 이옥경 여사겠죠?

강영- 그 분두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죠.

양장점을 하고 계신「노라노」여사의 어머니예요.

가끔 만나 뵙죠. 최세- 부군 되시는 분「노창성」씨죠?

그러니까 이옥경 여사가 아나운서 시절 그 부군은 같은 방송국 엔지니어셨다고 하던데…?

 

강영- 그때가 그러니까 1926년 JODK시절이었을 거예요.

일본 도쿄사범학교를 졸업한 이옥경 여사가 방송국에 들어온 건 그 부군되시는 분의

권유에 의해서라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두 일어와 우리나라 말을 혼용해서 방송했는데

특히 일본 말을 유창하게 아나운스하는 여자 아나운서가 없었나 봐요.

 

최세- 그래 방송국에 계신 부군께서 부탁을 했다─

그런 얘기겠죠. 방송국에 나와줬으면 하고.

강영- 멋쟁이였어요.

이미 기혼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신문인지 잡지에선지 이옥경 어나가

같은 방송국 엔지니어와 연애한다는 가십기사가 날 정도였다는 거예요.

지금도 만나 뵈면 곧잘 옛날얘기를 들려주시곤 하죠.

 

최세- 이런 얘기도 있더군요.

양장을 가볍게 차려입구 모자까지 쓰고는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는

이옥경 어나가 어떻게나 대견했던지 그 부군께서 박수까지 쳤다는 에피소드도 있더군요.

최은희 이옥경 여사 다음 바톤을 이어받은 여자 아나운서라면

김문경 최아지 두 분이라고 볼 수 있겠죠.

 

강영- 결국 그 두 분이 우리나라 방송계 여자 아나운서로선

최초로 정규적인 시험 과정을 밟고 합격하신분이죠.

김문경 여사는 숙명고녀를 나왔고 최아지 여산 아마 경기고녀를 나와서

곧 아나운서 시험에 응모했을 거예요.

 

최세- 그 때 남자 아나운서는 세 명을 뽑았는데

모두 일본 사람이었고 여자만 우리나라 사람 둘, 3대 2였다고 해요.

그 당시 일본어 방송을 3, 우리말 방송을 2의 비율로 했는데

아나운서 남녀 합격자두 3대 2라 해서 묘한 관계라고 웃었다지 않아요.

 

강영- 최아지 선배 아나운서 생활 중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해요.

권00선생이라면 국문학자 아녜요. 그분이「조선어강좌」소개「멘트」를 바로

최아지 선배가 했는데 한참 소개하고 나서 돌아봤더니 글쎄 고갤 빠뜨리고 쿨쿨 졸고 있더라잖아요.

그래서 귓속말로 선생에게「선생님 이제 시작 하셔요」했더니 별안간「왜이래?」하고

꽥 고함을 지르시더라지 않아요.

 

최세- 방송을 보나마나 망쳤겠군요.

더구나 그땐 지금처럼 녹음이 아니었고 직접「라이브」로 방송 했을 텐데…

권00선생이라면 집이 두 군데라고 할 만큼 모주로 유명한 분이시죠.

본가 말고도 서대문 선술집이 있는데 선생을 찾으려면

서대문 선술집으로 가면 틀림없이 거기 술푸념을 하고 계신 선생을 볼 수 있다는 거죠.

우리말 방송을 일본식으로 한 여(女) 아나도 강영- 너무 술을 즐겨하셨기 때문에

흔히 술이 취해서 방송을 나오곤 했나 봐요. 그러기에 소개「멘트」하는 새에 잠이 들겠죠─.

아무튼 최아지 선배라면 앳된 목소리로 팬들의 인기가 굉장했다나 봐요.

 

최세- 그 다음의 바톤을 이은 여자 아나운서가 곧잘 스캔들을 일으키곤 했던 김운길…?

강영- 왜 하필이면 스캔들이란 관사를 붙이죠(웃음)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하려면 차라리 로맨스라고 할 일이지─.

 

최세- 바로 그 다음이 호기수 여사─.

그 분은 해방 전의 아나운서로선 최후의 주자인 셈이겠죠.  

강영- 그렇게 된 셈이죠.

굉장히 화려한 선배시고 아주 우수한 아나운서였고

또 예뻤고 재원이기도 했죠.

 

최세- 이런 얘기도 있더군요.

일본말 아나운서로 응모 당당히 합격까지 한 것은 좋은데

우리나라 말 방송을 하는데 글쎄 일본말 식 발음으로 했다지 않아요.

무척 사교적인 성격은 해방 후 연희대학 정외과를 거쳐 미국 VOA으로 이적되었고

그 후 미국인과 국제결혼을 해서 현재까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강영- 그 다음부턴 해방 후가 되겠군요.

현재는 가정주부인 박인자 여사를 비롯해서 김영숙 최창숙여사가 다음 바톤을 이었고─.

 

최세- 최창숙 여사두 아나운서 시절에 위진록 아나운서와 직장연애,

골인한 모델·케이스, 지금두「오끼나와」의 VUNC 아나운서 생활을 하고 있죠.

 

강영- 이제 그 다음부터가 HLKA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할 때

아나운서 생활을 하신 분이 되겠죠.

황순덕 박정희 두 분의 다음으로 이창연 김옥렬선배, 다음이 박춘자 선배,

그 다음이 정순형 김정진 선배였고 바로 그 다음이 나의 직 선배가 되는

김유선 김경자 선배─.

 

최세- 그 다음이 또한 바로 신시대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강 선배와 김인숙 여사의 차례시고 참 정순형 아나운서는 영화배우

윤 일봉씨의 첫째 부인이셨죠?

강영- 그땐 영화배우가 아니었고 성우였죠.

 

최세- 바로 선배 되신다는 김유선 여사도 같은 방송인과 로맨스가 꽃피고

엔지니어인 부군 이중집씨와 함께 현재「오끼나와」에 가계시지 않아요?.

참 바로 강선배의 후배 아나운서중에 고광숙 이란 이름 기억하고 계십니까?

병역기필을 병역기피로 방송 강영- 지금 누구 얘길 하려고 유도하신 거죠?

 

최세- 어쨌든 기억하고 계십니까?

강영- 글쎄─ 고흥숙 이었는지 어쩐지 잘은 모르지만

지금 성우로서 지보적인 존재 고은정 여사가 바로 후배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온 일은 있었죠.

 

최세- 바로 성우 고 은정여사의 아나운서 네임이 고흥숙 이었어요.

나현주선배와 동기였죠.

그 다음의 장금자 윤영중선배와 소위 신구가 갈리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면

그 다음 민병연 문복순 송영필 이현숙 아나 때부터

비로소 신세대의 여자 아나운서 시절이 점철된다고나 할까.

 

강영- 아나운서가 여류방송인으로선 주로 시인 작가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모윤숙」씨, 지금은 이승을 등진「노천명」씨 그리고 소설을 쓰신 박순녀씨가

문예계 직원으로 일했고 프리렌서 로는 홍은순씨가 방송계에서 활약한 여류들이죠.

 

최세- 이 새로운 세대의 여자 아나운서들은 굉장히 오만하기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흔히 이런 실수를 조금도 스스럼없이 저지르기도 했는데「육자배기」를

「금자배기」라고 발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카메라 맨의 플래시가 터진다」를

거꾸로「플래시 맨의 카메라가 터진다」는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고,

이현숙 아나는「병역을 기피하시기 바랍니다」해서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으며─.

강영- 그「병역 기피」는「병역 기필」의 잘못해석이었어요.

ㄹ의 액센트를 강하게 붙여주지 않은데서 온 오해였지만─.

 

최세- 그 이 여사도 같은 방송인으로 결혼하신 분이시죠?

강영- 그 부군이 지금 TBC의 고급 직원으로 있다죠─.

최세- 민병연 아나는 코스모스같이 예쁜 아가씨였는데

그래서 한때 이강석과의 로맨스로 화제의 대상이 된 일도 있었고─.

자 이상이 대충 살펴본 여류 아나운서의 계보인데 이제 강 선배의 얘길 좀 해줘야겠습니다.

 

강영- 내게 관한 얘기라면 최 후배가 다 아는 사실이 아녜요.

최세- 제가 듣기 위해서라면 몰라도─어린이 방송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공로가

특히 많은 아나운서가 바로 강 선배신데─. 강영- 그게 그러니까《무엇일까요?》

누가 누가 잘 하나》《깨도리 문답》이었을 거예요.

 

최세- 여자 아나운서로선 최초로 공개방송의 MC를 한 일도 있었을 텐데?

강영- 《노래자랑》이란 공개「프로」였죠.

KBS홀에서 공개방송을 마치고 층계를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진 일도 있지만─.

최세- 그래서 생긴 고지공포증이 바로 그때부터 생기게 된 거라 그런 얘기겠고─.

새벽방송 나와 보면 코골고 이 가는 선배님

 

최세- 그건 그렇고 견습 과정을 좀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강영- 지금의 견습 과정에 비하면 굉장히 심한 시집 살이었어요.

3개월 동안 아무리 해도 도무지 발전이 없고 또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

최 계환씨 같은 분이 운 일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교육이랍시고 늘 하는 일은 원고만 읽히는 것뿐이었죠.

도대체 자기가 하는게 잘하는 것인지 어쩐지 어떻게 알 수 있어야 말이죠.

나도 몰래 운 일도 있었지만.

 

최세- 부군, 강 선배의 말대로 동거인과의 로맨스를

이제 털어 놓게끔도 되었는데…? 강영- 3년 동안 냉전 끝에 이뤄졌다 할까─.

서로 바빴기 때문에 뭐… 아무튼 동거인은 그때 보도계장 이었죠.

「어린이 신문」을 가지러 갔는데 어느 날인가는

「어린이」라는「어」자 동그라미에 얼굴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겠어요.

저이가 어딘지 내게 딴 뜻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두 좀처럼 여유를 주지 않았죠.

그로부터 6개월 후에 겨우 같이 자리를 해서 차를 마셨을까─.

 

최세- 오랜 아나운서 생활을 통해서 잊혀지지 않는 일들도 많으실 텐데─?

강영- 옛날《가정 메모》란 프로를 방송할 때─

그땐 녹음방송이 아닌 라이브였기 때문에

6시 15분의 방송시간까지 대기 위해선 일찍 집에서 나와야 했죠.

그런데 그 무렵 선배인 남자 아나운서가 곧잘 스튜디오에서 자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자는 모습이 징그러워 들어가기가 섬짓했죠.

게다가 방송도중 코골고 이를 가는 바람에 정말 소름끼치는 방송을 해야 했으니까─.

또 한 번은《우문현답》이란 공개프로에서 웃었던 일이 있었죠.

한데 어느 일간신문에 창자가 끊어질 만큼 심한 평을 실렸더군요.

하도 분해서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면 머리털을 뽑아버리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글쎄 날 가장 아낀 팬 이기 때문이라지 뭐예요.

 

최세- 그러니까 강 선배께선 스포츠 중계를 빼놓곤

뭐든지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할 수 있겠죠?

강영- 그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때로 권유를 받는 일이 있지만

「스포츠」는 앞으로도 안할 생각이에요.

 

최세- 서예에도 조예가 깊으시다는 얘긴데 서예 명으로 만향이라 하시던가 그렇죠?

희소라는 닉네임도 있었지만─.

강영- 내가 서예를 배운건 원곡 김기승 선생님으로부터죠.

허지만 내 서예실력이야 어디 그게 실력이에요.

서예란 그 글귀를 알고 써야 진품이 나오는 법인데

우린 그 글귀가 좀 어둡죠.「언어운서」해서 혼기를 맞아「아내운서」가 되었고

애를 가지면서「애아내운서」이것이 내가 걸어온 아나운서 과정 아녜요.

 

최세- 한 가지가 빠졌군요 현재의 과정을─.

그리하여 지금은 안하운사(眼下雲士)가 되셨고(웃음).

강영- 아니, 그 얘긴 취소하세요. 정말 큰일 날 말씀을─.

 

최세- 너무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꼭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대체 임택근 상무님하곤 서로 호형호호니 자매호제라는데 누가 손위고

누가 손아랩니까?

하긴 그만큼 가까운 분끼리 장난하느라고 하는 얘기겠지만(웃음).

강영- 묻고 대답 해버리니까 난 그냥 웃어버려야죠.

최세- 그럼 2주일 후에 다시 뵙기로 하고 지루한 대담 이쯤 해두겠습니다.

 

 

  

 

강영숙 아나운서와 최세훈 아나운서는

1968년 같은해에 영예로운 상을 받았습니다.

강영숙 아나운서는 4월 3일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

했고 (위) 최세훈 아나운서는 같은해 10월 2일 방송의

 날을 맞아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방송문화상을 

수상(아래) 했습니다. 위 대담내용이 이루어진

 바로 그 해였습니다.

 

 

 

 

아래는 강영숙, 최세훈 아나운서가 KBS에서 함께 근무하던

1958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강영숙 아나운서는 1954년 공채 아나운서이고 최세훈 아나운서는 1955년 공채

아나운서로 1년차 선후배 아나운서입니다. 사진은 앞줄 왼쪽부터 송영필, 강익수,

장기범, 임택근, 박종세,최세훈, 이규영, 강영숙, 전영우,황우겸, 유석춘, 강찬선,

김동만, 최계환, 최두헌, 문복순, 장금자, 유창경, 김준철, 최만린, 이현숙,

윤영중, 조영준, 이본, 이광재, 한경희 아나운서입니다.

 

 

 

최철미님이 위 대담 글과 함께 보내오신 강영숙 아나운서와

최세훈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 몇장을 골랐습니다.

 

 

 

 

 

 

 위는 왼쪽부터 최세훈 실장, 강찬선

 아나운서, 임택근 아나운서 (당시 MBC상무)

강영숙 아나운서이고. 아래는 두번째부터 최세훈,

장기범, 강영숙 아나운서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그리운 강남-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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