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방송작가 주태익 이것이 인생이다. 판소리 성서 박서림 이희복 김광섭

이장춘 2014. 5. 19. 04:06

 

 

 

 연극, 잡지편집등을 하다가 1954년  기독교방송의

 탄생과 함께 방송작가로 데뷔한「주태익」그로부터 일생을

 방송과 함께했다. 1918년 평안남도 대동(大同)에서 출생 1940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나온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 1954년

기독교방송 출연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 딛은 활력소가 되었다. 루터란 아워,

7년간에 걸친 「이것이 인생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성서 판소리」의 창작,

그에게는 길이 남는 작품이자 기독교정신을 깊고 넓게 심어 주고 널리 전파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오늘 듣고 계시는 목소리는 「이것이 인생이다.」 주태익

선생님의  얘기와 박동진 선생님의「성서 판소리」다. 이 글은

주태익선생님과 오랜세월 박송작가활동흘 함께 한 박서림

선생님과  방우회 노익중 이사님 도움으로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방송작가 주태익(朱泰益) 이것이 인생이다. 판소리 성서

 

 

기독교방송에서 기반을 다진 주태익은

 KBS TV가 개국하고 1962년 방송드라마가 편성되면서

TV방송의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KBS TV에서 최초로 편성된

「금요무대」 1962년 3월에 방송된「결단」은 주태익의 TV 첫 작품이자

 KBS TV에서 방송된 다섯 번째로 방송된 작품이었다. 첫 작품은 유치진 원작,

차범석 각본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 두 번째 작품 이용찬 「불빛이 

점멸하는 설경」, 세 번째 작품 김영수 작 「가족회의」, 네 번째

작품 하유상 작 「인간검사」 다섯 번째 주태익 작「결단」

으로 방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로부터 출현한 MBC 문화방송,

DBS 동아방송, RSB 라디오서울, TBC 동양 TV,

 MBC TV 등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주태익의 참여폭이

넓어지고 바빠졌다. 각 채널의 골든아워에서 주태익이 쓴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방송작가로서 위상이 확고해 졌다. 그 시절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   방송문화상이 수여된 것은

1963년으로 주태익의 작품이 KBS 라디오와 TV, CBS,

MBC, DBS 대한민국 모든 방송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때다.

  

 

 

 

1963년 방송문화상을 받으신 분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1 손석우, 2 박능상, 3 강찬선

 4 임성희장관, 5 이운용, 6 고은정, 7.주태익 님이다.

 그는 방송평론가, 이론가로도 활약해서 방송합평회나 세미나

 등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1958년부터 지역방송국을

순회 하며 실시한 사진중의 제 1회 합평회로  대구에서 실시되었

다.  작가 주태익(1)  박희양 공보실 방송관리과장(2),

 노정팔 중앙방송국 방송과장(3), 모습이 인다.

끝부분에 두장의 사진이 더 있다.

 

 

 

 

주태익, 그의 작품은 인간과 종교를

바탕으로 시작되어 전 분야에 걸쳐 쓰였고 깊고

넓은 뜻의 메세이지를 담았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을

 거쳐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으며 1977년애눈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재직중 세상을 뜨셨다.

6.25때 한강을 건너던 작은 배를 탔다가 배가 무거워 출발 할 수 없게 되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배에서 내려 배를 출발시키고 그는 정처없이

 백사장을  걸었다는  아름다운 일화를 비롯해서 인간적인 면에서도 전해오는

 여러  얘기들이 있다. 자세한 얘기를 알아보려고 오랜세월  주태익선생과

 함께 하셨던 박서림선생 페이지를 찾았다. 종심만평에 박선생이 

글에 주태익선생과 가까이 지냈던 이희복, 김광섭, 최환상님의

 댓글이 달려 있어 그 일부분을 옮겼더니 박서림 선생님이

그것을 알고 주옥같은 기록 두편을 더 보내 주셨다.

 

 

 

 

 

박서림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주태익 선생님에 관한 기록

 

 

필자가 주태익선생님에 관한 글을 쓴다는

애기를 들은 박서림 선생님께서 주태익선생님에 관한

 지난날의 생생한 기록 두편을 보내주셨습니다. 

 

 

 1. 방송작가 이희복 선생님의 유고 

 

"한국방송작가협회 50년. <작고 작가 회고>

<가시지 않는 메아리> -고 주태익(朱泰益) -" 

 

 

2. 1978년 2월 28일자 일기

 (주태익 사망일 2월 24일)

 

이희복선생님은 1947년부터 오랜세월

주태익선생님과 늘 가까이 지낸 방송작가이시고

 박서림 선생님은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던

주태익선생님이 세상을 뜨실때 상임이사로 가장가까이 하시던

 분입니다. 김광섭 선생님은 주태익선생님에 이어 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분이어서 이 세분의 생생한 채험기록은 

선생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1. 방송작가 이희복 선생님 글

 

 

주테익 선생님은 암산(岩山)이라는

호가 말해 주듯 큰 바위같은 분이시다.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분이셨고 시간이 갈수록 포근함을 안겨 주시는

분이었다.  처음 선생님을 뵙게 되기는 1947년 가을부터였다. 그러니까

타계하시기까지 30여 년간 하루같이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는 이어져 왔다.

강산이 몇 번을 탈바꿈하는 세월 속에서도 나를 아껴 주시는 선생님의 마음은

 한결같으셨다. 친자식처럼 아껴 주시고 염려하시고 사랑해 주셨으니까. 6.25 전

 여순반란사건을 소재로 희곡 <향>을 집필하셨고 중앙극장에서 막을 올려

많은 관심을 모았던 기억은 지금도 나를 흐뭇하게 해주는 추억이다.

그만큼 <향>의 공연이 나를 기쁘게 해 주었는지도 몰랐다.

 

6.25때의 일이다. 한강교가 폭파되고 피난민이

 한강으로 몰려들어 나룻배 타려고 아우성을 칠 때, 주선생님은

탔던 배에서 상큼 내리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하셨다.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태연히 말씀하시기를 자기 체중이 다른 사람의 두 배는

 실히 될 것인즉 자신이 양보하면 두 사람의 도강이 가능할 테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해방 후 38선을 넘어오실 때도 고아들 10여명과

 함께였다. 더욱이나 그 애들을 친자식들처럼 돌보셨다.

참으로 넉넉한 마음씨를 지니신 분이었다.

 

한동안 경남 김해 진영 한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그 때의 제자들이 반백 년이 흘러간

오늘에도 주선생님의 체온을 어제 일처럼 느끼고 있다고들

 이구동성이다. 수복 후에 주선생님께서는 방송극을 쓰기 시작했다.

소박한 소재와 투박한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구수한 대사로 엮어져서

 전국의 화제를 모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연속극 <솔뫼마을의 미륵이>,

<꽃과 나비가 있는 언덕길>, <젊음의 뒤안길>, <당산방죽에 물이 넘친다>

그리고 단막극 <성모상>, <얼굴 없는 아이니>.등을 손꼽을 수가있겠다. 이런

가운데 루터런의 선교극 <이것이 인생이다>를 계속 집필하시어서 주선생님은

방송에서 그 이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얘기나

농촌얘기나 주선생님이 선택하신 소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짙은

감동을 가슴에 안겨 주었다. 말 쉴새 없이 원고를 쓰셔야

하는데도 주변의 친구들과는 여전히 시간을 아끼지 않고

 사귀는 여유를 가질 정도로 넉넉한 분이었다.

 

주선생님의 권유로 나도 방송극에 입문을

하게 됐다. 새롭게 출발한 백전교, 정진건, 박서림,

그리고 나 등등, 주선생님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말썽도 적지 않게 일으켰다. 우리들을

 아껴 주고 사랑하시는 선생님을 괴롭게 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선생님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어 놓으셨다. 이런 가운데

 작가협회가 분열되고 작가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을 때 선생님은 정의가 불의에

짓밟힐 수는 없다면서 참으로 어려운 한국작가협회 이사장 직을 맡으셨다.

그때 일을 지금 돌이켜 되새겨 보면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우셨다.

젊은 우리가 흥분하면 조용히 달래셨다. 흥분은 자칫 일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을 항상 간직하라고 당부하셨다.

 

큰 문제를 앞에 놓고도 사람들을 먼저 헤아리시는

교훈을 무언 중에 일깨워 주셨다. 협회가 분열되고 조잡스러운

 소행을 상대방이 일삼아도 결단코 한국방송작가협회는 제구실을 하게

될 날이 온다고 단언하시었다. 이 한마디는 절망에 빠졌던 우리들을 얼마나

 고무시켜 주었는지,지금 되새겨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상을 떠나시기 이틀 전

이사회를 주관하시고 정동을 거쳐 법원골목을 나올 때 몹시도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금호동까지 버스로 가시지 말고 택시를 타시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럴 돈이

있으면 어려운 협회를 위하여 쓰자고 하시고는 기어코 버스로 귀가 길에 오르셨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박서림형도 그의 일기에 썼듯이 주태익선생님께

복잡하였던 협회 일로 부담을 드려 돌아가시게 했다고 애통해 하고 있다.

나도 동감이다.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지만 주태익 선생님이 한국

작가협회 통합을 위한 이사회를 주관하시고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협회사를 꾸미게 되니 더욱 간절하게

주태익 선생님의 발자취가 눈앞에 역력하다.

한국방송작가협회를 위해 큰일을 하고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만 되겠다.

 

선생님! 믿고 말씀하신 그대로

한국방송작가협회 간판 아래 작가들의

권익이 날로 신장되고 있으니 마음 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끝)

 

   

주태익 선생 이야기 

-박서림의 일기-

 

1978년 2월 28일 (화)

 

 

諸行無常

 

지난 일은 明鏡과 같고 앞의 일은

 칠흑과 같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어제 豫感이 불길하다 했더니 그 不吉이 그대로

통하고 말다니- 이런 薄福도 있고 試鍊도 있구나-

 

금요일 아침, 報告할 일이 있어 朱선생 댁에 전화.

사모님이 받으면서 몸이 좋지 않아 病院에 入院手續 중이라고 -

전일 오후 6시쯤 報告 전화 걸었을 때 가슴이 좀 답답하다고 했어도

 설마 했었는데 不吉한 예감이들었다. 특히 전날 새벽 꿈에 朱선생과 내가

 조선일보 앞에서 길을 건너는데 (묘하게 바둑이나 두고 가자면서) 그만

되돌아 보는 순간에 택시가 받아 버렸다. 친 택시는 달아나고 차들은

 요란하게 오가는데 그 육중한 몸을 부추기기가 그리도 벅찰 수가

없었고, 아무리 딴 차를 불러대도 서서 도와주지를 않았다.

그래도 꿈틀대며 무언가 중얼대고 계셨는데 - 이러다

꿈에서 깨었던 일이 너무도 선연하여

더욱 불길해질 수 밖에 -

 

그래도 꿈이 맞는다면 돌아가시기야

할라구 하는 생각으로 協會에 일단 알려 놓고

病院이 정해질 때를기다렸다. (아직 病室이

안정해졌다는 사모님이 전화였다)

 

 

* * *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聖母病院 6층, 612호실로 정해졌다고-

 

協會에 알리고 熙福형에게 알리니 熙福형 曰,

面會시간도 있을 것이니 오후에나 問病가기로 하고

 面會시간이나 알아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

 

6층 간호원실에 전화를 거니 간호원- 지금 重患者室에 가 계시다 고-

 

긴장은 했지만 설마 돌아가시리라 생각은

 안 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를 걸어보니 간호원 曰

 돌아가신 것 같다고, 중환자실에 걸어 보라고-

 

重患者室에 전화를 거니 男子의 목소리.

돌아가셨습니다. 11시 15분쯤 됩니다.

 

* * *

 

이 사실 協會에 알리니 崔獻씨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熙福형을 찾으니 점심하러

 나갔노라고- 나 혼자 애태우다 KBS 작가실에는

 高永勳씨에게 알려 주고, 그러다 보니까 金敎植씨가

나오길래(전화에) 朱선생 돌아가셨다니까 衝擊으로

말을 잃고 있었다. 그저 "일이 참 안 되는군요"

 

病院으로 향했다. 市外버스를 탔는데

눈물이 자꾸 솟았다. 택시를 탔는데 울적한 마음에

자꾸 통곡하고 싶다. 朱선생은 우리가 죽였다, 우리가 죽였구나-

병원에 도착하여 英顯安置所에 가 보니 쓸쓸할 뿐, 직원에게 물어보니

6층에 가 보라고 - 6층에 가서 간호원에게 물어보니 宅으로 모셨다고-

喪家에 도착해 보니 이미 熙福형과 金順福형 와 있었고 내 전화 연락을

받고 鄭仁燮국장도 와 있었다. 鄭형을 보니 눈물이 왈칵 - 뒤미처

 盧常務도 와 주었는데 靈前에 기도 드리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

이었다.朱선생이 몸담고 있는 크리스찬 文學家協會

理事長 黃錦燦 선생과 相議, 趙香錄목사 護喪.

兩協會 공동 主管으로 葬禮를 치르기로-

 

그 밤, 劇作協 측에서 尹赫民씨도 왔는데

 피차 자극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協會도 요란스럽지

않게 協會葬의 문제를 조용히 진행시켜 나가기로 -

 

朴瑾淑常務, 金抱千국장 韓雲史,

金重熙, 白承燦. 辛奉承씨 등도 다녀갔다.

朴상무와 韓雲史씨는 내기 바둑을 두는 여유(?)도

보였다. 朱선갱 덕분으로 久阻했던 분들도 많이

만났다. 그 德을 실감케 했다.

 

* * *

 

일요일, 1.00PM 草洞敎會에서 永訣式.

 

신문 방송으로 일제히 報道가 되어서

그런지 복도 계단까지 꽉 차는 超滿員. 사람은

棺뚜껑을 덮고야 그 인물을 알 수 있다 했던가?

그분의 德人임을 거기서 보았다.

 

具常씨, 車凡錫씨 그리고 그 날도

끝까지 지켜보아 준 盧常務가 특히 고마웠다.

목사의 인사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자꾸자꾸 복바쳤다.

 

* * *

 

葬地 加坪郡 縣里 근방 산골 비포장 도로를

2시간. 그러나 山所의 앞산은 한 폭의 東洋畵처럼

아름다웠다. 黃선생이 雲鶴山이라 일러 주셨다.

 

경건한 下棺.禮拜. 그 때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그 침울하고 슬픔에 찬 表情들 - 그것은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표정들이었다. 讚頌歌는

깊은 산골에 메아리쳤다. 그 때의 나의 눈물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라 어쩜 거기 모인 유족, 친지들의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해서 나오는 눈물이

었는지도모른다.흙 한 삽 관

위에 뿌렸다.

 

歸路, 차 안에서 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와 또 술을 마시고 10시 넘어

朱선생 追慕特輯 (KBS) 「聖母像」과 肉聲과

熙福형과 黃錦燦선생의 座談을 들었다. 感動이 있었다.

친구와 스승을 잃은 슬픔을 감추려 애쓰는 두 분의 울먹거림이

涕淚를 금치 못하게 했다. 遺族에 위로 전화. 밤 늦게 -

 

* * *

 

오늘 擴大幹部會議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나는 역시 常任理事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본인은 朱선생을 이 어려운 시기에 재대로 보필을 못해 드려

 殉職케 한 책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또한 본인은 그 동안 協會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있어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느낀 지 오래 입니다.

지금이 그 책임을 절감하고 물러나야 할 적절한 시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理事職직을 회피한다거나 統合작업에서 도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理事의 자리와 統合協議委員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협회 회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겠습니다.

 

이런 뜻의 辭意를 이사회에 표명할 작정으로 있다.

 

 

이것이 朱선생의 죽음의 뜻을

 제대로 살리는 길인지 무엇인지 나는

 아직 판단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런 판단을 내려 주실 朱선생은

이미 안 계신 것을 -

 

* * *

 

朱선생님. 저는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습니다.

비록 종교의 차이는 있지만 이에서는 같은 생각으로 함께

살아왔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朱선생님 영혼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하시거든 한동안 뫼신 인연을 보아서라도 아직 철 안든 이 제자와 후대를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저는 외롭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저는 가려낼 수 있었습니다. 先輩는 많아도 진실로 선배다운 선배는

朱선생 뿐이라고. 同僚나 後輩는 많아도 진실하게 作家精神이 투철한 작가는

 열 손가락에도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이 醜하고 삭막한 放送界에서

우리는 기댈 곳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좌절감을

朱선생님 방관하지 말아 주세요.

 

熙福형은 장례의 귀로에서 자꾸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슴앓이는 육체적 가슴앓이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너무도 잘 압니다. 目標 朱泰益 하고

 작품도 그렇게 썼고 목표 주태익 하고 인격도 그렇게 쌓아야겠다고 농 반

진 반으로 말씀 드렸던 저를 기억하십니까? 저로 하여금 허망하게 他界하는 것도

표로 삼아 보라는 것인가요? 이런 無心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떠돌아 다니지 마시고 우리 가까이 계십시오. 그래야 선생님을

너무 괴롭혀 드린 우리가 조금은 자책을 면할 수 있습니다.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엉뚱한 公翰을 퍼뜨려

놓은 상태에서, 양쪽 理事長과 協議委員이 모여 논의하러

가는 길에서 하시던 말씀, 내, 어쩌다 그런 친구들과 마주 앉아

그런 논의를 하게 되었는가?탄식하시던 일을.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날 밤, 몹시 피곤한 발걸음으로 시청 앞 지하도로 사라지시던

 그 뒷모습. 그 육중한 거구를 뒤뚱거리듯 걸으시던 모습을-

 

사모님은 불치의 병에 시달리시고 자신은

혈압이 높아 피곤을 감당하지 못하건만 끝내 내색을

 않고 協會 일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後輩 부탁을

차마 거절 못하시고 끝내는 쓰러지신 주선생님

 

선생님은 우리가 죽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回甲宴 때 그리도

기뻐하시고 典敎형 말에는 귀로 택시 안에서

 알아 듣지 못할 노래를 어린애처럼 흥얼거리셨다구요?

그 천진성, 그리고 그 진실성을 이제 다시 못 본다는 것은 어쩜

 放送作家 社會의 몰락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놓고 자기만 눈을 감으시다니

 이런 무심이 어디 있습니까?또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생님이 主宰하신 마지막

 擴大幹部會議 끝에 선생님이 술값을 내신 술좌석에서 우연히도 죽음 얘기들이

 나왔지요. 任熙宰씨 林仁洙씨 그리고 외국인들- 죽음이 가까우면 무엇인가

다르다는-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 죽음을 조금도 豫期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죠.

 

生死가 무엇인지 죽음의 뜻이 무엇인지

 요즘 들어서 문뜩 깨달아질 것 같다, 깨닫고 죽음의

준비를 하면 죽음은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豫感에 손을

 내젓고 오히려 無明을 고집하고 싶어진다 - 이런 말을 하자 묘한

表情으로 저를 지켜보셨죠. 그런데 허망하게 가시다니- 이것을

無常으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두고 두고 생각나고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두고두고 우리 친구들 간에는 화제가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함께 계십시오. 소탈하니 Y담도 하시고 웃음도

 웃으시고 공동부담으로 돈도 내셔야 합니다. 그 호주머니

에서 내놓는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를....

 

 

1960년대 박서림님을 비롯한 이희복, 백전교, 김포천, 이영신(다큐맨터리 광복 20년 작가),

황일청, 박민아, 김석옥 등 작가, 연출가, 성우 분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박서림 선생님 홈에서 옮겨온 글 (주태익)

 

 

박서림선생님 글에 이희복,김광섭, 최환상님의 댓글과 답글이 이언진다.

 

박서림 (요약분)

(04.11.28)

 

 

전략..............  선생을 알기는

작품에서였다. 내가 데뷔 했을 무렵(주:1958년)

 '솔뫼마을의 미륵' 며 '민들레 꽃도 봄이면 핀다' 며

'이것이 인생이다'등 당시는 드라마 발표의 마당(場)도 좁아

한 작가가 한 번의 발표 기회를 얻기도 힘든데, KBS고 기독교

방송이고를 가릴 것 없이 마구 나가는 것이었다. 작품을

들어보면 화려한 문체는 아니지만 질박(質朴)

하고 거칠 것이 없이 쓰는 글이 예사

경지가 아나구나 싶었다.

 

그래 '나도 저런 글을 저렇게 써야지' 하고

감히 [목표 주태익]을 내심 선언했었다.

 

얼마 후 아마 同人 李熙福 형과

 함께였을 것이다. 선생을 직접 뵐 기회를

얻었다. 우선 우람한 체격하며 널찍한 용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 중간 부위가

 함몰되어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맞아서

그리 됐다고 들었다)

 

"호가 암삼(岩山)이라더니.

과연 바위산이로구나!" 했다. 그리고

 희복 형으로부터 선생의 경력과 인품에 대해

듣고부터는 "감히 발 밑에도 못 미칠 내가 목표

 주태익이라니!" 하며 풋내기의 만용을 스스로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있어서 작품 수에서만은 선생을

목표로 삼아야지 하고는 야한 연속극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 써댔다.

 

 

연          보

 

1918년 평안남도 대동(大同) 출생.  

1943년 백합보육원 설립 운영.  

1946년 신의주사건 혐의로 소련군에 체포 옥살이. 월남  

중고등 교사. 대학기독교서회 잡지 편집.

  1949년 희곡 <향> 중앙극장 상연.  

1954년 방송극 창작 시작.  

1964년 방송극 작가 협회 부회장.  

1977년 한국방송 작가협회 이사장.  

1978년 2월 24일 별세.

 

 

작       품

<솔뫼 마을의 미륵이>

 <민들레 꽃도 봄이면 핀다>

<물 길러 나온 여인>  

등 다수.

 

<배비장전> <예수전> 등의 대사 씀  

선교드라마 <이것이 인생이다> 시리즈

  기타 단편극 무수.

   

 

이희복

04-11-29 23:06

 

박서림 선생 고맙습니다. 덕분에

날로 희미해가던 기억을 되살릴 수가 있었네요.

 협회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이를 극복하느라 애쓰신

주태익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임원들과 박서림선생의 남다른

 수고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발자취지요. 주태익 선생님은 항상

 마음이 따뜻한 부자였습니다. 평양 근처에서 운영하시던 고아원

식구들의 손목을 잡고 38선을 넘어오신 남다른 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제자의 데이트 비용을 위해서 원고료 봉투를

선뜻 내놓으시기도 하셨으니깐요.

 

 

박서림

04-11-30 07:24

 

이희복 선생 고맙습니다.  

아드님이 30대(?) 에 요절하였을 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신을 옆방에 두고 글을 쓰셨다는 일화도

 기억이 납니다. 분초를 다투는 방송작가의 비애이기도 하죠.

또 선생은 자신을 "내가 주님이다!" 하셨다구요. 신도로서 감히

 주님이라니? 하고 놀라자 "내 성이 朱씨이니 朱님이 아니고

 뭐야" 하셨다지요. 선생은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계셨던

분이기에 이런 유머도 나왔을 것입니다.

기억나는 대로 보태십시다.

 

 

김광섭  

04-11-30 11:16

 

또 한편 소중한 추억담이 탄생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주 선생님과 별로 지우관계가 없이

그저 여러 선배작가들을 통해 그 분의 인품을 알고 존경해

 왔을 따름인데 그 때 제 마음에 새겨진 그분은 '大人'이셨습

니다. 문득 정진건, 김중희, 박우보 등 주선생과

가까웠던 선배작가들이 기억납니다.

   

 

박서림

04-12-01 04:29

 

바쁘신데 들르셨군요. 주선생

돌아가시고 난 뒤. 다시 통합작업을 할 때

이사장으로 어려운 작업을 하셨죠? 결과가 그렇게

수습된 것도 대인의 품도라 하겠죠. 그나저나 주선생의

영가(관)를 모실 때 저도 한쪽을 들었는데 어찌나 무겁던지요!

한번 들면 다시 내려놔서는 안 된다고 그러잖아요? 놓을 수도

 없고 허리는 끊어질 듯하고..."무겁지?" 하고 걱정하시는

소리가 들렸던 같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허리 병은

 앓지 않으니 아마 岩山의 무게를 잊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건필을 빕니다.

  

 

박서림  

04-12-18 03:36

 

방송작가협회 50년사 <작고작가 회고>에

이희복 선생이 소개한 주선생의 일화 한 토막 추가

합니다. 6.25 때의 일이다. 한강교가 폭파되고 피난민이

한강으로 몰려들어 나룻배를 타려고 아우성을 칠 때, 주 선생님은

탔던 배에서 성큼 내리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하셨다.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태연히 말씀하시기를 자기 체중이 다른 사람의

두 배는 실히 될 것인즉 자신이 양보하면 두 사람의 도강이

 가능할 테니까. ...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엘리베이터도 아닌데 ...

 

 

관리자 (최환상)

04-12-20 08:51

 

이희복 선생께서 쓰신 협회50사

 '작고작가회고' 부분에는 박서림 선생님

께서 올리신 '나룻배' 이야기 말고도, 또

 이런 문장이 연결돼 있습니다.

 

 

"해방 후 38선을 넘어오실 때도'

 고아들 10여 명과 함께 였다. 더욱이나

그 애들을 친자식들처럼 돌보셨다. 참으로

넉넉한 마음씨를 지니신 분이었다. 한동안 경남

김해 진영 한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그때의 제자들이 반백 년이 흘러간 오늘에도

주 선생님의 체온을 어제 일처럼 느끼고

있다고들 이구동성이다."

   

김광섭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주태익 선생은 정말 '대인'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훌륭하신 대선배님을 둔 저희 후배들은 오늘날

과연 어떤 모습인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기왕 말씀이

나온 김에 이희복 선생께서 쓰신 '작고작가회고'의

글 마지막 부분을 더 인용합니다.

 

이희복 선생님의 글은 이렇게 끝이 나더군요.

   

"세상을 떠나시기 이틀 전 이사회를

주관하시고 정동을 거쳐 법원 골목을 나올 때

몹시도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금호동까지 버스로

가시지 말고 택시를 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럴 돈이 있으면

어려운 협회를 위하여 쓰자고 하시고는 기어코 버스로 귀가

길에 오르셨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박서림 형도 그의 일기에 썼듯이

주태익 선생님께 복잡하였던 협회 일로

 부담을 드려 돌아가시게 했다고 애통해하고 있다.

나도 동감이다.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지만 주태익 선생님이

한국방송작가협회 통합을 위한 이사회를 주관하시고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협회사를

꾸미게 되니 더욱 간절하게 주태익 선생님의 발자취가

눈앞에 역력하다. 한국방송작가협회를 위해 큰일을

하고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만 되겠다.

 

선생님! 믿고 말씀하신

그대로 한국방송작가협회 간판 아래

작가들의 권익이 날로 신장되고 있으니

마음 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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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윤회설과 장마루촌 이발사 박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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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기독교 초기 방송역사 다큐멘터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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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끝난 이석이 인생이다. 196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루터란 아워는 1959년 11월 6일부터

 기독교방송을 통해 매주 1회씩 30분용 기독교

 선교드라마"이것이 인생이다"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생이다"는 세계적으로 매스컴을 통해

선교를 하고있는 루터란 아워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에서

방송을 하고있는 시츄에이션 드라마"This is aLife"의한국판으로 제목

부터가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로터란 아워의 첫번째드라마 "이것이

 인생이다"는 주태익작 민구연출의 "세파의 물결속에서" 였다. 루터란 아워

드라마 내용은 한마디로 인생극장이었으며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알게하는 메신저 역할과 함께 일반

청취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프로그램으로

40년가까이 장수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고 기술하고 있다.

 

 

 

주태익 작 성서 판소리 1970년 3월 박동진의

 5시간 완창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때의 동아일보

신문기사다. 판소리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보존

되고 있다. 박동진 전수관에서 들을 수 있다.

   

 

 

 

 

방송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와 함께

1958년 대구에서 실시한 제1회  지역 합평회로 부터

각 지역을 수회하면서 실시한 합평회가  있었다. 전국을  3개

정도의 구룹으로 나누어 5-7개 방송국이 일정한 장소에 PD, 기자,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이 참여해서 각 방송국별로 프로그램을 제출받아

 청취하면서 방송 학자나 평론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갖고 프로그램을

평가 하면서 프로그램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제도였다. 이 합평회 에서 우수작,

장려상등의 작품을 선별해서 시상하고  우수 프로 그램 제작자는 인사에도 반영되었다.

위, 아래 사진은 1965년과 66년에 부산에서 열린 합평회 모습으로 한남석 부산방송국장

비롯해서 대학교수이자 평론가 이덕근, 방송작가 주태익님 , 최종채, 서용수,

김정수, 박도균, 강완수, 김수웅, 정병진, 박한국, 남상호, 김성배, 오이열,

 김선초, 인운섭, 황희두, 김무중, 이춘기, 최종채, 박노정 김성배,

신창기 그리고성함이 잘 기억나지 않는분을 포함해서 그 때

 이름 있던 방송실무진이 많이 참여 하셨다.

 

 

 

 

 

  주태익 선생은 12대 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1957년 방송작가들의 친목단체로 출발한 한국

방송작가협회는 57년을 이어오면서 28 이사장까지 이어왔다.

초대 10대 이서구, 2대 김희창, 3, 8, 11, 15대 한운사, 4, 5대 조남사

6, 7대 이용찬, 6대 권항대행 김교식, 12대 주태익, 13대 이인석

14대 김광섭, 16, 17대 유호 18대 심영식, 18대 권한대행 오재호

18대 권한대행 이철향, 19, 20, 21, 22대 김수현,

23대 신사일, 24대 이희우, 27대 김옥영님

 

 

 

 

1971년 방솓작가 세미나를 마치고 촬영한 기면사진이다.

(1) 주태익 (朱泰益) (2) 노정팔(盧正八) (4) 유호(兪湖) (5) 최요안(崔要安)

 (6) 홍석진(洪石眞 (8) 이기명 (李基明) (12) 김원태(金元泰) (16) 신윤생(申允生)

 (17)추식(秋湜) (18) 정진건(鄭鎭建) (19) 김석야(金石野) (20) 박조열 (22) 최풍(崔豊)

 (23) 이인석(李仁石)  (24) 김중희(金重熙)  (26) 백승찬 (27) 이희복 (28) 민병훈 

(32) 김교식(金敎植) 1970년대 활동하던 방송작가님들입니다.

 

 

   

1963년 대공방송 공모작품 시상식에서

수상자와 심사위원, 중앙방송국장, TV방송국장,

국제방송국장, 방송관리국장 등 관계자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문시형, 김재연, 이홍수, 노정팔,

홍천, 주태익, 이호원, 한사람 건너 방필주, 이규철,

이상얼, 앞줄 왼쪽 이철주님.

 

 

 

박진호(박재윤님 자제분-미국거주)님 글

 

이희복 작가님은 저희 아버님의

학교 동창이시며, 오랜 찬구이자 방송국  

동료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지병으로 퇴사하신 후  집에서 요양중이실때도 

 한분의 친구분과(존함이 소 륜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집으로 문병까지 오셨던 고마우신 분이셨습니다. 아직

 생존하시다면 글로나마 그때의 감사한 마음을 올리며,

늘 주님안에서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길 위해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글

 

 

주태익선생님에 관해서 

많은 분들이 이메일이나 전화로

관심을 표명 해 주셨습니다.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위는 1960년대 동해안 어느 해수욕장

에서 작가 이희복 (하지동), 편성계장 조석호, 이팔웅

아나운서와 필자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이희복,

조석호님은 일찌기 세상을 뜨셨습니다.

  

 

 

1960년대에 이전부터 활동하던 작가분들이다.

1, 박영만,  6. 이진섭, 7. 장수철, 8. 이서구, 11. 한석윤,

 12. 임희재, 15. 이호원, 16. 주태익,  17. 정순일, 1

8. 이경재,  20. 최요안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주태익 박동진 판소리성서(1).wma

 

주태익 박동진 판소리성서(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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