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시인 박화목 KBS 방송시절 회고록, 노래 윤용하작곡 보리밭

이장춘 2014. 5. 7. 05:29

 

 

 

박화목! 시인이자 방송인이다.

1946년 해방공간에서 공보처 직원이 되고

그의 문학과 연계되는 방송을 원해서 시인이자 방송국

차장으로 재직중이던 안서 김억선생을 찾았다. 그로부터 안서가

직접 담당했던 “다발 꽃다발 엮어나 보세” 그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그의

 문학세계를 펼처나갔다. 그때  만난이가 작곡가 윤용하로 그와 인연이 깊어졌다.

 오늘 글은 그때의 얘기를 써서 월간방송 1984년 1월호에 기고한 내용이다. 

그때의 방송에 관해서 알 겸 이 글을 올렸다. 6.25무렵 KBS를 퇴직한

 박화목은 1954년 CBS기독교방송이 새출발 하면서 교양과장

으로 취임 1970년까지 방송에 힘을 기울였다.   

 

 

시인 박화목 KBS 방송시절 회고록, 노래 윤용하작곡 보리밭 
 
 

 

 광화문 네거리 남쪽을 향해 좌측에서
 접어들어 느슨한 오르막길을 넘어가면  덕수궁
뒷 담장을 낀 뒤안길이 있다. 즉 경기여고 앞에서 미국
대사관저 앞을 지나 정동교회 앞으로 이어지는 도심 치고는
다소 조용한 길이다.  어쩌다 그 길을 걸어갈 일이 생길 때면
나는 그 길 중간쯤 되는 고갯길에서 잠시 동안 길을
멈추곤 한다.  불현듯 어떤 그리움 같은 것에
 붙잡히기 때문이다.
 
경기여고 건너편, 그러니까
덕수국민학교 바로 뒤 둔덕진 곳에,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이 쏠리곤 하는 것이다.  6.25전까지

그곳에 한 건물이 있었다. 해방 전까지는 정동 방송국, 해방후에는 

서울방송국 ( 다음 공보처 방송국이다가 서울중앙방송국) 이 자리 잡았던

 건물이었다. 그 건물이 6.25전란 때 자취도 없이 사라짐으로 30년도 더 지난

 옛날의 KBS방송국자리였다는 기억조차도 지금은 자꾸만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러나 어쩌다 그 건물의 정문이 있던 어귀 앞을 지나 갈 때면 건물이 지금도

서 있는 듯 한 환상에 사로 집히면서 내가풋내기였던 젊은 시절에 3,4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의그리움이 되살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KBS재직시절 KBS어린이 합창단이 최초로 창단되었다.

 

 

그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때 일을 회상해

보기도 한다. 1946년 여름, 나는 당시 미 군정청청의 공보부

여론국 직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내가 딸려있는 직제는 여론국의

 정치과란 곳이었는데 오늘에 보면 조사국 같은 곳이아니었나 생각된다.

 내가 하는 일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연사를 모시고 지방으로 출장 다니는

일이었다. 그때 아마 군정을 맡은 미국 사람들이우리에게 민주주의 대한 훈련의

 필요성을 생각했는지 제도적으로 그런 것을 설치 했던 듯싶다.  아무튼 나는 공보부

직원이 된 샘이었다. 그래서 몇 달 지나는 동안이 직책에 대해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그때 나는 문학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내 문학의 길에 도움이 되는 그런

 일자리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참에 서울방송국이 공보부 산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서을방송국에 시인 김억
(호 안서) 선생님이 국 차장으로 계시다는 것도 알았다.
 
 
47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어느 날
서울방송국으로 안서선생님을 찾아갔다.
“시를 쓰는 박 아무개 올 씨다.” 하고 인사를 하니까.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 하셨다. 그럴 수밖에, 덮어놓고

자신이 시인 아무개하고 말했으니까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었다.  

나는 무슨 말로 나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 저…….

몇 년 전에 아이생활에이헌구 선생님이   동시를   추천해   주신 …….”

하니까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도 안서 선생님은

월간 아동 지였단 “아이생활” 도 읽으셨던 같았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반가움에서 고개를 끄덕이셨는지 모른다. 아무튼 안서선생님이 “그래

박 군 어쩐 일로 날 찾아왔나?” 하고 물으신 말씀이 나로 하여금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보부 본청 직원으로 있는데 방송국으로
전직될 수 있도록 청원했다.

 

 

 안서 김억과 일민 송영호

 

 
그때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턱대고 부탁을
드려본 샘이다. 그런데 뜻 밖에도 “자리가 하나 있긴 있는데…….
박 군, 그 자리라도  괜찮을까?” 하신다.    “어떤 일을 아는데요?” “응

번역사야. 매일 방송 프로그램을 영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일야”  “네, 그런

것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어떻습니까? 이곳으로 옮기도록 해 주십시오. 

안서 선생인은 2층의 고문실로 데리고 갔다. 이른바 인터뷰를 한 샘인데 내가

배운 영어로는 묻는 말의 그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나는 안 되는구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번역 글이

합격이 되었다.  안서 선생님이손수 본청에 전화를

거시더니, 내일 부터라도 당장 방송국

사무실로 출근 하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서울 방송국의 편성과

직원이 되었다. 직제는 번역사지만, 손이 모자란

 때라 시 낭송시간을 비롯해서몇 개의 프로그램이 내게 

맡겨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실재로 PD가된 샘이었다. 시 낭송

시간은 꽃다발 시간이라고 이름 붙여서투고 해 온 시와 또 더러는

 청탁한 시고를 엮어서주 1 회 15분 방송하는 시의 낭송이었다. 안서

선생님이 시인이라서 그 시간의 편성을 주장했다며 그 시간을 내게

맡기시기 까지는 선생님이 손수 맡으셨다는 것이다. 시낭송으로는

 남해연씨가많이 했고 조남사씨가 성우시절에 여러번 그 시간을

기꺼이맡아 주셨다. 조남사씨도 그 당시에 시를 좋아하는

 문학도여서 나와도 가깝게 사귀게 되었다.

 

 

 

성우 조남사와 남해연님 

  

  
“다발 꽃다발 엮어나 보세” 란 투의 서시
(안서 작) 로부터 시작되는 시 낭송방송이 무슨
대수로운 것이 되었을까.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즈음
한참 정치적인 혼란에 처해 있던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안정을 찾게 해 주었다고 생각되어진다. 한편 그때의 시 낭송시간은

 우리 시 문학에도 공헌한바가 크다. 그때 그 시간을 통해 익혀진 시인

들로는 현 중진시인인 구경서씨를 비롯해서 여럿이 된다. 한운사

(한간남) 씨도 시를 썼고 작고한영문학자 김도성씨도 시

낭송프로를 위해 시고를 많이 써 주었다.

 
이 시낭송 프로를 맡은 나는 매우 보람을 느꼈고
기성시인 선배를 만나 사귀는 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또 얼마쯤 지났을까. 했을 때 당시의 송영호 편성과장님 (차징은
노정팔) 이 하나의 멋진 계획을 세웠다. 즉 우리 가곡을 많이 제정해서

우선 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시켜서 국민들로  하여금 세 노래를 부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작사는 시인들에 부탁해서 비교적 서정시적인 것을

 구하기로  했고 작곡은 작곡가에게 탁했다. 그런데 송 과장님은

 그 막중한 일을 내게 맡긴 것이다. 물론 나는 작사 분야만을

 맡았다. 이 노래제정은 방송가요의 효시가 아닌가 생각

된다. 해방 후 첫 시도되었던 건전한 노래 부르기

 범 국민운동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당시 왜색 유행가가 여전히 판을 치며

불리우던 때임으로 그 성과야 어떻든 정신적

혁신의 한 방법이었던 것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그때

만들어진 노래 중 오늘에도 불리워지는노래가 여러 편 있다는

사실은 마땅히 주목할 만하다. 이 우리 노래 제정을 추진 할 즈음해서

방송국에서 만난 사람 중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작고한 불세출의 작곡가

윤용하씨다.     그가 월남한 것은 1946년 늦여름이나 초가을 쯤이라는

 말을 나는 들었다. ……. 중략( 작곡가 윤용하씨를 만나게 된 얘기)...나의

작시에다 윤용하 작곡인 “보리밭은 몇 년 후인 부산의 피난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 방송국 시절에 그를 만났었고 사귈 수

있었기에 그 노래가 열매로 맺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작사료 작곡료를 받으면 둘이서 명동에 나가

제법사치스럽게 양주에다 맥주를 마셨다.

 

 

 

 
거나하게 취기가 돌면 그는 열을 올리며
음악에 관한 얘기를 폈다…,중 략……. 서울 방송국,
훗날의 서울 중앙방송국 편성과 직원시절에 사귀인 분으로
나를 우정 깊게 대해준 분들이 적지 않다. 나는 이른바 월남한

이북 출신 이였기 때문에 소외되기 쉬었고 또 실제 소외의식에서

 좌절되곤 한 적이한 두 번이 아니었다. …….중 략……. 50년 봄 정부의

감원계획으로감원계획이 되었던 나는 일단 방송국을 떠나게 되었지만

 1954년기독교방송 개국 시에 다시 방송계에 참여하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나의 젊은 시절이 다 지날 때까지 즉 70년도

 까지 운명처럼 우리나라 방송을 위해 일하는

몸으로 살아왔다…….생 략…….

 

 

 

보   리   밭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며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하늘만 눈에 차누나 

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며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하늘만 눈에 차누나

 

 

 

유경환 (유카리나)여사님 글  

 

보리밭, 저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좀 부끄러운 얘기인데 성함만 들은 윤용하님의 곡만

알고있었고, 가사를 쓰신 분이 박화목 시인이신 줄을 모르고

있었군요. 시인이신줄만 알았지, 방송국에 계셨던 것도 국장님

블로그를 통해서 처음 알았습니다.     이래서 제가 국장님

블로그에 열심으로 들어옵니다. 늘 감사함을 느낍니다

 

 

 

답  글

 

김억, 김진섭, 이진섭, 이서구,

박화목, 이하윤, 모윤숙, 노천명 이런 유명한

 문학가분들 방송국에 계신것을 아신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방송국에 계신분들도 잘 몰라요. 유여사님이

늘 관심 가져주시고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해 주신 것에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경환 (유카리나)여사님 두번째

 

 

제가 아는 분의 블로그에도    

'보리밭' 노래가 부산피난시절 만들어진

 노래라는 기사가 있네요. 부산 자갈치시장 앞엔가

뒤엔가 실제로 보리밭 노래비가 있다고 합니다. 블로그  

들풀은 잠들지 않는다 입니다. 블로그내의 검색에

보리밭으로 해보니 나오더군요.^0^

 

 

 

 

 

CBS초기사원들과 함께 한 박화목(위)과 CBS재직시절 박화목(아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박화목 작시 윤용하곡 보리밭.mp3

 

박화목작시 윤용하작곡 보리밭
수원 시립 합창단

  

박화목 작시 윤용하곡 보리밭.mp3
1.8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