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전창신,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 이화옥 삼일여성동지회장 발표문

이장춘 2014. 4. 21. 10:48

 

 

 

이 글은 삼일여성동지회 이화옥회장님이

2013년 3.1운동 94주년, 삼일여성동지회 창립 46주년이 된

2013년 삼일여성 동지회 학술발표회에서 여성독립운동가 전창신에

관해서 발표한 내용 전문입니다. 전창신은 함경북도 함흥 일대의 3.1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옥고를 치루는 등 일제에 함거 해 왔고 해방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경찰

서장을 지냈습니다. 1967년 황애덕, 황신덕, 박현순, 김영순등과 함께 삼일여성동지회를 결성

하고 1981년부터 83년까지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삼일여성동지회는 해마다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을 벌린 인사들에 학술연구 발표회를 갖습니다.    글은 어머니의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오랜기간 외교관으로  UNDP대사를 지낸 김윤열선생이 쓴 내용을 현재 삼일여성동지회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며느리 이화옥여사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담았기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어떤것인가. 를 아는데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되어  내용이 좀 길기는 하지만 전문을 올렸습니다. 오늘

배경음악은 그날 있었던 선열추모가와 삼일여성

동지회가를 함께 올렸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전창신 글, 이화옥 삼일여성동지회장   

 

 

전창신 여사는 1901년 함경남도

용대에서 출생했다. 아버님 전원규씨는 당시

애국교육의 온상이었던 이승훈씨가 세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용대로 돌아오시자마자 여자 서당을 세우고 백사장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남 학생들의 군사훈련에 전념하시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조인되자 잠적하셨는데 해삼위(부라디보스톡)로 망명하여

 신한 촌에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신다는 소식이 들렸다. 세 번째 해삼위에

 가셨다가도 “교육을 통해 나라를 다시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다”는 아버님의 고집에 홀로 돌아오신 할아버님께서는

드디어 굳게 닫혔던 창고 문을 여셨다.

 

그 안에는 한 줄에 열 개씩 꿰인 엽전 뭉치를

다시 셋씩 묶은 것을 천장까지 쌓인 엽전 꾸러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가 옆전 더미가 창고에서 자취를 감춘 1908년

어느날, “성진으로 이사하여 창신이를 학교에 입학(入學)시키고

가족이 기독교 신자가 되면 귀국을 하겠다”는 아버님의 전갈이 왔고

 할아버님은 어머님과 창신을 동반하고 그날로 성진으로 이사를 하셔서

 곧 창신은 캐나다 장로회가 세운 성진 보신여학교 보통과 학생이

되고 다음날, 갓 쓰고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님은 어머님을

대동하시고 선교사가 세운 서양 교회 건물 밖을

 몇 바퀴 도시다가 들어가서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셨다.

 

아버님은 1910초가 되어서야

돌아오셨는데 얼마 1910년 5월에 일본이

을사조약을 맺고 한국을 합병하자 아버님은 국내에서

 벌어진 구국교육운동 확산의 목적으로 안창호 선생과 이동휘

구한국 참령의 일촌일교(一村一校) 운동에 가담하여 다시 함경남도

 이원(利原), 단천(端川) 지방에 학교를 세우신다고 집을 떠나셨다. 1910년,

합병을 전후하여 러시아나 북만주 등지로 망명을 떠나는 마지막 항이었던 성진에

 위치한 보신여자학교는 매국노 이완용 저격에 실패하여 교수형을 당하신 이재명 씨의

부인 오인성씨를 선생님으로 모셨고 캐나다 선교사 구례선 (Grierson, Robert)목사님의

매서인(賣書人) 행세로 조랑 말에 성경을 싣고 성진 교회를 거점(據點)으로 하여 지방으로

다니며 3년간 독립운동과 개화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하시던 이동휘 참령의 두 따님의 가르침

으로 1912년에 즈음하여 12세에서 16세에 걸친 보신여학생들은 창신을 위시한 9명의

 학생이 9송 결사대를 조직하고 장차 북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국권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약속하며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우연이 라 할 수 없으나 결혼 전인 처녀들이

비밀행동을 하기에는 당시의 여건이 너무나 불리하여

 만주로 가는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16년 9월에 캐나다 선교부는 중심구역을

성진에서 함흥으로 이전하여 성진 보신 여학교 상급반인

 창신도 함흥영생여학교로 학적을 옮겨서 1917년에 영생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시 보습과(補習科)를 5명의 졸업생을 진학 시켰다.

 1918 년에 보습과를 졸업한 창신은 함흥 영생여학교 보통과 교사에 특채 되었다.

카나다 선교부는 창신에게 1919년에 동경의 동양영화 여학교 고등과로 유학을 보내어

 정 교사 자격을 받은 후 맥애련 (McEachern)교장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알려 주었다. 학생들의 학기말 고사가 끝나고 곧 유학의 꿈이 무르익어가던

2월 28일 저녁, 과로로 입원 한 창신을 제자 이성률이 “시내 모처에서

만세운동 거사 관계로 함흥 유지들이 비밀리 모이고

있다” 는 소식을 갖고 병실로 찾아왔다.

 

 

 

 

수소문 끝에 중하리 교회로 뛰어가니

함흥 교회 목사님, 장로님, 영신 소학교와 남녀

영생학교 직원과 그 당시 민족 주의 자로 소문 난 허헌(許憲)

 변호사 등 약 40명 가량이 모여 계셨고 서울서 연락 차 온 강봉우 씨는

3.1일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를 원산에서 찾아 올 것, 태극기 준비, 당일 거행할

행동 절차 등을 설명하고 벌써 떠나신 후였다. 대표자로 허 헌 씨가 만장일치로 추대되자

 그는 “이번 거사는 일본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대사라 일인들이 이를 내란 음모 죄에

 적용시켜 주모자들을 사형이나 종신형 으로 다룰 지 도 모르니 자기가 선봉에 서다가 옥중에서

 썩기 보다는 밖에서 사건의 뒷수습을 하는 편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느냐”는 말씀에 여자

2인을 포함한 참석자 42인이 모두 주모자가 되어 각기 부서를 맡기로 하고 대표자로

 제일 연소자인 40세 미만 의 영신 보통 학교 남자 선생인 이근재 씨를

선출하고 허헌 씨의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 하였다.

 

 

 

 

그 42인 중에는 후에 전창신씨가 결혼한 연대 출신

김 기섭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선언서는 아직 원산에 있고

태극기 만드는 일과 참가자 동원을 하룻밤 사이에 완수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주모자들은 거사 일을 3 월 3일 장날로 결정하였다. 여자 2인은

 여자동원, 태극기 준비, 연락, 간호, 뒤처리, 거사 후 수감자 가족들의 뒷바라지

 책임을 맡았다. 창신은 기숙사생들과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그렸다. 그러던 중

서울의 거사 소식으로 인물검거에 혈안이 된 함흥 관헌들에게 총 대표

이근재 씨가 불심 검열에 걸려 주모자 42인의 직책이 적힌 명부를

 압수당하였다. 3월3일이 왔다. 그런데 눈치를 채신 맥교장이

새벽에 기숙사생 전원을 자기 집으로 소집하셨다.

 

당황한 창신은 혼자 장거리를 향하여 뛰어갔더니

벌써 거리는 기마 헌병과 무장 경찰관, 소방서원 들로 가득 차

 있어서 책임을 진 만세교 입구까지는 갈 수도 없었다. 또 지정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학생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얼른 학교로 되돌아갔더니 교정에서

 맥애련 교장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창신이 “다시는 못 뵈올 줄 알았습니다. 사직서는

 책상 위에 두고 나가겠습니다” 라고 여쭈었더니 맥애련 교장은 눈물 섞인 어조로

 “나는 창신이를 일본 유학 후 내 후계자로 만들 작정을 하고 있소.    그러니

거사는 남자에게 맡기시오. 창신이가 항상 생각하고 자원하는 국민을

 교육하는 일이 더 중요한 나라 사랑이오.” 라고 하셨다.

 

창신은 “저의 이 피 끓는 마음을 교장 선생님께

알려드릴 길이 없는 것이 슬픕니다. 저는 나라 찾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라고 응대하자 “나는 조선 사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한 지 벌써 오래 되었는데 그렇게 섭섭한 말을 하니

실망했어요.” 하면서 교장 선생님께서는 흐느끼셨다. 그때 장거리 거사 장소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교장 댁에 갇혀 있던

학생들은 창 문을 부수고 담을 뛰어 넘어 만세를 부르면서 달려 나왔다.

 

 교장 선생님도 아랑곳 없이 창신은 학생을 이끌고

거리로 나오니 벌써 신창리 일대가 인파로 메어 있었다.

거사 일에 인근 각 촌에서 새벽 일찍 장터 어구에 도착한 군중은

예정대로 큰 장거리에서 세브란스 의대에 재학 중인 최명학의 나팔소리를

거사신호를 삼고 연대 재학 중인 김기섭이 초가집 지붕에 올라 만세삼창을 선창하고

서상리(西上里) 교회 이상봉 장로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자 모두들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대열에 합류한 창신과 학생들은 무서운

 총칼 앞에서 만세를 외치며 함흥일원을 돌아 함흥 경찰서로 향하였다.

 

 함흥시내는 기마경찰대, 소방서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함흥 거사는 3월 3일에 사직되어 인근 각 농촌으로

번져나갔으며 2주간, 계획에도 없던 산발적 만세운동이 계속되어

일본 관헌과 신경전을 벌렸다. 캐나다 선교사 마구례(McRae, Duncan

Murdoch)목사는 소방서원이 경찰서 문 앞을 떠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여학생들의 머리를 불 갈고리로 찍어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촬영하며

“여학생 머리에 불이 붙었소? 당신들의 만행을 만국회의에

고발하겠소” 하며 항의를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로 구치소가 부족한 경찰서에서는

 나이 어린 남학생들의 팔 다리를 형틀에 묶고 막대기에

 매달은 긴 혁 띠로 벌거벗긴 엉덩이를 하루에 30대씩 사흘 동안

90여대를 때리는 태형을 가한 후에 석방했다.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는 아이들은 정신을 잃고 미치기도 했다.

학교에는 임시 휴교령이 내렸다. 창신은 북으로는 서호, 통원,

신포, 신창, 북청, 차호 등과 남으로는 정평, 신상,

영흥 등으로 귀가하는 기숙사생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고향에 가서

거사할 것을 약속 받았다.

 

3. 3사건 남자 주모자 40인이 거의 다

체포되는 마당에 함흥에서 얼굴이 알려진 창신은

서울로 가서 그곳 동지들과 합칠 계획으로 원산에서 형세를

 살피던 중 맥애련 교장께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고 기차 시간에 맞추어

역으로 나가다가 3월 18일 오후 4시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때 기차에서

 내리신 맥 교장은 9척에 가까운 키에 얼굴이 시커먼 호송원께서 창신을

묶은 오라 줄을 잡고 부두로 향하는 것을 보시고 “젊은 여자 혼자는

 못 가오. 우리나라는 그런 법 없소. 나도 같이 가겠소”하시며

부두까지 따라오셨으나 배는 우시는 맥 교장을

부두에 남기고 넓은 바다를 향해 떠났다.

 

 선실에 오르자 경찰관은 수갑을 풀어주고

 나갔고 그 틈을 타서 창신은 몸에 지닌 일기 책을 한 장씩

 뜯어 씹어 삼키려 했으나 너무 힘들어서 마침 눈 앞에 보이는

증기기관 구멍 속에 책을 뜯어서 넣었더니 종이들이 어디론 지 살아져

버렸다. 늦게 함흥경찰서 도착하여 감방에서 어린 학생들이 곤장을 맞으며

지르는 비명소리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던 창신은 꼭 지옥에 온 것 같았고

 나라 없는 국민의 고통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3월 19일 아침 창신은 두어 평

되는 취조실에서 젊은 조선인 고등계 형사를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속으로

“저만큼 났으면 무슨 해 먹을 일이 없어 일제 앞잡이를 할꼬?” 하고

탄식을 하는데 이 계한 경부도 창신을 힐끔 쳐다보면서

혼잣말로 “야! 아깝다”라고 중얼거렸다.

 

창신이 못 들은 척 하자 그는 “야! 아깝다.

되지도 않을 일을 왜 해 가지고...”하며 그 다음 말은

입 속으로 얼버무려버린다. 그래서 창신도 “야! 불쌍하다. 무슨

할 일이 없어...” 했더니 “지금 뭐라고 했어?”하고 다그쳐 묻기에 “불쌍

하다고 했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지금 삼천만 민족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잃었던 조국을 찾으려고 총칼 앞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피 끓는 청년 남아로 태어난 당신은 고작 하는 말이

그거요?” 하니, 그는 “나는 그런 되지도 않을

 일은 안 해!”하며 말을 뱉었다.

 

 창신은 “되지도 않을 일? 이것은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독립운동이오. 동포 2천만이

 하나 되어 독립이냐, 죽음이냐, 하는 이 마당에 된다, 안 된다는

 말이 무엇이오? 당신은 늘 될 일만 뽑아서 하여 지금 그 자리에 앉았소?

대단히 출세했구려. 이 기회에 다시 애국동포를 팔아서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고 있소? 나는 당신이 업신여기는 여자요. 우리 어머니는 나를 곱게 길러

 나라에 바쳤소. 당신은 자랑스러운 피 끓는 한국의 남아로 태어났소. 이 판국에

당신은 어찌, 될 것과 안 될 것만 따지고 앉았소? 천추 만대에 매국노 소리를 면하려

거든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그 쥐고 있는 붓대를 꺾어 버리고 민족 앞에 나가 사과

하시오. 4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절대로 일본의 노예는 될 수 없고

반드시 독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천리요, 철칙이오.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라는 말을 모르오? 단군의 피를 받은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운명을 타고났소. 양심에 묻고

민족혼을 찾으시오,” 하며 대드니 형사는 안색이 변하며 주먹을 쥔 채

말 문이 막혔던 지 “주소, 성명”하며 취조를 시작하였다. 취조가 끝나자

 큰 책으로 하나가 되는 조서를 창신에게 내밀고는 “읽은 후 도장을 찍으시오”

하며 나가려 하기에 “나는 내 생전에 독립이 될 것을 굳게 믿고 있으니

그 날이 오면 이 장소에서 자리를 바꾸어 만납시다.” 라고

응답하고 조서는 읽지도 않고 날인을 하였다.

 

 

창신은 서울로 남하한 1946년 3월경,

서울에 온 이 계한이 반민특위(민족반역자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친일파를 색출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독립되는 날 만나자고 한 약속”을 이행하자고 사람을 보냈더니

 “내가 이제 무슨 면목으로 만나겠소. 처분만 기다리겠소”라는 대답이

왔다. 창신은 “독립된 국가에서 전과를 뉘우치지 않고 일선에 나선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26년간 형극의 길을 걷게 한 이계한을

 용서하였다. 취조를 받은 창신은 함흥 형무소 뒷문을 통하여 누추한 함흥

여자 형무소 의무실로 끌려갔다. “옷을 벗어” 하며 뻐드러진 이를

 내밀고 비죽이 웃는 흰 가운의 일본 남자의 명령에 놀란

창신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뭐 하는 거야, 빨리 벗어” 하며

 두 일본 여 간수가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쌍소리를

섞어가며 한국말을 지껄이는 40대 일본남자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던 창신은 혀를 깨물고 죽자니 안 되고

 그렇다고 들어 갈 쥐 구멍도 없는 상태에서 죽음보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던져 준 푸른 수의에 얼른 몸을 감자,

여 간수는 붉은 수의를 입고 무릎을 꿇고 앉은 여자들로 빽빽한

감방으로 창신을 밀어 넣고는 “저 똥통 곁에 가 앉아!”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온 감옥이 흔들리도록

창살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변기에서 진한 냄새가 나는

 안쪽으로 발을 옮기는 도중에 누가 창신의 다리를 걸어

넘어지게 하고는 넘어진 자리에 끌어 앉히었다. 고참 죄수가 소위

 “만세 꾼”에게 베푼 극진한 배려였던 것이다. 약간 장방형인 감방은 옆 사람의

 발이 바로 코앞에 닿게 엇갈려 누우면 마지막 줄에 누운 사람의 얼굴이 변기통을

마주 보았다. 한번 일어나면 다시 눕기가 힘들 만큼 비좁은 방은 몹시 추운 함흥의

3월 중순인데도 서로 살을 부치고 자니 추위를 견딜 만 하였으나 아침에 똥 통을

 비울 의무가 있는 신참 죄수는 밤 새 고름과 진물로 들러붙은 옆 사람과

 몸을 떼다가 딱지가 떨어 지면 피가 흐르고 몹시 쓰렸다.

 

미결수인 창신은 감방 안에서 홀로 머리를

곧 바로 세우고 꿇어앉은 자세로 일본 여 간수들의 욕설,

멸시, 천대를 받아야 했다. 그러자 매일 어머님, 맥 교장, 또 친구들을

 생각하며 호소의 기도와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2000년 전에

벌써 고통 받는 너의 친구가 되려고 내가 미리 확실히 당하였다. 나 없이 네가

살 수 없고, 나 말고 어디서 위로를 받으려 하느냐?” 하시며 예수님이 말씀하는

소리를 들었다. 창신은 “하나님, 저의 모든 교만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항상

 함께 하여 주시옵고, 곁에서 영원히 기쁘고 감사한 맘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앞으로는 주님과 더불어 대화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 변변치 않으나 진실한 민족의 봉사자가 되겠습니다. 이 감옥이 최고의

 수련장이고 주님을 가슴에 받아들이는 최종학부가 될 것입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니 드디어 마음이 평안해지고 예수님의 사랑에

삶도 죽음도 맡기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3월15일, 명천군 하가면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군경이 쏜 총에 아버님이 쓰러지자 외딸인 동풍신이

 피가 흐르는 아버지를 업고 시장 주위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했다.

그리하여 동(薰)씨 가문을 선두로 하여 충격을 받은 군중 50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가서 70이 넘으신 할머님께서는 주재소에 불을 지르시고

여러 사상자가 생기는 가운데 동풍신 부모님께서는 모두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3명의 여자 중죄인인 20세 전후의 동풍신,

30세 미만의 동풍신 가문의 며느리, 70이 넘으신 할머님이

살인, 방화죄로 창신이 있는 함흥 여자

형무소에 구치되었다.

 

당시 동풍신은 몸에 탄알이 박혀있었고

심한 고문으로 정신 이상이 된 젊은 며느리는 항상

소리로 울다가 간수들 잣대 세례를 받기가 일수였다. 동풍신은

창신이 미결수일 때 상고 차 서울로 떠났다. 함흥형무소 시절, 서로

엇갈리면서 창신이 그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나라 없고 부모 없이

어이 살란 말인가, 나도 따라 가련다”라는 것이었다. 해방 후 애국 부인회에서

백신영 씨에게 들은 말로는 동풍신은 끝까지 상고하여 감형으로 5년 형을

받은 후 옥중에서 단식투쟁으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함흥 주모자42인은 처음에는 독립만세 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죄목이 소요사건으로 변하여 안보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판결이 나는 대로 남자 40명은 공소 차 서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창신도 상고하고 동지들을 따라 가서 법정투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허 변호사는 조서 진술상의 불리한 점이 많으니

 상고를 포기하도록 설득 하시고 “여자요, 미성년자” 인 점을 강조

하여 남자들 형량의 반을 주장하고 또 제자들이 다른 지방에서

일으킨 사건들과 연루 될 것을 우려하여 죄목을 함흥

3.3 사건으로 마무리를 지으셨다.

 

 

판결 날이 왔다. 함흥사건 주모자 42인은

최고 2년으로부터 6개월이라는 판결이 났다. 이성률은

 6개월을 받고, 8개월 언도를 받은 창신은 미성년자이기는 하나

국사범인 까닭에 푸른 수의 대신 44호 번호가 달린 붉은 수의복 차림으로

 징역살이를 시작하였다. 일본 여 간수들은 44호와 92호가 판결만 나면 세탁부와

식사 당번을 시켜서 출옥할 때는 뼈를 못 추리는 병신을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들은 맹세에 충실하여 추운 겨울에 창신을 맨 발로 우물가에 내 보내어 남자들이나

지는 큰 물통에 두레박으로 물을 채우게 하고는 세탁소로 운반하라는 명령에

무게에 견디지 못하여 지려던 물통에 덮쳐서 물 세례를 받으며 개울가에

 나둥그러져서 실신하게도 하였고 더운 여름에는 몇 백 필이나 되는

 붉은 광목을 가위로 잘라 죄수 복 마름질을 시켜서, 창신이

 손이 붓고 어깨가 결려서 쩔쩔매면 곧 바로 취사장

으로 보내어 뜨거운 밥을 푸게 하였다.

 

유일한 한국 여 간수인 영생 보습과 동창인

경혜는 처음 감방에 들어 오자 처음에는 사표를 낼 생각을

하다가 판결이 난 후에는 자기가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같이 징역을 살자고 감옥에 남았다가 창신이 출옥하는 날,

사표를 내고 같이 형무소를 떠나 한국인의 의리와 우정이 어떤 것임을 일본인들에게

역력히 보여 준 난 의로운 친구요 애국자였다. 그러던 중 6월 어느 날, 남자 간수가 44호를

 불렀다. 지방으로 흩어진 제자들이 일으킨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의심한 창신은 제자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증언을 모색하며 오라 줄에 매어 따라 갔더니 끌려 간 곳은 법정이

아니고 금테 모자를 쓴 정복 경찰 관리 300여명으로 가득 찬 넓은 방에 좌우에

 통역관을 거느리고 앞 줄 가운데에 앉은 신사차림을 한 일본인이 앉아있었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너희 조선 사람들의 진의를

물어 보고 싶어서이다. 만일 네가 말을 잘 못하는 것이 있어도

형량에는 아무 관계없으니 마음 놓고 대답하여라.”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서두를 끊더니 “말은 국어도 조선어도 좋다. 왜 만세를 불렀느냐”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질문을 했다. 그간 법정투쟁 기회를 잃어 억울했던 창신은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세를 왜 불렀느냐는 것은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당신들은

 우리의 국토, 국권, 국민의 생존권마저 빼앗는데 성공 한 줄 알겠지만 우리의 민족혼은 건드리지

못하였소. 우국 혼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독립할 때까지 싸울 것이오. 당신들은 일방적으로

합병을 강행하고 외교권부터 박탈하고 군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을 쓰고 있소.

 

첫째, 교육을 한다고 보통학교

훈도에게까지 긴 칼을 채워 공포 분위기

속에서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했소.

 

둘째,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농민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주고 만기되기만 기다렸다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를 빼앗아 이들을 남부여대

하여 남북 만주로 유랑하게 하였소.

 

셋째, 애국동포는 감옥에 가두고

 언론 기관을 철폐시키고 집회는 불허했소.

 

넷째, 직장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있소. 이번 의거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의 필연적 행동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주먹의

군중을 총칼로 살생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소. 그것이 언필칭

대 일본제국의 행동이오? 이번 의거는 우리의 독립운동이오. 좋은 증거를

보여드리리다”하고 말한 뒤 창신은 동상과 부스럼으로 범벅이 된 두 팔을

 걷어 붙이며 “내 얼굴과 팔을 보시오. 나는 분명 당신네들과 똑같은

인간임에는 틀림없소. 내가 왜 이렇게 인간 이하의 비참한

꼴로 나타났겠소? 나라를 빼앗긴 탓이오.

 

축생 이하의 대우를 받아 죽어도,

나를 보호할 나라가 없단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독립이냐 죽음이냐에 있는 것이지 처우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싶소. 우리는

반드시 꼭 독립하고야 말 것이오. 우리에게는 4천여 년 역사가 있고

굳게 뭉친 2천만 민족의 우국 혼이 있소. 그러니 당신도 더 이상 수고하지

말고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우리는 군국주의 식민정책에 신물이 나오.”

라며 신이 나서 언성을 높이자 일본신사는 “너의 말 잘 알아듣겠다.

 

그러나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

그러니 이런 일에 참여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여라. 앞으로는 잘 살게 될 것이다”라고 되받기에 창신은

당신들과 합병하여 편하게 살기를 원치 않소. 못살아도 좋으니

내 나라를 찾아 내 동포와 더불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소.” 하고

말을 끝냈다. 창신은 방에서 끌려 나와서 다시 용수를 쓰고 오라 줄에

묶이어 함흥 감옥으로 돌아오는데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고

생각할수록 꿈만 같고 속이 후련했다. 그러나 꿈에서 깨니 기다리는 곳은

 숨 막히는 감옥이었다. 다음날 창신을 찾은 경혜는 “어제 너와 대화한 일

본인은 민정시찰 차 함흥에 온 동경 고등법원장이었어. 함흥사건 남자

주모자들이 모두 서울로 공소하러 가고 없어 함흥에 있는 네가 불려

갔던 거야. 참석한 그 금 테두리 중에는 조선사람도 섞여 있어서

그들이 네가 일본 법원장을 호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말하며 흥분하였다. 이 소문은 함흥 전체에 퍼졌고

교회에서는 창신을 영웅화하였다.

 

러던 중, 9월 1일 새벽 3시에 4개의

감방 문이 활짝 열렸다. 당번 간수인 경혜가 재빨리

 창신과 성률에게 짚이 거의 다 떨어진 용수를 얼른 씌우고는

행렬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 둘을 앞줄에 끌어 세웠다. 구 감옥에서

1 km떨어 진 동흥리 동쪽 시외 근방에 세워진 신 감옥으로 옮기는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행렬이 어둠을 더듬고 시가에 들어서는 데 헌 옷에 물동이를

인 여자 아이가 바짝 창신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상하여 얼굴을 보니

석박순(石朴順)이라는 제자였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에서 빠르게 군중이 행렬에

 끼어 들고 날이 밝자 학교선생, 학생, 교회사람, 아이, 어른들이 소리쳐 “창신,

창신”하며 외쳤다. 이 소리에 창신도 처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열심히 응답하자 인솔하던 남녀 간수들은

총까지 휘두르며 군중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때 창신에게는 신 감옥 가까운 어느 초가집에

한복으로 촌부인 차림을 하신 맥교장이 발광에 가까운

 몸짓으로 “창신아! 성률아!” 하시며 소리를 지르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창신은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하고 소리소리 질렀고 군중의

 소리는 신 감옥의 큰 대문이 닫길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드높은 벽돌담에

쌓인 신 감옥에 백 명 가까운 죄수들이 도착하였다. 작은 출입구 곁 모래

장에서 이글거리는 불에 죄수들은 용수를 던진 후 수의를 땅에 벗어

놓고 감옥에 들어가는 죄수들은 난데없는 펌프로 약 소독 세례를

 받았다. 옷이 고열로 처리되는 동안 알몸으로 몇 시간이나

 쭈그리고 앉아야 했던가! 창신은 초라한 자신이 너무

불쌍하여 엎드려 울기만 하였다.

 

1919년 12월 25일, 출옥하는 날이 왔다.

아침 일찍, 솜으로 따뜻한 흰 광목 치마 저고리를

갈아입은 후 기다리는 인력거에 몸을 싣고 맥 애련 교장 집에

도착하였다. 선생과 제자는 그저 부둥켜안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울며 기도할 뿐이었다. 함흥 친지들을 만나 위로와 환영의 기념품도 받았다.

1920년 초하루 아침을 부모님이 계신 성진 집에서 보내려고 출옥 5일 후 인 12월

30일에 배를 탔다. 그러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추위로 기관이 얼어 붙은 배는

하루 늦게 성진에 도착했는데 엄동에도 불구하고 부두는 일가 친척은

 물론 교회, 학생, 사회인사 들로 부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월말 경부터 함흥에 가서 일본유학 준비를 하려고

영생여고 기숙사에 머물고 있을 때 1920년 3월 1일을 맞게 되자

 기미년 3․1운동의 주모자가 기숙사에 같이 있는 것을 기화로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맥 교장 은 모든 학생들에게 설사약을 먹여 휴교하고

그날을 무사히 넘겼다. 1920년부터 일본으로 가는데 도항 증을 필요로 하는 새 법이

생겨 본적지인 성진으로 다시 돌아가서 수속을 하려는데 불온선인이라 내어 줄 리가 없다.

서장을 직접 만났더니 “일본을 왜 갈 테냐? 만세 부르러 가냐?” 하고 눈을 부릅뜨고 때리기 라도

할 기세로 물었다. 창신은 "아니요. 독립운동을 하러 갑니다”라고 대답하고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난감해진 채 돌아간 함흥에서도 뾰족한 길이 있을 리 없었다. 궁리 끝에 맥교장은 창신을 대동하고

 비가 뿌리는 4월 초 아침 서울 행 기차에 올랐는데 좌석을 얻지 못하여 3등간 기차 문 앞에 서서

가시다가 강원도를 지나갈 무렵 거센 바람에 맥교장이 쓴 애지 중지하시던 꽃 모자가

마을 쪽을 향하여 춤을 추고 가다가 살아졌다. 서울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맥교장이 웃음을 머금고 널찍한 인찰지에 도장이 찍힌

정무총감의 친서를 건네주셨다.

 

창신은 다음 날 기차로 부산에 도착하였고

다시 배로 일본으로 가서 동경 동양 영화여학교의

기숙사생이 되었다. 기숙사에서 두어 밤 잤을 까? 麻布津

경찰서에서 4~50대로 보이는 형사가 하까마 (일본 남자 옷)를

입고 학교로 찾아왔다. 서로 인사를 건 낸 다음 창신이 대뜸 “거물을

만나러 오셨는데 실망하셨겠어요. 동경에 오니 꽤 외롭습니다. 종종

찾아 주세요” 하고 놀렸더니 그 뒤에는 경찰 방문객을 볼 수 없었다.

일차 대전 당시 돈을 번 일본 사람이 설립한, 갑부와 귀족의 딸들이

 다니는 동양 영화여학교는 교사 진이 주로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파견 된 선교사들로 영어는 물론 신식 서구 문명을 도입하여

피아노, 바이올린도 가르쳤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창신은

고등과 4학년에 입학하게 되었고 영어, 음악, 미술은

부족하나 물리, 화학, 수학, 문법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반에서 머리가 좋다는

 평판을 받았다.

 

 5학년 때 한일 근세사를 맡은

일본 역사 선생은 전반 22명 중 단 하나의

한국인인 창신을 의식했는지 “나는 주어진 교과서에만

의거하여 강의를 맡은 선생일 뿐이다”라고 자기 국민을 가르치기

위하여서는 거짓말이라도 하겠으니 그리 알라는 암시를 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이마즈와 여선생은 만주사건, 러시아 출병사건, 한국인 사건 등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던 그때 “일본인은 민족적으로 죄 많은 인간”이라고

항상 한탄하며 잘 우셨다. 기독교 청년회관에 가면 일본여자 대학생 황신덕 씨,

음악가 윤 심덕 씨, 또 박순천 씨가 계셨다. 영학숙에 다니시던 박승호 형님은

 혼자 외롭겠다고 창신에게 많은 정을 주셨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남편

 최승만씨와 자식들을 남겨 두고 북으로 끌려가서 얼마나

고생을 하실까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동경 도리이사까 (鳥居坂)에 있는 영화여학교는

 李王世子의 저택 건너편에 대문끼리 마주보고 있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늘 한복만 고집하던 창신은 전차 길에 나갔다가

군복 정장에 말을 탄 李王世子를 자주 뵈올 때 마다 공손히 절을 하면

은 씨는 경례로 답하셨다. 1920년에 4월 28일에 거행 된 李王世子의

결혼식은 적령기 여학생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결혼식 날은 아침부터 아이

들이 “全 양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을 창신은 “내게 왜 축하를 하니, 내가

 결혼을 하니” 하며 딴청을 했다. 조선 왕가의 대를 끊으려는 이등박문의 정략적

 결혼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전 교생이 기마대 의장병의 호위를 받으며

鳥居坂宮의 왕세자 저택으로 향하는 결혼행렬을 구경하러 나가서 학교는

 비어있었다. 창신도 호기심을 견디다 못하여 몰래 교문 밖으로 나와서

 쌍두마차에 앉은 아름다운 방자 양을 보고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3․1 독립운동 후에 시작된 신교육 선풍은 거세게 불었다.

 2층 목조 건물 안에서 교실 4개에 복식으로 8학급의 60~70명의

학생을 수용하던 영생 여학교는 쇄도하는 300여명의 여학생을 영입하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기숙사를 개방하여 낮에는 교실로 사용하고 근처에 있는

집들을 한 채씩 사서 칸을 헤치고 한 학급씩 늘려서 학교를 유지하기에 분주했다. 이때

안식년으로 캐나다에 가신 맥 교장은 캐나다 선교본부에 영생 학교의 열악한 학교 운영

실상을 알리는 반면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교 운영 방침으로 건물뿐 아니라

자격 있는 교사 채용이 필요함을 역설하셨다. 그 결과 선교 부에서는

함흥 영생여학교의 새 건축 안을 승인하였다.

 

함흥 교사 신축 기금확보에 개가를 올리는 동시

대학에서 학사 학위까지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오시는

 맥 교장께서는 창신에게 “졸업 즉시 귀국하여 자기의 일을 돕도록 하라”는

명령조인 편지를 보내셨다. 창신은 아쉬운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거두고 학교 발전을

 돕기 위하여 1922년에 교사자격증을 받은 즉시 귀국 길에 올랐다. 보통학교가 헐린

장소에 강당과 번듯한 교실을 갖춘 현대식 2층 영생보통여학교 빌딩이 섰다. 옛

 기숙사 터는 여학생들에게 장차 가정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서와 지식을

가르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현대식 시설을 설치하느라 건축에

온갖 열의를 다 하였고 새 기숙사가 완성되자

우선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제도 영생여학교를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누어 영생여학교 보통과와 영생여학교 고등과로

완전히 분리하여 인가를 내었다. 학생이 많이 몰려들자 당국의

교육 방침과 행정에 부합된 학교 교육을 위한 사범학교 출신 교원채용

문제가 대두하였다. 당국은 창신이 황국 신민 2세를 교육하기에는 사상이

불온하다고 일본에서 받아 온 자격증에도 불구하고 교사로 인정하기를 거부

하였다. 그러다가 사이또 총독의 융화정책에 따라 함흥 사건 42인 대표자로

2년 형을 받은 영신 보통 학교 이근재선생과 당시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생 중학교 이봉근 교무 주임은 복권되어 학교에 복직되었으나 창신만은

예외였다. 도(道) 학무 과장이 바뀌거나 시(市) 학무과장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학교에서는 창신의 인가 신청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궁여지책으로 맥 교장은 창신의 모교이며

사이또 총독의 부인 하루꼬 (春子)가 졸업한 같은

캐나다 계통의 동양영화여학교 교장에게 의뢰하여 보았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청탁한 서류가 함경도 학무과에서 함경도

 경찰서에 넘어가는 순간 경찰에서 창신의 경찰 조서를 총독부에 보낸

 것으로 문제는 끝이 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원인가

신청을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창신은 결과를 기다리기로 하고 임시로

분립된 영생보통 학교에서 교장의 재량으로 20년간 인가 없는 교원생활을

하다가 후에 그나마도 강제로 교직생활을 멈추게 되었다. 창신은 제 2세를

 가르치는 교육자로 성공해 보겠다는 꿈을 접고 멀리 함흥 영생 중학교와

연전 문과 출신인 정평의 김기섭씨와 1924년 4월 1일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은 함흥 3.3 거사 때 장 터의 초가집 지붕에

올라가 만세삼창을 선창 하였고 옛날 창신의 성진

보신학교 시절에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어를 담임한 선생 이었다.

 

맥교장은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재미없는

그를 사랑 하고 믿으셨고 학교 재정을 맡은 그에게 당신이

 딸처럼 사랑하는 창신을 중매하신 것이다. 맥교장은 창신의 면사포까지

캐나다에서 수입하여 씌워 주시고 당시 모든 결혼 비용도 아낌없이 즐겨 베풀어

주셨다. 결혼식은 시아버님 댁에서 올렸고 피로연도 그 당시로는 꽤 화려 했다. 맥교장은

 임시 살림할 집도 마련 해 주셨으며 신혼 부부는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결혼 후

 장녀를 잃고 차녀를 본 김씨 일가에 1928년에 기다리던 장남 윤열이 태어났다. 그 후

창신의 남편 김기섭 (후에 김주로 개명)씨는 동료와의 의견 충돌로 학교 일을

사직하고 맥 교장의 곁을 떠났다. 그 후 저금과 퇴직 금을 합쳐서

출자한 출판사업는 여의치 않아 투자 금을 통째 날리고

그간 창신이 주선한 돈은 고스란히 그녀의

앞으로 채무가 되었다.

 

장래가 막막하던 남편께서는

 다시 용기를 얻어 염원하였던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평양으로 떠나셨다. 창신은 불령선인을 부모로

두어 공립학교도 들어가지 못하는 진주와 윤열을 교육시키고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빗을 갚아 나가는데 급급하고 영생보통학교의

임시 교사 월급으로 아이들을 배 불리 먹이지도 못하고 허덕이는 힘든

생활을 엮어 나갔다. 1934년에 남편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동장

진 일대의 순회목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서호 교회로 옮긴 지

한 1년쯤 되였을 때 흥남 경찰서 고등계에 불려 갔다 오더니

말없이 교회에 사표를 내고 행방을 감추었다가 몇 달 후에

 돌아 와서 벽돌공장으로 갑부가 된 최 장로가

세우신 동부교회에서 시무를 하셨다.

 

창신은 선교사들이 강제 귀국을 당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맥애련 교장이 한국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물건 정리하고 계신 교실로 찾아 갔다. 식구의 안부를

묻고 눈물을 닦으시던 맥교장은 자신의 가운을 창신에게 입히시고 탁자 위에

놓인 베레모를 머리에 씌워 주시더니 “내가 조선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 갈 때에는

 이렇게 하여 나의 교육 사업을 창신에게 맡겨주려고 30년을 열심히 일했는데 앞으로

이 예복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야 되느냐?”하시며 흐느끼셨다. 1943년 4월에 김 주 목사

 (남편 김기섭)는 예수회 총회 결의에 따라 시국관계로 문을 닫게 된 전남 순천지방

교회를 재개할 책임을 맡고 떠나셨는데 가자마자 경찰에 의하여 금족령이

 내려서 출입도 못하시다가 결국 6월쯤 함흥으로 되돌아오시는 길에

기차 안에서 이동 경찰에게 약 1000회 정도의 설교 집을

 빼앗겼다며 전 재산을 잃은 사람처럼

실의에 빠져 돌아 오셨다.

 

그러다가 약 한달 후에 여수 고등계 형사 4인,

함경남도 경찰부와 함흥 경찰서 고등계가 합세한 10여

 경찰관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가택 수색을 하고 책장의

책이며 자기네는 읽지도 못 할 외국서적까지 가져갔다. 그 후 목사님께서는

함흥 경찰서 고등계에서 취조를 받으신 후 여수경찰서원 金次奉 이하 몇 사람에게

 연행되어 가시고 소식이 두절되었다. 걱정 중 새해를 맞은 1944년, 김주 목사 생신일인

 1월 11일에 광주 형무소에서 신사참배반대 죄목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고 계시다는

김주 목사의 편지가 왔다. 창신은 몹시 추운 겨울에 통행증을 얻어서 즉시 광주로

떠났다. 동생 전종휘박사의 동창이며 형무소 담당의사로 병감에서 일하시는

 최석채의사를 그의 개인병원으로 찾아갔더니 “목사님은 너무 쇠약하여

처음에는 사경을 헤매셨으나 잘 치료하면 생명은

건지실 것 같다”고 일러 주었다.

 

곧 광주의 여성 활동가 김필례 선생과

최의사의 주선으로 면회를 신청하고 다음 날

형무소로 가니 바짝 마르고 양 귀만 두드러지게 나오고

옷이 작아 팔꿈치와 무르팍이 들어 난 죄수 복 차림의 다 죽어가는

 늙은 남자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간수에게 끌려 왔다. 한 참 보다가 혹시

사람이 바뀌지나 않았나 의심스러워 “날 알겠소?” 하고 묻는데 대답도 듣기 전에

시간이 지났다고 면회가 끝났다. 꼭 그날 밤 안으로 돌아 가실 것 같아 밤새 울기만

하다가 다음날 아침에 억지로 면회 신청서를 내 밀며 몇 시간을 갖은 방법과

지혜를 짜내어 간수를 설득한 끝에 면회에 성공 하였는데 교회를 쩡쩡

울리던 그의 목소리는 간 곳이 없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목소리는 알아듣기조차 힘들어 창신은 자기가

할 말만 마치고 돌아서야 했다.

 

출감 후 들은 이야기로는 6개월 동안

여수 경찰서에서 김차봉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비행기고문, 고춧가루고문, 재우지 않는 고문 등 본인의 말로는

 안 받아 본 고문이 없었는데 의자에 묶어놓고 무릎아래 다리뼈를 몹시

때리니 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기절하고 깨어난 후부터는 영영 목소리를

되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편을 다시 면회 갔을 때 광주 김필례 선생 댁에서

 묵으며 선생님께서 밤새 화덕을 달구어 구우신 과자를 들고 아침 일찍이 산 너머에 사는

 어느 간수를 찾아가서 둘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차입을 부탁하였다. 부디 10개월만

견디고 출옥하셔서 아이들을 만나시게 되기를 하나님께 빌며 남편을 뒤에 두고 귀향 길에

오르는 창신은 기차 속에서 오열을 금 치 못하였다. 45년 8월 5일 남편의 출옥하시는

 날이다. 일찍부터 광주 형무소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유난히도 미군 비행기의

공습이 잦은 그날, 비행기에 이리 저리 쫓기며 형무소 대문이 열릴 때 마다

안을 드려다 보았는데 김주 목사님은 나오지 않으셨다.

 

해는 넘어가고 창신은 절망에 빠져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 위에 묻고 울고 있는데 한참 만에 “내가 나왔소”

하는 그의 괴상한 목소리가 들리고 전에 차입한 당꼬 바지를 입은 그가

창신 앞으로 걸어 나오셨다. 당국은 비 전향자인 그를 출옥만기가 된

그날 다시 청주에 있는 구치소로 옮겨지려고 결정을 내렸는데

반복되는 비행기 출현에 수송이 어려워져서 해가

 저물게 되자 내보내기로 결정되어서

늦게 나왔다는 것이다.

 

곧 김필례선생 댁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편히 하룻밤 지낸 후

 다음날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는 고향 함흥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아, 드디어 해방! 8월15일은 몹시 흐렸고 무더웠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다가 그 귀한 주먹 빵 먹을 것을 잊고 썩혀 버릴 정도였다.

진정으로 기쁘다는 것도 참 견디기 괴로운 것임을 체험하였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움의 도수는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거지떼 같은 쏘련 병정은

 들어온 즉시 집집으로 노략질 다니기에 바쁘고 대형 군 트럭의 행렬은 흥남

질소비료 공장 기계와 압록강 수력전기 시설을 포함하여 큰 규모의

공장을 다 뜯어가느라 분주했다. 1945년 9월에 김주 목사님는

 서울에서 거행되는 장로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하를 시도하기로 결심하셨다.

 

 

창신에게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가서

함께 살자는 말을 남기고 혼자 떠나신 목사님은 고원

에서 철도편으로 평양에 도착하신 후 사력을 다하여 도보로

서울에 도착하셨다고 들었다. 목사님이 떠나신 지 몇 일 후, 교회의

여신도인 몇 분이 집으로 찾아 오셔서 “이제 앞으로 무슨 기회든지

 있을 터이니 김주 목사 지도하에 단결할 수 있는 집합체를 만들어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는데 힘을 합하자” 고 제안하였다.

 

벌써 평양에서는 소문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을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주 목사는 서울로 떠나셨다고

전하니 서로 걱정만 하다가 헤어졌다. 장남도 10월 초에 서울로 떠난 후

간다고 떠났다. 남은 식구가 한꺼번에 가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머리를 짜고

있던 중, 하루는 젊은 남자 청년들이 찾아왔다. “나와서 일하여 달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판국에 무슨 일을 하겠는가! 창신이 못 하겠다고 거절하니 “당신은 일제시대에도

일했는데 지금은 왜 못 하겠소?” 하기에 “그때는 일제 시대이지만 지금은 무슨 시대요?

 시대를 밝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여 보겠소.” 라고 말을 받으니 그들은

 대답은 안하고 나에게 민족반역자라고 욕을 하며 떠났다. 서울로 갈 때가

왔구나 생각한 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창신은 걸을 수 있는

3남 영훈군을 데리고 몹시 추운 1945년 12월 12일

 이른 아침, 함흥을 몰래 빠져 나왔다.

 

중간에 3남과 서로 헤어지는 위기도

있었으나 모자는 며칠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역에서 머지 않은 지금의 도뀨호텔 자리에 있던 미군장교

 구락부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는 장남을 찾아가서 반갑게 만나고 원효로에

방 한 칸을 얻고 아버님을 위시한 4식구가 서울에 모여 살게 되었다. 서울 온지

 4~5일이나 되었을까? 감옥시절 창신의 간수였던 김경혜의 동생 김경민이가

 찾아와서 함께 종로 2가 관수동에 있는 애국부인회를 찾아갔더니

회장 양한나씨와 유각경 씨가 반갑게 맞아주시며

 회원들에게 소개를 하셨다.

 

창신은 그 날로 부인회에 가입하고

간사 직책까지 받았다. 그 때 총무인 박원경 씨는

 피난민인 창신에게 부인회에 속하는 관사를 배당하여 주어서

장남은 직장으로 돌아가고 3식구는 그 회관에 부속된 건물로 이사를

하였다.  애국부인회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선두를

서고 또 이북 실정을 방방곡곡에 알리는데 전력을 쏟았다. 강원도, 경상도

지방은 박순천 팀. 경기도, 충청 남북도, 전라도는 전창신, 백신영 팀이

맡아서 주민들에게 이북의 실정을 소개 하며 순회 하였는데 대구에

 갔을 때는 위해를 당하여 어려운 고비를 겪기도 했다.

 

1946년 6월도 절반이 갔을 무렵,

미군정에서 여자경찰간부 후보생을 모집하는데

애국 부인회에서라도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공산당의 여성

동맹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당시

미군정은 민주진영이나 공산 진영 양쪽을 꼭 같이 취급할 때였다. 그리하여

애국부인회회장 양한나씨, 간사 전창신, 돈암동 지부장 서범식 씨 부인, 이선근 씨

누이동생과 김경민 등 다섯 사람이 모집인원 15명의3분의 1을 이루고 간부후보생이

 되었다. 간부후보생인 창신은 애국부인회 간사 직을 사직하였다. 그러고 나니

모두 남하하여 8명으로 늘어 난 식구들이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군정에서는 적산가옥들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 받게 해준다면서 증빙 서류 일체를 준비하여

 창신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집에는 일제시의 악질 경찰관 백형권이

당시 미 군정청 철도 경찰청장으로 있으면서 첩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상의하였더니 절대 반대를 하시다가 백형권의 전직 신분을 밝히니

 “그런 사람이면 법이 있는 이상 해 볼 수 있겠다”고 허락을 하셔서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관계 부처에 제출하였다. 서류는 내는 데로

 분실됐다고 했고 관계 직원은 없어진 서류에 대한

대책을 제시 하기는커녕 미안한 생각도

 보이자 않았다.

 

그때마다 창신은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다시

구비하여 제출하기를 수십 번 하였더니 하루는 담당관이,

“당신이 성공할 것 같소?” 하기에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오. 법을

집행할 의무가 있는 당신들의 양심에 맡기겠소” 하고 말을 받았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일이 지나도 끝이 안 보이자, 장남이 직접 군정청으로 미군인

 담당관을 찾아가서 알아봤다. 금시초문이라는 그는 빨리 수속을 끝내주어서

그 집 에 붙은 일부 구옥을 차지하여 1947년 가을에 애국부인회 사택을

떠나 남산동(현 외교 구락부)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8명의 식구와 친척 여학생 순희까지

 끼어9명이 된 식구가 오래간 만에 한 집에 모여 살게

 되었고 함흥에서 피란 온 친지들에게도 빈방들을 나누어 같이

살게 되었다. 남편 김 주 목사는 해방된 고국에서 비록 군정 하이지만

정부에서 일하여 보기를 원하여 백낙준 박사의 주선으로 불편한 몸을 지탱하며

 미 군정 공보부에서 신문을 검열하는 일을 며칠 하셨다. 유엔의 덕으로 1948년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장남은 최초의 대한민국 3등 서기관으로 외무부 정보 과에

재직하게 되고 딸은 학교 선생으로 취직하고 차남은 성남 중학교(김석원 교장)의

학생으로 또 3남, 4남은 교동 국민학교에 재학하여 일단 가정이 안정 되었다.

그때 사십육 세의 노 학생인 창신은 그 당시 중앙청 앞에 있었던 경찰

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아침이면 시간이 늦을세라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등교하여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훈련 복으로 갈아

입고 체조와 여러 가지 군사 훈련을 받았다.

 

12~3세 때 성진에서 9송 결사대를 조직

하여 독립군에 입대하면 받으려던 군사 훈련을 33년이

지난 후에 경착학교에서 받는 것 이었다. 시험도 종종 있었고

 논문도 가끔 발표해야 하는 바쁜 나날이었으나 창신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운 일들뿐이었다. 하루는 교장 김정오 장군의 시간에 창신이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앉아 필기를 하다가 함흥에서 일제 때 악명 높던

고등계 형사가 어느 교관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 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뜻 밖에

한국인 고문관 이라는 분이 창신을 불러 “함경도

함흥에서 전에 복역한 일이 있느냐, 그 때 담당 조사관이

 누구냐” 고 묻기에 담당조사관은 이계한 이라고 했더니 그는

입속말로 “미와(三和) 는 아니었구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부담 없이 진지하게 하다가 “한 가지 더 물어 볼 것이 있다”고 하며

“만일에 현 경찰에 일제 때 일을 한 경찰관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기에 “영광스럽게 독립된 국가에 잘 났으나 못 났으나 한 동포인데

무엇을 따지겠습니까? 온 국민이 다 하나 같이 기뻐하며 봉사해야 하지요.

 그러나 최 일선에서 민족을 괴롭히고 더욱이 애국자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 넣던 고등계 형사들은 민족 정기를 위하여서라도 당분간은

물러서서 근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들은 말에 의하면 그는 함경도 고등계 형사의

왕이었던 최 연이었고 창신과 대담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신상 이유로 사직하였다고 했다. 사실 광복된 이 나라 경찰은

전직 일제 경찰이 그 진영 그대로 새 정부에 들어왔다는 것을 창신은

몰랐고 여경 15명 중 3~4 명 정도는 역시 그들의 스파이였음을 후에 알았을 때

기가 막혀 땅을 치고 싶었다. 경찰전문학교 교육이 끝나고 일선 경찰서에서 실습을

 마친 창신은 경감으로 임관되어 경찰청 관하 중부서에 외무주임으로 배치 되었다.

여자들에게 문밖 출입이 금지됐던 시대에 태어나서 남자 경찰과 동등하게 경찰

제복에 모자까지 쓰고, 가방을 메고 구두소리를 요란히 내며

 국가에 봉사하는 여자 경찰이 된 것이다.

 

일제 하에서 나라를 잃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고 살아 남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창신에게는 꿈만 같았고 독립된 조국에 헌신하자는 결심은

굳어만 갔다. 사실 미군정에서 여자 경찰을 세운 주 목적은 미군

주둔 지역 내의 풍기 문란을 방지하는 것이었으나 일제 식민지 경찰에

40 평생을 시달려 온 원한으로 가득한 창신은 민주 경찰로 인권을 존중하고

민중의 공복으로 봉사하여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생활풍토를 이룩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울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루는 피투성이 여자가 여자 경찰

 서로 도망 을 오더니 얼마 후 남편이 뒤 달아 서에 나타 났다.

 

창신은 얼른 여자를 숨겨 놓고나서

 “당신 부인은 지금 위태 하여 곧 죽을 지 모르 는데

그리 되면 당신은 살인범이 된다” 고 겁을 준 후 곁에 있는

경찰서에 찾아 가서 “여편네를 팬 남자가 여자경찰서에 있는데 와서

패주면 점심을 사겠다” 고 유혹을 해봤으나 덤벼드는 경찰이 하나도 없어

어쩔까 하고 서로 돌아왔더니 여자 경찰 가운데 전에 남편에게 맞아 본 여경이

 나서서 그 남자에게 사정 없이 몽둥이 질을 하는데도 그 남편은 “마누라를

보게 해 달라” 고 빌고 있었다. 싫것 맞은 후에 고맙다며 수 없이 인사를

 하며 서를 떠나는 부부를 보는 창신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부부 사이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시작되는 국회의원 첫 선거일 새벽에 갑자기 화장실도

 부축 없이는 못 가시던 당신도 어서 가서 투표하고 오시오.” 라고

 김주 목사님께서 부엌에 있는 창신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닌가! 후에

 외교 구락부가 된 남산동 집은 정부에서 쓰겠다고 하며 이전 비 명목으로

김태선 서울 시장이 200만원을 주선하여 주어서 후암동 297번지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후암동에서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던 1950년 6월 25일 치안국의 명령으로

 여순경 10명을 대동하고 종로와 을지로입구 사이에 있는 임시 부상병 치료실에

가서 대기하고 있는데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더니 정부도 피난 갔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어 늦게야 여자 경찰들을 해산시키고 귀가하니

 라디오 에서는 이 박사의 육성 녹음으로 정부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방송만 나왔다.

 

경찰이기 때문에 집을 떠나야 했던 창신은

헌 베옷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파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하루는 “서울서 온 전창신씨 아니시오?” 하는 낮이 선 남자

소리에 혼비백산을 하였더니 그 남자는 “미군이 곧 인천에 상륙할 것이오”

라고 소근거리며 스쳐 갔다. 인천 상륙 후 총소리가 요란한 서울로 들어와서

집으로 달려가 보니 뜰 안에는 9월 19일에 돌아가신 남편 김주 목사와 9월 26일

추석날에 굶주림으로 돌아가신 시아버님 김우정 장로님의 무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건국 이후 국회에는 “남자의 간통행위만 처벌하는 불합리한

간통죄를 불문에 부치자”는 결의가 대두되었다.

 

 

 

 

전창신경감은 이완보 경사를 대동하고 국회법

수정 위원회에 찾아가서 “남녀쌍벌죄”를 채택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법무부, 법제처 등의 관계요로에 지지를 호소하며

다녔다. 첩을 거느리지 않은 국회의원이 드물었던 당시 창신의 호소는

웃음거리 밖에 안되었을 지 모르나 ‘형법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혁명적 사건인 쌍벌죄가 채택된 것은 여자경찰의 치맛바람의 덕이었다. 1951년

2월 초 인천여자 경찰서장 서리로 발령이 났다. 인천으로 복귀한 여경서원 60명은

비었던 경찰서를 정돈하여 전초기지를 만들고 첫날밤을 보냈다. 당시 인천 에서는

 1월부터 후퇴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미군 선박 엘. 에스. 티. 를 타고 피난

가는 4~5천명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하여 여경은 우선 선상의 좌석배치,

음식 평균배부, 배설물 정리, 환자조사, 임신부 해산문제와

미군 병사의 풍기문제가 대두 되었다.

 

 

 

 

 4~5000 명이 사용하는 화장실 문 앞에는

여경이 24시간 근무 교대 하고 바닷물을 이용하여

수시로 청소하게 하였다. 그 후 인천에 복귀한 피난민들의

수효는 엄청났다. 인천시내 근교의 빈 절간을 얻어 경찰 애육원 이라는

 간판을 붙이자 100여명의 고아들이 몰려들었다. 신학과 출신 이세자 씨를

보호책임자로 임명하고 서원 4명, 전직 간호원, 전직 교원, 신용 있는 남자

한 분에게 경리를 맡겼다. 애육원은 서둘러 정비를 끝낸 후 미국 구호기관에서

 제공하는 구호물자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고 강당으로 사용하는 넓은

 법당은 음악과 출신 서원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은

미군이 고아 운송용 차에 피아노도 한 대 실어다 주어

유치원을 방불케 하였다.

 

 학교가 개교하자 아이들을 나이별로

 1학년부터 6학년에 모두 입학시켰고 전직 교원

두 사람이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지도하며 구제품에서

좋은 옷으로 골라 입히고 월사 금이 면제된 고아들에게 열등감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돈을 직접 선생님께 갖다 드리도록 배려도

하였다. 고아문제를 해결한 경찰은 다음에는 동서지방에서 온 피난을

 위하여 수용시설을 마련했고 40명 정도의 나이 어린 여학생 피난민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어린 자녀가 있는 어머니들의 주거에는 자치활동을 장려

하고 유행병 방역 등 풀어나갈 일들이 산 더미를 이루었으나 전시하에서

 모두 혼심을 다하였고 미국에서 지원한 원조물자는 일을 계획대로

 풀어 나가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경찰의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창신에게 경기도 경찰국장 윤기병 씨로부터

 공로상이 내렸다. 행사 후 돌아가는 창신은 도중에 김성화 소령이

운영하는 제2국민병 환자 수용소에 잠시 들렀다가 눈물이 나도록 비참한

참상을 보고 부상으로 받은 상금을 송두리째 기부하고 경찰서로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하에서 애국자의 박해를 일삼던 이익흥씨를 내무장관으로

 앉혔고 여경인 창신은 항상 그의 눈에 가시 노릇을 했다. 드디어 1952년에

창신은 인천 여자 경찰서장 직을 사임할 결심을 하고 대구에 가서

그를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오니 벌써 후임자가 주동이 되어

창고의 물자들을 세고 있었다.

 

하기야 같은 일신교회에 교인 이었던

 이익흥씨의 장모는 “사위지만 하는 짓을 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고 늘 말하였다. 1953년,

함흥 제혜병원에 계셨던 닥터 모리(Maury)박사가가 찾으신다 하여

서울역 앞에 자리한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뵈니 세탁부 일을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셔서 병원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차차 교인들도 서울로 돌아 오자

일신교회에서는 조 경우 목사를 중심으로 남산 기슭 좋은 터를 닦아 적어도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짓기로 하였다. 장명원, 김락범

장로 등이 전시에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헌금하고 목수이신

조정행 장로님께서 기술을 제공하셨다.

 

교인들이 매일 나와서 돌을 깨고 흙을

 나르는 노동을 하는 것을 본 장남 김윤열이 미 8군

민사원조처에 가서 건축자재 관리 책임자를 설득하여 목재와

시멘트를 지원 받아와 4층의 석조건물인 교회가 완성되었다. 남창동

교회 건축 중 많은 일화 중 하나를 말하겠다. 골목이 워낙 비 좁아

대형 운반 트럭이 물자를 싣고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교회

 대문 밖에서 도저히 안으로 꺾어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미군 트럭

운전병이 엉엉 울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장남이 대문의 벽을

일부 헐게 하고 운전병을 다독여서 장시간 진땀을

흘린 끝에 물자를 교회 마당으로 들여 온 일이 있다. 그렇게

 세워진 일신교회 내에 조만식 선생님 부인 전선애 장로를 선두로 한

 미망인 들을 돕는 수산나회가 창설되었고 교회 일로 분주해진

 창신은 7~8년간 근무했던 세브란스병원을 사임하였다.

 

 

 

 

1960년 일신교회에서 전창신여사의 장로 장립식이

거행됐다. 전 장로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주님! 저는 주님의 손에 쥐어진 한 줌의 흙이 옵니다. 마음대로 빚어

사용 하시옵소서. 주님 걸어가신 가시밭길 저도 뒤따라 걸어가고자 하오니,

 주여! 주님의 오른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전창신 여사는

 1985년3월 1일, 3.1여성동지 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시고

 온천에 다녀 오신 후 3월15일,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후   기

 

1981년에 주 스리랑카 유엔개발기구(UNDP)

대표인 장남 김윤열의 임지에서 흔들리는 열대 야자수를

창 밖으로 내다 보시며 집필하신 시어머님 전창신여사의 자서전에서

이 발표문을 뽑았다. 자서전은 2003년에 한국에서 “작은 불꽃”이라는 이름을

달고 햇빛을 보았으며 2012년에는 California, Santa Ana에 있는 Graphic

출판사가 “Torchbearer” - Translated by Yoon Yul Kim - 으로 출판

하여 amazon.com이 판매하고 있다. 미국국회 도서관 기록에는

{2012942137} 번으로 등록되어 있다.

 

발표자: 전창신 맏며느리 이 화 옥

 ( 3.1 여성동지회 회장).

 

 

남기신 후손은 다음과 같다.

 

2녀 김 연 주: 전 세브란스 의과대학 해부학실장,

고 박수연 박사의 부인.

 

1남 김 윤 열: UNDP(유엔개발기구)대표로 은퇴.

현 세계종교간 평화추진한국협회 대표

 

2남 김 상 헌: 유엔식량기구에서 은퇴.

현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

 

3남 김 영 훈: 전 동부건설 해외 본부장

 

 4남 김 일 순: 전 연세의과대학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현 Golden Age Forum 회장

 

양녀 최 명 자: 전 한국 노인협회 조 기 동 회장의 부인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전창신, 김영순 독립운동가, 동영상 3.1(삼일)여성동지회 이화옥

http://blog.daum.net/jc21th/17781687

 

항일 여성독립운동가들 권기옥, 연미당, 삼일여성동지회 발표 윤선자, 이명화

http://blog.daum.net/jc21th/17782090

 

제 7회 항일 여성동지선열 추모식, 삼일(3.1) 여성동지회

http://blog.daum.net/jc21th/17781926

 

 

 

 

 

 전창신의 아들 김윤열은 UNDP 대사 재직중  어머니의 기록을 정리 전기를 발간했다.

 

남편 김윤열이 쓴 전기를 요약 2013년 3.1운동 94주년, 삼일여성동지회 창립 46주년이 된

2013년 삼일여성 동지회 학술발표회에서 전창신의 독립운동사를 발표했다.

 

 

선열추념가, 3.1여성 동지회가.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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