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27일 EBS 교육방송이 KBS로부터 분리되어 새롭게 출발하던 그때의 FM 104.5MHz 교육방송을 임지혁선생님이 직접 수신 녹음한 그때의 방송을 듣고 있다. 어제 올려드린 TBS 교통 방송의 개국 실황방송과 함께 소중한 자료를 접하면서 이를 계기로 1951년 시작된 우리나라 교육 방송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EBS 교육방송 63년의 발자취, 1990년의 새 출발,
교육방송이 '교사의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은 1951년 6월
18일이다. 부산임시정부시절 방송을 주관하는
KBS와 교육을 담당하는 문교부는 학교방송이 뜻이
맞아 학교방송을 시작했다. 부산 피난시절의 방송국
프로듀서를 지냈고 KBS TV 초대 편성과장, 교수,
방우회장 등을 역임한 문시형은 그의 유고에서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49년 3월부터 만6개월 동안
컬럼비아대학에서 특별 강의를 받은 옥천
배준호는 미국 각지를 돌며 미국의 방송 실태와
상업방송을 두루 살피고 특히 FM방송을 이용한 교육방송에
접하게 된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미국기행은 6.25사변 으로인해 크게 활용되지는 않았으나 부산 피난시절 교육방송의 효시가 된 학교방송 '교사의 시간'을 처음 담당하기에 이른다. 옥천은 그의 유고에서 학교방송이 시작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산으로 피난하고서도 어린이 시간과 편성 전체 일을 겸하고 있었다. (중략) 문교부에서 공문이 왔다. 건전지식 라디오 수신기가USIS를 통해 5백대가 입수되었으니 방송국과 협의해서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내용이었다.
방송국을 대표해서 본인이 나갔고
문교부를 대표해서는 과학기술국의 백(白) 사무관이 나와 상의한 끝에 학교방송용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우선 15분짜리 '교사의 시간'을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 5백대라는 건전지식 라디오가 각 국민학교 교무실에 배치됨을 계기로 해서 1951년 6월부터 학교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이 대상방송은 1927년 방송을 시작하면서 부터
있어 왔지만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방송국과 교육의 주체
문교부가 힘을 합쳐 실시한 학교방송은 1951년 6월 18일이 그
기원이다. 그로부터 방송국과 문교부는 서로의 맡은 역할을
다하며 오랜 세월 학교방송을 이끌어 왔다.
1960년대 문교부 소속으로 남산의
KBS중앙방송국과 맞붙은 곳에 중앙 시청각
교육원이라는 문교부 산하기관이 있었다. 문교부의 학교방송을 전담하던 곳이다. 교육이란 특성과 방송이라는 특성이 조화를 이루며 쌍방이 힘을 합해 프로그램을 제작 하고 KBS방송 송신소를 통해서 송출되는 것이었다. 시청각 교육원의 방송요원도 방송국 직원 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9년 5월 6일부터 TV에서
학교방송이 시작 되면서부터 KBS와 문교부의 교육방송에 관한 역할이 더 확대되었다.
1972년 문교부에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설립되고, 이를 중심으로 초, 중등학생 대상의 라디오 교육 프로그램과 방송통신 고등학교 프로그램이 제작되면서 방송을 통한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었다. 시청각 교육원에서 담당하던 학교방송 기능이 교육개발원으로 옮겨지고 방송을 활용한 대학 교과 과정의 방송통신대학 등이 신설되면서 그 기능은 더 커갔다. 그때부터 양성된 방송통신대학 과정을 이수한 우수한 인재들이 각계 각층에서 중책을 수행 해 왔음을 본다.
교육방송의 기능과 역할이 확대되먄서 TV 교육방송을 전담채널로 만들기 위해 기구 (氣球)를 띄워 극초단하 UHF TV 채널의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기구(氣球)를 활용한 특수방송의 송출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다고 하지만 여의치 않다는 얘기가 들린다.
독자적인 송신시스템이 어려워지면서 교육방송을 KBS와 한국교육개발원 (KEDI)의 이원 체제를 골자로 한 국무총리 지시각서가 내려지기도 했고 1980년대 방송 통폐합 때는 방송관련 기능의 상당부분 KBS에 이관되어 그때 KBS로 온 사원들이 오랫동안 KBS에 재직하다가 KBS 사원으로 정년을 맞기도 했다. 필자는 한국 교육개발원 직원들 가운데는 학교 선생님 출신들이 많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방송의 격변기 1980년 교육방송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극성하던 과외수업을 없애기 위해 대학입시를 위한 방송 강의가 신설되었는가 하면 기구(氣球)를 띄워 가능성을 모색했던 극초단파 UHF TV가 지상파 송출로 실현 되었는가 하면 FM라디오방송을 송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 지면서 교육방송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증가와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 초단파 TV에 익숙해 있던 당시로서는 UHF TV수상기를 따로 구입 하거나 개조 하는 등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했고 라디오 FM수신기고 별로 보급되지 않았을 때라 별도의 수신기를 구입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따랐지만 결국 방송을 통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오늘날의 EBS 틀이 이때 확립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KBS와 한국교육개발원은 한층 협력을 강화 해 나갔다.
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KBS이사회가 최초로 민주적으로 구성 되었던 1988년 그때 한국교육 개발원장 신세호는 KBS 제1기 이사로 참여해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다. KBS에서「TV 고교 가정학습」방송이 실시된 것은 신세호가 KBS 이사로 있던 1989년 4월 17일의 일이다. 두 기관의 적극적입 협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 교육방송을 일원화해야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1990년 12월 27일 기해서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방송(EBS)이 새로 개국되어 호출부호 HLQL의 EBS TV와 EBS FM이 독립 교육 채널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오늘 들으신 EBS개국방송은 이날 9시부터 방송된 FM 104.5MHz 교육방송의 일부다. 초기에는 취약한 재정과 방송 기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KBS가 송출을 대행하기도 했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1997년 법율에 근거한 "한국교육방송원"이 새로 창설되면서 "한국교육개발원" 부설로 제작, 방송되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씨스템 으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 무렵 1997년부터 실시된 위성방송을 통한 송출시스템, 인터넷방송의 실시등 기술적 성과에 따른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으로 차츰 정상적인 기능을 확보해 가던중 2000년 3월 13일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이 시행 공포되면서 그해 6월 22일 "한국교육방송공사"가 촐범함으로서 모름지기 교육전담 공영방송으로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EBS 운영재원으로 KBS수신료가 지원 되는등 KBS와의 인연은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독자적인 운영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교육방송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교양방송이나 유익한 정보제공으로 국민의 사랑받는 방송으로 커가고 있다. 많은 우수한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어서 EBS와 접하는 두터운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2013년 방송대상 시상식에서는 국내 모든 방송사를 뒤로하고 방송대상을 수상하는 등 확고한 위상을 다지고 있다.
교육방송국이 새롭게 출범 하던날 정원식 문교부장관, 신세호 한국 교육개발원장, 김원기 국회 문공위원당등이 현판을 걸고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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