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김세원님과 동아방송 밤의 플랫폼
김 세 원 ! 그 얼굴은 몰라도 그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라디오 시대 ! ? TV시대에 TV에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밤의 고요한 정적을 울려주며 마음을 파고들던 김세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셨던 분들은 그래도 라디오의 묘미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TV에서 느낄 수 없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그 친근함과 정겨움, 때로는 고향을 그리며 때로는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때로는 연인을 생각하며 때로는 근심 걱정을 털어내며, 때로는 망상에 젖어,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생각하며, 그리며 그 목소리는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님의 목소리가 전파에 실리기 사작하던 1964년! 그때는 라디오 전성시대였습니다. 남녀 노소, 도시 농어촌 할것 없이 라디오에 귀 기울였습니다. 1970년대! TV시대가 열렸어도 님의 목소리를 들어 오시던분들은 여전히 라디오에 귀 기울이십니다. FM방송이 본격화 되면서 음악에 실린 님의 목 소리는 많았습니다.
지난 세월 KBS-FM, 김세원의 가정음악, 노래의 날개 위에, 저녁의 클래식, 당신의 밤과 음악, MBC-FM, FM 가정음악실 또 CD를 쉽게 제작 할 수 있고 인터냇에 쉽게 접 할 수 있게 되면서 님의 목소리는 CD에 실려, 또 인터냇 선을 따라 가정으로, 직장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님의 목소리에 접해 왔습니다.
님은 말합니다. 대한민국 방송에서 내 목소리가 안 나간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제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파트에 사시는 김세원을 아시느냐고. 잘 모르는 듯 해서 또 물었습니다.
성우 김세원을 아느냐고. 성우 김세원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고 합니다.
님이 곁에 서 계셔도.... 그 얼굴은 모르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또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어도.....아니 그 얼굴을 보았어도 그 분이 그 분인것을 몰르지만 님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나 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한 분! 긴 세월 하루에도 이곳 저곳에서 방송 전파를 타던 그 목소리! 뭇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던 그 주인공 왜? 필자는 님의 성함에 동아방송, 밤의 플랫폼을 붙였을까요. 님의 다음 글을 읽어 보셔요.
밤의 플랫폼 그 당시 동아 방송을 들어야 지성인축에 끼는 듯 한 기분일 때 다시 말해 동아 방송의 청취율이 최고일 때 그 방송 무드에 얹혀 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화로, 편지로, 방문으로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귀찮게 만들었다. 어느 맵게 춥던 날 나는 보통 때처럼 “밤의 플랫폼” 녹음을 위해 제작 2부에 들어갔다. 누군가가 “김세원씨 살맛나겠어요. 했다. 얘기인즉 방금 전에 28살 된 청년이 나와 결혼 하겠다고 찬아 왔었단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고 하자 한참 말이 없더니 그럴 리가 없다면서 내일 와서 본인을 만나보겠다고 돌아갔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살맛이 아니라 죽을 맛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한참을 동아방송 뒷문으로 해서 비상구로 다녀야 했으니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사랑, 아픔, 그리움, 이별, 만남, 아름다움. 기다림, 또 사랑 이런 낱말들을 허공에 날리는 동안 난 20대에서 30대에 서 있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10년간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김세원님이 동아 방송사에 남긴 글입니다.
밤의 플랫폼은 1970년 10월 5일 편성표에 그 이름을 올랐다가 1980년 4월 편성표에서 사라졌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정겨운 목소리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머물게 하던 밤의 플랫폼은 김세원님이 1970년 TBC 전속에서 풀리고 동아방송에서 방송을 할 수있게 되면서 생겼다가 1980년 미국으로 떠나면서 사라진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원님은 1964년 RSB 라디오 서울 (TBC전신)이 새로 발족하면서 성우를 모집할 때 성우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년 가까운 세월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 그 목소리에 마음을 멈추게 해 주셨습니다.
김세원님의 또 다른 글입니다.
63년 나는 한국 외국어대 불어과에 입학했다. 바로 방송 반에 들어가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어쩐지 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해본 일이었는데 그 예감은 적중했다. 과 행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교내 “불 문화의 밤”에 나가, 시도 낭송하고 “구노의 아배 마리아”를 피아노로 연주해서 남학생들로부터 휘파람도 받았다. 새내기 시절은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낭만도 잠깐, 2학년 되던 해에 나는 TBC의 전신인 RSB에 성우 1기로 합사하게 된다. 재미삼아 우연히 치른 시험이었는데 덜컥 합격되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학교와 방송국을 오가는 바쁜 시간이 계속되었다. 택시 빨리 잡는 법을 터득하며 길가에 돈을 뿌리고 다닌 것도 이때부터다. 방송 초창기 생활은 시큰둥했다. 성우로 들어갔으니 목소리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당시는 사극이 엄청난 유행을 타고 있었다. 왕비 역은 엄두도 못내고 시녀 역으로 “네, 마마”하는 연기가 고작, 그런데 그 “네” 소리도 제대로 못 내 쩔쩔 맺다. 일지감치 발 들여놓은 사회 눈앞엔 경쟁이 보이는데 실력발휘는 안되고 자존심만 상해갔다. 그래도 나는 낙천적이었다. “애라 안 되면 학교로 다시 가지 뭐”..........
그렇게 시작된 성우생활은 일생동안 바쁘시기만 합니다. 대한민국 방송에서 오랜 기간 님의 방송이 안 나간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합니다. YTN시청자 위원회 위원장, EBS이사장을 역임하신 님은 KBS-TV 1기 PD이자 미국 유학을 다녀오셔서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등에서 많은 언론인을 길러냈고 스카이라이프 사장을 지내신 강현두님과 삶을 같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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