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재직하던 국제방송국 대공과에서 문을 열면 문예계였다. 사무실문을 열고 일을 하던 그 시절에는 오가며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였다. 남산에 있던 중앙방송국시절에는 편성과와 방송과 기술과, 서무과가 있었다. 또 편성과에는 편성계, 문예계, 연출계가 있었고, 방송과에는 아나운서실과 보도실이 속해 있었다. 필자가 1963년 국제방송국 대공과에서 일을 시작 했을 때 대한민국 내노라 하는 작가, 연출가, 성우들이 드나들던 문예계에는 원용철, 윤혁민, 이기명, 유신박 그리고 한, 두 분 더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작가 윤혁민, 팔도강산
문예계에서는 드라마와 그밖에 문예물의 방송을 맡았다. 유신박은 계장이고 원용철은 PD, 윤혁민, 이기명은 전속작가였다. 말이 전속작가이지 맡은 일은 PD와 같고 직원들과 같은 일을 했다. 프로그램은 기획, 취재, 편집, 구성, 원고작성, 녹음을 거쳐 진행자 에게 인계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손수 임했다. 지금 PD와 비교 하면 엄청나게 많은 업무량이었다. 그 시절 윤혁민 작가가 맡은 프로그램은 “양지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드라마였고 그밖에 스퍼트나 다른 일도 함께 한 것으로 기억한다. 라디오 시대에 그 프로그램은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1973년 KBS가 공사로 바뀌면서 서로 하는일이 달라져 오랜 세월 만남이 드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때의 유신박은 방송 간부로 계속 활약했고, 원용철은 관료로 남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을 알리는 홍보외교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이기명은 이나라 대통령이 된 정치인의 수족이 되어 한때 대한민국의 정계를 주름잡는 거물 정치인으로 화제에 올랐다. 윤혁민은 전속에서 프리작가로 전환 방송작가로 대성했다. 그러던중 어느모임에서 원용철을 만났더니 반갑게 마지하며 필자가 쓴 “김삿갓 북한 방랑기” 글을 보았다면서 “윤혁민씨와도 그 얘기를 했다” 고 전했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는 방송사상 최장수 최다수 프로프로그램으로 방송초기 원용철 PD가 담당한적이 있다. 몇일후 윤혁민 작가가 엠파스 필자의 블로그 프로필 난에 “이런 블로그가 있는 줄 몰랐는데 반갑다”는 글을 남겼다. 이때 윤혁민 작가 지난날의 생각이 떠 올랐다.
2006년 11월 팔도강산 촬영 30주년이 더 지나 포항 포스코를 방문할때 제작진과 출연진 윤혁민을 비롯해서 김수동, 황정순, 최은희, 이향자, 민지환,최정훈, 장민호
연속드라마가 어렵던 시절 1974년 날마다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그 연속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전국을 누비며, 세계를 돌아다니며 현장을 목격하면서 쉼 없이 써 내려갔던 그 프로그램, 필자는 장편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에 관한 글을 쓰며 제목에 윤혁민을 넣었다. 윤혁민의 작품은 1960년대 벽두 라디오로 부터 시작되어 2 000년대 초까지 라디오와 TV에서 길고 긴 세월 많은 인기작을 냈고 꽃동네 새 동네 등 노래가사도 써서 불렸다. 1993년의 “백색 미로” 1998년 1월에 KBS 2TV에서 방영된 “진달래꽃 필 때까지” 2000년 10월 2일부터 2001년 2월 17일 까지 역시 KBS 2TV에서 방송된 내일은 맑음 등 아직도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있는 드라마가 윤혁민이 쓴 작품이다. 이 밖에도 빨간 선인장, 꿈꾸는 해바라기, 옛날에 이 길은 등 방송전파를 타고 또 영화로 방영된 작품들은 많다.
백색미로(위) 내일은 맑음(아래) 출연진
윤혁민 작가는 늘 필자의 마음속에 있었고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만남이 없던 차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윤혁민 작가의 블로그를 찾았다. 11월 4일 어느 분인가, 가 “라디오 드라마 양지를 찾아서”로 “춘하추동방송” 에 들어 오신 분이 있었다. 그 검색어 따라 가 보았더니 “춘하추동방송”에 올라 있는 글 제목과 함께 「드라마 반세기-방송국 청소부도 부러웠는데」, 「드라마 반세기-위나 아래나 어쩌면 그리 똑같냐?」 두편의 글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그 글이 바로 윤혁민 작가의 글이고 블로그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글을 읽는데 윤혁민 작가가 스스로 쓴 생생한 체험담 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1974년 4월 14일부터 다음해 10월 5일까지 밤 9시 40분부터 10시까지1년 6개월에 걸쳐 398회가 방송되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 자긍심을 갖게 해주던 프로그램 꽃피는 팔도강산을 위해 프로듀서 김수동 작가 윤혁민은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를 돌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한대밖에 없던 중계방송 녹화차가 자주 배정되었다. 스탶과 출연진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 이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윤혁민님 블로그 이름이 「첫날 이야기」다, 이야기 첫날 "살날이 얼마 남았냐고 묻질 마세요. 오늘은 내 여생의 첫날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멀마나 의미 깊은 말인가? 오늘이 여생의 첫날! 글을 더 보시려면 윤혁민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 해 보셔요. 아울러 원용철님이 최근에 보내 주신 글 한편을 인용합니다.
이장춘 춘하추동님,
보내주시는 방송계 소식 반갑게 보고 있읍니다. 늘 반갑고 고맙게 생각 하면서도 인사를 못 드렸읍니다. 특히 오늘 본 사진에서는 옛날 얼굴들을 많이 보여 주셔서 더욱 고마웠읍 니다. 1961년 8월 부터 69년까지 살던 남산집이 내 고향이고 향수 입니다. 그리운 시절 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라도 한번
뵐수 있길 바랍니다.
원용철 드림
2014년 7월 1일자 KBS 사우회보
이재봉 아나운서 인터뷰
만나고 싶었습니다.
1974년, 지금으로 부터 꼭 40년 전에 전국적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KBS일일연속극 <꽃 피는 八道江山>을 反芻해 본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黑白에 다소 어설픈 세트와 분장, 연기력, 유치한 시츄에이션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당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흩어진 민심을 한데 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방송시간이 되면 市中에는 차량과 人波가 뜸해지고 酒黨들도 귀가를 서둘렀다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사우회우는 아니지만 드라마 작가로, 연출가로 KBS와 는 인연이 많은 윤혁민 작가를 만났다. (인터뷰·정리 : 이재봉 편집위원)
가난 탈피의 새마을 운동에서 경제대국으로 변 모되기까지, 江山이 수 없이 바뀌어 버린 지난 40 년. 流水처럼 빠른 歲月도 아쉽지만 한 時代를 풍 미했던 인기작가가 홀연이 우리 곁을 떠난 후의 사 연이 궁금해, 추적(?) 끝에 윤 작가를 충청도 천안 의 어느 산골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우네 장터에서 동쪽으로 20여 里, 좁은 외길 을 가다보면 태백산맥의 끝자락 夢覺山을 마주하게 되고 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夢覺山房'이 윤 작 가의 작업실이다)
안녕하십니까? 뵙게 돼서 반 갑습니다. 먼길까지 오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수-인사에서 느낀 첫 인 상은 重厚하고 線이 굵은…) 어찌하여 이 깊은 곳까지 오시게 되었는지요? 重病을 앓으시던 母親께서 10남매의 장남인 저 와 단 하루라도 이 곳에서 같이 살기를 바랬는데, 그 뜻을 받들지 못했어요. '不孝 父母 死後悔' 란 말처럼 후회가 밀려 오더군요. 그래서 바로 이 곳 으로 오게 되었지요. 벌써 17년째 입니다. 가구가 단촐해 보이는데 家族은 어디에? 男妹 출가시키고 제 妻는 경기도 안산에서 따로 살고 있습니다.
妻의 몸이 불편해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病 수발을 겸해 본가에 다녀옵니다. 병 치레하는 식구를 남겨둔 채 글 만 쓰느냐며 힐 난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혼자 놔 둠으로써 自立 의 의지를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요즘도 글은 계속 쓰시나요?
글 쟁이가 할게 뭐 있겠어요. 이 곳에서 몇 제자를 키우고 옛 知人들이 찾아주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작품을 구상하고 습작도 해 보고, TV 드라마를 보며 나름대로 요즘 트렌드를 느끼기도 한답니다.
구상중인 작품이 있다면…?
史劇인데, 고려가 원나라의 핍박을 견뎌 내는데 있어 큰 功을 세운 '人物외교 드라마' 한편을 생각 하고 있고, 우리나라 원불교 開敎 100주년을 앞두고 창시자인 박중빈 大宗師의 일대기를 한번 다뤄 볼까 하고 있습니다.
꽤 흥미롭고 가치있는 소재가 될 것 같습니다. <꽃 피는 八道江山>의 콘셉트와 비교하면 상당한 궤 도 수정처럼 들리는 군요?
작가가 다루지 못할 素材가 뭐 따로 있겠습니 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連載 다큐물을 6개월 동안 서울신문에 기고 한 전력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꽃 핀 한국도자기>라는 제목으로… 요즘 표현으로 '국민작가'라고 불러도 좋을 듯한데, 지금까지 쓰신 작품을 대략 기억하고 계시나요?
드라마 제목으로만 보면 150여 편인데 <즐거운 우리 집-KBS>, <아차부인 재치부인-동아방송>, <갈대의 노래-MBC> 등 시트콤까지 포함하면 대 략 2000여 편이 될 것 같습니다. 知人의 요청으로 노랫말 작사도 몇곡 했는데 '꽃 동네 새 동네', '빨 간 선인장', '파초의 꿈' 등이 제 작품입니다. 요즘 저작권 料가 나와 후배들과 목을 축이는데 다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픔은?
1년 6개월 동안 398회를 이끌어 온 <꽃 피는 八道江山>이 아닐까 싶습니다. 最長壽라는 기록외 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해외 로케, 김희갑, 황정 순, 최은희, 장민호, 박노식, 태현실, 한혜숙 등 초 호화 출연진, 전국 八道를 누비며 발전상도 거부감 없이 잘 담아 국민통합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찬사 를 들었습니다.
작가에의 꿈은 어떻게 키우게 되었습니까?
소질이 좀 있었던가 봐요. 국민학교 3학년 때 교 내 백일장에서 壯元을 한 감격이 원동력이 되어 先親 친구분의 책방에서 많은 문학서적을 읽었고, 흥 미가 붙어 고교시절엔 문학써클을 이끌었으며, 대 학시절에는 비록 佳作이었지만 두편이나 문예콩클 에서 入賞하기도 했어요.
방송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 작 되었는지요?
군 복무 중인 1961년, <현충일 특집 단막극>이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내 극본을 본 KBS 윤길구 국장께서 기왕이면 현 역 사병이 쓴 특집극에 애착이 간다며 채택해 주 셨고, 제대 후 배려까지 해 주셔서 KBS에서 아르 바이트 형식으로 일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유쾌한 3형제>를 연출하던 조흔파 선생이 결근 하는 바람에 拙地에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고, 이 후 <한운사作 南과 北>, <김희창作 열두냥 짜리 인생>, <신봉승作 회전 의자> 등을 연출하며 3년 여 동안 KBS 맨으로 봉직했습니다. 참 대단한 기 회였는데 제게 運도 꽤 있었나 봐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혈압이 다소 높고 몸이 비대해 매일 아침 반신욕 과 런닝 머신을 각 30여분 씩 하고 있어 집필활동 에 별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교통사고와 뇌졸중으로 두어 차례 고생한 바 있어 우스개 소리로 '생전 葬' 과 '49齊 葬'은 이미 치뤘다며 조심 하고 있답니다.
술 때문에 빚어진 에피소드도 더러 있겠군요?
있지요. 어느 날 제 집사람이 술 친구인 한운사 선배를 뵙겠다고 해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 뒤로 내가 술 먹는 일에 별 간섭을 안 하더라구요. 궁금 했는데 얼마 뒤 의문이 풀렸죠. 한 선배를 만난 제 집사람이 대뜸 "애 아빠 술 좀 그만 먹이라"고 하더래요. 그래 한 선배가 딱 한마 디 했대요. "매어 놓은 송아지는 새 풀을 먹지 못하 는 법…"이라구요. 이 말이 아마 제 妻의 뇌리에 깊 이 각인된 모양이에요.
또 한번은 해병대 고위장교 들과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로, 취기가 오르고 입이 거칠어져 부사령관을 장교들 면전에서 갈겨 버 린 일이 있었어요. 이 일로 다소의 고충도 있었지 만 결국은 제가 드라마 <戰友> 제작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어요. 轉禍爲福이 된 셈이죠.
생활을 일구는 座右銘이랄까 철학은? 제
雅號가 '두리기'입니다. 둘러앉아 여럿이 나눠 먹는다는 의미인데, 품앗이 성격이 강합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늘 나누고 담소하고 즐기 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집 한채 덜렁 있는게 가진 재산의 전부랍니다.
지금 글을 쓰는 '夢覺山房'과 옆에 나란이 붙어있는 韓屋은 윤 작가 소유가 아닌가요?
집 한채 덜렁…이 아 닌 듯 한대요. 꽤 넓어 보이구요. 약 500여 평 됩니다. 그런데 제 제자 소유입니 다. 줄곧 저를 보살피고 살기에 걱정없이 다 뒷바 라지 해줘 제자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요즘 드라마 천국이고 韓流 드라마가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들 하는데 어찌 이해하고 계시는지?
집필에서 부터 제작, 방송에 이르기까지 여건이 많이 좋아졌고. 후배들이 참 잘 하고 있어요. 다만, 방송사가 너무 시청률에 매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연기자나 작가 모두 이 부분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고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順機能마져 저해하는 愚 를 자주 보게되지요. 公人의식을 저버린 작가나 연 기자의 지나친 상업주의도 경계했으면 합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 때는 연출가로써 호흡을 같이 한 KBS맨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호감이 가는군요. 건 강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길 기대해 볼께요. 사우회가 많이 성장했고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어 반가웠습니다.
잊혀진 인물을 찾아 먼 길, 누추한 곳까지 와 주 셔서 고맙고 이 자리를 빌어 저를 기억하는 모든분 들께도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윤혁민 씨 이재봉 편집위원 전국을 누볐던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사'의 작가 윤혁민氏
아래 사진은 2013년 12월 23일 문공회 송년회에서 촬영한 원용철님(오른쪽 두번째)입니다. 그로 부터 50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80대가 되셨군요.
이 사진에는 이종봉, 김종설, 한영섭, 성낙승, 이철호, ( ), ( ), 원용철, 서규석님등이 계십니다.
KBS인기 연속 드라마, 팔도상산,! 1974년 TV에서 일일연속극이 시작되던 그 시절 KBS가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그 프로그램을 이어가며 국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400회에 육박하는 장편드라마, 당시로서는 최장수 일일연속드라마였다. 그때의 연출가 김수동, 작가 윤혁민, 그리고 기술을 담당했던 분들 그분들이 40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 그 추억을 더듬었다.
얘기가 끝나고 사진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80 황혼길에 무슨 사진을 찍느냐고 했다. 인생은 오늘이 첫장이라고 한 윤혁민 작가의 말을 되새기며 식사가 끝난 후 그 집 앞에서 선체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김수동, 윤혁민, 주일청, 성우이자 탤런트 남일우등 드라마가 나갈땐면 들어왔던 그 이름들이다. 여자프로듀서 차욱진, 그는 오늘의 자리가 마련된 음식점 주인이다.
그저 한가족으로 생각하고 짝수달이 되면 샛째 수요일에 이 집에서 만난다. 음식점 주인이 된 차욱진은 12월 너무 바쁘고 힘들어 1월에는 쉬려고 하지만 방송국에서 오는 손님에게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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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윤혁민, 팔도강산
http://blog.daum.net/jc21th/17781919
장편 일일 연속극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윤혁민 http://blog.daum.net/jc21th/17781337
영화 팔도강산과 방송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배우 김희갑 황정순 http://blog.daum.net/jc21th/17781637
윤혁민 작가 블로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durigihan/15820882
꽃피는 팔도강산 연출 김수동님 글 보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734
방송작가, 해방공간으로부터 70년 변천사 http://blog.daum.net/jc21th/17781163
방송작가 역할과 활동 1970년대 인명록 http://blog.daum.net/jc21th/17781155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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