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년 9월 15일에 발행된 한국 아나운서 클럽회보 제 11호에 실린 글로 원로방송인 유덕훈, 김봉구 아나운서를 모시고 한국 아나운서 클럽 정영호 편집위원의 좌담으로 정리된 글입니다. 1948년에 아나운서로 입문해서 1951년 VUNC(UN군 총사령부방송)에 건너가1972년 VUNC가 막을 내릴 때까지 그 방송에서 재직하신 유덕훈 선생님은 미주방송인협회 고문이시고 KBS사우회 미주지회 원로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김봉구선생님은 HLKZ가 문을 닫으면서 새로 발족한 KBS TV 주요프로그램의 프리렌서로 일 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활동하시며 미주방송인 협회 초대회장을 지내시는 등 활동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미주방송인협회 고문이시고 KBS사우회 원로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이 두분, 지난날의 발자취는 우리 방송사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사회를 보신 정영호선생님은 KBS에 재직하시다가 미국에 가 활동하면서 미주방송인협회 회장을 지내셨고 지금은 KBS사우회 미주지회장, 아나운서 클럽 회보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춘하추동방송
재미 원로 방송인 (아나운서) 특집좌담, 유덕훈 김봉구 사회 정영호
아나운서는 타고난 운명처럼 방송을 떠나지 못 해
초대석-미주 한인방송의 원로 유덕훈, 김봉구 아나운서
(사)미주방송인협회(회장 김정수)는 1977년 위진록․유덕훈(전 KBS) 아나운서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한국 최초의 TV방송사 공채 1호 아나운서였던 김봉구(전 HLKZ-TV) 회장, 1965년 미주 최초로 한인방송을 실시한 김영우(전 MBC) 부회장 겸 총무가 주도해 창립했다. 김정태, 맹경원, 장인숙, 최운기 아나운서와 서정자 성우 등 16명의 친목단체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방송계 전반을 아우르며 한인방송의 질적 향상과 동포사회의 결속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엔 블로그
(http://blog.daum.net/kabausakorea/176)
도 개설했다. 미주 정영호 편집위원이 LA에서 한인방송의 원로인 유덕훈(87세, 이하 유), 김봉구(82세, 이하 김) 아나운서를 만나보았다.
초대석에서 미주 원로 두 분을 동시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유 : 노병을 잊지 않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 회보를 통해 전․현직 아나운서 의 소통의 장이 마련되고 방송의 주역 아나운서 들이 걸어온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두 분은 어떤 계기로 아나운서의 길을 택하게 되셨는지요?
유 : 1948년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축하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KBS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대학 연극부에서 활동한 걸 알고 있는 친구들이 한번 해 보라고 권유해 응시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응시자 중 합격한 동기생이 홍용기, 황남중, 저 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나운서가 하고 싶어 취직이 내정돼 있던 은행을 포기했지요.
김 : 저는 1956년 2월,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KORCAD(한국RCA배급회사)의 HLKZ-TV 아나운서로 입사했습니다. 종각 옆 동일빌딩에 있어 ‘종로테레비’라 불렸지요. KBS 아나운서 출신 서명석 선배가 방송과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공채를 진행했는데, 남녀 아나운서 1명씩 뽑는다고 했지만 입사해보니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그 때 연출자로 최창봉 전 MBC 사장이 함께 입사해 연출과장을 맡았고 후에 합류한 황문평, 이기하, 황재목, 이평재, 최덕수, 그리고 기술에 강진구, 카메라에 신면식, 마종훈 씨 등이 생각납니다.
HLKZ가 KBS보다 5년 앞서 TV를 시작한 셈이군요. 당시 아나운서의 목소리만 듣다가 직접 아나운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인기가 대단하셨겠습니다.
김 : 당시 TV 수상기가 400여 대였고 지금처럼 전국 방송망이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공채 1호 아나운서라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TV 방송 시작은 한국이 세계에서 15 번째, 아시아 에서 4 번째였는데, 쌀 한 가마니가 18,000 환이었던 당시 17인치 TV 한 대 값이 34만 환이었으니 참 굉장했지요. 1957년 5월 한국일보 사주인 장기영 사장이 HLKZ를 인수해 회사명을 대한방송(DBC)으로 바꾸었는데 안타깝게도 1959년 2월 화재로 방송기자재 등이 모두 불에 타 중단되었고, 그 후 주한미군TV(AFKN)를 통해 매일 저녁 30분간 방송을 내보내다가 1961년 10월 문을 닫을 때까지 고락을 함께했습니다. 격동과 시련, 수난의 시대를 살아 온 50년대 아나운서들의 초년시절은 유독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유 : 기대와 자부심을 가지고 첫 출근을 했는데, 그 날부터 6개월간 소리 내어 신문만 읽으라고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아나운서가 됐으니 방송에서 제 목소리가 나올 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어찌 된 거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6개월이 지나니까 동보연락(기간방송에서 지역 총국과 연락하는 비상용 직통 전화선)을 맡으라고 했고, 그 후 콜 사인(방송 전후에 그 방송국을 명시하는 전파 호출부호)과 9시 뉴스 끝나고 하는 일기예보를 맡겼습니다. 아나운서가 됐다고 자랑했는데 1년이 지나도록 낮 시간에 제 방송을 들은 친구가 없었습니다. 요즘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참 부럽습니다.
김 : 제 경우는 입사하자마자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뉴스, 인터뷰, 취재는 기본이고 일반 프로그램의 멘트나 사회 등 1인 2, 3역을 했습니다. 유: 초년병 시절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정오 뉴스, 민요, 가곡 등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특히 1950년 4월 12일 숙직 근무 중 ‘제54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우리 한국 선수가 1, 2, 3위를 휩쓸었다’는 뉴스를 전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죠. 미처 피난을 못 가 서울에서 3개월간 숨어 살았습니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유덕훈을 발견하면 사살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전 수복됐을 때 평양에서 방송하다가 1.4 후퇴 때 KBS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대구와 부산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때 공산당의 회유에 속아 전인국, 윤용로 선배가 남산 방송국에 나갔는데, 납북되어 소식이 없습니다.
미국에 오시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유 : 6.25로 인해 도쿄 NHK 건물에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Voice of Unite Nation Command)이 시작되었는데요. 방송과장이던 민재호 아나운서가 VUNC 파견 근무 후 1951년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 우리말 방송으로 옮기게 돼 9월에 제가 그 후임자로 가게 된 것이 미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습니다. 1958년 VUNC가 오키나와 이전 시 저도 그쪽으로 갔다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김 : 저는 1962년부터 KBS에서 프리랜서로 ‘TV 그랜드 쇼’, ‘가요 퍼레이드’, ‘홈런 퀴즈’ 등을 진행하다가 1967년 TV 연출을 공부하러 미국에 와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미국에 오신 후에도 계속 방송과 인연을 맺고 사셨죠? 유: 저는 1948년부터 1951년까지 KBS 아나운서로 3년간 근무했고 1951년부터 1972년까지 21년간 미국 방송국의 한국어 아나운서로 근무했습니다. 24년을 아나운서 생활을 한 셈이죠. 미국에 와서는 한인교회 장로 직을 맡아 시각장애인과 글을 읽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우리말로 읽어 3년 만에 통독하고 카세트테이프 200세트를 만들어 선교용으로 보급했습니다. 목소리로 살아 온 아나운서로서 제가 가진 재능을 살려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김 : 저도 미국에서도 줄곧 방송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978년에 KBC방송 초대 방송국장을 지내기도 했고 1984년까지 한인방송 뉴스 캐스터로 활동했습니다. 아나운서는 스스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사는 직업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아나운서들이 바른말 고운 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지킴이’ 같은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아나운서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2005년에 6개월간 LA의 KAN TV를 통해 ‘우리말 고운 말’ 프로그램을 맡아 방송한 일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DVD로 녹화해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우리말 방송사와 중남미 파나마까지 제공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평생 방송을 떠나지 않고 사셨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유 : 아나운서였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는 방송을 떠나지 못 합니다. 타고난 운명처럼 말입니다. 김: 아나운서였다가 다른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나운서였다는 것이 가장 자부심을 갖게 하고 그런 자부심이 자신을 영원한 아나운서로 남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나운서클럽이나 후배 아나운서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유 : 아나운서클럽회보는 ‘아나운서의 광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광장을 통해 국내외에 있는 전․현직 아나운서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아나운서들의 활동상과 시대상이 다음 세대에게 전수되어 귀한 참고가 되도록 힘써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후배들에게는 아나운서다운 아나운서가 돼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아나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의 프로그램을 찾아서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조직 내에서는 서로 경쟁자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잘하려면 책도 많이 읽고 경험도 많이 쌓기 바랍니다.
김 : 지금 방송은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는데 그만큼 아나운서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넓어졌다고 봅니다. 떠나고 나서도 후회가 없도록 현직에 있을 때 열심히 아나운서 생활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퇴직 후 삶이 길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놓는 것도 필요합니다.
김 선배님은 한국민족서예대전에서 두 차례 특선을 차지한 서예가로서 제2의 인생도 멋지게 꾸려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두 선배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선․후배 아나운서 간에 격의 없는 대화와 유대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빕니다.
대담 정리 / 미주에서 정영호(전 KBS) 편집위원
유덕훈선생님 글을 연결합니다.
6.25격변기 KBS와 VUNC에서 활약한 유덕훈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683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인생의 어느 싯점과 계기로 아나운서가 되고 여정을 따라 각기 살고있는 곳에서 열심히 노장으로서 직분을 다 하시는 분들이셔서후배들이 바라볼 곳이 되시는 분들이시군요.
1957년 VUNC에서 유덕훈 아나운서와 함께 근무하시던 분들입니다. 위진록, 최규원, 김종흡, 김영수, 황진남, 김유선, 장상문, 김주용,그리고 한국어과장이 함께 한 김유선 송별회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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