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방송인협회

재미 원로 방송인 특집좌담, 유덕훈 김봉구 사회 정영호

이장춘 2013. 12. 18. 11:41

 

 

 

이 글은 2013년 9월 15일에 발행된

한국 아나운서 클럽회보 제 11호에 실린 글로

원로방송인 유덕훈, 김봉구 아나운서를 모시고 한국

 아나운서 클럽 정영호 편집위원의 좌담으로 정리된 글입니다.

1948년에 아나운서로 입문해서 1951년 VUNC(UN군 총사령부방송)에

 건너가1972년 VUNC가 막을 내릴 때까지   그 방송에서 재직하신 유덕훈

 선생님은 미주방송인협회 고문이시고 KBS사우회 미주지회 원로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김봉구선생님은 HLKZ가 문을 닫으면서 

새로 발족한 KBS TV  주요프로그램의 프리렌서로 일 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활동하시며 미주방송인 협회 초대회장을 지내시는 등 활동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미주방송인협회 고문이시고 KBS사우회 원로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이 두분, 지난날의 발자취는 우리 방송사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사회를 보신 정영호선생님은 KBS에 재직하시다가 미국에 가

 활동하면서 미주방송인협회 회장을 지내셨고 지금은

 KBS사우회 미주지회장, 아나운서 클럽 회보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춘하추동방송

 

 

재미 원로 방송인 (아나운서) 특집좌담, 유덕훈 김봉구 사회 정영호

 

 

 

아나운서는 타고난 운명처럼 방송을 떠나지 못 해

 

초대석-미주 한인방송의 원로 유덕훈, 김봉구 아나운서

 

 

  •  

    유덕훈 KBS 1948년 입사

  • 6개월간 소리 내어 신문만 읽다가 콜사인 투입
  • 1950년 숙직 때 제54회 보스톤마라톤대회 출전 한국선수
  • 함기용‧송길윤‧최윤칠 1‧2‧3위 석권했다는 뉴스 전해
  • 1951년 유엔군총사령부방송 VUNC 아나운서로 21년간 근무
  •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때 이국으로 이민

 

  • 김봉구 HLKZ TV 1956년 입사

  • 최초의 TV방송 첫 공채 아나운서로 시작부터 1인 3역
  • 텔레비전 방송 세계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로 시작
  • 1967년 TV 연출 공부하러 미국 유학 가면서 정착
  • 미주방송인협회 초대 회장 지내고 한인방송 사회자로 활약
  • 지금은 서예가로 제2의 인생 꽃피워

 

(사)미주방송인협회(회장 김정수)는

1977년 위진록․유덕훈(전 KBS) 아나운서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한국 최초의 TV방송사 공채 1호

아나운서였던 김봉구(전 HLKZ-TV) 회장, 1965년 미주

최초로 한인방송을 실시한 김영우(전 MBC) 부회장 겸 총무가

 주도해 창립했다. 김정태, 맹경원, 장인숙, 최운기 아나운서와

 서정자 성우 등 16명의 친목단체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방송계

 전반을 아우르며 한인방송의 질적 향상과 동포사회의

결속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엔 블로그

 

(http://blog.daum.net/kabausakorea/176)

 

도 개설했다. 미주 정영호 편집위원이

 LA에서 한인방송의 원로인 유덕훈(87세, 이하 유),

김봉구(82세, 이하 김) 아나운서를 만나보았다.

 

 

 

 초대석에서 미주 원로 두 분을 동시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유 : 노병을 잊지 않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 회보를 통해 전․현직 아나운서

소통의 장이 마련되고 방송의 주역 아나운서

들이 걸어온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는

같아 기쁩니다.

 

두 분은 어떤 계기로 아나운서의 길을 택하게 되셨는지요?

 

유 : 1948년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축하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KBS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대학

연극부에서 활동한 걸 알고 있는 친구들이 한번 해 보라고 권유해

응시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응시자 중 합격한 동기생이 홍용기,

황남중, 저 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나운서가 하고 싶어

취직이 내정돼 있던 은행을 포기했지요.

 

 

 

 

김 : 저는 1956년 2월,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KORCAD(한국RCA배급회사)의 HLKZ-TV 아나운서로

입사했습니다. 종각 옆 동일빌딩에 있어 ‘종로테레비’라 불렸지요.

 KBS 아나운서 출신 서명석 선배가 방송과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공채를

 진행했는데, 남녀 아나운서 1명씩 뽑는다고 했지만 입사해보니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그 때 연출자로 최창봉 전 MBC 사장이 함께 입사해

연출과장을 맡았고 후에 합류한 황문평, 이기하, 황재목, 이평재,

최덕수, 그리고 기술에 강진구, 카메라에 신면식,

마종훈 씨 등이 생각납니다.

  

HLKZ가 KBS보다 5년 앞서

TV를 시작한 셈이군요. 당시 아나운서의

 목소리만 듣다가 직접 아나운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인기가 대단하셨겠습니다.

 

 

 

 

김 : 당시 TV 수상기가 400여 대였고

지금처럼 전국 방송망이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공채 1호 아나운서라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TV 방송 시작은 한국이 세계에서 15 번째, 아시아

에서 4 번째였는데, 쌀 한 가마니가 18,000 환이었던 당시 17인치

TV 한 대 값이 34만 환이었으니 참 굉장했지요. 1957년 5월 한국일보

사주인 장기영 사장이 HLKZ를 인수해 회사명을 대한방송(DBC)으로

바꾸었는데 안타깝게도 1959년 2월 화재로 방송기자재 등이 모두 불에

 타 중단되었고, 그 후 주한미군TV(AFKN)를 통해 매일 저녁 30분간

 방송을 내보내다가 1961년 10월 문을 닫을 때까지 고락을

함께했습니다.  격동과 시련, 수난의 시대를 살아 온

 50년대 아나운서들의 초년시절은 유독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유 : 기대와 자부심을 가지고 첫 출근을

 했는데, 그 날부터 6개월간 소리 내어 신문만

읽으라고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아나운서가 됐으니

 방송에서 제 목소리가 나올 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어찌 된 거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6개월이 지나니까

동보연락(기간방송에서 지역 총국과 연락하는 비상용 직통 전화선)을

 맡으라고 했고, 그 후 콜 사인(방송 전후에 그 방송국을 명시하는 전파

호출부호)과 9시 뉴스 끝나고 하는 일기예보를 맡겼습니다. 아나운서가

됐다고 자랑했는데 1년이 지나도록 낮 시간에 제 방송을 들은

친구가 없었습니다. 요즘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참 부럽습니다.

 

김 : 제 경우는 입사하자마자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뉴스, 인터뷰, 취재는 기본이고 일반 프로그램의 멘트나

 사회 등 1인 2, 3역을 했습니다. 유: 초년병 시절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정오 뉴스, 민요, 가곡 등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특히 1950년 4월 12일 숙직

근무 중 ‘제54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우리 한국 선수가

1, 2, 3위를 휩쓸었다’는 뉴스를 전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죠. 미처 피난을 못 가 서울에서 3개월간 숨어 살았습니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유덕훈을 발견하면 사살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전 수복됐을 때

 평양에서 방송하다가 1.4 후퇴 때 KBS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대구와 부산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때 공산당의 회유에 속아 전인국, 윤용로 선배가

남산 방송국에 나갔는데, 납북되어 소식이 없습니다.

 

미국에 오시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유 : 6.25로 인해 도쿄 NHK 건물에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Voice of Unite Nation

 Command)이 시작되었는데요. 방송과장이던 민재호 아나운서가

VUNC 파견 근무 후 1951년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 우리말

방송으로 옮기게 돼 9월에 제가 그 후임자로 가게 된 것이 미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습니다. 1958년 VUNC가 오키나와 이전 시 저도

그쪽으로 갔다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김 : 저는 1962년부터 KBS에서 프리랜서로

 ‘TV 그랜드 쇼’, ‘가요 퍼레이드’, ‘홈런 퀴즈’ 등을

진행하다가 1967년 TV 연출을 공부하러 미국에 와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미국에 오신 후에도

계속 방송과 인연을 맺고 사셨죠? 유: 저는 1948년부터 1951년까지 KBS

아나운서로 3년간 근무했고 1951년부터 1972년까지 21년간 미국 방송국의

 한국어 아나운서로 근무했습니다. 24년을 아나운서 생활을 한 셈이죠. 미국에

 와서는 한인교회 장로 직을 맡아 시각장애인과 글을 읽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우리말로 읽어 3년 만에 통독하고

카세트테이프 200세트를 만들어 선교용으로 보급했습니다.

목소리로 살아 온 아나운서로서 제가 가진 재능을 

살려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김 : 저도 미국에서도 줄곧 방송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978년에 KBC방송 초대

방송국장을 지내기도 했고 1984년까지 한인방송 뉴스

캐스터로 활동했습니다. 아나운서는 스스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사는

직업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아나운서들이 바른말 고운 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지킴이’ 같은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아나운서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2005년에 6개월간 LA의 KAN TV를

통해 ‘우리말 고운 말’ 프로그램을 맡아 방송한 일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DVD로 녹화해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우리말

 방송사와 중남미 파나마까지 제공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평생 방송을 떠나지 않고

 사셨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유 : 아나운서였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는 방송을 떠나지 못 합니다.

타고난 운명처럼 말입니다. 김: 아나운서였다가

다른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나운서였다는 것이 가장

자부심을 갖게 하고 그런 자부심이 자신을 영원한

 아나운서로 남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나운서클럽이나 후배 아나운서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유 : 아나운서클럽회보는

 ‘아나운서의 광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광장을 통해 국내외에 있는 전․현직 아나운서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아나운서들의 활동상과 시대상이 다음

세대에게 전수되어 귀한 참고가 되도록 힘써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후배들에게는 아나운서다운 아나운서가 돼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아나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의 프로그램을 찾아서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조직 내에서는 서로 경쟁자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잘하려면

책도 많이 읽고 경험도 많이 쌓기 바랍니다.

 

김 : 지금 방송은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는데

그만큼 아나운서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넓어졌다고

 봅니다. 떠나고 나서도 후회가 없도록 현직에 있을 때 열심히

 아나운서 생활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퇴직 후 삶이

 길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놓는 것도 필요합니다.

 

김 선배님은 한국민족서예대전에서

두 차례 특선을 차지한 서예가로서 제2의

인생도 멋지게 꾸려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두

 선배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선․후배 아나운서

 간에 격의 없는 대화와 유대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빕니다.

 

대담 정리 / 미주에서 정영호(전 KBS) 편집위원

 

 

유덕훈선생님 글을 연결합니다.

 

6.25격변기 KBS와 VUNC에서 활약한 유덕훈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683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인생의 어느 싯점과 계기로 아나운서가 되고
평생 그 운명과 사명에 충실한 현역으로 계셨고 인생

여정을 따라 각기 살고있는 곳에서 열심히 노장으로서 직분을

다 하시는 분들이셔서후배들이 바라볼 곳이 되시는 분들이시군요.
시각 장애인과 글을 읽는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분들을 위해
신구약 성서를 우리말로 3년에 걸쳐 통독하셨다는
유덕훈 아나운서님의 이야기는 감명입니다.

 

 

 

 1957년 VUNC에서 유덕훈 아나운서와 함께 근무하시던 분들입니다.

위진록, 최규원, 김종흡, 김영수, 황진남, 김유선, 장상문, 김주용,그리고

한국어과장이 함께 한 김유선 송별회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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