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은 대한 언론인회 부회장이자 KBS사우회 회원이기도 한 이병대님이 쓴 글로 6.25전쟁시 평양을 탈환한 1사단장 백선엽장군과 정훈장교 노영서의 생생한 채험담을 담은 기록입니다. 그때 그 상황 속에서 종군기자 이혜복기자의 활동상과 인간상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으로 또 6.25 핵심적인 비사를 담은 역사물로 큰 감동을 주어 글이 다소 길지먼 전문을 올렸습니다. 1965년 동아방송 기자로 입사해서 오랜세월 동아방송과 KBS에서 활약했던 이병대기자는 KBS재직중 필자와 친분을 이어왔고 1991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 고위과정을 1년간 함께 했으며 KBS를 한날 한시에 퇴직한 인연 등으로 이 원고를 특별히 제공 해 주셨습니다. 아래 영문자를 클릭 하시면 이병대님의 이혜복선생님 추모글이 있습니다.
종군기자, 사회부장으로 빛나던 이혜복 선배를 추모하며/이병대 http://blog.daum.net/jc21th/17781888
종군기자 이혜복, 6.25 전쟁 샌생한 취재기록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면서 이룩한 인간 승리의 기록들을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여러 전쟁에서 수많이 목격한다. 특히 민족상잔의 6.25 전쟁에서의 영웅이 어찌 군(軍)에만 있었겠는가.이미 60여 년 하고도 몇 년 더 지났건만 6.25 전쟁 때의 인간 승리 사례들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아픈 기억속에서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 중 한 분이 언론계의 이혜복(李蕙馥) 선배 기자다. 이혜복 선배는 6.25 전쟁을 27세 나던 해 경향 신문 사회부 기자때 맞는다. 그날 동두천 군부대 취재에 나선다. 지휘관의 ‘걱정 없다’는 말을 보도하면서 ‘이 기회를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된다’는 글까지 뒤에 달았으나 그 기사는 군 지휘관의 잘못된 전황 설명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옮긴 보도 였었다. 그러나 그날 이혜복 선배는 동두천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창 밖에서 계속 들려오는 포성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하루였다.
그뒤 북한의 남침 4개월 조금 안 된 그해 10월 19일 육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평양을 탈환했다. 이혜복 선배는 역사적 평양 탈환 기사를 우리나라 종군기자 가운데 처음으로 경향신문에 특종한다. 당시 주요 전황기사는 작전권을 가진 미군에 종군한 세계 각국 통신사 기자들이 타전한 기사를 우리 신문들이 번역해 전재하던 때이다. 그러한 시기 우리 국군이 성공한 평양 탈환 작전을 우리 종군기자가 우리 신문에 특종한 사실은 우리나라 종군기자 사상 새로운 기원이다.
그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물론 이혜복 선배도 취재에 나선다. 당시 전화가 안되던 시대여서 조인식장인 판문점에서 취재를 한 뒤 직접 서울 회사에 돌아와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이혜복 선배는 휴전조인이 끝나자 태워주지 않으려는 다른회사 지프차 뒤 스페어 타이어에 매달려 죽기살기로 가다가 중간에서 강제로 하차 당하여 문산까지 다시 뛰어 회사 지프차를 타고 마감시간을 맞춘 이야기는 이제 언론계의 전설이 되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6.25 전쟁은 이혜복 선배의 기사로 시작하여 기사로 종결된 전쟁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혜복 선배의 6.25 종군 활동상은 당시 목숨을 걸고 함께 전장을 누빈 군 관계자들이 목격을 했거니와 증인이기도 하다. 당시 동고동락했던 이혜복 선배의 종군 때의 활동상을 취재하기 위해 군 관계자들을 릴레이로 만났다. 먼저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전 육군참모 총장, 한국 최초 4성 장군) 장군을 만나러 나섰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평양을 탈환 한 육군 1사단장이었고 이혜복 선배는 평양 탈환 기사를 특종 보도한 종군기자이다. 6.25 전쟁 발발 62주년이 나흘 지난 6월 29일 오전 백선엽 장군을 전쟁기념관 4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이병대: 6.25 전쟁에서 백선엽 장군께서 지휘한 육군 1사단의 평양 탈환은 전쟁사(史)적으로 매우 의미가 큽니다. 다른 한편 이혜복 선배의 평양 탈환 특종 보도 또한 언론사(史)에서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6.25 당시의 신문을 보면 중요기사는 모두 외국 통신기사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중 하이라이트인 평양 탈환 보도는 이혜복 선배가 특종 했습니다. 백선엽 장군께서 평양 입성때 이혜복 선배가 동행 취재해 단독 보도 했습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말씀해 주시죠.
■ 백선엽 장군: 그때를 회상하면 감개 무량합니다. 우리 1사단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나서 평양 외곽 30km 지점인 중화(中和)군 상원(祥原)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을 무렵이었어요. 드디어 내고향 평양을 탈환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고 여러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했어요. 그 가운데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국민들에게 평양 탈환 사실을 직접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군은 그때만 해도 기자들을 챙길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의 전황을 자세하게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했어요. 워낙 전장의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보니까 적극적으로 기자들을 챙기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러나 평양 탈환은 우리 기자들과 함께 들어가서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지시를 했지요. ‘빨리 서울 가서 종군기자들을 모셔오라’ 고. 아마 지시한 날짜가 10월 15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1사단 정훈부장 등이 서울에 직접 달려가 이혜복 기자 등을 지프차에 모시고 와 19일 평양에 입성할 때 함께 갈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병대님
- 백장군께서 평양 탈환과 관련하여 많은 일화들이 있던데 좀 소개해 주시죠. 특히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이 평양 선교리에 먼저 도착하는 사단을 우승 사단으로 하기로 하고 경쟁을 했다면서요?
■ 백선엽 장군: 우리 1사단이 18일 오후 평양 외곽 15km 지점인 지동리(智洞里) 가까이 진출했어요. 우리 1사단은 그날 밤 공격을 개시해 제12연대 (김점곤 대령)는 미 6전차대대와 함께 대동교(大同橋)로 향하고 11연대(김동빈 대령)는 미림 비행장과 평양 비행장을 거쳐 능라도 상류 주암산(注岩山) 쪽으로 대동강을 넘는 한편 15연대(조재미 중령)는 평양 뒤를 공격하도록 했어요. 이 공격 루트는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평양을 칠 때 사용한 공격로인데 제가 검토해보니 가장 좋은 공격루트에요. 적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새벽이 되자 모두 달아나 버렸지요. 그러던 사이 윤혁표 통신부장(소령)이 적의 통신선을 발견하여 전화기를 연결했어요. 윤소령은 경남 하동 출신이어서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 자기가 말을 하면 인민군이 아니라는게 들킬 것 같다면서 평양 출신인 나에게 전화를 바꿔 주길래 ‘누구냐’고 물으니 ‘통신국 장교’라고 해서 ‘김일성이 어디 있냐’고 재차 물으니 ‘달아난지 사흘 됐다’고 하더군요.
곤궁한 적의 사정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어요. 우리 사단은 4개 포병대대 100여 문의 포와 박격포 그리고 전차 60여 대의 지원 아래 횡대로 줄을 서 평양을 향해 보무도 당당히 진격해 들어갔지요. 그런데 도로에 수많은 지뢰가 묻혀 있었어요. 포로들이 앞장 서 지뢰를 제거했어요. 대동교로 통하는 동(東)평양을 진입할 무렵 석주암 참모장의 지프차가 갑자기 지뢰가 폭발해 뒤집히는 사고가 났어요. 석대령은 모두가 가슴 설레는 평양 입성 서두르는 가운데 다리를 다치는 불운을 겪었지요. 석주암 참모장의 지프차가 지뢰 피해를 입었을 때 이혜복 기자가 탄 지프차는 바로 그 뒤에 있었어요. 사단장인 제 차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석주암 대령 지프차와 참모들이 탑승한 지프차 그리고 그 다음에 이혜복 기자가 탄 지프차가 따랐지요.
이혜복 기자는 앞 지프차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그 뒤 우리는 지뢰의 악몽과 적 저격병을 피하면서 긴장 속에 평양 시내를 다녔지요. 백장군이 설명하면서 그린 평양 진격 작전도 모두가 흥분한 가운데 이날 낮 11시 경 우리 1사단이 먼저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타리에 도착했어요. 이때 적군이 대동교를 폭파하는 겁니다. 40분 뒤 미 제1기병사단 병력이 선교리에 도착했고 뒤따라 ‘밀번’ 미 제1군단장과 미 ‘트루만’ 대통령 특사 ‘로우’ 소장 그리고 미 제1기병 사단장 ‘게이’ 소장이 도착했어요.
저는 40분 가까이 긴 시간으로 느꼈으나 공식적으로 15분 뒤 도착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이’ 소장은 2차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의 참모장으로 유럽 전선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평양 입성에서 나에게 지는 바람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저와 ‘게이’ 소장은 선교리에서 평양 탈환 축하 악수를 나누었 습니다. 정말 눈시울이 뜨거웠던 감격적인 순간이었어요. 이 자리에서 저는 ‘밀번’ 군단장으로부터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고 평양에 진입한 육군 제1사단 장병들은 1계급 특진하는 엄청난 영광을 가졌지요. 역사적인 평양 현장에서 이혜복 기자는 나와 동선을 거의 같이 하면서 계속 취재를 했어요.
백장군이 설명하면서 그린 평양 진격작전도
- 선교리 도착시간을 두고 여러 기록들이 있습니다. 19일 오전 11시 그리고 12시와 12시 반 등 여러 기록들이 있습니다. 워낙 급박한 전쟁 상태에서 느끼고 본 시간이라서 다소 차이가 납니다. 백장군께서는 오전 11시라고 말씀 하시는데 이혜복 선배의 기사에는 12시 반으로 표기하고 있어요. 지난번 백장군 께서 쓰신 ‘1128일의 기억,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제하의 6.25 전쟁 역저를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백장군께서는 북한의 남침후 마지막 낙동강 벨트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벌인 다부동 전투가 피아(彼我) 간의 승부를 건 대혈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 니다. 다부동에서 육군 1사단이 승리한 뒤 전쟁의 승기를 잡은 걸로 표현했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의미부터 말씀해 주시죠.
■ 백선엽 장군: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대한민국을 지킨 대단히 중요한 의미의 전투 였습니다. 또한 북진의 기회를 제공한 승리였고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미 1군단장 ‘밀번(Milburn)’ 장군은 그 다음날 저에게 다부동 가산의 적1사단을 격파하고 상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나 피를 말리는 진퇴만 거듭됐을뿐 돌파구를 찾지 못하다가 18일 오후 12연대 (김점곤 대령)가 요충지 거매동에 진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전과였습니다. 8군의 ‘워커’ 사령관까지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전승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컸어요. 제1사단의 공격으로 적군 1사단은 완전히 와해 되어 형체를 잃었지요. 다부동의 승리는 전쟁의 승기를 잡은 6.25에서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 어떤 루트로 평양으로 진격했습니까?
■ 백선엽 장군: 우리는 후퇴했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상주-보은-미원을 거쳐 청주에 진출했습니다. 도로에는 과거의 피난 때와는 다른 귀향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어요. 석달 가량의 고된 피난살이에 고단한 모습이었으나 집을 찾아가는 기쁨으로 표정은 한결 같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들판의 오곡들이 전쟁이라는 아픈 상처를 위로라도 하듯 황금 색깔의 물결을 출렁이고 있었죠. 우리들이 지나가자 주민들은 어느 틈에 준비해 두었든지 태극기를 들고 길에 나와 환영해 주었지요.
우리는 10월 2일 청주에 들어갔어요. 이보다 하루 앞선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 했는데 뒷날 이날을 기념해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됐지요. 당초 미군은 평양 탈환에 우리 1사단을 배제 했어요. 미군 1기병사단 (사단장 ‘게이’ 소장)이 주력 부대를 맡아 나가고 미 24사단(‘존 처치’ 소장)이 우익부대로 구화리-시변리-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죠. 여기에 영국 27여단(여단장 ‘바실 코드’ 준장)이 예비여단으로 기병사단을 따르고 우리 1사단은 개성-연안-해주-안악 방면으로 나서서 후방 소탕 임무가 주어졌어요. 한마디로 말해 국군이 평양 공격에 빠져 있었죠. 저는 대전에 있던 ‘밀번’ 미 1군단장에게 우리 사단이 평양 공격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된데 대해 항의를 하고 설득을 한 끝에 미 24사단과 역할을 맞바꾸게 되어 평양 진격에 나서게 된 겁니다.
‘밀번’ 미 1군단장은 그 후 저에게 미 제6전차대대 C중대 M-26형 전차 20여대를 보강해 주었지요. 미군 전차 부대가 한국군 사단에 배속되기는 6.25 중 처음 있었던 배려였어요. 정말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10월 13일에는 미 제6전차대대 D중대도 우리 사단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어요. 우리 1사단은 60여대의 전차를 확보하고 파죽지세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평안남도에 진입하여 17일에는 평양 외곽 30km 지점인 중화군 상원(祥原)을 탈환했습니다. 진격중 도로 옆 민가에 남아있던 아녀자와 노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를 환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어요. 우리가 진격해 들어가자 적군들이 줄줄이 항복해 오는 겁니다. 상원 근처 군데 군데 적군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적군의 패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요. 상원을 탈환하면서 평양 진입은 시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군이 평양 탈환에 나서는데 먼저 국민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우리 종군기자들을 모셔 오게 된 겁니다.
- 얼마 전 출판된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이정식 교수의 ‘해방후사’에를 보면 평양 탈환시 공격 장면이 이 교수의 체험담으로 나와요. 이 교수에 따르면 10월 19일 비가 오락 가락 하는 가운데 평양 시내에 밤새 십자포화가 작열 했다고 해요. 이 교수는 물이 무릎팍까지 차오르는 방공호 속에서 이쪽 저쪽으로 오가는 대포알 색깔을 신기하게 쳐다봤는데 아침이 되자 대포 소리가 뚝 그치더래요. 그리고 북한군이 어디론가 후퇴하고 국군이 평양에 들어오더라고 직접 본 그날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어요. 백장군께서 탈환하고 나서 다시 본 평양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 백선엽 장군: 평양 탈환이라는 축제 분위기 속에도 나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아 계속 긴장감 속에 평양 시내를 다녔습니다. 탈환 이튿날 김일성 집무실 이던 만수대 인민위원회 그의 집무실을 둘러봤습니다. 사무실 집기는 그대로 있었으나 그는 달아나고 없었죠. 평양은 5년 전 저가 떠날 때와 별로 변한게 없었어요. 평양 형무소에 가 보니까 형무소 마당과 우물에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시체가 겹겹이 쌓여져 있어 눈을 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북한 수뇌부는 목숨을 유지 하기 위해 달아나면서 다른 한편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 평양 시내 곳곳에서 저들이 저질은 만행들이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이 널러져 있었어요.
백선엽 장군이 고향 평양 탈환 때의 이야기를 펼쳐 놓을때 눈은 광채로 빛나고 평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쇠소리를 내면서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제 이혜복 선배의 평양 탈환 기사 취재 과정을 알아볼 차례다. 평양 탈환 취재는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낸 노영서(예비군 육군소장) 장군이 가까이서 지원 했다. 노영서 장군은 평양 탈환시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백선엽 사단 정훈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 종군 기자들을 모셔오라는 사단장 지시가 떨어지자 서울로 달려가 이혜복 선배 등과 평양에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그 과정을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 노영서 장군: 사단장의 지시가 내려져 서울을 가려고 보니 자동차가 없는 겁니다. 자동차를 알아보기 시작한 거지요. 때마침 수송부에 노획한 소련제 지프차 1대가 있었어요. 상관인 안중식 대위와 함께 이 차를 징발해서 타고 곧바로 서울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날이 상원 탈환 하루 전인 16일로 기억됩니다. 17일 오후경 국방부 정훈국에 갔습니다. 마침 이혜복 (경향신문) 기자가 있었어요. 그리고 김진섭(동아일보), 김우용(서울신문) 기자 등 세분에게 ‘평양 갑시다. 곧 떠나요’ 했더니 모두가 응하면서 소련제 지프차에 올라 탄 겁니다.
그때 이혜복 기자를 처음 봤어요.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탑승하고 떠났지만 차안에서 처음 본 이혜복 기자는 매우 침착하고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다행히 소련제 지프차는 내부 공간이 비교적 넓어 탑승인원이 많은데도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어요.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18일 저녁 ‘신계’ 조금 못 미쳐 ‘회장’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민가 에서 하룻밤을 보냈어요. 길가의 조그만 초가집이었는데 주인이 정말로 따뜻하게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어요. 다음날 우리는 새벽 일찍 출발해 사리원을 거쳐 선교리를 향했지요.
- 선교리를 향하면서 모두가 흥분 했겠어요. 그런데 평양 탈환 기사는 어떻게 취재되고 작성 되었습니까?
■ 노영서 장군: 6.25 당시 미국 기자들은 취재한 기사를 미군 통신선을 이용해 본사에 송고 하였으나 우리는 원고를 직접 회사에 들고 가야 제작할 수가 있었어요. 평양 탈환 그날 오후 취재를 끝낸 이혜복 기자는 다시 어제 서울에서 평양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가서 신문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평양에 올 때 이용했던 그 소련제 지프차를 다시 타고 간 겁니다. 이 지프차에는 이혜복 기자와 정국은(鄭國殷) 당시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 그리고 정기자를 보좌하던 정모씨 등 세분이 탔었죠. 뒷날 이혜복 기자에게서 들은 이야깁니다만 남하하던 운전병이 졸음이 와 쉬어 가자고 하는 것을 재촉해 20일 새벽 4시반 경 서울 명륜동 집에 도착해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오전 7시 경 회사에 가 기사를 작성했다고 해요
. - 제가 경향신문 자료실에서 역사적인 평양 탈환 기사를 찾아봤어요. 그리고 당시 기사를 보니까 요즘 신문 기사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현대화 된 문장이었어요. 10월 21일 경향신문 기사를 소개하면
세계전사상에 경이적 작전 國軍精銳先着渡河 白부대장과 ‘게이’少將 大同橋서 감격의 악수
(평양 대동강에서 본사 특파원 李蕙馥 19일 발) 祥原(상원)을 탈환하고 18일 하오 평양을 향하는 공로를 북진 중이던 아군 5816부대는 18일 하오 12시경 평양 동남방 20km 지점 구릉지대에 의거하여 완강히 저항을 시도하던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9일 아침 6시부터 空陸呼応(공륙호응) 맹공격을 개시하여 탱크부대를 선두로 후퇴 이산하는 적을 急迫(급박) 드디어 오전 10시 반 그 선봉부대의 일부가 평양시 동남방 공장지대 돌입에 성공하였다. 동일 오전 12시 반 동부대 주력은 대동강 남안 평양시 중심부인 선교리에 도달, 대동강 도하점인 대동교를 완전 확보하여 砲煙彈雨(포연탄우)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과 같이 시 중심부로 돌진하던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국군부대보다 약 40분 뒤늦게 선교리에 도달한 미 제1기갑 사단장 ‘게이’ 소장과 대동교 앞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하였다.
선교리에서 합류한 한미 양군은 대동교의 철교 및 인도교가 모두 적에게 폭파되었음을 확인하고 도하 작전을 위하여 우선 대동강 북안 적진지에 맹포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5816부대의 일부는 동일 정오 평양시 동방에 있는 비행장을 탈환 하고 잔적을 소탕 중에 있으며 또 일부대는 대동강 상류를 도하 동일 오후 2시 평양시 북단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동남북 3방면으로 평양에 입성하였으며 서방은 진남포 방면으로부터 진격해온 유엔군에 의하여 봉쇄되고 있다.
적은 평양시 고수를 기도하였음인지 시가 주요 도로에는 50미터 간격으로 흙가마니를 쌓아 올리고 시가전을 준비한 형적이 있으나 동시에 진입한 국군 부대의 진격이 너무도 급했기 때문에 도주할 기회를 놓친 소수 패잔병들의 발악적 저격을 받았을 뿐 아군은 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유유히 시가 중심부까지 도달하였으며 시민의 열광적 환호리에 감격적인 진주를 행하였다.
현재 전투 상황으로 보아 20일 오후까지는 평양전시의 패잔병이 완전 소탕될 것으로 보인다. 6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눈으로 봐도 전혀 낡은 기사가 아니에요. 사실 그때의 일반 신문 기사와는 차별화 되는 현대화 된 기사에요. 이혜복 선배는 서울에서 신문을 만들고 나흘 뒤 평양에 다시 왔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오면서 평양 탈환 기사가 실린 신문을 지프차에 가득 싣고 연도 주민들에게 뿌렸다고 해요. 주민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래요. 그리고 다시 평양에 돌아오면서 거치게 되는 신계, 수안, 상원 등 길 주변과 평양 시내에 신문을 뿌리거나 벽에 붙여 국민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알려주었대요.
이혜복 선배의 평양탈환 기사는 우리 국군의 사기를 드높혔어요. 제가 잘 아는 6.25 참전 예비역 소장 박남표 장군도 38선을 넘은 뒤 이혜복 선배가 쓴 기사를 흥분 하여 열번 이상 읽었다고 해요. 정말 모두에게 가슴 벅찬 뉴스였지요. 이혜복 선배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벅차고 황홀한 시간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어요.
■ 노영서 장군: 이혜복 기자는 평양으로 오면서 경향신문 5백부와 동판을 갖고 왔다고 해요. 그 동판으로 며칠전 공산당이 인민일보를 발행하던 인쇄소에서 평양 탈환 기사가 실린 경향신문을 대량 인쇄해서 평양 시내에 뿌리고 벽에 붙이면서 아주 신나게 누비고 다녔어요. 그때 우리는 또 다른 일들을 했지요. 이혜복 기자가 경향신문을 인쇄한 그 인쇄소에서 태극기와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삐라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뿌렸습니다. 국군이 탈환하자 평양 시민들은 자위대를 구성하여 주요 건물들을 지켰어요.
적군은 비상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로 군데 군데 쌀 가마니를 쌓아 놓고 있다가 미처 옮기지 못하고 달아났는데 자발적으로 평양 시민들이 조직한 자위대가 잘 지키고 있어서 쌀이 그대로 있었어요. 우리는 영수증을 써 주고 쌀을 받아 배고픈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어요. 자위대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고요. 자위대에 활동한 사람들은 아마 그 뒤에 모두 남쪽으로 왔을 거에요. 이혜복 기자는 평양에 이틀정도 있다가 다시 서울로 갔어요. 나는 이혜복 기자에 비해 두 살 아래여서 전쟁 당시 25세였어요. 전쟁 발발 1년 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정훈병과 2기생으로 군에 지원했지요.
당시 정훈병과에 50명이 입교했는데 전쟁이 나던 50년 1월 14일 육사 9기생과 같이 졸업을 하고 명동에 있던 정훈건물에서 근무했었지요. 전쟁이 나자 나도 정훈국과 함께 남하하여 대구 소재 국방부 분실에서 언론 검열 등의 일을 보았습니다만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9월 초 대구를 방문해 장교들을 마당에 집합 시킨 뒤 전방에는 장교가 모자라 큰일인데 위관급 장교는 모두 전방으로 가라고 명령을 해 1사단에 발령 받았죠. 나는 평양 탈환후 1사단 장병들이 1계급 특진할 때 중위가 되고 곧 이어 또 한 계급 특진해서 평양 에서 대위가 됐어요. 평양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종군기자의 탄생
이야기를 바꿔 평양 입성 취재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 내내 대한민국 종군기자들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나라에 종군기자라는 새로운 개념의 전문기자를 등장 시킵니다. 국방부 기록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종군기자 라는 명칭이 6.25 바로 전해인 1949년부터 나타나요. 당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군 출입 기자도 군 지식을 알아야 공비토벌 작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종군기자가 탄생되었다는 거에요. 당시에 6.25 남침은 예상을 못했지만 여순반란이라든가 4.3 사태 등 해방 후 사회를 흔든 공비 관련 취재는 많았었거든요.
■ 노영서 장군: 종군기자 1기생과는 교육기간이 잠시나마 나와 비슷한 시기였어요. 종군기자 1기생은 20여명. 훈련 기간은 1949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10여일간 이었고요. 정부수립 후 ‘종군기자’라는 공식명칭이 부여된 것이 1949년 10월 4일 태릉 육사에서 10여일간 훈련 받은 군 출입기자에게 국방장관(신성모) 명의의 ‘종군기자 수료증’이 주어지고 나서 부터였어요. 당시 육사 교장은 이한림 대령(1군사령관 역임), 교수는 김웅수 (6군단장 역임), 나중에 보도과장을 지낸 박석교 대위도 교관 중의 한사람이었지요. 1기생을 보면 조창섭(조선일보), 최경덕(동아일보), 김진섭(동아일보), 장명덕(합동통신), 박성환(경향신문), 허승균(경향신문), 김군서(국제신문), 이지웅(연합신문), 최기덕(태양신문), 전인국(KBS아나운서), 한응태(중앙통신), 김우용(서울신문), 이월준(자유신문), 조용하(KBS), 이재욱(연합신문), 임학수(대동신문), 한규호(서울신문), 이혜복(자유신문) 등 18명이었 어요. 그 외에 6.25 이후 행방불명된 이모(국제신문)와 윤모(조선통신)까지 합하면 20여명 입니다. 그 후 1950년 2월 26일 종군기자 2기생으로 정성관 (평양신문), 구본건(합동통신) 등 기자 10여 명이 육사에서 12일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종군기자 1기생 훈련이 끝나자, 당시 육본 정훈국 보도과에서는 보도과장 이창정 대위가 인솔하여 강릉에 있던 8사단(사단장 이형근 대령), 원주의 6사단(사단장 유재흥 대령) 그리고 38선 접경지역 군부대를 순회 시찰하면서 군을 이해하도록 배려했지요. 그때 기자들은 회사를 자주 바꿨어요. 지금처럼 입사해서 계속 다니지 않고 한달 또는 1년 근무하다가 금방 또 옮겼어요. 이혜복 기자도 종군기자 훈련을 받을 때는 자유신문에 있었으나 그 다음해 경향신문 그리고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서울신문에 이어 동아일보에서 일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옮겨 다녔어요.
- 앞에서 언급 했었지만 종군기자의 등장은 비록 ‘종군기자’ 호칭은 얻지 못했지만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사건을 취재한 국방부 기자에 연원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야지요. 여수반란사건의 진압 작전은 군대 뿐만 아니라 경찰도 참여했어요. 이혜복 선배에 따르면 10월 하순경 현지에 출동하는 경찰 ‘스리퀴터’에 국회의원 두 분과 함께 떠났 다고 해요. 여수 부근을 지날 무렵 집들이 불에 탔거나 타고 있었는데 경찰 관계자는 ‘소작농들이 지주집을 불태웠다’고 설명했대요. 그때 반란군에 가담한 지역 좌익들은 여수 시내 ‘지까다비(地下足袋;일본 노동자 농민들이 신었던 신발)’ 공장에서 약탈한 ‘지까다비’를 신고 있었대요. 그래서 일단 이 신발을 신은 사람은 모두 반란군으로 몰렸고 손가락에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도 역시 반란군으로 분류됐다고 했어요.
■ 노영서 장군: 그때 종군기자들은 종군기자 완장을 팔뚝에 찼어요. 완장은 흰색과 푸른색을 상하에 깔고 위에 한자 ‘從軍記者’, 아래에 영자 ‘correspondent’를 인쇄했대요. 기자들은 명동 소재 적산 건물인 증권거래소를 접수해 당시 사용한 국방부 정훈국에서 전황을 파악하고 취재할 대상을 찾았지요. 당시 정훈국은 이 건물의 1, 2층을 사용했는데 1층에 보도부가 있었어요. 정훈국에서는 차량 지원을 했는데 보통 기자 한 분이 취재 현장으로 떠날 때가 많았고 두 세분이 동행할 때도 있었어요.
부대 취재를 갈 때면 정훈국에서 ‘출장증’을 발부해 주었는데 출장증이 있으면 부대 출입이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취재 협조를 구할 수 있었어요. 출장증은 회사에서 출장 정리를 하는데 기본 서류였다. 물론 출장비는 출장증을 근거로 산정됐다. 출장증은 미군 비행기도 운이 좋으면 탈 수 있었던 문서였다. 종군기자 완장을 차고 가다가 미군차를 만나면 미군들은 거의 대부분 태워주고 취재에 도움을 줬다. 당시 종군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어서 시중에 가짜 종군기자가 많았다. 지프차 뒤에 목숨 걸고 매달려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고 최후의 교두보였던 낙동강 벨트에서 적군이 패퇴하면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나선다. 유엔군이 평양 탈환을 하자 중공군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한다. 이 무렵 미국에서 평화 협상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51년 3월 12일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휴전 협상에 대해 운을 뗀 뒤 6월 16일 ‘트리그브리(Trigbri)’ 유엔 사무총장이 휴전 제의를 하고 소련 ‘그로미코’ 외상이 화답을 한다. 미국 정부는 급기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휴전 제의를 지시하고 ‘리지웨이’는 6월 30일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연락관 회의를 갖자고 방송을 통해 제의하자 공산측은 개성에서 접촉하자고 다시 제의를 해온다. 그러다가 7월 8일 개성 북쪽 ‘래봉장’에서 접촉을 갖자고 하여 래봉장에서 처음 양측이 만나기 시작한다. 그때 1군단장으로 있던 백선엽 장군이 유엔군측 한국 대표로 선정되어 휴전 회담에 참여하게 된다. 다시 백선엽 장군과 휴전 회담에 대해 알아본다.
- ‘래봉장’은 어떤 장소였고 초기 쌍방의 회담 대표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 백선엽 장군: 유엔군 대표는 미 극동 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이었고 나는 한국 대표로서 참석했지만 나중에 휴전 협정을 조인할 때는 한국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어요. 북측은 북한군 참모장 남일 중장을 대표로 하여 이상조 소장 등과 중공군 ‘덩화(鄧華)’ 부사령관, ‘세팡(解方)’ 참모장 겸 정치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래봉장’은 개성의 부자 소유의 99칸 큰 한옥이었어요. 회의 장소가 북측 지역이다 보니 북측은 자기측 의자는 높고 크게 제작해 유엔군측을 내려다보게 만들어 두고 깃발도 훨씬 크게 만들어 ‘기싸움’에서 이기려고 여러 준비를 해 두었더라고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군 대표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중공군 대표들은 유엔군측에 자주 웃고 눈웃음을 지으면서 신중하게 말과 행동을 했어요.
북측은 취재기자들의 출입을 통제했어요. 휴전 회담장 밖에 있던 1백여 명의 세계 각국 취재기자들이 매일 항의를 했으나 ‘리지웨이’ 장군도 어쩔 수 없었어요. 휴전 회담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미군들은 10일내에 평화가 올 걸로 생각했었지요. 곧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 풀어 있었어요.
- 회담은 어떻게 진행 됐습니까?
■ 백선엽 장군: 그렇게 시작된 회담은 정말 지루하게 계속 되었지요. ‘래봉장’ 예비회담 이틀 후인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을 시작하여 어떤 날은 하루에도 두 세 번씩 회담을 가졌는데 처음 9일 동안 무려 26번의 회담을 가졌어요. 그러다가 7월 20일부터 판문점으로 이동하여 다시 접촉을 했지요. 몇 채의 초가집 밖에 없던 허허벌판 판문점에 천막 몇 개가 급히 세워져 휴전회담장과 그 부속시설로 이용했어요. 그리고 별도의 천막 2개를 마련해 남북 기자들에게 1개씩 배당하여 취재 편의를 제공했어요. 기자들은 회담이 끝나면 브리핑을 듣고 기사 작성을 해야 하는데 우리 종군기자들의 경우 브리핑이 끝나면 재빨리 대기 중인 유엔군 차량을 타고 문산 ‘평화열차’까지 나와 대기 중인 각사의 지프차를 타고 본사에 들어가는데 정신이 없었지요.
이혜복 선배가 촬영한 초기 판문점 회담장: 멀리 보이는 왼쪽 끝이 북측, 오른쪽이 유엔군측 천막
외국의 종군기자들은 회담 내용 브리핑이 끝나면 기사 작성을 하고 즉시 공보장교의 검열을 거쳐 군용 통신망을 이용해 해외 본사로 송고할 수가 있었 어요. 5, 6분 안에 끝났지요. 그러나 우리는 옛날 봉화로 전쟁 상황을 알리던 시절과 같은 송고 방식으로 정말 원시 상태에 있었어요. 전쟁때 유엔 종군기자들의 숙소는 종로구 내자동에 있던 ‘내자 호텔’이었지만 휴전회담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판문점 유엔군 측이 가까운 문산역 구내에 침대차 5량과 식당차 2량을 마련해 주었어요. 그리고 그 차량을 ‘평화열차(Peace train)’란 멋진 이름을 붙였는데 프레스센터 겸 숙소 역할을 했어요. 나는 3개월 정도 휴전 회담 유엔군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참가했다가 다시 1군 단장으로 원대 복귀했습니다.
휴전 협정 조인날인 ′53년 10월 27일 이혜복 선배가 판문점에서 기사를 쓰기 위해 본사에 들어오던 과정의 얘기는 이제 기자 정신의 표본 사례처럼 전설이 됐다. 이혜복 선배는 조인 당일 일찍 판문점에 갔다. 타고 간 회사 지프차를 문산 평화열차 구내에 두고 유엔군 차편으로 회담 장소에 갔다. 휴전협정문 조인을 취재한 뒤 밖으로 나오자 마침 그곳에 대기 중이던 다른 회사 지프가 떠나려고 했다. 그 당시 판문점에 오가던 유엔군 지프차는 모두 ‘윌리스’ 지프로 색깔은 ‘노란색’이었는데 마침 그 회사 지프차도 ‘윌리스’ 노란색 지프차이어서 검문소 미군 헌병이 유엔군 지프차로 잘못 알고 제지하지 않는 바람에 운 좋게 통과하여 판문점 현장에 있었다.
이혜복 선배가 태워달라고 했으나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래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프차 뒤 스페어 타이어에 무조건 매달렸는데 약 8km 정도를 가다가 미군 헌병이 차를 세웠다. 위험하니 내리라고 해서 내렸더니 그 지프차는 전속력을 내면서 가 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0여분 뛰어 평화열차 구내에 도착하여 회사 지프차를 타고 서울에 남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어 기사를 일찍 마감했다. 목숨을 걸다시피 판문점에서 돌아와 작성한 그때의 기사를 본다.
냉전의 고민 휴전에 조인 좌절된 한국의 통일 염원 역사적 순간! 27일 상오 10시 7분
(판문점에서 본사특파원 이혜복 27일 지급 전)
한국 정부와 인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휴전 협정 조인은 27일 오전 10시 7분 예정대로 판문점의 조인 장소에서 실시되었다. 3년 1개월간 계속되던 가열한 한국 전쟁의 종막을 고하는 역사적인 동 조인식 에는 유엔 측 휴전 협상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을 비롯한 13개국의 유엔 참전 장성들이 회석하였으나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군 대표만이 참석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양측 대표는 공산측이 건축한 광표대(廣表大) 목조건물의 동서 양측으로부터 입장하였는데 내부 남측에 마련된 3개의 청색 테이블 중 동측 테이블에는 유엔군 수석대표인 ‘해리슨’ 장군이 또 서측 테이블에는 공산측 대표 남일이 중앙 테이블을 격(隔) 해놓고 면대하여 앉았다. 이날 휴전 협정문을 서명한 유엔군 측 ‘해리스’ 미 육군 중장과 북한군 측 남일 대장은 한마디 인사도 없이 악수도 하지 않은채 서명만 했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문서는 ‘한국 휴전 협정’ 과 ‘휴전 협정에 대한 임시적 보충 협정’ 두 가지였는데 국문과 영문, 중문 등 세 가지 언어로 모두 18부가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이날 오후 1시경 문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서명하고 북한 김일성이 이날 밤 10시경 평양에서 그리고 중국의 팽덕회가 다음날인 28일 오전 9시 30분 개성에서 서명을 끝내 절차가 모두 마무리 되었다.
무려 3년 2개월 2일의 6.25 전쟁의 결과는 7월 27일 밤 10시에 차지한 땅이 서로의 땅이 된다는 합의 아래 총성은 멈췄다. 그런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쌍방은 서로가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을 맺기 위해 전투는 한때 더욱 치열해져서 희생이 컸다. 그 중에서 1951년 8월과 9월 사이의 ‘피의 능선 전투’와 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피의 능선 전투’에서 국군은 1개 연대 병력인 2천 7백 72명의 인명 피해를, 미군 2사단은 1천 7백여 명. 그리고 북한군은 1만 5천여 명의 큰 인명 피해를 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초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됐다. 10월 6일부터 9일 동안 국군 사상자 3천 4백 16명, 중공군 1만 5천명이 목숨을 잃는 등 막대한 인명 손실이 있었다. 한편 이혜복 선배의 휴전 회담 장소인 판문점 취재에 얽힌 뒷이야기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어느 날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다가와 ‘남측 기자들의 취재 천막을 보고 싶다’고 해서 구경시켜 주었더니 자기들 천막도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따라가다가 납치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화장실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1951년 12월 9일 판문점에서 북한군 장교 복장에 ‘공작원’ 쪽지를 가슴에 달고 있는 모교 중앙고보 선배이자 보전(普專) 재학중 영어를 가르쳤던 김동석 교수를 만난 일 등 이혜복 선배의 판문점에서 추억담은 많다.
김교수는 해방 이후 ‘문학가 동맹’ 간부로활동하다 월북했는데 굳은 표정으로 남쪽을 비난하다가 다른 북한 인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는 남쪽 인사들의 안부를 물었고 이혜복 선배도 월북한 지인들의 소식을 묻는 등 옛날의 사제지간으로 돌아가 정답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간 이혜복 - 이제 인간 이혜복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죠. 이혜복 선배는 제가 ′65년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할 때 사회부장이었습니다. 명 사회부장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평소에 말씀이 없었으나 신문 제작에는 온몸을 던지다시피 했어요. 신문사에서 기자가 송고한 기사를 부·차장이 손질하는 과정을 ‘데스크 본다’고합니다. 대부분의 기사가 마감시간 앞두고 송고되기 때문에 마감시간을 앞둔 때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그런데 기사를 받아 넘기면 이혜복 선배는 붓으로 데스크를 본 뒤 편집에 넘기는데 신기(神技)에 가까운 겁니다. 또 전화 송고 기사를 직접 붓으로 받아 적으면서 그 자리에서 고쳐 넘기는데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요즘 말로 정리하자면 ‘데스크의 달인’ 이랄까요. 뿐만 아니라 특집 기획을 시의 적절하게 준비하셨고 버린 기사에서 사회면 톱기사를 줍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기사를 주물렀지요. 특히 부당한 지시나 인격을 모독하는 말씀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 습니다. 평소 기자들과 가깝게 지냈던 노장군께서도 이혜복 선배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지요?
■ 노영서 장군: 지금도 종군기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이혜복 기자는 정말 신사입니다. 모두가 좋아했죠. 그리고 한번도 부당한 일을 부탁하는 법이 없었 어요. 저는 정훈과 보도 일을 군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수많은 기자들을 만났어요. 이혜복 기자는 저가 가장 좋아하는 한분이고 신뢰하는 분으로 평생을 만나고 있어요. 군대 친구들도 만나면 이혜복 기자 얘기를 많이 합니다.
- 백선엽 장군도 이혜복 선배를 신뢰하고 좋아하시더라고요. 보도를 통해 군을 도와주고 나라를 위한 보도를 많이 해주었다고 칭찬을 많이 했어요. 6.25 전쟁때 역할은 달랐지만 피를 나눈 전우애 같은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어요.
■ 노영서 장군: 6.25 전쟁을 통해 저는 이혜복 기자와 그야말로 동고동락 했어요. 평양 탈환때 같은 지프차를 타고 들어갔고 서로 도우면서 이혜복 기자는 취재 보도에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종군기자들의 취재활동을 도우면서 선무활동에 뛰었던 일들이 어제만 같습니다. 청춘의 피가 끓던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6.25때 종군기자들의 활동들은 이제 전설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목숨을 걸고 6.25 전쟁 현장에서 피로 쓴 종군기자들이 남긴 기사들은 이제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 앞에 그날의 진실을 실체적 증거로서 보여주고 있다. 한편 6.25 전쟁은 세계 언론계의 또 다른 전쟁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기자들이 한반도에 몰려왔는데 잘 알려진 종군기자 ‘헤랄드 트리븐’지의 ‘마가렛 히킨스’ 여기자를 비롯해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아들 ‘랜돌프 처칠’도 그 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생사(生死)가 걸린 전장에서의 취재는 그만큼 위험하다. 6.25 전쟁이 터진 날 서부전선 임진강에서 취재하던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가 북한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는 등 세계 각국의 기자 17명이 6.25 전쟁 종군중 이 세상을 마감했다. 사실 그들 모두가 전장의 진실을 알리려던 영웅들이었다.
대한 연론인회 부회장 이병대 씀
1991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고위과정 제 1기 수료식 기념(0안 이병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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