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제일먼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드린곳 정동길과 숭례문 (남대문)의 서쪽 부분과 연결되는 서소문길의 한양도성은 여러사연으로 한양도성가운데서 가장 먼저 훼손되기 시작 했고 지금은 큰 빌딩들로 가득 메워졌는가 하면 이미 사유지가 되어버려 훼손된 도성은 복원이 어려워진곳이 많지만 역사와 문화의 거리로 자리 메김하고 있는곳이기도 하다. 이 곳의 역사탐방은 이런점에 역점을 두어 역사적 의미와 오늘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는 기회로 삼고저 한다.
한양도성 역사탐방 (2) 정동길, 서소문길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후손들이 간직해오던 사진으로 2007년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공개되었다. 마이어는 1883년 인천에 최초로 무역회사 세창양행을 열고 활동했다고 한다. 이사진에서 2층으로 된 중화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1897년 부터 중화전 화재발생 1904년 사이에 촬영한 사진이라고 볼 수 있고 이때까지 남산에서 서소문을 거쳐 정동과 서대문을 따라 인왕산으로 오르고 있는 모습이 역력 하다. 이때까지 남대문과 한양도성은 완벽하게 보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보 1호 남대문은 한양도성중에서도 제닐먼저 건립되었고 여러측면에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남대문의 복원인가? 복구인가?의 논란이 제기되면서 국보 1호의 자격 상실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복구로 결론나면서 국보 1호의 자격을 이어가기로해서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부근의 성곽은 한양도성중에서도 제일 머저 헐리기 시작해서 남대문과 연결되는 16m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양도성이 헐리기 시작한것은 일제의 마수가 뻐치면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에 전철이 들어와 철길을 놓을 때도 도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문안을 통해서 전차가 다니도록 공사를 했다. 1899년 동대문을 지나는 철도나 남대문을 통하는 철도 모두 그랬었다. 그러던 것이 1907년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裕仁)가 조선을 방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그 길을 통과하려고 성을 헐어버리고 일진회등 친일파 들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했던 것이다. 그 해는 해아 밀사사건으로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이 왕위에 오른 해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1915년까지 이러 저런 이유로 서대문까지의 성은 헐렸고 서소문에서 정동으로 이어지는 성도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헐렸다. 서대문이 헐린것은 1915년의 일이다. 서대문, 지금은 그 표시만 되어 있다. 숭례문 (남대문)에서 바라보이는 거대한 빌딩 상공 회의소가 들어서 있는 지역까지는 현재도 성이없고 그 다음 건물부터 복원된 성이 시작된다.
남대문의 남쪽에 있던 연못 남지터에서 길 건너 두리번 거리다 보니 정교하게 다듬어진 담벽에 서울 성곽이라는 표지가 있다. 여기서부터 복원된 서소문 한양도성이 시작된다.
성의 측면에는 안내표지가 있고 금연 등을 하지 말고 성을 보호 해 달라는 표지가 있지만 정작 성이 시작되는 성의 정면에는 구두닦기 이동식 간이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다. 가능하면 다른곳으로 옮기면...
큰 빌딩의 담벽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한양도성의 일부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잔디밭으로 되어있다. 옛 성에서 보는 그런 성의 정취는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한양도성이라는 모습을 갖추어 놓은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
성곽따라 가다가 서소문에 이르자 통일로와 맞닿은 곳에 큰 주차장이 있다. 여기가 옛 서소문 자리라고 한다. 흔히들 이곳을 서소문이라고 부르지만 원이름은 소의문昭義門 이다. 처음 성을 싸을때는 소덕문昭德門 이라고 했다가 중간에 이름이 바귀었다. 신당동에 있는 광희문과 함께 사람이 죽으면 이 문을 통해서 그 시체를 내 보냈다. 그래서 이문을 屍口門이라고도 부렀다.
주차장에서 바라보이는 길 건너에는 거대한 빌딩, 중앙 메스컴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중앙일보사, JTBC, 호암 아트홀이 있다.
여기서 통일로로 통하는 육교밑으로 난 길을 건너 평안교회를 지나면 정동이 시작되고 우리나라 근대문명과 교육의 요람 배재학당 터에 이른다. 여기에 러시아 대사관이 있어서 직진하는 길은 없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정동길 따라 정동 사거리까지 걸으면서 오늘의 정동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양도성은 이 정동길 뒤에 있지만 그 길을 걷기는 어려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자그마한 근린공원 쌈지공원으로 이루어진 배재공원 길바닥에는 배재공원의 내력이 적혀있다. 왼쪽은 러시아 대사관이고 오른쪽은 옛 배제고등학교 자리에 마련된 배재학강 역사 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잠시 옛 정동의 모습을 보기로 한다. 아래 사진은 2008년 한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그 기념행사로 열린 사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그 시절의 정동을 볼 수 있다. 프랑스공사관과 미원성의 배재학당이 나란이 있는 모습이며 그 뒤로 지나는 성곽과 누각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이다. 아래 사진 한장을 더 올린다.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에 있는 사진이다. 미완성의 배재학당이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보아서 같은 시기에 왈영한 사진으로 짐작된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혼재하는 서울 4대문 안의 전통적인 조선 도읍지 마을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필자가 건물 하나 하나의 내역까지는 잘 모르지만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과 같이 살펴보면 좋은 자료가 될 것리라고 생각된다. 이 사진을 머릿속에 넣고 발길을 옮긴다.
아래 사진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본 프랑스 공사관과 주변이다. 정동교횡에서 본 프랑스 공사관이라고 되어있다.
글 머리에 올렸던 사진 두장을 이곳에 옮겨 함께 보면 이해가 더 빠를 것으로 생각된다.
정동길 따라 발검음을 옮긴다.
오른쪽으로 배제공원과 맞 닿아 있는 배재학강 역사 박물관이다. 문을 연지 4년이 흘렀지만 처음 가보는 박물관이다. 3층으로 되어있는 건물 1층에 들렸더니 음성과 영상 등으로 소개하는 전시물들이 있다. 아팬샐러가 작사작곡한 배재학당 노래가 울려퍼져 녹음기에 담고 있노라니 어느분이 신을 벗고 들어 왔느냐?고 묻는다. 마루바닥을 깨끗이 닦아 놓았기에 신을 벗고 들어 간것인데 신을 신고 들어 오는곳이라고 했다. 종종 다녀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비교적 한산한 편이어서 30분 이상을 머물렀다. 배재학당과 인연을 맺었던, 서재필, 이승만, 이청천, 주시경, 김소월 등을 소개하는 명예의 전당관, 배재학당의 역사를 소개하는 방이 따로 있다. 2층 까지가 전시실이고 3층은 새미나 실이다. 배재학당의 역사도 유익했지만 정동의 역사를 아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나오다가 배재학당의 역사를 지켜본 노거수가 있기에 촬영했다. 1885년 우리나라에 새운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은 1984넌까지 이곳에 있다가 강남이 새로 개발되던 때 옮겼다.
역사박물관에서 나와 정동길로 발길을 옮기면서 러시아 대사관과 맡붙은 정동교회를 본다. 정동교회와 이화 여자고등학교가 함께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이화학당은 한 울나리 안에 새워진 시설이었다. 1886년 국교가 수립된 프랑스의 공사관이 이곳에 자리잡을 무렵 1885년에 서울에 온 아팬샐러가 이 곳에 자리잡으면서 일구어 놓은 시설들이다. 배재학당 현판은 1889년 고종이 하사했다면서 역사박물관에 잘 간직되어 있다.
정동교회 앞에서 보면 덕수궁 돌담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자그마한 근린공원이 있고 이 근린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진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공원과 밪 붙은곳에 서울 시립 미술관이 있다. 고갱전이 열리고 있어서 사람들의 내왕이 많았다.
근린공원에는 조선조 유학자 이황선생님의 집터와 김장생, 김집선생님 생가터가 있다
이곳에서 덕수궁 돌담길 따라 왼쪽으로 돌아 오르면 옛 돈덕전, 중화전 자리가 있고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 일본인 학교 제일고녀, 해방되어 경기여자 고등학교가 되었다가 덕수궁을 복원하려고 한 터가 있고 덕수 초등학교가 있다. 덕수 초등학교 안에는 옛 경성방송국 터가 있다. 그리고 그 부근에 구세군 본원과 박물관, 영국 성공회 성당이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곳에서 글을 썼기에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정동길로 곧장 올라갔다.
오늘날 거대한 학교 재단이 된 이화학당이 4명의 학생으로 배움의 터를 마련한곳이 이곳이다. 이화여자 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옛 건물 한동이 남아 있어서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고 서울시에서 새운 정동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이라는 안내표지가 서 있다. 손탁호텔 터라는 표지석도 서 있다.
최초의 프랑스 공사관이 있던 자리, 지금은 창덕 여자 중학교로 되어있지만 처음 에는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으며 또 일본 신사도 있었다. 얼마전까지 이곳에 연못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모두 운동장으로 되었다. 이곳에서 한양도성의 남아있는 부분이 보일까. 해서 학교 뒷쪽을 내려가 걷다 보니 부로크 담 아레로 두 줄의 성벽이 보이고 그 부로크에는 성터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러나 성 잔해가 있는곳이 성터라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창덕여자 중학교에서 나와 정동길을 걷다가 만난 표지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은 국토관리청이 있지만 개화기에는 프랑스어학교가 있었고 1949년 내무부 서울 지방건설국으로 부터 오늘에 이른다고 했다. "대소 인원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비석이 서 있다. 무슨 석비일까. 덕수궁이 황궁이던 시절 황궁이 있어서일까?
정동길 오른족 편을 걷다가 정동극장을 지나노라면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이있다. 캐나다 대사관을 지나면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1년간 머물렀던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아관파천 때는 덕수궁과 담 하나 사이로 있었지만 지금은 그 사이로 길이 나있고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사적 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가 5년전 이곳을 들렸을때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깔끔히 정비되고 안내표지도 서 있다. 또 한국 카토릭 수도원 첫 자리라는 안내 표지도 서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동길에는 노거수 한그루가 지키고 있다. 수령 520년이라고 되어 있지만 5년전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고 이 표지를 언제 썼다는 얘기도 없어서 520년보다 몇년이 더 지난 노거수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지나노라면 정겹다. 촬영한 사진을 기껏해야 한장 사용 할 사진이지만 이곳을 지나노라면 여러장의 사진을 촹영하는것이 습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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