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류역사상 그런 예는 없었다. 궁 안에 깊숙이 들어와 불량배로 가장해서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고 불에 태워 흔적을 지워버린 그 을미사변 말이다. 1868년 일본 메이지(明治)천왕이 들어서 대륙침략의 야욕이 싹트면서 대륙의 관문 조선을 제일먼저 눈 안에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를 안겨주었다.
건청궁 명성황후시해 이토 히로부미 을미사변 을사조약 한일합방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부터 조선에 발길을 들여놓은 일본이 1895년에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는 조선을 자기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일을 기획하고 실천한 우두머리는 당시 일본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그 위로 천황이 있었지만 내각책임제 헌법이 실시되고 있을 때라 천황은 의례적인 존재였기에 일본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은 이토에게 있었고 그는 1882년 이래 천황 다음의 실력자였다. 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조선을 실질적인 일본의 속국으로 만든 1905년의 을사조약을 채결한 일본 천황의 특명 전권대사였으며 그 을사조약으로 생긴 초대통감이었다. 1907년 그는 해아 특사사건을 들어 고종을 퇴위시킨 장본인이다. 1909년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에 갔을때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총에 맞아 최후를 고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건청궁에서 일어났던 1895년 10월 8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만행을 대한민국 국민은 절대로 잊어서도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낸 일본이 외교에 능한 명성왕후를 제거하고 러시아 (로시아)를 몰아내면 조선은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 했기에 그 최대의 걸림돌 명성왕후를 제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겁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KBS가 2001년에 방송한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 그 실상이 잘 그려져 있어서 여기 동영상 한편과 뒷면에 그 글을 연결한다.
그날의 책임자는 일본총리 이토 히로부미이고 실행에 옮긴 자는 전, 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리(井上香織)와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 다. 그날밤 그 길을 열어준 자는 조선 훈련대 2대장 우범선이다. 일본은 이 일을 위해서 우범선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경복궁을 지키는 책임을 맡겼고 그날 밤 그 작전수행을 위한 중요한 임무를 맡겨 실천에 옮겼다. 치밀하게 짜인 계획 하에 왕과 세자를 감금하고 행해진 처절한 장면이었고 쓰러져가는 조선왕조를 구해 보고자 몸부림치던 명성왕후는 시신도 찾지 못한 체 산화 해버렸다. 이렇게 저지른 일을 일본은 명성황후의 정적 흥선대원군에게 뒤집어 씌우는 작전까지 시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으로 일본에 협조한자도 있겠지만 들어 내놓고 일을 수행한자는 우범선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박사는 그의 아들이다. 우장춘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저지른 역적행위였지만 그로인해서 우장춘의 고통은 컸다. 천재 식물학자가 되어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그를 대려와 나라발전에 기여 하도록 했다. 돌아와서 일은 했지만 주위사람들 눈총의 대상 이었다. 아버지의 역적행위로 죄없는 아들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싶었어도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역적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건청궁 얘기를 해보자. 경복궁 안에 또 하나의 궁이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지 10년이 되어 대원군 섭정에서 벗어나면서 왕이 거처할 궁을 만든 것이다. 왕이 살던 궁이라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제일먼저 전깃불을 켠 곳이기도 하다.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고 한 건물 안에도 여러 개의 옥호가 붙어있었다. 그 부근에 연못을 만들고 향원정을 세워 휴식처를 만들었다. 그 뒤에는 서양식 집을 지어 외국인들을 비롯한 귀빈을 접대했다. 경복궁 안에서도 제일 뒤편 깊숙한 곳에 있었다. 일본의 칼잡이 들이 이곳에 들어와 그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명성황후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래서 그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미리 넣어놓은 자로부터 그림을 그리게 해서 그 그림을 보고 일을 저질렀지만 확실한 얼굴을 몰라 여러 궁녀가 희생을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오며 말 못할 끔찍한 얘기도 전해온다. 지금도 명성왕후의 얼굴을 고증 하기는 어렵다. 종종 명성황후라고 하는 사진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한다. 인터넷 상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해서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필자에게도 그 사진이 있다. 1910년 통감부에서 발행한 책자에서 복사한 사진이다. 그 책자에서는 宮중의 老관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영정은 있을 수 있지만 사진은 희귀하다.
1910년 한일합방의 해에 총독부가 발행한 책에서 복사한 사진이다. 지금도 이 사진을 명성황후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듯 한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명성황후를 궁중의 노관이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그토록 격이 높은 책에 아무렴 노관을 올렸을까? 이리 저리 생각 해 보지만 아직 알길이 없다.
이 사진에 대한 외국 서적에서의 설명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 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 (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 한장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박사가 1910년 미국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그러나 이 사진역시 명성황후라는 확실한 설명이 없어서 과연 명성황후일까?하는 생각을 갖는다.
을미사변이 있은 후 기회를 보던 고종이 로시아(러시아) 공사관으로 가 그곳에서 1년간 정사를 보다가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건청궁은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이 퇴위 할 무렵 그 궁은 헐렸다. 다음 사진은 건청궁의 정문과 원래의 뒷 부분에 있던 양관이 보인다. 언제 촬영한 사진인지는 잘 모른다.
1926년 총독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건청궁 터를 포함한 그 옆 뜰에 아래 사진에서 본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총독부 박물관이라고 쓰여 있고 사진 밑 부분에 경복궁 안에 있는 조선의 역사, 미술, 공예 등에 관한 참고자료를 모아 진열 전시한 곳이라고 했다. 이 건물은 1960년대까지 있었고 그 앞뜰은 운동장으로 활용되었다. 운동장이 귀하던 시절이라 이곳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1972년 이 자리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섰다가 중앙청에 있던 각 부처가 과천으로 옮기면서 박물관은 중앙청 건물로 옮기고 이 자리는 민속박물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청궁은 2,000년대에 복원을 시작해서 2007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지금은 건청궁 옆에 있었던 흥복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이나 광화문에 관한 글은 이미 써 올린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 한다. 영문자를 클릭하셔요.
방송 명작 드라마 명성황후, http://blog.daum.net/jc21th/17781147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그리고 광화문 http://blog.daum.net/jc21th/17781718
돈덕전 순종즉위 1910년 일본 장서 소개 사진과 돈덕전이 헐린 역사의 진실 http://blog.daum.net/jc21th/17781825
건청궁과 향원정 http://blog.daum.net/jc21th/17781872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일국의 국모를 그렇게 악랄하게 시해한 자가 이토 히로부미였고, 그가 그렇게 하는데 협조한 조선인의 이름이 우범선이라는 자이고 습니다. 또한 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인 사람이 안중근 열사, 그 안중근 열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준 말, 열사의 어머니다운 말이였더군요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곤녕합이다. 여기서 참변을 당한 것이다. 곤녕합에도 여러 옥호가 붙은 방이 있다. 아래는 곤녕합의 오른편을 촬영한 사진이디다.
방우회 이사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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