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세계유산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그리고 광화문

이장춘 2013. 4. 24. 04:29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북악산과

남산을 그리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나아가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이이지는 민족의 정기를 잘라버린

조선 총독부 건물, 그 건물이 500 여년을 이어온 조선의 정궁 경복궁

마당에 세워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옮긴 것은 1926년이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일본이 대륙 침략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한 주춧돌을 놓은 것

이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정전인 근정전으로 통하는 홍례문을 헐어 버린 것은 물론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동쪽 한구석으로 옮겨지고 역사의 비운을 간직한 건청궁은

헐려 그 자리에 총독부 박물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버렸다. 조선의 제1왕궁

경복궁은 갈기갈기 찧기고 대륙침략의 야욕은 더해갔다. 그 역사의

현장을 다시 돌이켜본다. 광화문에 관해서는 따로 글을

썼으므로 그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그리고 광화문

 

 

 

 

 

 태조 이성계가가 새로운 왕권을 확립하고

한양천도를 실현하면서 야심차게 세운 궁궐 경복궁!

한양의 허허벌판에 가장 먼저 세운 궁궐은 임진왜란때까지

200년간 조선왕조의 중심궁궐이었다. 1592년 일본침략으로 빚어진

임진왜란으로 송두리채 불타고 오랜세월 묵혀있던 땅에 고종이 들어서면서

 섭정대원군이 왕권의 위엄을 살려야 한다고  1867년에 복원했다. 바닥난

재정으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원납전을 걷으어 세운탓에 원성을  사기도

 했다.  원대한 꿈을 않고 세운 궁이었지만 일제 침략의 마수가 뻐지며

1895년 명성왕후가 이곳에서 일본인들의 칼에 시해되는 아픈역사를

안아야 했고 그로부터 경복궁은 영영 궁의 역할을 상실한채

 일본인의 손에넘어가 갈기갈기 찟긴것이다.

 

 

 

 

1975년 김학수님이 그린 북궐도다.

창덕궁, 창경궁을 동궐, 경희궁을 서궐,

경복궁을 북궐이라고 했다.  이 그림을 보면

경복궁의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총독부가 들어서기전 엣 경복궁 촬영

 사진 한장을 더 올린다.

 

 

 

 

 

 

 

이런 모습으로 되어있던 경북궁에

일본이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를 짛기

시작한다. 일본이 조선 제일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마당에  조선총부를 짛은 속샘은   설명하지 않아도

 다안다. 이곳으로 옮기기전 남산에 있었던 총독부에

 대해서는 앞에서 글을 쓴적이 있다. 아래 사진은

 총독부를 세울때 공사 모습이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후의 경복궁은

다음과 같이 변해 버렸다. 근정전이나 경회루가

총독부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버렸다. 근정문은 총독부의

뒷문이 되고 근정전은 부속건물처럼 되어 버렸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잘 보이지도 않는곳으로 옮겨저 버렸다. 근정전

 주변의 전각은 사라지고 명성왕후가 기거하던곳 그리고

칼에 찟겨 새상을 떠나야 했던 건청궁은 사라져

그 자리에 총독부 박물관이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못된짓을 하던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가고 나라를 되찾아

 1945년 9월 9일 바로 이곳에서 일본 아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고 이곳에  걸려있던 일장기가

 내려지면서 성조기가 올랐다. 미 군정이 들어서고 집무를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처음 오른것은 

1946년 1월 14일이고 이 군정의 자문역할을 했던 입법의원이

이곳에서 개원한것은 1946년 12월이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중앙청이라 불렀다.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는 하지중장이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지도자들이 돌아오면서

이곳에서 환영대회를 갖었다. 아래 사진은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 박사의 환영대회 모습이다.  이승만박사는 10월 16일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17일 첫 방송을 통해서 "뭉치면

 살고 해치면 죽는다"는 민족의 진로를 밝힌이래

기회 있을때마다 이 말을 강조했다.

  

 

 

 

일본 제국주의자가 물러갔어도 그것이 바로

우리의 독립은 아니어서 3.8선이 그어지고 신탁통치

 운운하며 남과 북이 대립하고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48년 8월 15일옛 종독부는  대한민국의 중앙청이 되어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음을 만천하에 선포한다.  

 

 

 

 

6.25로 파괴된 건물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가 돌아 오면서 1953년 다시

중앙청의 기능을 회복했다. 과천 종합청사로  

이전하기 까지 이곳이 대한민국 정부의 중심이었다.

1982년 부터 정부가 옮겨가면서 1986년

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

 

 

 

 

 

일본통치의 상징물, 민족정기를 말살한

조선 총독부의 건물을 철거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찬반 양론이 있었으나 철거해야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1995년에 이 건물은 완전히 해체되고 경복궁은 엣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살라져버렸던 홍례문이 세워지고 광화문이 옛모습을

찾았다. 건청궁, 강령전, 교태전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버려지다시피 했던

경복궁의 후원이 옛 모습을 찾았다. 좁게 느껴지던 경복궁은 청와대와

경게를 하는 곳까지 넓혀졌다.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것 같다

 

 

 

 

근   정   전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근정전은 경복궁 안에서 핵십적인 건물로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국보 22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근정전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 광화문과 홍례문(흥례문),

 근정문을 거쳐야 했지만 홍례문은 조선총독부를세울때

 헐렸다가 오랫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고

 광화문은 구석으로 옮겼다가 다시

 경복궁의 정문이 되었다.

 

 

 

 

 

 

강    녕     전

 

 

 

 

경복궁의 내전(內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임과 동시에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

근정전과 함께 지은 건물이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1553년(명종 8)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했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탔다.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지만1917년에 창덕궁(昌德宮)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內殿)이 불타버리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을 다시 짓기위해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강녕전을  다시 지었으며 이때 12개 전각이

 복원되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이 연생전(延生殿)이고 서쪽 침전이

경성전(慶成殿)이며 강년전 출입문이 향오문이다. 아래사진.

 

 

 

 

 

 

교     태     전

 

 

 

 

세종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했다.  1553년 명종 때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어 1555년(명종 I0)8월에 다시 지었지만 일본 침락의 임진

왜란 때 불타버렸다. 1869년(고종 6)에 새로 창건되었지만 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이 불타 이를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양의문

(兩儀門)으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아래 사진이 양의문이다.

 

 

 

 

 

건   청   궁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이다.

1872년에 건설된 건청궁,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살다가 이 안에 있는 옥호루에서 일본

자객들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고하고 고종의 아관파천,

그리고 대한제국의 선포와 고종황제 등극등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세는 기울어져만 갔다.

아래는 옛 건청궁안의 옥호루 모습이다.

 

 

 

 

 

 

 건청궁은 우리나라에서 전깃불이

제일먼저 켜진 건물로도 널리알려졌다.

지금은 옛 건청궁이 복원되어 그 담에서

옥호루를 비롯, 장안당, 녹금당, 정시각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도 1960년대까지

총독부 박물관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 앞

운동장으로도 쓰여서 많은 사람들이드나들었던

자리에 박물관이 들어 섰다가 민속박물관이 되었다.

오늘날 민속박물관에는 많은 민속자료가 보존되어

있고 훌륭한 야외 전시장이 있어 찾는이들이

 많다. 민속박물관의 모습이다.

 

 

 

 

 

경    회    루

 

 

 

 

아름답기 그지 없는 국보 224호이다.

조선조 3대와 태종이 1412년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기도 했다.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기도 했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름철 야경이 아름다워 사진 두장을 더 올렸다.

 

 

 

 

 

향    원    정

 

 

건청궁 앞의 연못에 세워진

아름다운 정자다. 1867년부터 1873년

사이에 세운것으로 보이는 향원정은 나무다리를

지나 정자에 이른다.  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61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의 역사는 우리나라 근, 현대사와

맥을 같이하며 일제침략으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은 경복궁을 비롯해서

 이 나라 3천리강산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로부터

경복궁은 300년 가까운 세월 황폐화되었다. 그 땅에 온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경복궁을 일으켰지만 또 다시 일본 침략의 마수가 뻗쳐

 구중궁궐 깊은 곳까지 총칼을 들고 들어와 일국의 국모를 시해해 버렸다.

천추에 씻지 못할 일본이 이 나라를 자기들 손아귀에 넣고 핍박했다. 침략의

총 지휘소를 만들어 경복궁을 그 그림자로 가려버렸다. 영원토록 그 만행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들은 패망했고. 그 만행의 죄를 언제까지 엎드려

사죄해도 다 못할 그들이 그때 그 전범들의 혼을 받들어야 한다며

 웨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라는것이 무엇인가? 그 혼들이

자기들을 다시 만행의 길로  인도 할 것리라고 믿는가?

우리는 지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하나 되어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나라로 키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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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에 그린 경도오부 북한산성 부도

 

 

 

 

 

 

 

 

  

 

  

 

 

 

 

 

 

 

흥복전 복원 공사중

 

 

 

 

 

고궁박물관

 

 

경복궁역 5번출구 경복궁 경내에 

고궁박물관이 있다. 조선왕실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자격루가 원래의 크기로 복원되어 비치되어 있고 순종어차,

이왕실계사진 왕실의 의상등 볼만한 진열품이 않다. 1908년 9월

 창경궁 내에 제실박물관으로 개관한 이래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실 박물관으로 이어 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박물관이다.

 

 

 

 

 

 

 

 

아래 사진은 1904년에 촬영한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때는 고종이 덕수궁에 있을때다. 힘없는 나라에서 경복궁을

돌볼수가 없어서 잡초가 우거져 있는 모습을 볼 수있다.

 

 

 

 

광화문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공사를 하던때의

 모습이다.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지만 원래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새워진 것은 아니다. 모두 달라져버린 환경은 그때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세울 수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늘날에 보는 광화문이다.

 

 

 

 

국보 제 101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경복궁 뜰 쉽터에 큰 은행나무화 북관대첩비가 함께 있다. 

 

 

 

 

북관 대첩비

  

 

 

 

임진왜란때 정문부선생의 의병 대첩을

기리기 위해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세운비다.

로. 일전쟁 때 일본으로 가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던것을 재일동포 최서면선생님 등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반환받아 이곳에 세웠다가남.북 합의에 따라

 2006년에 원래의 비는 북한에 인도되고

 이곳에는 복재비가 서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조선시대 궁궐 모습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춘문 동쪽으로 이건되기 전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으로 이를 확대하면 '光化門'이란 현액 글씨가

 뚜렷하다. 나아가 그 전면 월대를 포함한 광화문 전경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열린 우협문 안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 지붕 일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건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 직후에 촬영했다고 판단된다.

 

 

 

 

조선총독부서 찍은 경복궁 근정전 주변 사진.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67년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지은 경복궁 자경전. 이곳은

 이후 두 차례 화재를 만났다가 1888년(고종 15) 재건됐다.
꽃담으로 유명한 이곳 서측 담장에는 꽃 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문양은 꽃 아홉 개와 문자 아홉 개가 서로 짝을 이루고,
나머지 한 개는

 꽃과 나비 등을 조합한 것이다. 현재의 자경전 꽃담에는 아홉 개가 아닌

 여덟 개 꽃 문양이 남아 있다. 윗쪽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식민지

시대 유리건판 사진이며 아래쪽은 그 현재 모습.

 

 

 

경복궁 자경전 꽃문양

 

 

 

 

앙부일구는 조선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로 창덕궁 소장품으로 현재 여주 영릉전시관과 창덕궁에

전시 중이다. 현재 이 앙부일구는 다리를 포함한 몸체가 받침돌 위에

 노출돼 있으나(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에는 받침돌에 몸체가 감입돼 앉힌 모습이다. 나아가 대석 옆쪽으로 빗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구멍이 뚫려 있음이 확인된다. (왼쪽과 가운데)

앙부일구 원래 모습을 고증할 수 있는 사진이다.

 

 

 

 

 

창덕궁 원래 위치 보루각에 있을 당시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들 유리건판 사진에서 자격루는

청동으로 만든 파수호 하나, 수수호 둘, 그리고 수수통

둘만 남아 있으며 부표는 없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수통 양 옆에는 측우기와 석조대와 위치한다.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인 자격루는

현존품은 1536년(중종 31)에 제작품으로

현재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조선국왕 용상 뒤에 설치한 그림병풍인

 일월오봉병으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에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윗쪽)과 덕수궁 중화전(가운데) 작품.
이에는 한결같이 해와 달 부분에 금속판이 붙어 있으나
현재의 일월오봉병(아래쪽)에는 이 금속판이 없다.

 

 

 

1935년 경복궁 건청궁 터에 조선총독부

종합박물관을 짓기 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 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를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총독부

미술관을 짓는 데 그쳤다.

 

 

 

 

1929년 지금의 경복궁 건춘문 일대로 옮긴

광화문 문루에서 본 경복궁 동쪽 궁성과 건춘문,

동십자각 일대 전경. 왼편에 중학천이 흐르고 그 동편

에는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 1929년 박람회로

궁성이 파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붕괴사고 현장.
궁장 대부분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

 바로 옆은 무너져 있다.  붕괴사고는 1926년 4월27일

 오전 10시에 일어 났으며 그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해서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이라고

매일신문 4월29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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